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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시대 3대 기인(奇人) - 매월당 김시습, 북창 정염(정북창), 토정 이지함

 

 

 

 

 

 

 

 

 

 

 

 

 

 

 

기인(奇人)은 일반인과 함께 세상을 살지만, 말과 행동, 정신과 사상이 보통사람과 다른 사람을 일컫는다.

기인은 일반인보다 가진 재주가 신통하고 비범한 사람이라 하여 이인(異人)이라고도 말한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 세종 17~성종 24), 북창 정염(정북창, 1506~1549, 중종 1~명종 4), 토정 이지함(1517~1578, 중종 12~선조 11)을 조선왕조 시대 3대 기인이라 부른다.

 

 

 

 

 

 

 

 

 

 

 

 

 

 

조선왕조 시대 3대 기인, 비운의 천재 첫 번째 기인은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소문이 자자했던 매월당 김시습은 임금의 부름을 받고 5살에 궁궐에 들어간다.

어린 김시습이 쓴 글을 보고 세종대왕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왕조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 문인 매월당 김시습은 시, 소설, 평문 등 수많은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조선왕조 최고의 사상가 매월당 김시습의 사상은 성리학(유교), 불교, 단학(도교) 등 다방면에 무불통지(無不通知)한 달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매월당 김시습의 정신과 사상은 동양의 철학과 사상, 즉 유불선(유교 불교 도교)을 넘나드는 폭넓은 세계관을 가지고 이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세조)의 왕위찬탈에 비분강개한 매월당 김시습은 끓어오르는 울분을 절제하며 조선 팔도를 유랑하면서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방랑으로 점철된 삶을 산다.

 

 

 

 

매월당 김시습은 옛글을 모방하여 세종대왕이 반포한 훈민정음 28자는 신라 눌지왕 때 박제상(363~419)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징심록(澄心錄)에서 발췌했다고도 한다.

 

매월당 김시습은 박제상이 저술한 징심록과 박제상의 아들 백결선생 박문량이 저술한 금척지(金尺誌)를 보고 징심록 추기(澄心錄追記)를 썼다. 징심록의 한 부분이 부도지다.

 

 

 

 

 

조선 시대 3대 기인으로 꼽히는 매월당 김시습은 문학가이며 사상가요, 철학가이며 종교인이다.

조선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와 신귀설, 태극설, 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 법화경별찬, 고금제왕국가흥말론, 위치필법삼대론 등을 비롯한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매월당 김시습의 사상과 철학이 담긴 여러 저서에는 인간의 마음, 우주의 이법, 귀신의 세계, 유불선 종교 철학, 도덕과 가치관, 국가와 사회와 가정의 질서, 성인과 임금과 신하 등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것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조선왕조 시대 3대 기인, 비운의 천재 두 번쨰는 북창 정염(정북창(1506~1549)이다.

 

재위 8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승하한 조선 12대 왕 인종은 북창 정염(정북창)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다.

조선 11대 왕 중종 때 개혁정치를 했던 정암 조광조는 동소문(혜화문) 밖에서 가죽신을 만드는 갖바치를 자주 찾아가서 학문적 고견을 들었다.

 

 

조광조와 갖바치는 양반과 천민이라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을 터놓은 벗이었으며, 조광조에게 갖바치는 정신적 지주였다.

조광조는 갖바치를 왕세자(인종)에게 후일에 반드시 크게 써 줄 것을 건의하였다. 그래서 인종은 세자시절부터 병풍 위에 영의정 갖바치, 좌의정 서경덕, 우의정 정북창 등 삼정승의 이름을 써놓고 있었다.

 

 

 

 

 

북창 정염(정북창)의 아버지 정순붕은 조선 13대 왕 명종이 즉위한 해에 일어난 을사사화(1545년)에서 윤원형 등 소윤 세력과 결탁하여 윤임 등 대윤 세력을 숙청하는 일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용호대사로도 불리는 정북창(정염)은 조선왕조 시대 도교의 내단 사상, 즉 단학의 중시조 또는 비조로 모셔지고 있다.

 

북창 정염(정북창)은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다. 

따로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지 않았으며, 책을 한두 번 보면 모두 외웠고, 천문, 지리, 의약, 복서, 율려, 산수, 한어(漢語)와 배우지 않은 외국어도 능통했다. 맑은 영혼으로 신(神)에 통했으며, 선가(禪家, 불교)의 육통법을 시험하기 위해 입산 3일 만에 유불선(유교 불교 도교)에 정통하였다.

 

 

 

 

정북창은 애초에 관직에 뜻이 없었으나 아버지 정순붕의 강압적인 권유로 과거(사마시)에 응시하여 잠시 관직에 있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소윤 세력은 명종을 허수아비 왕으로 만들고 부정부패와 매관매직 등 권력을 전횡한다.

 

아버지 정순붕 역시 소윤의 윤원형 일파에 협조하여 대윤 등 사림세력을 죽이는데 앞장선 공로로 우의정까지 올랐다. 

북창 정염(정북창)은 불의한 세상의 모습을 보고 속세연을 끊는다.

 

 

 

산속에 은거하면서 한양 쪽은 보지도 않기 위해 문과 창문을 모두 북쪽으로 내어 살았다.

정염의 호가 북창(北窓)이 된 바로 이 때문이다.

도교(단학)의 신선술 수련서인 『용호비결(북창비결)』을 저술하였고, 미래의 예언을 담은 『궁을가』를 썼다.

 

 

 

미수 허목(허미수)은 정북창을 "정염(정북창)은 남과 더불어 말할 때는 단 한마디라도 공자의 학문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니, 이미 그 깨달음은 중(선禪)과 같고, 그 행적은 노자와 같았으나, 사람을 가르치는 데는 한결같이 성인으로 종(宗)을 삼아서였을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조선왕조 시대 3대 기인으로 비운의 천재 세 번째는 토정(土亭) 이지함(1517~1578)이다.

 

토정 이지함은 목은 이색의 7대손으로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이개는 종증조부(증조할아버지의 형제)가 된다.

새해 초가 되면 사람들은 한 해 운수를 토정비결을 보면서 길흉화복을 알아본다.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공부한 토정 이지함은 성리학(주자학)을 비롯하여 주역(역학), 천문, 지리, 산술, 노장사상(도교), 불경, 의약, 복서 등 다양한 학문에 통달한 박학다식한 천재였으며, 뛰어난 재주를 겸비한 기인이었다.

 

 

 

 

 

명문 집안 양반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종증조부 이개는 단종복위운동에 연류되어 멸문지화를 당했고, 아버지 이치도 갑자사화에 연류되어 유배되었고, 명종 때 당시 사관이었던 친구 안명세는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를 비판하는 글을 써놓아 참형을 당했다.

 

처가집은 조선 2대 왕 정종의 후손이었으나, 역모에 연류되어 장인이 능지처참을 당하면서 처가도 몰락한다.

평탄하지 않은 인생사에 토정 이지함은 조선 팔도를 유랑하며 솥으로 된 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고 남루한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토정 이지함이 벼슬길에 나선 것은 그가 57세 되던 1573년(선조 6)에 이르러서다.

선비로서 학식과 인품이 뛰어난 토정 이지함은 주변의 천거로 포천현감으로 발령받는다.

 

포천 현감으로 부임하자 산해진미를 차려 놓은 밥상을 보고, 백성이 먹는 평범한 밥상을 차려 올리라고 하였다.

한양 마포 나루 인근에서 흙담 움막집에서 지냈다 하여 토정(土亭)이란 호가 붙었다.

 

 

 

 

 

조선 팔도를 방랑할 때 소금을 만들어 팔고, 물고기를 잡아 팔고, 바가지를 만들어 파는 등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직접 실험해 보았던 염업과 수산업, 수공업 등으로 백성을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획기적인 대책을 조정에 건의하기도 했다.

충청도 아산현감으로 있을 때 세계 최초의 사회복지기관인 걸인청을 만들어 빈민구제에도 힘썼다.

 

 

 

 

토정 이지함의 고손자 이정익은 고조부의 유고를 모아 토정유고를 간행했다.

당대 최고의 선비(학자)였던 율곡 이이와 남명 조식 등 많은 학자와 교류하였고,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뛰어난 학자이며 기인이었다.

 

임진왜란 의병장이며 학자인 조헌과 천민출신의 대학자 서기, 대학자 구봉 송익필(송구봉) 등도 토정 이지함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며, 조카 이산해는 숙부인 이지함에게 학문을 배워 영의정에까지 오른다.

 

 

 

 

격변의 시기에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을 제시한 토정 이지함은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현실에 적용한 시대를 앞서 간 실학사상의 선구자이며 실천가로 세계 최초의 국부론 주창자라고도 한다. 

 

토정비결은 토정 이지함 사후 3백 년이 지나 일반백성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토정비결이 토정 이지함이 저술한 것이 아니라는 의견이 있다.

 

 

 

 

 

조선 시대 3대 기인 매월당 김시습, 북창 정염(정북창), 토정 이지함이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그들의 뛰어난 학문세계는 유학에 국한되지 않고, 유교 불교 도교를 넘나드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과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가 권력을 전횡하며 국정을 농단하던 불운한 시대에 태어나 한평생 세상을 등진 그들은 타고난 재주와 학문을 미처 세상에 펴보지도 못한 비운의 천재들이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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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6.11.08 06: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선 3대 기인의 대해 잘 보고 가네요

목숨을 바친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충절(忠節, 충성과 절의)을 지킨

매월당 김시습, 미수 성담수, 경은 이맹전, 관란 원호, 어계은자 조려, 추강 남효온 - 생육신(生六臣)

 

 

 

 

 

 

 

 

 

 

 

 

 

 

 

수양대군(세조)과 한명회, 신숙주 등이 결탁하여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1453년, 단종 1)이 끝나고, 1455년(단종 3)에 조선 6대 왕 단종대왕은 수양대군에게 전위한다. 1455년(세조 즉위년) 수양대군이 조선 7대 왕으로 즉위하고, 1456년에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단종복위운동을 벌이다 발각되어 모두 죽었다.

 

 

 

목숨을 바쳐 충신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 사육신과 함께 왕위찬탈을 한 수양대군을 왕으로 섬길 수 없다며 벼슬을 버리거나 방랑과 은둔 생활을 했던 여섯 분을 말한다.

 

 

충신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생육신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1435~1493), 미수(眉) 성담수(미상~미상), 추강(秋江) 남효온(1454~1492), 관란(觀瀾) 원호(1397~1463), 경은(耕隱) 이맹전(1392~1480), 어계 은자(漁溪隱者) 조려(1420~1489)다.

 

 

 

 

 

 

 

 

 

 

 

 

 

 

 

 

충신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은 어려서부터 신동과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영특하여 세종대왕이 5살의 어린아이 김시습을 불러 글을 짓게 하고 크게 칭찬하였다고 한다.

 

매월당 김시습은 생육신 중 유일하게 벼슬을 하지 않은 인물이다.

천재 중의 천재라 불린 조선 최고의 문인이며 사상가 김시습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분개하여 조선 팔도를 방랑하며 떠돌아다녔다.

 

 

 

 

 

충신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생육신 미수 성담수는 사육신 성삼문과 6촌 형제간이다.

성담수의 아버지 성희는 고문과 유배생활에 사망하였다.

 

단종복위사건을 주도한 성삼문과 친척이었기 때문에 끌려가 문초를 당하고 유배되었다.

유배가 풀린 후로도 충신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며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은둔하였다.

 

 

 

 

 

충신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생육신 관란 원호는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단종 폐위에 분개하여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 원주로 내려가 은둔하였다. 원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원주 원씨다.

 

어머니 원씨는 고려 말 대학자로 환단고기 삼성기의 저자 운곡 원천석(원동중)의 조카다.

원천석(원동중)은 태종 이방원의 스승으로 이방원이 관직을 주려고 직접 찾아왔으나 거부하고 은둔하였다.

 

 

 

 

 

 

 

 

 

 

 

 

충신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생육신 경은 이맹전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전초전인 계유정난 후 예문관 직제학으로 있던 장인 김성미와 함께 신병(身病)을 핑계로 한양을 떠나 고향 경상도 선산으로 내려간다.

 

경은 이맹전과 장인인 김성미는 단종이 폐위되고 영월로 유배되자, 주군(主, 임금)이 계신 강원도 영월을 향해 매일 절을 올리며 평안하시기를 기원했다. 이맹전은 당시 선산 부사로와 있던 성리학의 영수(종사) 김종직과 교류한다.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은 연산군 때 무오사화로 부관참시 된다.

 

 

 

 

 

충신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생육신 어계은자 조려는 수양대군의 왕위찬탈과 단종 폐위에 분개하여 고향 경상도 함안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임금이 계신 강원도 영월 하늘을 바라보며 지냈다.

 

조려의 임금을 향한 마음은 단순히 그리움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경상도 함안에서 강원도 영월까지 머나먼 길을 걸어가 직접 알현했다. 단종대왕이 승하하자 강원도 영월까지 달려갔고,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억울하게 먼저 가신 주군의 명복을 빌었다.

 

 

 

 

 

충신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생육신 추강 남효온은 자신이 집필한 『추강집』에서 사육신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바로 「육신전」이다. 추강 남효온은 김종직이면서 매월당 김시습에게도 학문을 배웠다.

 

문종대왕의 왕비이며 단종대왕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가 서인으로 강등되고 능을 물가로 옮기자 남효온은 소릉의 회복을 상소하였다. 현덕왕후의 능이 옮겨지지 않자 세상을 등지고 명산대천 유랑 길에 올라 은거한 선비와 교류하며 글을 썼다.

남효온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당한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사육신이 집현전에서 함께했던 친구이며 동지였다.

생육신 김시습, 성담수, 남효온, 원호, 이맹전, 조려는 조정에서 관직과 고향, 학문의 맥도 달랐지만, 수양대군의 왕위찬탈과 단종의 폐위에 분개하여 관직을 내놓고 조선 팔도를 떠돌거나 고향으로 내려와 다시는 관직에 오르지 않고 은거한 인물들이다.

 

 

 

계유정난과 단종 폐위에 비분강개하여 수양대군이 다스리는 조선 조정과 등을 지고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은둔한 선비가 많았다.

그러나 목숨을 바쳐 충신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고, 권력과 명예를 탐하지 않고 과감하게 버린 사육신과 생육신은 충절의 대명사가 되었다.

 

 

 

정조 5년과 6년에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 관란 원호, 추강 남효온, 미수 성담수, 어계은자 조려, 경은 이맹전에게 이조 판서가 추증되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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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프다 2016.11.07 22: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