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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의 진리 화두!

개벽과 상생의 새 문화를 선도하는

증산도 월간 개벽(開闢) 2018년 12월호(통권 264호) 발간

커버스토리: 충청남도 논산과 공주, 대전에 걸쳐 있는 계룡산과 천황봉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함께 둘러보았다는 계룡산 천황봉 아래의 신도안(新都安, 신도내新都內)에는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정하기 전 신도안을 조선의 도읍으로 만들기 위해 궁궐을 짓던 주초석(柱礎石)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600여 년 전 이성계와 무학대사에 의해 조선의 도읍지 준비단계에서 한양을 새 도읍으로 정하면서 폐허로 남아 있었습니다.

현대에 들어 계룡산 천황봉 아래 신도안 일대가 천혜의 요새와 같은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받으면서 대한민국의 육군, 해군, 공군의 삼군사령부인 계룡대가 들어섰습니다.

 

 

 

 

 

 

 

 

 

 

계룡산은 본래 시대에 따라 천태산(天太山), 계람산(鷄籃山), 옹산(翁山)을 비롯하여 지역별로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렸던 천하 명산입니다.

 

 

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경에서 새 도읍으로 천도하기 위해 계룡산 천황봉 아래 신도안을 살펴볼 때 무학대사가 계룡산의 형세가 금닭이 알을 품고 있다는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이며,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비룡승천(飛龍昇天)의 형세라고 했습니다.

 

 

풍수지리적으로 금계포란형과 비룡승천형의 천하의 명당기운을 갖고 있다고 하여 계(鷄)와 용(龍)을 따서 계룡산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계룡산 천황봉 아래 신도안(新都安) 역시 새 나라 조선의 새 도읍이란 의미로 신도안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계룡산은 태전과 연산, 공주를 중심으로 산태극(山太極)과 수태극(水太極)의 형세로 되어 있습니다.

백두대간이 마이산에서 대둔산과 계룡산으로 산태극(山太極)의 형세를 이루고, 전라북도 진안 마이산과 무주에서 발원한 금강은 대전과 공주와 계룡산을 휘감으며 서해로 빠져나가 수태극(水太極)의 형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148년 전 상생(相生)의 가을우주를 열기 위해 삼계대권(三界大權)을 주재하신 우주의 통치자 참하나님께서 인간으로 강세하셨습니다.

 

 

상생의 질서로 돌아가는 후천 5만 년의 새 역사를 열어 놓으신 증산상제님께서는 "내가 후천선경 건설의 푯대를 태전(太田)에 꽂았느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5:136:1)라고 말씀하셨고, 계룡산 천황봉 아래 충청도 연산 땅에 가셔서 상극(相克)의 질서로 돌아간 선천 5만 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후천 선경을 여는 도성덕립(道成德立)의 천지공사를 보셨습니다.

 

 

 

 

 

 

 

 

 

 

증산도 안운산 태상종도사님께서는 "세상만사가 다 순(順)해야 하는데 지리만은 역(逆)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례로 현재의 서울(한양)을 새 도읍으로 정한 조선이 5백 년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한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지만, 청계천만 서쪽에서 동쪽으로 거꾸로 흘러 중랑천에서 한강과 합류해 서해로 빠져나가 조선이 5백 년 역사를 지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룡산 천황봉을 중심으로 대전과 논산시 연산 일대는 청계천과 같은 냇물이 아니라 금강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치오르다 공주 곰나루에서 부여와 군산을 거쳐 서해로 빠져나갑니다.

 

 

증산도는 새 우주를 여시기 위해 인간으로 강세하신 참 하나님의 새 역사 설계도를 역사에 실현하는 진리의 열매입니다.

이제 선천 5만 년의 상극 역사를 끝 막고 후천 5만 년의 새 역사를 여는 계룡산 천황봉 증산도 태을궁 수도원 역사가 시작됩니다.

 

 

 

 

 

 

 

 

 

 

후천 5만 년의 가을우주 상생의 새 문화를 선도하는 증산도 월간 『개벽』 2018년 12월호 목차

 

이달을 열며: 계룡산 천황봉 태을궁 수도원 시대

증산도 문화 소식: 상제님 성탄 치성/ 11월 증산도대학교/ 태모님 선화 치성/ 11월 어청대포 증산도대학교

이달의 일정: 12월 증산도대학교/ 동지대천제/ 대학교포교회 겨울수련회/ 어청포포교회 겨울수련회 등

 

증산도 종도사님 말씀: 영광의 새 역사, 대세몰이의 문을 열자.

증산도 태상종도사님 말씀: 진실로 상제님 진리에 복종하라.

 

『도전道典』 산책: 무척 잘 사는 길

태을주 천지조화문화를 연다: '문어의 빨판이 솜 뭉텅이를 빨아들여 외

진리를 만나는 기쁨: 상생방송으로 찾은 변화된 삶 외

 

 

 

청소년 글로벌 주니어

초립동이 4개국어: 쇼핑하기

청소년 영어: 인간론

사물의 유래: 달의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되었을까?

 

 

사진으로 보는 근대사: 근대 영욕의 역사를 지켜본 덕수궁과 대한문

명장 열전: 청태조 누르하치와 그 후계자들

 

지구촌 개벽뉴스: '붙임 모기' 퍼뜨려 말라리아 박멸한다!

뉴미디어 세상: <앤트맨 앤 와스프>로 보는 진리 코드

새 책 맛보기: 『경영혁명』 외

 

 

권말부록 STB 상생방송 가이드북

상생 FOCUS: 환단고기 북콘서트-서울 편 코엑스 오디토리움

INSIDE 상생인: 나의 신앙 증산도2

STB 다시보기: 소통의 인문학 주역-지산겸괘

이달의 신 프로그램: 도전문화콘서트2

ON-AIR: 도전 산책/ 문화와 인물/ STB 상생정보 오늘/ 기마 루트

 

전국채널 안내/ 프로그램일정표

상생방송이 걸어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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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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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블프라이스 2018.12.01 01: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와, 표지가 정말 멋집니다 ^^계룡산 천황봉 사진인가봐요?
    증산도 월간 개벽 2018년 12월호- 계룡산 천황봉 이 나왔군요? 소식을 접하고 갑니다.
    좋은 주말 보내시길 바래요

  2. *저녁노을* 2018.12.01 05: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사진이네요.
    ㅎㅎ

    잘 보고 갑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3. kangdante 2018.12.01 09: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증산도에서 월간지를 발간하는군요
    표지의 설산이 아름다워요
    오늘도 행복한 하루되세요.. ^^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무학대사

무산 계룡산 신도안(新都內) 천도(遷都) 계획

 

 

 

 

 

 

 

 

 

 

 

 

 

삼봉 정도전(1337~1398)과 무학대사(1327~1405)는 조선 건국의 쌍두마차다.

태조 이성계는 삼봉 정도전에게 스승의 예로 대했고, 무학대사에게도 스승의 예로 대했으며,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정신적 지주 역할도 했다. 무학대사는 고려말 공민왕 때 왕사(王師)를 지낸 고승 나옹 화상(1320~1376)의 제자다.

 

 

 

 

새 나라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는 기운이 다한 개성을 떠나 도읍을 새로운 곳으로 옮기려고 준비한다.

이성계는 고려의 망령이 남아 있는 곳으로부터 하루라도 빨리 도읍을 옮기려 했다.

 

1392년 7월 17일에 왕위에 오르고, 한 달도 안 된 8월 13일에 한양으로 천도(遷都)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조정에서 논쟁으로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계룡산 신도안으로 도읍을 천도하다가 한양으로 변경한 것으로 알고 있다.

계룡산 신도안이 예로부터 천하의 길지로 꼽혔던 곳이었지만, 태조 이성계가 천도 도읍지로 첫 번째 정한 곳은 한양이 맞다.

조선의 도읍지 천도과정은 한양에서 계룡산 신도안, 다시 한양으로 결정되었다.

 

 

 

 

 

 

 

 

 

 

 

 

 

지지부진한 도읍지 천도 문제를 적극적으로 나선 사람이 바로 무학대사다. 

무학대사는 수태극(水太極) 산태극(山太極)의 계룡산 신도안을 도읍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조선의 도읍을 옮기기 위해 무학대사와 이성계는 직접 계룡산 신도안 일대를 돌아보았다.

 

 

 

 

태조 이성계와 함께 계룡산 신도안을 새로운 도읍으로 결정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계룡산 신도안에 새로운 도읍을 정하고 약 10개월 남짓 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하륜의 반대로 계룡산 신도안 천도는 중지되고 만다.

 

 

 

 

조선은 새로운 도읍을 계룡산 신도안에서 다시 한양으로 정한 후 왕궁을 어느 곳, 어느 방향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대립한다. 정도전, 무학대사, 하륜은 바로 왕궁의 방향을 결정짓는 주산(主山)을 놓고 각기 서로 다른 주장을 다.

 

정도전은 백악산(삼각산, 북한산, 북악산)주산론, 하륜은 안산(무악산)주산론, 무학대사는 인왕산주산론을 주장했다.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의 주장을 받아들여 현재의 삼각산(백악산)이 주산으로 결정되었다.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13일(1392년)

도평의사사에 명령을 내려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였다.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9월 3일(1392년)

시중 배극렴, 조준 등이 온천에 나아가서 아뢰었다.

"가만히 보건대, 한양의 궁궐이 이룩되지 못하고 성곽이 완공되지 못하여서, 호종하는 사람이 민가를 빼앗아 들어가게 됩니다.

기후는 점차 추워 오고 백성은 돌아갈 데가 없사오니, 청하옵건대 궁실과 성곽을 건축하고 각 관사를 배치하기를 기다려서, 그 후에 도읍을 옮기도록 하소서."

임금이 옳게 받아들였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1월 19일(1393년)

임금이 송경(개성)을 출발하여 계룡산의 지세를 친히 보고 장차 도읍을 정하려고 하니, 영삼사사 안종원, 우시중 김사형, 참찬문하부사 이지란, 판중추원사 남은 등이 따라갔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2월 1일(1393년)

임금이 말하기를

"도읍을 옮기는 일은 경들도 역시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예로부터 왕조가 바뀌고 천명을 받은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기게 마련인데, 지금 내가 계룡산을 급히 보고자 하는 것은 나 자신 때에 친히 도읍을 정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후사 될 적자가 비록 선대의 뜻을 계승하여 도읍을 옮기려고 하더라도, 대신(大臣)이 옳지 않아도 저지시킨다면, 후사가 될 적자가 어찌 이 일을 하겠는가?"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3월 24일(1393년)

계룡산에 새 도읍을 정하였는데, 기내의 주현, 부곡, 향소가 모두 81이었다.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12월 11일(1393년)

대장군 심효생을 보내어 계룡산에 가서 새 도읍의 역사를 그만두게 하였다.

경기 좌, 우도 도관찰사 하윤(하륜)이 상언하였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할 것이온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면, 서면, 북면과는 서로 떨어져 있습니다.

또 신(臣)이 일찍이 신의 아버지를 장사하면서 풍수 관계의 여러 서적을 대강 열람했사온데, 지금 듣건대 계룡산의 땅은, 산은 건방(乾方)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에서 흘러간다 하오니, 이것은 송(宋)나라 호순신이 이른바 '물이 장생(長生)을 파(破)하여 쇠패가 곧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을 건설하는 데는 적당하지 못합니다."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8월 13일(1394년)

임금이 여러 사람의 말로써 한양을 도읍으로 결정하였다.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8월 24일(1394년)

".... 리나라는 단군 이래로 혹은 합하고 혹은 나누어져서 각각 도읍을 정했으나, 전조 왕씨가 통일한 이후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자손이 서로 계승해 온 지 거의 5백 년에 천운이 끝이 나서 자연히 망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큰 덕과 신성한 공으로 천명을 받아 한 나라를 차지하시어 이미 또 제도를 고쳐서 만대의 국통을 세웠으니, 마땅히 도읍을 정하여 만세의 기초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윽이 한양을 보건대, 안팎 산수의 형세가 훌륭한 것은 옛날부터 이름난 것이요,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으니, 여기에 영구히 도읍을 정하는 것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맞을까 합니다."

왕지(王旨)로 아뢴 대로 하도록 하였다.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10월 25일(1394년)

한양으로 서울을 옮기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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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죽풍 2017.01.04 19: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행복하세요. ^^

  2. 고프다 2017.01.04 22: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

증산도 열어나가는 상생 후천개벽 !

 

두암斗庵 한동석韓東錫 (1911 - 1968)

한동석 선생님 일대기

 

(1911년)
辛亥年 陰曆 6月5日(陽曆 6月30日) 寅時生. 출생지는 함경남도 함주군下朝陽面. 淸州韓氏 禮賓尹公派 22세손으로 韓希春과 李氏와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남. 태어날 때 역산으로 나와 난산이었다고 함.
유년기
五老里 小學校(지금의 초등학교)를 다님.
13
집안에서 정혼한 辛亥生 金氏와 결혼.
15~16
영생중학교 중퇴
17~18
장진으로 감. 초혼부인과 딸이 하나 있었으나 이혼함.
20대초
만주 용정에 가 있었다고 함.
27~28
함흥으로 가서 장사를 함. 재혼을 하고 두 딸을 둠.
32
부인과 死別한 후 한의학 공부를 시작하게 됨.
35세 前後
조선민주당 함경남도 조직국장 역임.
40
6 25발발 직후, 함흥 민선 경찰국장을 지내다 월남하여 부산으로 내려옴.
세번째로 재혼하여 1남 1녀가 있었음.
41
부산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는 이와 동업하여 진료를 시작함. 네번째 결혼을 하였으나 부인이 출가하여 스님이 됨.
42
釜山 影島에서 진료하면서 동양의학전문학원에서 강사로 출강.
43
釜山 影島에서, 수강생이었던 설태훈 등과 함께 제2회 한의사 국가고시에 응시. 면허 취득 후, 정식으로 仁溪漢醫院 개원.
45~46)
설태훈 등과 역학원론의 저자인 韓長庚 선생에게 주역을 배움.
46
李沃子 氏와 결혼. 12월에 상경하여 仁寺洞에서 韓東錫漢醫院 개원.
50
동양의약대학에 출강하여 내경을 강의함.
50 前後
內經 運氣篇, 周易 등을 강의함. 일본의 天理敎大學에 6,7개월간 원고를 연재함.
"宇宙變化의 原理" 執筆 (틈틈이 鷄龍山으로 가서 沐浴齋係 후 원고를 정리하였다고 함)
53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정치학사를 편입 수료함. 4월1일 대한한의학회 초대이사로 임명됨.
55
이후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동양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석사학위는 받지 못함.
56
인사동에서 돈암동으로 이사함 "宇宙變化의 原理" 초판 발행
56~57
"東醫壽世保元註釋" 초판 발행. 서서히 자신의 죽음을 예감함.
58
高血壓, 痺證. 喉頭癌(후두암) 등으로 투병함. 腦卒中(뇌졸증)으로 상태가 급격히 악화됨.


生日인 陰曆 6月5日(陽曆 6月 30日)에 자신의 生時인 寅時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함. (사망하기전 인시를 넘기면 더 살수 있을 것이라고 주변사람에게 예고함. 하지만 인시를 넘기지 못하고 대 의원이셨던 선생님은 아이러니하게 후두암이라는 암으로 돌아가심..)

 

 

한동석 선생 저서

                                     

 

                          우주변화의 원리                                    동의수세보원주석

 

 

한동석 선생 일화 (1)

 

평상시의 한동석 선생님


선생은 명예와 부를 구하지 않고 굉장히 검소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집안의 경제권도 직접 전담하여 관리하였으며, 주로 남대문 시장에서 싼 옷만 사 입었고, 부인에게도 그런 것을 사주었다. 선생은 돈을 함부로 쓰면 돈의 보복을 받고 물질을 함부로 남용하면 반드시 물질의 보복을 받는다고 하였다. 반면, 대의명분이 있는 일에는 목돈을 내놓았다. 속되고 안일한 것에 빠지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리 힘들어도 밀고 나가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선생의 집안은 지방에서 올라와 유학하던 선생의 조카들이나 다른 친척들로 항상 붐볐다고 한다.


선생은 술은 드시지 않았고 담배는 즐겼다. 술은 젊은 시절에는 마셨으나, 후에는 공부에 방해가 된다하여 입에도 대지 않았고, 담배는 즐겨 피운 편이었다. 영화와 바둑에 취미가 있었는데, 영화를 보러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택시를 타고 갔다가 영화만 보고는 다시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바둑에도 취미가 있었고 바둑계의 원로들과도 교분이 있었다. 선생의 기력은 아마추어 3단의 실력이었다.

 

김수영 7단의 부친인 김탁씨와 같은 함경도 고향출신이어서 이를 통해 조남철9단과도 알게 되었다. 조남철 9단은 본인이 워낙 약골이어서 한선생님 신세를 많이 졌다면서 그 때를 회고했고, 본 저자에게 김탁씨의 아들이자 자신의 제자인 김수영 7단을 소개했다.(기타 일화 참조:운영자註) 김수영 7단은 어릴때 부터 선생에게서 약을 지어먹곤 했고 특히 조남철 9단과 친했으며 김탁씨의 후원을 받던 조치훈 9단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전에 한의원에 와서 인사를 하고 떠났다.


선생은 인사동 네거리에서 개원을 하고 있었고 설태훈 선생은 가까운 곳에서 개원을 했기 때문에 서로 왕래하기가 좋았다고 한다. 아침저녁으로 서로 내왕하였는데 주로 건국대학교 분교(인사동) 근처에 있던 나비다방에서 만났다. 선생은 밤을 새워 공부하였고 새벽에는 그 곳 나비다방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커피한잔씩을 마시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고 한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책을 들고 나비다방에 나가서 공부하다가 10시 쯤 다시 들어와 아침식사를 하고 진료를 시작하였다. 그 외에도 생각할 것이 있거나 책을 보고 싶으면 한의원에서 나와 나비다방을 찾곤 했는데 선생을 만나려면 그 나비다방에 가야 만날 수 있다고 할 정도였다.


선생은 항상 무언가를 열심히 외우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언제나 황제내경을 옆에 끼고 다녔으며 인사동 골목길을 다닐 때나, 아침에 아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갈 때에도 항상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꼽아가며 외우곤 했다. 부인인 이옥자씨의 말에 의하면 선생은 "나는 의사인데 이것은 항상 놓지 말고 외워야 한다"고 하며 약성가를 아침저녁으로 외웠다고 하며, 한봉흠 교수는 황제내경 운기편일 것이라고 했다.


1960년 전후인 50세 전후에는 내경 운기편, 류경, 주역, 본초 등을 한의사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한의원2층에서 강의하기 시작했고, 동아.조선일보 등의 일간지에 한방관련 기사를 투고하기도 하고 양방의사들과 논쟁을 벌이는 글을 싣기도 했다. 그리고 틈틈히 일본의 천리교대학에 6, 7개월간 음양오행에 관한 원고를 쓰고 이양구씨가 이를 번역하여 연재하기도 했으며,

 

이 때부터 우주변화의 원리를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여름에 한달씩 계룡산으로 가서 숙소를 정해두고, 매일 아침 시냇물에서 목욕재계를 하고 난 다음에 원고를 정리하곤 하였다.


1960년에 경희대학교 한의과 대학의 전신인 동양의약대학에 출강하게 되었다. 4.19 혁명을 앞두고 있던 때에 동양의대에는 폐쇄령이 내려져 있었고 몇몇 교수들이 학교를 떠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들과 다시 동양의대의 임시관리책임자였던 전 서울신문사사장 오종식 씨가 협의하여 교수충원을 시도하게 되었다. 조교와 학생들이 추천하면 검토하여 발령을 내는 방식이었으며 그때 추천받은 사람들은 모두 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에 학년대표를 맡고 있던 문독전 전 경희대 한의대 교수와 이덕준씨가 한동석 한의원으로 내방하였고 그때 선생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것을 계기로 선생은 동양의대의 강사로 출강하게 되었고 6개월 정도 후에 전임강사로 발령을 받았다. 이때 동양의대로 발령을 받게 된 사람은 선생 외에도 윤길영, 안병국 교수가 있었다.


이 무렵 가까이 지내던 조재관 교수가 총장으로 있던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편입하여 정치학사를 63년 2월에 수료하였고 성균관 대학교 일반대학원 동양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석사학위는 받지 못하였다.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동양철학과를 졸업하기 위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논문을 준비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석사학위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논문은 현재 성균관 대학교에 보관되어 있지 않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서로 엇갈리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그러한 제목과 주제로 논문을 쓰려 하였으나, 당시의 선생의 대학원 지도교수였던 유승국 박사가 그런 거창한 주제의 논문을 선생이 어찌 쓸 수 있겠느냐는 투의 말을 하자 기분이 상해 아예 논문을 쓰지도 않았다는 것이고, 그것과 조금 다른 것은 당시 지도교수였던 유승국 교수의 말에 의한 것인데 그 원고를 읽어보니 논문의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소설이나 수필과도 같은 것이어서 논문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원고를 탈고하였는지, 아니면 계획만 가지고 있다가 지도교수와의 의견충돌로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선생의 마지막 제자인 오세정씨의 증언에 의하면 결국 그 원고를 반 정도로 줄인 것이 우주변화의 원리라고 했다.


동양의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였으나, 그것도 오래지 않아 동양의약대학의 제2대 학장으로 양방의사인 이종규 박사가 취임하자 그 날로 교수직을 그만 두고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이종규 박사와는 평소에 교분이 있었고 처형이 되는 이영자씨, 이영자씨의 동료이자 선배인 김기조 씨 등과 함께 서로 친한 사이였지만, 한의과대학에 양방의사가 학장을 하는 것은 한의사를 모독하는 것이며 불합리한 처사라고 하며 동양의약대학의 교수직을 그만 두었다.

 

이 시기에는 강의나 기고 등 활발하게 외부적인 활동을 하였다. 고위층 인사들과의 교류도 적지 않았으며, 한의사협회의 활동에도 참가하였다. 대학한의학회가 성립되면서 이와 더불어 63년 4월 1일에는 대한한의학회 초대이사에 임명되기도 했다. 이 무렵에는 한의학회보에 임상경험을 기고하면서 다른 한의사들의 참여를 독려하였고, 황제내경 강좌에 많은 글들을 연재하였고 또한 대한한의학회가 개최하는 각종 강연에 강사로 참여하기도 하였고, 방송에도 출연한 적이 있었다.


1966년 인사동에서 삼선교 돈암동 쪽에 있는 좀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였다. 당시에 성균관대의 모교수가 여기서 살았는데 이 집이 흉가라 하여 헐값에 내놓고 이사간 집을 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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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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