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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4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 낭인 깡패 아유카이 후사노신 '임나는 곧 가야,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 아유카이 후사노신 조선의 국모 중전 민씨(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 낭인 깡패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을미) 양력 10월 8일(음력 8월 20일)에 발생했습니다. '을미사변'은 일제의 공사관과 영사관의 관원, 일본군, 일본 순사, 낭인 깡패집단 등의 무리가 조선 25대 왕 고종이 정사를 돌보던 궁궐을 습격해 국모(대한제국 선포 후 명성황후 추존)를 시해한 사건으로 사실상 불법적인 침략과 전쟁 선포입니다. 일본군 출신의 미우라 고로(1847~1926) 공사는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1841~1909)과 같은 죠슈번 출신입니다. 조선의 국모 중전 민씨 시해 사건은 미우라 공사의 주도 아래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저지른 범죄입니다. 명성황후를 .. 2021. 7. 24.
명성황후시해사건(을미사변)으로 시해된 조선의 국모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여우사냥)으로 시해된 조선의 국모 중전 민씨(명성황후) 조선왕조에서 왕비, 즉 국모(國母)는 정치하는 사람이 아니다. 만백성의 어버이가 왕과 왕비다. 왕은 나라를 다스렸고 왕비는 조선의 국모로서 내명부와 외명부를 통솔했다. 내명부는 궁궐 안의 후궁과 궁녀 등의 여인, 외명부는 궁궐 밖의 왕족(종친)과 공신과 문무신료의 어머니와 처 등 작위와 품계를 받은 사람의 부인을 관리하였다. 왕비(대왕대비, 왕대비)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왕이 승하하고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일정 기간 또는 성인이 될 때까지 왕의 뒤에서 정치를 대리하던 수렴청정이 있었다. 이때를 제외하면 왕비는 권력투쟁에 나서면 안 된다. 조선왕조에서 왕이 제 역할을 못하고 허수아비 왕으로 재위했을.. 2016. 10. 15.
대한제국 초대황제 고종황제(명성황후) 근세조선 26대 왕이며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황제 - 중전 민씨(명성왕후 → 명성황후) 1895년 조성의 국모 중전 민씨가 일본 자객의 칼에 의해 무참하게 시해된다. 중전 민씨(명성황후)가 승하하자 일본 제국주의는 고종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폐서인으로 강등시켰다가 고종의 명에 의해 빈으로 몰려진다. 1897년 중전 민씨에게 명성왕후의 시호가 내려지고, 1919년 대한제국 초대황제 고종황제가 승하한 후 명성태황후 시호가 올려진다. 1896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조선의 26대 왕 고종은 세자(순종)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여 약 1년간 머문다. 19세기 말 조선은 동서양 제국주의로부터 통상수교를 요구받는다. 나라의 문을 쉽게 안 열어주자 동서 열강은 침략과 약탈에.. 2016. 10. 1.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익선관이 왜? 일본에 있는 것인가 - 증산도가 열어나가는 상생의 후천개벽 세계일보 보도일부 발췌 이원(50·) 대한황실문화원 총재는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이 총재는 이날 이화(李花·자두나무꽃) 문양이 선명한 고종의 익선관(翼善冠·왕이나 세자가 평상복으로 정무를 볼 때 쓰던 관)과 투구 등을 확인한 뒤 “한국에는 임금이나 황제가 쓰던 익선관이나 투구, 갑옷이 없다. 이게 왜 일본에 있는 것이냐”며 통탄했다. 의친왕의 13남9녀 중 9남 이충길씨의 장남인 이 총재는 2005년 7월 후사 없이 타계한 대한제국 마지막 황세손 이구(李玖·1931∼2005)씨의 양자로 선택되면서 공식적인 고종의 증손이 됐다............. 이씨는 “투구는 1897년 대한제국 설립 후에 국화로 사용한 이화 문양이 사용된 것으로 볼 때 대한제국 것이 확실하고 갑옷도 마찬가지”라며.. 2013. 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