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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주의의 만행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여우사냥)으로 시해된

조선의 국모 중전 민씨(명성황후)

 

 

 

 

 

 

 

 

 

 

 

 

 

 

 

 

조선왕조에서 왕비, 즉 국모(國母)는 정치하는 사람이 아니다.

만백성의 어버이가 왕과 왕비다. 왕은 나라를 다스렸고 왕비는 조선의 국모로서 내명부와 외명부를 통솔했다.

 

내명부는 궁궐 안의 후궁과 궁녀 등의 여인, 외명부는 궁궐 밖의 왕족(종친)과 공신과 문무신료의 어머니와 처 등 작위와 품계를 받은 사람의 부인 관리하였다.

  

 

 

 

왕비(대왕대비, 왕대비)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왕이 승하하고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일정 기간 또는 성인이 될 때까지 왕의 뒤에서 정치를 대리하던 수렴청정이 있었다. 이때를 제외하면 왕비는 권력투쟁에 나서면 안 된다.

 

조선왕조에서 왕이 제 역할을 못하고 허수아비 왕으로 재위했을 때나 조선왕조가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도 왕비와 외척 세력의 권력 전횡이 큰 원인이었다.

 

 

 

 

 

 

 

 

 

 

 

 

 

 

조선의 26대 왕 고종의 왕비, 즉 조선의 국모(國母) 중전은 여흥 민씨다.

 

1895년 10월 8일(양력)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일제 작전명 여우사냥)으로 조선의 국모 중전 민씨가 시해됐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황제는 1895년 시해된 중전 민씨를 명성황후로 추봉한다.

 

 

 

 

최근 조선의 국모, 중전 민씨를 시해한 일본 낭인의 칼(히젠도)이 일본의 신사에 보관되어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조선의 국모 시해사건(을미사변), 일본 작전명 여우사냥에서 중궁전에 난입하여 중전 민씨를 시해한 일당 중 한 명으로 지목된 도오 가쓰아키가 1908년 기증한 칼이라고 한다.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라는 글이 쓰여 있다고 한다.

칼을 구시다 신사에 기증할 당시 봉납 기록에는 '조선 왕비를 이 칼로 배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안동 김씨 세도 정치를 견제하기 위해 효명세자의 부인이며 조선의 25대 왕 헌종의 어머니인 조대비가 흥선군과 뜻을 같이하여 흥선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을 조선의 26대 왕으로 만든다.

 

 

 

1863년(고종 즉위년) 고종이 12살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조대비가 잠시 수렴청정을 하다 흥선대원군이 섭정였다.

 

조선왕조에는 4명의 대원군이 있었다.

살아서 대원군에 추존된 유일한 인물이 흥선대원군으로 고종을 섭정하면서 권력을 잡았다.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며느리 중전 민씨는 죽을 때까지 권력 다툼을 하였고, 결국 아들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장례에도 참석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왔다.

 

 

 

 

 

흥선대원군은 부인 여흥 민씨(고종의 어머니)의 먼 친척이었던 민자영을 1866년 고종의 왕비로 선택한다.

민자영은 16살에 15살 고종의 왕비가 되어 조선의 국모 자리에 앉는다.

 

 

 

 

민자영(명성황후)은 숙종에게 폐위됐다가 복위된 인현왕후 민씨의 후손이다.

고종의 왕비 여흥 민씨(민자영, 1851~1895)는 민치록과 둘째 부인 한산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민치록은 아들이 없어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여흥 민씨의 친동생 민승호를 양자로 들인다.

민승호는 흥선대원군의 처남(고종 외삼촌)이면서 중전 민씨(명성황후)의 양오라버니(고종의 처남)다.

 

 

 

조선의 마지막 외척 세도정치 세력은 민씨 일파다.

흥선대원군의 부인이며 고종의 어머니인 여흥부대부인 여흥 민씨와 중전 민씨(명성황후)는 먼 친척이며 외척 민씨 일파는 이 두 사람의 친척이다. 민씨 일파 세도정치 세력은 얽히고설켜 있다.

 

 

 

 

 

 

 

 

 

 

 

 

 

 

물밀듯 밀려오는 동서양 제국주의와 외척 정치로 조선은 내우외환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난파 직전의 조선을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무리하게 정책을 시행했고, 막후에서 조정한 중전 민씨와 최익현의 탄핵을 받고 1763년 물러나면서 고종이 친정한다.

 

 

 

조선은 이미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도 쉽게 썩은 곳을 도려내지 못한 상태였다.

고종과 중전 민씨는 이런 조선을 개방했다. 조선이 누란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당시 동서양 제국주의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였다.

내정이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격한 개국(開國, 문호를 엶)으로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는 한양 도성에 들어왔고 급기야 궁궐까지 난입하는 결과를 만든다.

 

 

 

 

1876년(고종 13) 일본은 조선 침략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불평등 강화도조약을 체결한다.

 

1881년 일본군의 도움으로 창설된 별기군은 우대하고 구식 군대 병사들은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급료로 주는 쌀에는 모래를 섞어 주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중전 민씨는 장호원으로 도망간다.

 

 

 

임오군란은 고종(명성황후)을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은 민씨 일파의 부정부패가 만든 결과물이다.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복귀하자 중전 민씨는 청나라 군대를 들여와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 톈진에 유배시킨다.

 

 

 

 

 

 

 

 

 

 

 

 

 

 

1884년 급진개화파가 수구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중전 민씨는 청나라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한다.

조선 조정은 민씨 일파가 장악하게 되고 여흥 민씨 세도정치로 민생은 파탄난다. 

1885년 청나라와 일본은 각 나라가 조선에 파병할 때는 서로 알린다는 내용의 천진 조약을 맺는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고종(중전 민씨)과 민씨 일파는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인다.

청나라 군대 파병 요청은 천진조약에 의해 일본군 출병을 부른 결과를 만든다.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제1차 청일전쟁이 벌어진다.

 

 

청일전쟁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나고 그 와중에 조선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동군농민군 30만 명이 무참하게 학살된다.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면서 조선은 망국의 길로 빠르게 달려간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4월 17청나라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여 만주와 대만 등지를 차지한다.

나라가 패배하자 중전 민씨는 러시아를 끌어들인다.

러시아, 프랑스, 독일 연합, 이른바 3국 간섭으로 일본은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한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에 손을 뻗은 중전 민씨는 일본에게 눈엣가시였다.

일본 제국주의 수뇌부는 조선의 국모 중전 민씨를 제거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철저하게 준비한다.

 

1895년(고종 32) 10월 8일 일본 군인과 낭인들이 궁궐에 난입하여 조선의 국모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다.

 

 

 

중전 민씨를 시해한 일본은 강화도조약의 속인주의에 따라 범인들을 일본으로 소환하여 자국의 법으로 처리한다. 

한 나라의 국모를 참살 만행을 저지른 범인들을 일본 법원은 증거불충분으로 모두 무죄방면 하였다.

 

 

 

 

 

 

 

 

 

 

 

 

 

조선의 국모 중전 민씨가 참되고 폐위됐다는 소식을 들은 조선에 의병운동이 일어난다.

 

일제에 의해 유폐되다시피한 고종은 세자와 함께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1년간 지낸다. 이른바 아관파천이다.

고종의 왕비이며 조선의 국모인 중전 민씨는 시해된 지 2년이 지난 1897년 시신없는 장례를 치르고,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명성황후 시호를 받았다.

 

 

 

 

조선의 국모 중전 민씨의 시해사건(을미사변)에 조선인 배후세력이 있다는 설도 있지만, 정확한 물증은 없다.

그리고 일본이 시해하고 불태웠다는 중전 민씨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을미사변으로 시해됐다고 전해지는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가 당시 암살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피신하여 다른 곳에서 숨어 지내다 세상을 떠났다는 명성황후 생존설도 있다.

 

 

 

 

 

 

 

 

 

 

 

 

 

 

조선왕조에서 왕비는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가 아니다.

중전 민씨가 고종이었다면 모르지만, 중전 민씨는 왕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영민하고 정치 감각이 뛰어났다고 평가되는 중전 민씨는 오직 자신과 민씨 일파의 권력 강화에만 힘을 쏟는데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했다. 

 

 

 

 

외세를 끌어들인 왕비의 권력 행사도 문제고, 권력을 전횡하며 부정부패를 일삼은 여흥 민씨 세도정치도 문제다.

매관매직과 부정부패로 백성들은 수탈당하고 민생은 파탄 났는데 민씨 일파와 중전 민씨(명성황후)는 왕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했다.

 

 

악녀였든 여걸이었든 명성황후로 추존된 중전 민씨는 조선의 국모였다.

중전 민씨(명성황후)가 시해되기 전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고 외쳤다는 것은 드라마 대사일 뿐 전혀 사실이 아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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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6.10.15 06: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명성황후 이야기 잘 보고 가네요

  2. Deborah 2016.10.15 11: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의 비극적 역사죠. 오랜만에 방문했네요. 그 동안 잘 지내셨죠?

  3. 비키니짐(VKNY GYM) 2016.10.17 07: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이야기 잘 보고 갑니다

근세조선 26대 왕이며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황제 - 중전 민씨(명성왕후 → 명성황후)

 

 

 

 

 

 

 

 

 

 

 

 

1895년 조성의 국모 중전 민씨가 일본 자객의 칼에 의해 무참하게 시해된다.

중전 민씨(명성황후)가 승하하자 일본 제국주의는 고종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폐서인으로 강등시켰다가 고종의 명에 의해 빈으로 몰려진다. 

 

1897년 중전 민씨에게 명성왕후의 시호가 내려지고, 1919년 대한제국 초대황제 고종황제가 승하한 후 명성태황후 시호가 올려진다.

 

 

 

 

 

 

 

 

 

 

 

 

 

 

1896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조선의 26대 왕 고종은 세자(순종)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여 약 1년간 머문다.

 

 

 

19세기 말 조선은 동서양 제국주의로부터 통상수교를 요구받는다.

나라의 문을 쉽게 안 열어주자 동서 열강은 침략과 약탈에 이어 불평등 조약과 동학 농민혁명 때는 백성 수십만 명을 학살하고, 조선의 국모를 시해하는 등 내정간섭을 넘어 조선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이 선포되기 전 이응준이 태극기의 원형을 처음 제안하였다고 전하며, 1882년 조미 수호통상과 박영효 등이 일본 수신사로 건너갈 때 나라의 상징으로 태극기를 처음 사용하였다.

 

조선의 26대 왕 고종은 1883년 3월 6일 태극기를 조선의 국기로 선포한다.

흰 바탕에 중앙의 태극과 그 주위를 건곤감리 사괘가 둘러싸고 있다.

 

 

 

 

 

 

 

 

 

 

 

 

 

 

조선왕조는 임금의 깃발, 즉 어기(御旗)로 태극 팔괘도를 사용하고 있었다.

태극기의 유래는 바로 한민족의 위대한 조상 배달국 5대 태우의 천황의 막내 아드님이신 태호복희씨가 팔괘를 처음 그리면서 유래됐다.

 

 

우주의 시작인 태극과 만물의 근원이며 생성변화를 일으키는 천지일월(건곤감리, 하늘 땅 물 불)이 그려진 태극기는 우주와 인간이 역사가 하나의 그림 속에 그려진 것이다.

 

 

 

조선은 유학(성리학)의 나라다.

유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공자는 유학을 집대성한 분이고, 실제 유교와 도교 사상의 시조가 바로 배달국 태호복희씨다.

 

태호복희씨는 중국에서는 인류문명의 시조로 받들어지고 있고 한족(漢族)의 조상이라고 하지만, 태호복희씨는 명백한 한민족의 조상이며 실존 인물이다.

 

고종과 박영효 등이 태극기에 다른 의미도 부여하였지만 태극기는 우주의 섭리와 인간 역사의 섭리가 오롯이 담겨 있는 그림이다.

  

 

 

 

 

 

 

 

 

 

 

 

풍전등화와 같은 이러한 상황에서 외세 열강에 맞서 1897년(고종 34)에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다.

 

종은 1897년 10월 12일 제후국에서 황제국(천자국)으로 격상하고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며 자주독립국임을 만천하에 알린다.

 

조선 고종 34년에 새로 정한 우리나라 국호가 바로 대한제국이다. 태극기가 대한제국 정식 국기로 사용되었다.

 

 

 

 

조선의 26대 왕 고종 이희는 원구단(환구단)에서 하늘의 상제님께 제천의례를 올리며 대한제국 초대황제로 즉위한다.

연호는 광무(光武)다. 덕수궁을 황궁으로 하여 왕의 복식도 황제의 지위에 맞는 황룡포로 바꿨다.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일본 제국주의는 원구단 자리에 경성철도호텔(조선호텔)을 지어 원구단을 훼손하였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식민지화 하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해갔다.

1904년(고종 41) 일본 제국주의는 대한제국 초대황제 고종황제를 압박하였다.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국가 재정권을 박탈하고 일본이 조선의 필요한 땅을 언제든지 군사기지로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 등이 담긴 1차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한다.

 

 

1905년(고종 42)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주의는 대한제국 고종황제를 또다시 압박하며 2차 한일협약이 강제로 맺는다.

바로 을사늑약이다.

 

 

 

 

 

 

 

 

 

 

 

 

 

 

1907년(고종 44) 대한제국 고종황제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것인 만큼 부당하다는 것을 국제 사회에 알리기 시작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1907년 헤이그에 밀사 사건이다.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일본 제국주의와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가 대한제국 초대황제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다.

조선의 26대 왕이며 대한제국 초대황제 고종황제는 재위 46년 1907년 7월 20일 순종황제에게 양위하며 강제 퇴위 된다.

 

 

일본 제국주의 무력과 거기에 빌붙은 친일파 세력은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빼앗는 한일강제병합을 체결시킨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국권이 침탈된 경술국치로 조선왕조 519년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는다.

 

 

 

 

 

 

 

 

 

 

 

 

고종의 왕비이며 조선의 국모였던 명성황후를 무참하게 시해한 일본 제국주의는 대한제국까지 빼앗고 말았다.

나라를 빼앗고 황실을 왕으로 격하시킨 일제는 대한제국 황족을 말살시킨다.

 

대한제국 초대황제 광무황제(光武太皇帝)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식혜를 마시고 승하한다.

고종황제 승하와 독살설은 1919년 3·1 만세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다.

 

 

 

 

대한제국 광무태황제 이희는 대한제국이 망한 후 묘호와 시호가 붙여졌다.

묘호는 고종(高宗)이며 시호는 '고종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광무태황제(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光武太皇帝)'이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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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6.10.01 06: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종황제의 관해 잘 보고 가네요

  2. 고프다 2016.10.02 00: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오늘도 공부하고 갑니다^^

세계일보 보도일부 발췌

이원(50·) 대한황실문화원 총재는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이 총재는 이날 이화(李花·자두나무꽃) 문양이 선명한 고종의 익선관(翼善冠·왕이나 세자가 평상복으로 정무를 볼 때 쓰던 관)과 투구 등을 확인한 뒤 “한국에는 임금이나 황제가 쓰던 익선관이나 투구, 갑옷이 없다. 이게 왜 일본에 있는 것이냐”며 통탄했다.


의친왕의 13남9녀 중 9남 이충길씨의 장남인 이 총재는 2005년 7월 후사 없이 타계한 대한제국 마지막 황세손 이구(李玖·1931∼2005)씨의 양자로 선택되면서 공식적인 고종의 증손이 됐다.............


이씨는 “투구는 1897년 대한제국 설립 후에 국화로 사용한 이화 문양이 사용된 것으로 볼 때 대한제국 것이 확실하고 갑옷도 마찬가지”라며 “앞으로 유출 경위를 확인하는 데 온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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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대한제국을 세우고 환구제를 거행하다

1897년 고종황제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황천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는 환구제를 거행하고, '대한민국'의 근간인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풍전등화의 국운 아래,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의 무능한 임금으로 흔히 그려지는 고종황제,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당시 일본이 왜곡해낸 이미지다.

황제국가의 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국호를 바꾸고 연호를 재정한 다음, 천상의 황천상제님께 천제를 지내기 위한 천단, 즉 환구단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천제는 황제국의 출범을 대내외에 알리는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이에 대해 이민원 교수는(동아역사연구소 소장) "환구단을 설치해서 황제가 하늘의 신과 직접 교감하면서 제천행사를 한다. 이전에는 중국의 황제만이 할 수 있었던 행사를 우리 대한제국에서도 이제는 자주국이고 독립국의 입장에서 진행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한제국의 국왕은 더 이상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는 왕이 아니라, 천상의 상제님으로부터 천명을 부여받은 천자, 즉 황제가 된 것이다. 1981년 2월, 황궁우 복원공사를 하던 도중 발견된 황궁우 상량문에는 당시 고종황제가 국가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상제께 고하는 글귀가 발견되었다.

"상제님께 정성을 다하여 상량하오니 상량 후에 국운이 장구하여 만민이 복되게 하여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고종황제가 천제를 올린 황천상제님는 어떤 존재일까?

상제上帝에서 상上은 가장 높은, 더 이상이 없는, 지고무상至高無上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帝는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한울님 제帝자입니다. 그러므로 상제님는 신의 세계, 인간의 세계, 나아가서는 자연세계를 두루 다스리는 지존무상至尊無上의 한울님을 말합니다." (강영한 연구위원, 상생문화연구소)

대한제국이 건국되고 2년 후인 1899년, 황천상제님께 천제를 지내기 위해서 만들어졌던 환구단 옆에 황궁우가 들어선다. 황궁우는 "황천상제, 황지기, 태조'의 신위를 보관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어 하늘에 천제를 지냈던 환구단! 그러나 지금은 환구단은 사라지고 신위를 모셨던 황궁우만 고층빌딩에 둘러싸인 채 남아 있다. 황궁우에서는 오늘날에도 환구대제가 열린다. 하지만 환구단이 아니라 황궁우라 아쉬움이 남는다.

황천상제님께 황제국의 꿈과 이상을 고하고 그 꿈을 대한제국으로 풀어나가길 기원했던 환구단! 그러나 1914년 9월 30일, 일제는 환구단을 헐고 거기에 조선경성철도호텔을 세운다. 환구단 주변의 건물들도 철거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수난을 당한다.

1945년 광복 후, 일본에 의해 건립된 철도호텔은 헐렸지만 그 자리에는 환구단이 아닌 조선호텔이 들어서기에 이른다. 현재는 호텔의 정원인양 황궁우만 외롭게 서 있고, 이 자리가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했던 곳임을 알리는 팻말만 쓸쓸히 서 있을 뿐이다.

 

고종 - 상제님의 명으로 대한제국 선포하다

EBS 잊혀진나라 13년 1부 중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uUqa6-55Q54

 

고종황제가 즉위하면서 내린 말씀
"짐이 부덕하여 마침 어려운 때를 당하였는데

상제께서 권고하여 위태로움을 편안함으로 바꾸고

독립하는 기초를 창건하여 스스로 주장하는 권리를 행하라 하시니

황제의 칭호를 추존코자하매 천지에 제사를 고하고

황제의 자리에 나아감에 국호를 정하여 가로되

대한이라하고 이해로써 광무 원년을 삼고

이에 역대 고사를 상고하여 따로 큰 제사를 행한다.


고종 - 대한제국 애국가를 만들도록 명을 내리다

 

 

             

 

 

대한제국 애국가는 몇 차례의 가사 변화가 있었다

첫 번째 가사

한문 표기

上帝保佑皇帝聖上

聖壽無疆

海屋籌山

威權瀛廣

于千萬歲

福祿無窮

上帝保佑皇帝聖上

고전 한글 표기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를 도으ㅅㆍ

셩슈무강(聖壽無疆)ㅎㆍㅅㆍ

ㅎㆍㅣ옥듀(海屋籌)를 산(山)갓치 ᄡᆞ으시고

위권(威權)이 환영(環瀛)에 ᄯᅳᆯ치사

오쳔만셰(於千萬歲)에 복녹(福祿)이

일신(日新)케 ㅎㆍ소셔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우소셔

현대 한글 표기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사.

만수무강하사

큰 수명의 수를 산같이 쌓으시고.

위엄과 권세를 천하에 떨치사

오천만세에 기쁨과 즐거움이

날로 세롭게 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두 번째 가사

당시 한국어

상뎨(上帝)난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소셔 / 셩슈무강(聖壽無疆)ㅎㆍ샤

ㅎㆍㅣ옥듀(海屋籌)를 산(山)갓치 ㅆㆍ으소셔

위권(威權)이 환영(環瀛)에 떨치샤

오쳔만셰(於千萬歲)에 무궁(無窮)케 ㅎㆍ소셔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소셔


현대 한국어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만수무강하사

큰 수명의 수를 산 같이 쌓으소서

위엄과 권세를 천하에 떨치사

오천만세에 무궁케 하소서

상제는 우리황제를 도우소서

 

 

증산도 열어나가는 상생 후천개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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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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