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암한동석' 태그의 글 목록

증산도 열어나가는 상생 후천개벽 !

 

한동석 선생님 일화 (3)

이 글은 재단법인 한국기원에서 발행한 <<바둑이야기 3, 나의 스승 조남철>>에서 이 책의 저자인 김수영 7단이 한동석 선생과의 일화를 소개한 것이다.


나의 스승과 일본의 다카가와 가쿠 선생이 국수전과 본인방전에서 연속 우승 행진이 9기로 끝난 공통점이 있음은 이미 밝힌 바와 같다. 어째서 9기연패로 끝나는가? 그점이 나에겐 의문이었다. 그래서 '선지식'을 찾아가 여쭈어 보았다.


내가 찾아 간 '선지식'은 한동석 선생이라는 분이었다. 한동석 선생은 사상 한의학의 대가로 경희대 한의과대학의 교수이기도 했는데 주역에 조예가 깊어 그 방면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었다.


나의 의문에 대한 한동석 선생의 조언은 다음과 같이 알 듯 모를 듯 한 그것이었다.

"우리 동양의 숫자 개념은 아홉이 마지막이다. 따라서 9기연패는 꽉 채웠음을 뜻하네."

"그렇다면 10기 연속 우승은 불가능한가요?"

"물론 10기 연패도 가능하지만 그 경우는 새롭게 한 회를 쌓아 나가는 것으로 해석해야겠지."

아마추어 3단의 愛棋家 한동석 선생은 나의 스승의 주치의를 맡은 정도로 인연이 깊은 분이어서 나 역시 자주 찾아 뵙고 치료를 받는 등 폐를 많이 끼쳤다.

천성적으로 욕심이 없었던 한동석 선생이지만 학구열만은 남달리 높아 끊임없이 공부하는 모습이었다. 함경도 한 고향인 나의 선친과 막역지교를 맺고 있었던 관계로 나의 스승의 주치의까지 맡았으며, 나를 친조카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한동석 선생은 자신의 한의원을 찾아온 환자를 꾸짖기 일쑤였다. "건강한 분이 보약은 왜 필요합니까? 적당한 운동이나 꾸준히 하세요." 라며 돈도 싫은지 좀처럼 보약을 지어 주지 않았다. "자네는 더 건강해지면 안되네. 자칫 인생을 망칠 수도 있어." 역시 자주 쓰는 훈계였다.

옛 중국에 편작이라는 신의가 있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처럼 그의 친구들 중에도 이름난 의사가 많았다. 어느 날 친구의사들이 부친을 만나 뵈니 해소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모두들 의아해 하며 약을 짓고, 다리고 하여 하루만에 완치시켜 드렸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편작을 만난 자리에서 "이 사람 편작이, 어찌 그리도 무심할 수 있나?"하고 나무랐다. "이 사람들아, 무슨 뚱딴지 같은 얘긴가?", "자네 어르신 해소병 말일세. 우리가 대신 고쳐 드렸네." 그러자 편작은 "아뿔사, 잔병 하나 가지고 계셔서 매사에 조심하는 덕분에 장수하실 분이었는데 이제 오래 사시기는 다 틀렸구나." 탄식하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비로소 그 깊은 뜻을 깨닫고 "과연 따를 수 없는 심오한 경지"라며 찬탄해 마지 않았다. 그 일화와 일맥상통한다 할까.


나도 컨디션이 안 좋거나 몸살이 나 찾아 뵈면 "젊은 녀석이 벌써 부터 병원 출입하면 어디 쓰겠냐? 가서 숯불 갈비나 한 10대 뜯어. 그러면 괜찮을 거야." 하거나 "새벽 공복에 참기름 한 숟가락과 계란 노른자위를 섞어 꾸준히 먹어봐." 라며 잔뜩 꾸중만 하고 약은 지어 주지 않았지만 말씀대로 실천하면 어김없이 효과만점이었으니 신기할 노릇이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스승의 심부름으로 방문했더니 장안의 명의로 소문이 나 돈도 많이 벌고 큰 빌딩까지 신축한 한의사 내외가 화제(처방전)를 받으러 와 한동석 선생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환자가 쇄도하여 밤 늦게까지 진료하느라 과로가 누적된 탓에 자신이 중병이 들었던 것.


알고 보니 그 한의사는 한동석 선생의 제자였다. 남의 병은 잘 고쳐(?) 돈은 많이 벌었을 망정 자신의 병을 고칠 재주는 없었던 모양이다. 돈에 대한 탐욕이 그를 병들게 한 셈이었다.

화제를 받은 제자 한의사는 "선생님, 제가 더운 체질인데 이건 더운 약 아닙니까?" 하고 질문했다. "이 사람아, 자네 여지껏 '이열치열'도 깨우치지 못했단 말인가?" 한동석 선생의 핀잔이 떨어졌다. "그렇군요. 제가 그 생각을 미쳐 못했습니다." 제자 한의사는 비로소 감탄했다.



"자네, 더 이상 돈 벌 생각 버리게,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거들랑 내 말 명심해야 하네. 그리고 공부 게을리 말게나." 한동석 선생은 자상하게 제자를 타일렀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하루는 왕진 요청이 있어 한동석 선생이 안내자를 따라 나섰다. 그런데 환자의 집에 도착한 안내자는 으리으리한 저택의 대문을 놔두고 집 뒷편 골목으로 난 쪽문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 행동거지가 미심쩍었지만 한동석 선생은 개의치 않았다.


그 집의 안방 마님인 환자는 자리에 누운 채로 꼼짝 못하는 심각한 상태였다. 진맥을 끝낸 한동석 선생은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꼭 나으실테니 걱정마십시오."라고 환자를 안심시켰다.


"아는 것을 안다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아는 것이다."라는 공자님 말씀처럼 애당초 자신이 없거나 치유불능인 환자에게는 "제 능력으로는 불가합니다."라고 솔직히 말하는 분이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 크게 희망적임을 뜻한다.


그 날부터 꾸준히 약을 복용한 그 중년 부인은 6개월 후 거의 완쾌되어 혼자 걸어서 나들이를 할 만큼 건강이 회복되었다. 백약이 무효요, 어떤 의사도 고치지 못했던 병명 미상의 중환자가 감쪽같이 나았으니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그 환자의 남편이 사회적으로 명성이 높은 의학박사(내과전문의)였다는 점이다. 그 내과 전문의는 평소 한의사를 불신하는 편이어서 "우리가 고치지 못하는 병을 어찌 한의사가 고칠 수 있으랴." 여기던 차에 부인의 마지막 간청을 마지 못해 들어주었던 것.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번번이 안내자가 대문 아닌 쪽문으로 한동석 선생을 모시고 들어갔던 것이다. 남들이 알까봐 창피하고 두려운 심리상태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부인이 완쾌된 다음 환자의 남편인 내과 전문의가 한동석 선생을 예방하여 "내자를 살려 주셔서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불치병을 고치시다니 한선생님 참으로 명의십니다."하고 사의를 표했다. 이에 대해 한동석 선생은 "명의는 제가 아니라 바로 선생님이십니다."라고 답례했다. "제가 못 고친 환자를 완치시키신 분이 그건 또 어인 말씀이십니까?" 그 내과 전문의가 의아스러워했다.

제 말씀 좀 들어보십시오. 제가 부인을 치료하는 동안 차도가 있음을 감지하시고 계속 맡겨 주셨기에 성공할 수 있었지요. 만약 선생의 그런 높은 안목이 아니였다면, 그리고 저에게 계속 치료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전들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말씀입니다."


"아, 그런가요. 사실 의사를 믿지 못하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옮겨다니는 환자가 적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그래 가지고는 효과적인 치료가 어렵지요." 한동석 선생의 겸양지덕도 특별했지만 두 분 명의는 금방 의기투합했다. '한방'과 '양방'으로 서로의 전공은 다를망정 병든 사람들에게 '인술'을 베풀고 국민 보건에 이바지하는 의사라는 공통점이 있는데다가 흔지 않은 인연으로 만난 두 분은 그날 밤이 늦도록 술잔을 다투며 친교를 맺었다.


'인명은 재천'인가. 이렇듯 훌륭한 인품의 명의 한동석 선생도 하늘의 부름만은 거역할 수 없었던지 후두암으로 회갑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으니 애통하다. '참 인술'의 거룩한 정신이 점점 사라져가는 요즘 한동석 선생이 더욱 그립다. 황금만능주의에 찌든 오늘날 그런 분이 계시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일까?

김수영, 나의 스승 조남철, 서울, 재단법인 한국기원, 1996, p.288~292

 

<별세>


1963년에 이미 당신 스스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하였고 돌아기시기 한 해 전인 67년 12월 정도부터는 주위사람들에게 "내가 왜 이러지?" 하며 자신의 건강상태가 좋지 못함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자꾸만 머리가 커지는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이후에 "환한 봄날인데, 볕 좋은 봄날인데 환한 세상이 왜 이렇게 어둡냐."고 하는 등 서서히 죽음을 예감하였다.


돌아가시던 68년에는 산책을 나가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였다. 당신이 죽고 난 뒤에 가족들의 생계가 매우 어려워질 것이라 예견하였으며(선생이 죽고 난 뒤에 온 식구가 거지가 되어 거리에 나 앉을 것이라며 대성통곡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과연 선생의 임종 후 가세가 기울고 가족이 흩어지는 시련을 겪었다) 혹시라도 당신의 生日과 生時만 넘기도록 살 수 있다면 회생할 것이나 완전한 건강을 되찾으려면 2,3년이 걸릴 것이라 하였는데, 아무래도 그날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등, 자신의 죽음과 관련된 여러 일들을 미리 내다보았다.

 

그래서 자구책으로 자신의 생일을 넘기고 오겠노라고 계룡산으로 내려갔었으나, 꿈에 선생의 조모가 나타나 "여기가 어디라고 왔느냐, 빨리 너의 집으로 가거라!"고 소리치는 것을 보고서 그 곳이 머물러 있을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황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제자들에게도 역시 갈 곳이 아니었기에 그랬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한다. 여느 때처럼 계룡산으로 갔다 하면 한달 씩 걸려야 올라오던 선생이 며칠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주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는데 이때부터 건강히 급격히 악화되었다.


자신의 生時만 넘기면 된다는 선생의 말에 한봉흠 교수가 그렇다면 양방 치료를 시도해도 되겠느냐는 질문을 했는데 선생은 그것은 결코 안된다 하였다. 이영자 씨에 의하면 당시의 의료기술로는 양방으로도 어쩔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뇌혈관발작으로 혼수상태에 빠진지 열흘도 채 안되어 자신이 태어난 날에 태어난 時를 넘기지 못하고 1968년 음력 6월 5일(양력 6월 30일) 새벽, 가족과 제자들의 곁에서 별세하였으니, 이 때 선생의 나이
향년 58세있다.

 

 

우주의 주재자,통치자,참하나님이신 증산상제님의

통치원리가 바로 우주변화원리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리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진리의 해답을 꼭 찾으시기를 기원드립니다.

무료책신청 여기를 꾹 눌러주세요. ^_^

클릭 ->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댓글을 달아 주세요

증산도 열어나가는 상생 후천개벽 !

 

 

<학문연구> 한동석 선생님 일화 (2)

선생은 어려서부터 한문을 공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려서는 형제, 종형제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숙부였던 한희관이 조선 말엽에 과거에 응시했던 것으로 보아 학문을 하는 집안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고 따라서 한학 공부를 하며 자랐을 것으로 보여진다.


20대 후반에 함흥에서 장사를 하면서 재혼을 하고 어느 정도 재력을 쌓아 종형제들을 돌보기도 했는데, 그 부인이 폐병을 앓아 42년도에 사망하였다. 이 때 부인이 죽기 전에 폐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 당시 동무 이제마 선생의 이전제자 중의 하나라고 하는 김홍제란 사람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 때
김홍제 선생이 처음에 부인의 병을 치료해 주면서 나중에 다시 재발하면 못 고친다 하였는데, 후에 결국 이 병이 재발하여 사망하자 한의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것을 인연으로 김홍제 선생 밑에서 한의학을 배웠다고 한다. 이것은 한동석 선생의 종제인 한봉흠 교수의 구술에 의한 것이나, 설태훈 씨에 구술에 따르면 북청의 양경호라는 이에게서 한의학을 배웠다고 하고 일설에는 선생 자신이 많이 아팠는데 한의사에게 치료를 받고 완쾌되자 이를 계기로 한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러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선생은 북한에서 김홍제, 양경호 등의 인물에게서 한의학을 배우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외에도 선생의 종제인 한봉흠 교수에 의하면
진외 종조부가 이제마 선생의 제자였다고도 하니 그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6.25가 발발하면서 월남한 선생은 부산으로 가서 한약방을 운영하는 이와 동업하여 진료를 시작하였다. 이 때에도 이미 진료를 할 정도의 수준에는 도달했으나 항상 부족함을 느꼈고 마땅한 스승을 찾지 못해 오직 책 속에만 열중했다. 그래서
주로 獨學(독학)을 했지만 자신의 부족한 점에 대해서는 머리 숙여 배우려고 했다. 자기보다 나은 이가 있으면 찾아가든지 모셔와 자신의 집에 기거시키면서 주위의 한의사들을 모아 같이 배웠다.(1953년에 한장경 선생에게 2개월 동안 周易을 배웠고, 이후에도 설태훈 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함께 방학동 등지에서 몇 차례 수학하였다. 한장경 선생과는 북한에 있을 때부터 정치생활을 함께 하여 이미 하는 사이였다).


그러던 중
黃帝內經 運氣篇(황제내경 운기편)을 보게 되고, 이것을 萬讀, 內經 전체를 千讀하는 것을 목표로 內經을 공부했다. 한봉흠 교수에 의하면 선생은 실제로 黃帝內經 運氣篇을 萬讀했다고 한다. 선생이 생전에 한봉흠 교수와 이야기를 나눌 때에 三千讀을 하고 나면 뭔가 알게 될 것 같다고 말하며 공부를 했었는데, 三千讀을 하고 났지만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부터는 오대산, 계룡산 등지로 공부를 하러 가기 시작했고, 주역을 배우기 위해 사람을 찾아 헤맨 것도 같다고 한봉흠 교수는 이야기했다. 그렇게 六千讀을 하고 나니 구름 밑에 뭔가가 있는 것 같으니, 三千讀을 더 해봐야겠다고 하며 다시 三千讀을 더 하였다. 그 후에는 "저거 봐라. 야구 선수들이 코치가 던지라는 대로 탁탁 던지잖니? 저거도 도통한 거다. 철봉대에서 저거 봐라. 외팔로써 빙글빙글 돌지 않니? 저거도 다 저 분야에서 도통한 거다. 그런데 九千讀해서 안 트이는구나. 萬讀을 채워야겠다. 萬讀을 하고 나면 뭔가 통할 거야."라는 말씀을 하고 萬讀을 넘겼다고 한다.

 

 


밤새워 공부하고 아침에는 인근에 있는 나비다방에 가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밤사이에 한 생각들을 정리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변사람들에게 이러한 것이 있는데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고 들려주었다.

한번씩 한의원을 장기간 비워두고 공부하러 떠나기도 했는데, 주로 계룡산이나 오대산에 들어가 한 달 씩 공부하다 돌아오기도 했으며 돌아와서는 제자들을 불러모아 그 동안 공부한 성과를 들려주었다. 나중에 우주변화의 원리를 집필하면서부터도 방대한 원고를 들고 계룡산으로 내려가 원고의 정리와 집필을 했다.

 


이 당시 이정호 씨는 正易을 연구하기 위하여 金一夫 先生이 말년에 은거하던 계룡산 국사봉에 강학의 장소를 마련하고 권영원, 이용휘, 유승국, 백문섭, 김근수, 한장경, 김경운, 유남상, 육종철, 정성장 등과 더불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正易을 공부하고 토론하고 있었다. 이 때 한동석 선생이 한달에 3~4회, 1주일에 2회씩도 방문하여 이들과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한장경 선생과 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의 집중력은 실로 대단하여 주위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고, 의문점이 생기면 추호도 마음에 거리끼는것이 없을 때에야 다음으로 넘어가는 철저함을 보였다. 이것은 학문을 하는 데에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도 철두철미하게 임하여 한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하기 위해 입학시험을 준비할 때에는 당시 유명했던 영문법 책이었던 삼위일체 를 그대로 다 암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때의 나이가 53,4세 가량 되었을 때였는데, 제자들이 어떻게 그 내용을 다 외울 수 있느냐고 여쭈자, 이 정도도 제대로 못하면 공부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시며 그 내용을 모두 외웠다고 한다.


우주변화의 원리의 내용이 쉽지가 않아 한봉흠 교수가 선생에게, "형님, 좀 쉽게 풀어서 쓰시지요. 교수고 박사인 내가 보아도 잘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내가 읽고 알게는 써야 되지 않겠습니까?"하고 청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선생은
"가만 나둬. 진리라는 거는 알 사람만 알면 되는 게야."라 했다. "진리라는 것은 정치를 하는 단 한 사람만이 알아야지, 여러 사람이 알면 장사를 하게 돼."하고 말하였다.


韓 교수는 선생의 말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周易공부하고 한의학 공부하면서 모두 가짜 한의학 공부한다고 그랬어.
宇宙 變化하는 거 모르고 어떻게 한의사를 하고 세상을 아는가 그랬거든. 오행을 기본으로 놓고 여기서부터 천기 보는 거, 하늘을 보고 땅을 봐라. 버러지 보고 나무에 잎이 나오는 거. 여기 지금 봄인데 木의 봄에, 하늘에 木이 들어 왔다는 거거든. 이러면 혁명이 난다는 거거든. 사회가 시끄러워 진다는 거거든. 木이 너무 많아도 곤란하다는 거거든. 올해 무슨 곡식이 잘 될까 그러거든. 아니야. 가을에 火氣가 많이 들면 쌀도 잘 되지만, 고추나 마늘도 잘 돼. 근데 그거를 알면 통치자 한 두 사람이 알아야지, 만인이 알면 사회가 문란해진다는 거거든. 그걸 가지고 장사를 한다는 게야. 그러기 때문에 한 사람이 알아야 되고, 알고 나면 그 사람은 죽어야 된다. (한동석 선생님이) 천기를 누설해서 죽었다는 거 나도 그렇게 봐."


韓봉흠 교수가 선생에게 주역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질문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선생은 韓 교수에에 "글자나 해석하는 게 주역공부가 아니야. 주역공부를 제대로 하면 다 보여.", "천기 보는 거를 배워라. 천기를 보는 게 하늘을 쳐다보면 천기를 보는 거야? 아니야, 땅을 봐라. 땅에 이렇게 보면 풀이 있고 돌멩이가 있고 이렇게 흔들리지? 지렁이, 털벌레, 딱정벌레 요거로 천기를 보는 거야. 딱정벌레가 많이 있는 거는 이 地上에 金氣가 많이 왔다는 거야. 이제 발이 많은 돈지네가 많이 끓을 때가 있다면 火氣가 왔다는 거야. 땅에 지렁이가 많으면 土氣가 많다는 거고. 이렇게 해 가지고 천기를 보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이른 봄인데 金氣가 왜 이렇게 많으냐."고 말하였다.


인사동 사거리에서 한의원을 하는 동안, 틈나는 대로 인사동의 통문관 등의 고서점들을 돌면서 여러 서적들을 구해 읽곤 했었다. 선생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주위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할 정도로 대단했었다. 한의원에서건 어디서건 잠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매일 아침 6시 정도에 일어나서 2시간 정도를 소리내어 책을 읽고 외우기를 되풀이 하였다. 밤을 새워 공부하고 미진한 부분은 새벽부터 나비다방에 나가 커피를 마시며 고민하기도 하였다. 사람이 많아 시끄럽거나 해도 곧장 나비다방으로 가서 책을 보았다.


한의원에 환자가 붐비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밥 먹을 정도만 되면 되었지, 환자 욕심은 낼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당시 국회의원 원내총무를 하던 김진만 씨가 한의원에 와서 자기 병을 꼭 고칠 수 있겠느냐고 다짐을 하자, 주위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믿을 수 없다면 오지 말라고 하며 벽력같이 소리지른 적도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의원에 환자는 그리 많지 않았으며, 오직 책만 보고 저녁으로는 다른 이들을 가르치면서 공부에만 정진하였다. 종종 부인인 이옥자 씨에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겨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그런 것이 선생의 욕심이었을 뿐, 다른 부분에서는 욕심을 내지 않았다.

 

우주의 주재자,통치자,참하나님이신 증산상제님의

통치원리가 바로 우주변화원리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리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진리의 해답을 꼭 찾으시기를 기원드립니다.

무료책신청 여기를 꾹 눌러주세요. ^_^

클릭 ->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