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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군함도(하시마 섬 탄광)와 한국인 강제징용(강제노역) 피해자

 

 

 

 

 

 

 

 

 

 

 

 

 

 

일본은 동양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룬 나라다.

혹자는 일본 근대화와 산업화가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인을 강제징용으로 끌고 가 이루었다고 주장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일본은 강제징용을 본격화한 1939년 말 이전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미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루었다.

일본은 지난 2015년 지옥섬으로 불린 군함도(하시마 탄광)를 비롯한 23개 시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데 성공했다.

 

 

일본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을 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군함도(하시마 탄광)를 비롯한 23곳 중 7개 시설이 일제강점기 한국인이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시설이라 세계문화유산 등재 보류 또는 일본의 강제징용 사실을 명기하라고 일본에 요구하였다.

 

 

약삭빠른 일본은 대한제국 강제병합이 일어나기 전인 일본이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룬 메이지 시기 1860년에서 1910년으로 한정하였기 때문에 한국인 강제징용(강제동원)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시마섬 탄광은 1974년 이미 폐광되어 출입할 수도 없으므로 세계문화유산이 될 수 없고, 일본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것은 군함도에 있는 일본 최초의 콘크리트 구조물 아파트다.

 

그런데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에 있는 일본 최초의 콘크리트 아파트는 1916년에 건립했다고 이미 100년 전부터 공식적으로 공개돼 있다. 일본이 똑똑한 것 같지만, 잔머리를 굴렸다는 것과 대한민국이 얼마나 안일하게 대처했는지를 알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시설들은 어찌 됐든 건립과 사용 연도를 떠나서 일본이 주장한 대로 근대화의 상징임은 틀림없다.

일본의 세계문화유산을 다른 말로 하면 침략전쟁에 미쳐 날뛴 군국주의의 상징이다.

 

 

20세기 초에서 중반에 이르는 시기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피해를 본 나라와 피해당사자 측면에서 볼 때 일본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행위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군함도(하시마섬 탄광) 등 일본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시설 상당수가 침략전쟁의 상징이며, 인적수탈과 인권 유린 등의 만행을 저지른 현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반성과 사과는 없었고, 심지어는 강제징용의 사실까지도 부정하고 왜곡하며 일본 근대화의 상징이라는 미명아래 파렴치한 행위를 서슴없이 했다.

 

 

 

 

 

 

 

 

 

 

 

 

일제강점기 강제징병 되어 일본군으로 끌려간 한국인과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한국인 남녀노소의 정확한 통계는 없다.

지난 70여 년 동안 일본 정부는 일제강점기 저지른 만행을 관되게 부정하고 있고, 대한민국 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일제강점기 강제병과 강제징용으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만이 진실 규명과 법정 투쟁을 하며 계란으로 바위를 치고 있을 뿐이다.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하고 나서 거짓선전을 하기 시작한다.

 

1940년과 1942년 오사카 아사히 신문은 조선인 광부를 특별우대했고, 또 돈벌이와 대우가 좋아 자발적 희망자가 넘쳐나고 기뻐했다는 기사를 내보낸다.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으로 탄광에서 강제징용으로 일한 사람은 14세 이상의 남성만 광부로 일하였으나 나중에는 여성까지도 탄광에 강제동원했다.

 

 

 

 

 

 

 

 

 

 

 

 

세계문화유산을 등재된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에 한국인이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시기는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으나 일반적으로 1940년대 초반부터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에서 일한 증언자의 말에 의하면 1938년 국가총동원법과 1941년 국민징용령이 시행되기 이전에도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에 한국인이 광부가 일하고 있었다고 하며, 국가총동원법이 시행되기 이전인 중일전쟁 전후부터 강제징용으로 군함도에 끌려와 하시마 탄광에서 일한 한국인도 많았다고 증언했다.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에서 한국인 강제징용이 가장 많았던 때의 인원은 최소 5백 명에서 최대 1천 명까지로 추정하고 있고, 1943년에서 45년에는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가 전체 광부의 30%를 웃돌았다고 한다.

 

일본에 의해 사할린 등지로 강제징용을 당했다가 다시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으로 전환 배치된 '이중징용' 피해자도 상당수 있었다.

 

 

 

 

 

 

 

 

 

 

 

 

30년 전 일본에서 발굴된 자료에 의하면 1925년부터 1945년까지 군함도에서 사망한 사람은 일본인을 포함하여 총 1,295명이라고 나와 있다.(전체 사망자인지 일부 사망자를 기록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강제징용으로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에 끌려온 한국인 사망자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남자 110명, 여자 12명 총 122명이 사망했고, 중국인, 사망자는 15명이다. 강제징용 사망자의 사망원인은 군함도(하시마섬 탄광) 해저 탄광이라 육상 탄광보다 열악한 환경의 석탄 채굴과정에서 질식과 압사, 폭상사 등이 많았다.

 

 

군함도(하시마섬 탄광)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마치 고문이라도 하듯 가혹한 폭행에 맞아 죽은 폭행사와 병사, 자살, 그리고 급류가 쌔서 탈출 자체가 불가능한 군함도를 탈출하다가 익사한 사람도 적지 않다고 했다.

 

 

 

 

 

 

 

 

 

 

 

 

일본인과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에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한국인과 중국인의 거주지는 사뭇 달랐다.

군함도(하시마섬) 탄광 소장과 간부, 일본인 광부들의 집은 좋은 목조주택과 전망 좋은 아파트 고층 및 중층에서 거주했다.

 

그러나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빛도 들어오지 않고 습도가 높고 악취가 가득한 아파트 최하층이었다.

모기와 벼룩이 들끓어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었다.

 

 

 

일본인들은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한국인과 중국인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냥 개, 돼지와 같은 짐승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혹시 모를 폭동을 염려한 일본은 군함도에 있던 한국인과 중국인을 섬의 남단과 북단에 분리 수용했으며, 작업 현장과 시간도 겹치지 않도록 했다.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에서 일본인은 관리 감독과 편한 곳에서 일했고, 강제징용 당한 한국인과 중국인은 최악의 조건에서 일했다.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좁은 갱도에서 웅크린 채 석탄을 채굴했고, 안전장비 하나 없는 갱도에서 평균 40~45도, 최고 60도에 이르는 더위를 참아가며 일했다.

   

 

 

 

 

 

 

 

 

 

 

 

무엇보다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에서 가장 귀한 것은 물이었다.

수천 명이 공동생활을 하는 군함도는 물을 실어 나르는 운반선과 증류수로 마실 물, 세탁과 목욕 등을 모두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귀한 것이 식료품, 즉 먹을 것이었다.

 

 

비 오듯 땀이 쏟아지는 갱도에서 물 한 모음 제대로 마실 수가 없었다. 

멸시와 폭력을 참아가며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하루 세 끼를 먹는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조차 없었다.

 

일본인에게 물과 식료품은 넘쳐났지만,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에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한국인과 중국인에게는 단지 그림의 떡이었다.

 

 

 

하루에 멀건 국물에 주먹밥 1개가 먹는 것이 전부인 채로 허기진 배를 달래가며 가스와 석탄 먼지는 그대로 마실 수밖에 없었다.

 

해저 갱도에서 마실 물이 없어 갱도의 오염된 물로 목을 축였으며,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하는 가운데 다치고 병들고, 사고로 목숨을 잃는 일이 다반사였다. 군함도(하시마섬)에 병원이 있었지만, 전쟁 중이던 일본은 후방에 온전한 병원시설과 의료인력을 배치하지 않았고, 한국인과 중국인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이중징용으로 다른 곳에서 석탄 채굴을 하다가 온 한국인은 그나마 채굴 경험이 있었지만, 열악한 해저 탄광은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석탄 채굴 경험이 없던 사람에게 군함도는 최악의 조건이 아니라 공포 그 자체였다.

 

 

극한의 노동과 폭행과 멸시, 배고픔 때문에 성인도 견디기 힘들어 자살하고 하시마섬(군함도)을 탈출하다 급류에 휘말려 죽은 사람도 있는데, 그곳에 15살 어린 나이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생사를 넘나드는 생지옥 같은 곳에서 목숨을 이어가다 살아온 강제징용 피해자도다.

 

 

 

 

 

 

 

 

 

 

 

미쓰비시가 약속한 월급은 말뿐이었다.

밥값, 숙소사용료, 각종 세금과 작업 도구 대여료, 옷값 등을 제외하면 10분의 1도 되지 않았고, 그나마 남은 돈도 저축이라는 명분으로 강제로 일본 정부 채권을 구매해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내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숨쉬기도 어려운 최악의 환경에서 하루 8시간 3교대인데 16시간 동안 일해야 했고, 하루 12시간 맞교대에 오가는 시간까지 포함하여 15시간을 중노동을 하는 가운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고문과 다를 바 없는 잦은 폭행에 시달렸다.

 

 

 

1974년 지옥섬 군함도의 하시마 탄광이 폐광되면서 무인도가 되었고, 40여 년간 버려졌던 군함도는 나가사키시는 2009년부터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리스트에 선정되면서 일반인 관광을 허용했다.

 

CNN은 2012년 아무도 살지 않고 을씨년스러운 지옥섬 군함도를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7곳 중 한 곳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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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7.07.02 07: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오는 휴일 잘 보내세요~~

  2. 뉴론7 2017.07.02 09: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에 강제징용으로 사람이 많이 죽긴 했죠.
    다시는 이런 세상이 오지 말아야 하는데요

  3. 죽풍 2017.07.02 17: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제시대 때 강제징용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이 정확한 통계가 없다니 참으로 안타까울 일입니다.
    누구의 책임을 물어야할지...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

  4. 버블프라이스 2017.07.02 18: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군함도(하시마섬 탄광) 강제징용 피해자 포스트 잘 읽었습니다.. 숨도 쉬기 어려운 환경에서 3교대라니 ㅜㅜ 거기에 폭행까지.. 잘 몰랐던 역사공부를 하고 갑니다. 좋은 일요일 되세요 도생님

군함도(軍艦島) 강제징용(강제노역): 조선인에게 생지옥과 같았던 하시마섬 탄광

 

 

 

 

 

 

 

 

 

 

 

 

 

 

우리나라 석탄산업은 19세기 말 일본인에 의해 탄전(炭田)이 조사되었고,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문경 탄광(남한)이 채굴을 시작했다.

 

탄광산업의 전성기라고 하는 1960~70년대 흔히 탄광을 '막장'이라고 불렀다.

부라는 직업이 그만큼 위험하고 힘들었다는 의미였다. 수십 년 전 사용하던 막장이라는 의미는 아직도 부정적 또는 극단적 의미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으로 강제징용 당하여 끌려간 한국인 피해자들은 하시마섬 탄광을 생지옥과 같은 지옥섬이라고 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19세기 말부터 침략전쟁을 일으켰고, 식민지와 점령지 국민을 자신들이 저지른 침략전쟁에 강제동원했다.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사람들은 집단감금 상태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노예처럼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고, 때로는 병들거나 죽어 갔다.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는 약 780만 명의 한국인을 강제징용과 강제징집으로 전쟁터와 강제노역 현장에 끌고 갔다.

 

 

 

 

 

 

 

 

 

 

 

 

침략전쟁에 광분한 일본은 식민지와 점령지의 인적자원을 수탈하여 태평양전쟁에 총력전을 펼친다.

처음에는 모집 형식에서 관알선(각 지역 할당 목표 강제연행), 강제징용으로 군수기지 건설과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조선소, 탄광, 광산 등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끌려간 한국인은 이른바 군함도라 불리는 생지옥의 하시마섬 탄광을 비롯하여 1만여 곳이 넘는 지역으로 약 7백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이 강제징용에 끌려갔다.

 

한반도, 일본, 중국과 만주, 사할린,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 서태평양과 남태평양의 섬 등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전후방(前後方)을 가리지 않고 한국인이 '일본군', '군무원', '강제노역', '학도병', '위안부' 등으로 끌려갔다. 

 

 

 

 

 

 

 

 

 

 

 

 

나가사키에서 약 18km가량 떨어진 하시마섬(끝섬端島)은  주변에 급류가 거센 아주 작은 무인도였다.

1810년 하시마섬(군함도)의 노천 석탄이 발견되고, 1871년부터 본격적으로 석탄이 채굴되었다.

하시마섬(군함도) 옆에 있는 다카시마 탄광은 1869년 서양 기술자를 고용하여 이미 석탄을 채굴하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 석탄, 철강 등 핵심산업을 기반으로 근대화를 이루었다.

일본 근대화의 한 축이 석탄산업이고, 근대화의 상징이다.

그러나 강제징용으로 군함도 탄광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린 한국인에게 하시마섬 탄광은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타가시마 탄광이 일본 최초의 해저 탄광과 최대의 해저 탄광이었다면, 하시마섬(군함도) 탄광은 생지옥과 같은 최악의 탄광이다.

1887년 제1 해저 수갱을 굴착하고, 1890년 미쓰비시가 군함도 탄광을 인수하면서 석탄 채굴량을 늘려나갔다.

 

하시마섬(군함도)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와 가족들은 물 부족에 시달렸다.

1891년 미쓰비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증류기를 설치하여 물 공급을 늘려간다.

군함도에서 가장 큰 문제가 물 부족 현상이었다. 그래서 미쓰비시는 이후로도 증류기를 추가로 설치한다.  

 

 

 

 

 

 

 

 

 

 

 

 

 

1893년에는 제2 해저 수갱을 굴착하고, 하시마섬 탄광의 소유주 미쓰비시가 심상소학교(초등학교)를 설립한다.

1907년에는 다카시마섬(고도高島)와 하시마섬(단도端島) 간에 해저 전선을 개통한다.

 

  

일본은 아주 작은 하시마섬(군함도)을 1897년부터 1931년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길이 320m,  120m에서 길이 480m, 120m 매립했다.

 

 

하시마섬이 매립과 확장이 진행되면서 하시마섬 주위를 빙 둘러 약 10m 내외의 콘크리트 방파제를 만들어 높은 파도 막고 석탄운반선 부두를 조성해 나갔다.

 

 

 

 

 

 

 

 

 

 

 

 

 

 

미쓰비시는 환경이 열악한 하시마섬 탄광(군함도)에 광부를 끌어들이고자, 당시 최첨단 기술자와 공법을 동원하여 1916년 일본 최초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현대식 아파트를 건립한다

 

일본 최초의 콘크리트 구조물 아파트는 4층 건물로 지었으나 7층, 9층, 10층으로 신축하거나 증축했다.

군함도(하시마섬)에 극장, 신사, 유치원, 기숙사, 중학교, 수영장, 체육관, 병원과 파칭코와 이·미용실 등 여러 편의시설 등 70여 동의 건물이 들어섰다.

 

 

 

1917년 권양기와 증기로 전기를 만들어 사용하던 군함도 탄광은 해저 케이블로 송전받는다.

증류기와 제염공장의 증류수 등을 식수로 사용하던 군함도는 석탄 채굴량이 늘리기 위해 하시마 탄광에서 일할 광부를 수시로 모집했다. 사람이 많아지면서 물 부족 현상이 심화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32년 군함도에 물을 공급하는 전용 급수선을 만들었다.

 

 

 

 

 

 

 

 

 

 

 

 

나가사키 앞바다에 있는 무인도 끝섬(端島, 하시마섬)이 군함도(軍艦島, 군칸지마)라고 불리게 된 유래를 살펴보면 일본의 근대화와 산업화하는 과정과 함께 군국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16년 일본 아사히 신문은 하시마 섬(군함도)의 높은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것이 멀리서 보면 마치 군함과 비슷하다고 기사를 내보낸다.

 

 

 

 

1921년 다카시마섬 탄광과 하시마섬 탄광의 소유주이며 일본의 대표적인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전함 도사(토좌佐)를 건조했다. 당시 나가사키의 일일신문은 일본 전함 '도사'와 하시마섬이 닮았다고 기사를 내보내면서 하시마섬을 군함도(軍艦島, 군칸지마)로 소개하였다. 이때부터 일본인들은 하시마섬을 군함도라고 부르게 된다.

 

 

최신예 일본 전함 '도사'는 1922년 미국, 영국, 일본, 이탈리아, 프랑스가 참가한 군축회의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폐선될 처지에 몰리자 당시 '도사'에 설치되어 있던 16인치 함포를 떼어내어 부산과 대마도에 설치했다.

 

미군 폭격기가 컴컴한 밤에 바다 위의 군함도가 일본 전함인 줄 알고 폭격을 했다는 말도 전한다.

 

 

 

 

 

 

 

 

 

 

 

 

 

 

1935년 제염공장을 폐쇄하고, 1936년 군함도에 하시마 신사를 만든다.

군함도 하시마 탄광은 1941년 연간 석탄 생산량 41만여 톤의 최고 기록을 달성한다.

일제강점기 한국인 강제징용이 본격화된 것은 1938년 국가총동원법, 1939년 국민징용령, 1941년 노무조정령 등이 시행되면서부터다.

 

 

일본이 패망하던 1945년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에서 석탄을 싣던 운반선이 어뢰를 맞고 침몰하고 미군의 폭격으로 갱도가 수몰되기도 했다.

 

 

 

 

 

 

 

 

 

 

 

 

1956년과 1959년에 태풍의 영향으로 군함도도 큰 피해를 보았으며, 1973년에는 큰 화재가 발생하였다.

1974년 1월 15일 마침내 군함도의 하시마 탄광이 폐광된다.

1974년 4월 20일 군함도(하시마섬) 거주 일본인이 모두 떠나고 무인도가 되었다.

 

 

군함도 하시마 탄광의 소유주이며 일본의 대표적인 전범 기업 미쓰비시가 군함도(하시마섬)를 다카시마에 기증한다.

2009년 일본 근대화 상징의 산업 시설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준비했고, 군함도(하시마섬)도 포함되면서 일반 관광객이 드나들었다.

 

2015년 군함도를 비롯한 23개 시설이 일본 근대화를 상징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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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블프라이스 2017.07.01 03: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은 군함도 강제징용 생지옥 하시마섬 탄광 과 관련해서 정리를 아주 깔끔하게 해주셨네요, 몰랐던 역사 공부를 하고 갑니다^_^ 행복한 주말 되세요-

  2. 죽풍 2017.07.02 17: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진을 보니 그 때의 시대적인 상황이 어느 정도 상상이 가고도 남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역사 공부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휴일 밤 편안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

일제강점기 강제노역의 비참한 삶의 현장 나가사키 해저 탄광

미쓰비시 소유의 고도(高島) 다카시마 탄광과 지옥섬 단도(端島, 군함도:군칸지마)의 하시마 탄광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침략전쟁의 정점에는 히로히토 일본 왕이 있었다.

그러나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전범재판)을 주도한 미국 측의 은혜로 히로히토는 처벌을 받지 않았다. 

 

 

 

미쓰비시 그룹은 일본 제국주의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끈 대표적인 재벌 그룹이면서 전범 기업이다.

 

일본인과 점령지 국민을 강제노역시켜 전쟁에 사용하는 무기와 물자를 생산하고 수송 미쓰비시를 비롯한 일본 재벌 역시 미국 측의 큰 은혜로 전범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지난 2015년 미쓰비시의 머티리얼(옛 미쓰비시 광업) 기무라 히카루 상무가 미국을 방문하여 미쓰비시 탄광 등지에서 강제노역한 미국인 전쟁포로 9백여 명과 가족 등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

 

 

 

 

미국과 일본은 한때 적이 되어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1905년 대한제국과 필리핀을 미국과 일본이 식민지화하자고 밀약한 가쓰라 태프트 밀약 이후 100년이 넘게 최고의 우방이다.

 

 

 

 

 

 

 

 

 

 

 

 

미쓰비시를 창업한 이와사키 야타로다는 하층 무사 출신으로 나가사키의 무역상회의 책임자로 근무했다.

1870년 3척의 배를 직접 사서 해운업을 시작했고, 1873년 '미쓰비시상회'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하였다.

 

 

1874년 일본이 대만을 침략할 때 미쓰비시가 전쟁물자를 수송하면서 메이지 정부로부터 큰 신임을 얻었고, 일본 해운업계를 독점운영하며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달리게 된다.(1894년 일본군이 조선으로 출병할 때도 미쓰비시가 물자를 운송했다.)

 

 

 

 

 

 

 

 

 

 

 

 

 

미쓰비시는 해운업에서 치중되어 있던 사업을 조선, 탄광, 광산, 은행 등으로 확대해 나간다.

 

미쓰비시가 세계적인 기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나가사키 조선소(일본 정부 소유에서 1887년 인수)와 다카시마 탄광(1881년 인수)과 하시마 탄광(1890년 인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전범 기업 미쓰비시의 소유로 나가사키 앞바다에 있는 해저 탄광 고도(高島)의 다카시마 탄광과 단도(端島, 군함섬)의 하시마 탄광은 일제가 군국주의 국가로 나아가는 동력원 역할을 했다.

 

 

미쓰비시는 석탄사업과 조선소를 바탕으로 조선, 은행, 상사, 전기, 공업 등의 회사를 설립하여 거대 그룹으로 발전했고, 1934년 미쓰비시 중공업이 탄생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중공업'은 미쓰비시 그룹의 4대 총수 이와사키 고야타가 만든 말이다.

 

 

 

 

 

 

 

 

 

 

 

 

 

미쓰비시가 인수한 해저 탄광 고도(高島)의 다카시마 탄광과 하시마 탄광의 석탄은 최고의 품질을 자랑했다.

고도(高島)의 다카시마 탄광과 군함도의 하시마 탄광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의 석탄 광산중 가장 많은 생산량을 기록하기도 했다. 

 

 

나가사키 앞바다에 있는 고도(高島)의 다카시마 탄광과 지옥섬으로 불린 단도(端島, 군함도)의 하시마 탄광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의 강제동원(강제징용)으로 한국인이 끌려간 1만여 곳 중 미쓰비시가 소유한 해저 탄광이다.

 

 

고도(高島)와 지옥섬 군함도(단도端島)는 일본인에게 근대화와 산업화를 상징하는 곳이며, 두 섬에서 채굴된 석탄은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키는데 사용되었다.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한 반성과 사과, 참회와 보상이 없는 가운데 침략전쟁을 상징하는 지옥섬 군함도 하시마 탄광을 비롯한 나가사키, 야마구치, 가고시마 등지의 메이지 시대 이후 근대화를 상징하는 건축물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했다.

 

 

 

지난 2015년 일본은 근대화와 산업화의 상징하는 지옥섬 군함도를 비롯한 23곳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데 성공했다.

 

일본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상당수가 우리에게는 눈물과 한이 서린 강제노역의 현장이다.

침략전쟁의 피해 당사자국은 일본이 반성과 사죄 없이 근대화의 유산이라는 미명아래 일방적으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한 것은 군국주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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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블프라이스 2017.06.25 01: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쓰비시 소유의 단도와 군함도 해저탄광에 대해 역사공부하고 갑니다. 오늘은 전국적으로 비가 내렸고, 내일도 온다고 하네요^_^ 한번 시원한 장마비 처럼 많이 왔으면 하는데 말이죠
    항상 건강에 유의하시길 바라고요
    좋은 일요일 되세요- 도생님

  2. 청결원 2017.06.25 06: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가네요~~

  3. 뉴론7 2017.06.25 09: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생님은 역사적인 부분도 많이 아시겠네요
    저도 올때마다 이것 저것 알아 갑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4. 죽풍 2017.06.25 22: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쓰비시 창업의 과정을 알고 갑니다.
    행복한 밤 보내시기 바랍니다. ^^

일제강점기 강제징용(강제노역)의 비참한 삶의 현장 나가사키 해저 탄광

나가사키 앞바다에 있는 지옥섬 고도(高島)의 다카시마 탄광,

지옥섬 군함도(軍艦島, 단도端島)의 하시마 탄광

 

 

 

 

 

 

 

 

 

 

 

 

 

 

 

일본은 19세기 중엽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여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루면서 제국주의로 발돋움하였다.

일본 근대화의 핵심 산업으로 크게 철강과 조선, 그리고 석탄산업을 꼽는다.

 

 

일본 규슈 후쿠오카의 지쿠호 지역은 일본 최대의 탄광 지역으로 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지쿠호 지역의 300여 개 탄광에서 일본 석탄 생산량의 절반 가까이 생산해 냈다.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고 나서 돈을 벌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과 1930년대 말 일본의 국가총동원법이 공포되고 강제징용(강제노역)으로 끌려간 한국인은 임금착취, 차별과 폭행,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렸고, 사고로 희생된 분들이 많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와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몇 가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일본 제국주의를 대표하는 군사기지와 군수산업도시라는 공통점이다.

 

 

일본의 전범 기업 미쓰비시 중공업(나가사키 조선소)은 침략전쟁에 쓰인 일본 전함과 전투기 등의 각종 무기를 만들었고,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될 때 나가사키 조선소 등지에 강제징용(강제노역)으로 끌려간 한국인도 많이 희생됐다.

 

 

 

 

 

 

 

 

 

 

 

 

 

 

 

 

나가사키 현 나가사키시의 해저 탄광 다카시마(고도高島) 탄광과 지옥섬 군함도(단도端島) 하시마 탄광 역시 미쓰비시 중공업 소유였다.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 나가사키 현에는 국가총동원법이 공포되기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과 강제징용(강제노역)으로 끌려온 사람을 합하여 약 7만 5천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가사키 현의 나가사키시에는 약 2만여 명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절반 정도가 전범 기업 미쓰비시에서 일했다.

 

 

 

 

 

 

 

 

 

 

 

 

 

 

군함도(軍艦島, 단도端島)보다 조금 큰 섬으로 약 2.5km 정도 떨어진 고도(高島)에 해저 탄광인 다카시마 탄광이 있었다.

다카시마(고도高島) 탄광은 1695년 석탄이 발견되었고, 외국인 기술자를 고용하여 1869년부터 석탄을 채굴하였다.

그러나 바닷물이 유입되면서 한동안 석탄 채굴이 중지되었다.

 

 

고도(高島, 다카시마)는 본래 3개의 작은 섬이었는데, 세 섬의 물길을 메워서 둘레 6.4km로 넓어졌다.

미쓰비시가 1881년 다카시마 탄광을 인수하여 최초의 근대적 탄광으로 개발한다.

 

다카시마 탄광은 지옥섬 군함도의 하시마 탄광보다 큰 해저 탄광으로 전성기에는 약 1만 8천여 명까지 거주했다고 한다.

일본 근대화의 토대를 구축한 나가사키의 다카시마 탄광은 1986년 폐광됐다.

 

 

 

다카시마(고도高島)와 하시마(단도端島, 군함도) 탄광에 약 4만여 명의 한국인이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다고 추정되고 있고, 중국인도 다카시마 탄광과 지옥섬 군함도의 하시마 해저 탄광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군함도(하시마)는 나가사키에 속해 있는 아주 작은 섬으로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한국인과 중국인들은 지옥섬으로 불렀다. 

지옥섬 군함도의 본 지명은 단도(端島, 하시마) 그 지역 어민들은 '이소호리'라고 불렀다.

 

 

1810년경 지역 어민들에 의해서 밖으로 노출된 단도(端島, 군함도, 하시마 섬)의 석탄이 처음 발견됐다.

하시마(군함도) 탄광은 막부말기와 메이지유신(1868년) 초기까지만 해도 해저 탄광이 아니었고, 어민들이 부업으로 석탄을 내다 팔았다.

 

 

 

석탄산업은 일본 제국주의 근대화에 한 축을 담당하였고, 1875년부터 단도(端島, 군함도, 하시마 탄광)에서 석탄이 본격적으로 채광된다. 군함도(하시마 탄광)에서 채굴된 양질의 석탄은 제철소의 제철용과 선박 연료용으로 생산되었으며, 1887년 제1 수직 갱도를 파 내려가 해저 탄광이 되었다.

 

 

 

 

 

 

 

 

 

 

 

 

 

1890년 일본의 대표적인 전범 기업 미쓰비시가 군함도 하시마 탄광을 인수하면서 일본 근대산업의 번영을 이끈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단도(端島, 군함도 하시마)는 길이 320m, 폭 120m의 아주 작은 섬이었다.

군함도(하시마 섬)는 1897년부터 매립을 하기 시작하여 1930년대 초반에는 길이 460m, 폭 160m, 방파제를 쌓고 매립하여 둘레 1.2km가 된다.

 

 

 

일본 제국주의의 꾀임과 강제징용(강제노역)으로 끌려가 상상하기조차 힘든 극심한 노동과 고통,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경멸과 차별, 배고픔 속에 생지옥과 같은 삶을 살았던 한국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고도(高島) 다카시마 탄광은 생지옥이었고, 하시마 탄광의 군함도는 지옥섬 그 자체였다.

 

해저 탄광 하시마 탄광은 1974년 폐광되면서 군함도는 무인도가 되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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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블프라이스 2017.06.24 02: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은 다카시마탄광과 지옥섬 군함도 하시마탄광 관련하여 몰랐던 역사를 공부하고 갑니다^_^
    벌써 주말인데요- 무더위 폭염날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항상 건강 유의하시고요, 좋을 주말되시길 바래요

  2. 죽풍 2017.06.24 21: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군함도, 꼭 배모양을 닮았네요.
    사진을 보니 일제의 만행이 섬뜩합니다.
    좋은 밤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