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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後金, 청나라)을 여진족 오랑캐로 멸시하여 자초한 병자호란

청나라의 조선 침공으로 청나라 황제에게 삼배구고두례를 올린 조선 16대 왕 인조

 

 

 

 

 

 

 

 

 

 

 

 

 

 

 

후금(여진족, 청나라)은 북방의 여러 부족과 내몽골을 정복하고 2대 황제 숭덕제(홍타이지)가 1636년(인조 14) 국호를 후금에서 청나라로 고쳤다.

 

조선의 임금과 대명 사대주의자들이 여진족 오랑캐로 업신여긴 청나라(후금)는 명실공히 제국의 위상을 갖추고, 1627년(인조 2) 정묘호란에 이어 조선을 재침공한다. 바로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하는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대명 사대주의자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조선 조정은 후금을 여진족 오랑캐 이상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

후금(청나라) 사신을 푸대접하는 등 철저하게 무시하는 등 대명 사대주의자들은 친명배금(親明排金)의 정책을 그대로 고수하였다.

 

 

정묘화약으로 조선은 후금(여진족, 청나라)에 세폐(공물) 등을 바치고 있었는데, 후금(여진족, 청나라)이 명나라와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더 많은 물자가 필요했다. 군사와 군마, 황금 등을 요구하는 한편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로 바꾸어 달라고 요구하였다. 

 

대명사대(大明事大)하는 조선으로서는 여진족 오랑캐 청나라에 군신(君臣)의 예를 할 수도 없었고, 군사 3만 명, 말 3천 필, 황금 백만 냥 등의 요구조건은 조선이 감당할 수도 없었다. 조선은 청나라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중국 한족(漢族)은 예로부터 이민족과 자신들이 사는 중원을 제외하고 동서남북의 여러 민족과 국가를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다.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天子, 천제지자天帝之子)가 있는 중원 이외의 지역을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 하여 모두 벌레와 짐승 같은 야만스런 오랑캐로 여겼다.

 

조선의 대명 사대주의자들은 중국 한족(漢族)의 명나라를 하늘처럼 떠받들었다.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애신각라)는 명나라와 본격적인 전쟁을 하기 전 후방에서 공격할지도 모르는 조선을 확실하게 해둘 필요도 있었다.

 

인조의 정비 인열왕후 장례식과 기타 여러 가지 사항을 전달하러 온 청나라 사신을 조선 조정은 대놓고 무시하고 인조는 사신이 들고온 국서도 거부하였다. 이상한 동태를 느낀 청나라 사신은 다급하게 청나라로 돌아가던 길에 인조가 평안도 관찰사에게 보낸 밀서를 탈취한다.

 

 

1627년(인조 2) 정묘호란 때는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했지만,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애신각라)가 직접 1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일(1637년)

 

"대청국의 관온 인성 황제는 조선의 관리와 백성에게 고유한다.

짐이 이번에 정벌하러 온 것은 원래 죽이기를 좋아하고 얻기를 탐해서가 아니다.

본래는 늘 서로 화친하려고 했는데, 그대 나라와 군신이 먼저 불화의 단서를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짐이 배를 요구하며 명나라를 정벌하려 할 때는 번번이 인색하게 굴면서 기꺼이 내어주지 않았으니, 이는 특별히 명나라를 도와 우리를 해치려고 도모한 것이다. 우리 사신이 왕(인조)을 만나지 못하게 하여 국서를 마침내 못 보게 하였다.

 

 

그런데 짐의 사신이 우연히 그대 국왕이 평안도 관찰사에게 준 밀서를 얻었는데, 거기에 '정묘년 변란 때에는 임시로 속박됨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정의에 따라 결단을 내렸으니 관문을 닫고 방비책을 가다듬을 것이며 여러 고을에 효유하여 충의로운 인사들이 각기 책략을 다하게 하라.'라고 하였으며, 기타 내용은 모두 세기가 어렵다...." 

 

 

 

 

 

 

 

 

 

 

 

 

 

 

인조와 조선 조정은 정묘호란 이후 군대를 재편하긴 했지만, 청나라는 9년 전의 후금(여진족)이 아니었다.

1636년(인조 14) 12월 2일 청태종 홍타이지가 여진족(청나라 군사)과 몽골족, 한족 등 10여 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심양을 출발하여 조선을 침공했다.

 

 

 

 

12월 8일 청나라가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하자 도원수 김자점과 의주 부윤 임경업 장군은 청나라 대군이 조선을 침공했다는 장계를 한양으로 보냈고, 인조는 12월 12일에야 청나라의 조선침공 소식을 받았다. 청나라 군대의 진격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12월 13일 평양, 14일에는 개성까지 내려왔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 갈 예정이었으나, 이미 청나라 선발대가 한양 외곽과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강화도로 갈 수도 없었던 인조는 다급하게 목적지를 남한산성으로 정했고, 인조는 한양 도성을 세 번째 버리고 도망간다.

 

 

12월 15일 인조와 조정 신료들은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10만 명이 넘는 청나라 대군이 남한산성을 둘러쌓으며 완전히 고립다.

 

 

 

 

 

남한산성에서 47일 버티던 인조는 곤룡포를 벗고 융복(戎服, 군복의 일종)을 입고 삼전도에 나와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를 올린다. 인조 15년(1637) 음력 1월 30일 조선의 왕은 곤룡포가 아닌 융복을 입은 채 남한산성의 정문(지화문, 남문)으로 나오지 못하고 서문을 나와 삼전도(삼전포)로 향했다. 

 

 

 

 

 

여진족 오랑캐로 업신여기던 청나라(후금) 황제에게 무릎 꿇고 땅에 머리를 박는 굴욕과 치욕을 당한다.

병자호란은 청태종 홍타이지가 심양을 출발한 지 불과 60일 만에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1637년 1월 2일 쌍령전투에서는 청나라 기마병 300명이 4만 명의 조선군을 대파하면서 약 1만 명의 조선 병사가 죽었다.

 

2달 남짓한 시간에 수 만 명의 조선 병사가 목숨을 잃었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선 백성이 죽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50만 명 이상의 아무 죄 없는 조선 백성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8일(1637년)

 

 

용골대가 말하기를,

"그대 나라가 명나라의 칙서를 받을 때의 의례(儀例)는 어떠하였소?" 하니,

홍서봉이 말하기를,

"칙서를 받든 자는 남쪽을 향하여 서고 배신(陪臣)은 꿇어앉아 받았소이다." 하자,

용골대는 동쪽에 앉고 홍서봉 등은 서쪽에 앉았다.

 

 

용골대가 말하기를,

"요즈음 매우 추운데 수고스럽지 않소?"하니,

홍서봉이 말하기를,

"황상께서 온전히 살려주신 덕택으로 노고를 면하게 되었소이다." 하였다.

 

용골대가 말하기를,

"삼전포(三田浦)에 이미 항복을 받는 단(壇)을 쌓았는데, 황제가 서울에서 나오셨으니, 내일은 이 의식을 거행해야 할 것이오.

몸을 결박하고 관(棺)을 끌고 나오는 등의 허다한 절목(節目)은 지금 모두 없애겠소." 하니,

 

홍서봉이 말하기를,

"국왕께서 용포(龍袍)를 착용하고 계시는데, 당연히 이 복장으로 나가야 하겠지요?" 하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용포는 착용할 수 없소." 하였다.

 

홍서봉이 말하기를,

"남문(南門)으로 나와야 하겠지요?" 하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죄를 지은 사람은 정문(正門)을 통해 나올 수 없소." 하였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1637년)

 

용골대가 한(汗 칸, 청태종 홍타이지)의 말을 전하기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자,

상(인조)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 삼배구고두례의 의식을 소리 높여 외침)하게 하였다.

상(인조)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상(인조)을 인도하여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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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키니짐(VKNY GYM) 2016.12.12 12: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2. 죽풍 2016.12.12 13: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죄를 지은 사람은 정문으로 못나온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지금의 권력도 뒷문으로 쫓겨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

  3. 청결원 2016.12.12 17: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병자호란의 관해 잘 보고 가네요

대명(大明) 사대주의(事大主義)가 자초한 국란

동아시아의 신흥 강대국 후금(청나라)의 조선 침략전쟁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1616년(광해군 8) 여진족 누르하치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후금(後金, 청나라)을 세웠다.

후금(後金)은 명나라와 전쟁 중이던 1636년(인조 14) 청나라로 나라이름을 바꿨다.

 

 

1624년(인조 2) 이괄이 난을 일으킨지 한 달도 못되어 실패로 끝났지만, 그 여파로 후금(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전쟁인 정묘호란(1627년, 인조 5)이 일어난다.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조선은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기도 했다.

 

 

 

 

1618년(광해군 10) 중국 대륙의 패권을 놓고 후금(청나라)이 명나라를 공격하면서 명청전쟁(1618~1644)이 시작됐다.

광해군은 비록 쇠퇴하고 있었지만 강대국인 명나라와 신흥 강대국 후금(청나라) 사이에서 실용적인 외교정책을 폈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인조와 대명 사대주의자들은 배금친명(排金親明)을 주장했다. 

 

 

 

 

 

 

 

 

 

 

 

 

 

 

인조와 조선 조정은 대명 사대주의에 입각해서 후금(청나라)에 적대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명청전쟁이 한창진행 중에 후금(청나라)은 조선과 경제교류가 단절되었고, 앞쪽에는 명나라와 뒷쪽에는 조선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다.

 

 

 

이괄의 난에 참여했다가 후금(청나라)으로 도망간 한윤은 광해군의 명으로 후금(청나라)에 거짓 투항했던 강홍립에게 '강씨 일족이 모두 죽었다.'라고 말한다.

한윤은 인조가 부당하게 보위에 올랐고, 조정이 불안정하니 조선을 침략하라고 후금(청나라) 황제를 부추겼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명으로 도원수가 되어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와 후금(청나라)의 전쟁에 참여했고, 광해군의 명으로 후금에 거짓 투항해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이 일어나고 권력에 취한 조정 신료들의 머리속에서 강홍립은 반역자로 낙인 찍혀 있었다.

 

 

 

 

 

 

 

 

 

 

 

 

 

 

 

후금(청나라)은 초대 황제 천명제(청태조 누르하치, 1559~1626)가 죽고 두 번째 황제 숭덕제(청태종, 1592~1643)가 즉위하였다.

 

 

 

1627년(인조 5) 1월 8일 후금(청나라) 황제 태종은 조선 침략을 명하였고, 3만 명이 넘는 병력은 순식간에 압록강을 넘어 조선 강토를 유린했다. 이때 강홍립은 후금의 군대와 함께 조선에 들어온다.

 

 

 

 

이괄의 난 이후 북방의 군대는 약화되어 있었고, 이미 한 번의 반란을 겪은 조정은 군사 훈련을 등한시하였기 때문에 후금(청나라) 군대는 비교적 순조롭게 남하한다.

 

 

오합지졸에 가까운 조선군은 3만 여명의 후금(청나라) 군대에 연전연패하였다.

오랑캐 여진족의 외침(外侵)에 임진왜란 때처럼 의병의 활약도 없었다. 지난 임진왜란에 의병으로동하다 역적이 되어 죽는 모습을 본 백성은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후금(청나라) 군대는 보름도 안되 평양을 점령한다.

 

 

 

조선을 침략한 후금(청나라) 군대는 명나라와 전쟁중이라 조선과의 전쟁은 속전속결로 끝내야 했다.

황해도 평산까지 내려온 후금(청나라) 군대는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조선과 협상을 벌인다.

 

 

 

 

 

 

 

 

 

 

 

 

 

 

1627년(인조 5) 1월 27일 인조는 이괄의 난에 이어 두 번째로 한양 도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도망간다.

조선과 후금(청나라)는 줄다리기 끝에 1627년(인조 5) 3월 3일 조선과 후금(청나라)은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는다.

 

강홍립은 정묘화약이 체결되기까지 통역을 맡았다.

후금 군대 철수 등 다섯 가지 사항의 약조를 맺었지만, 가장 핵심은 후금(청나라)와 형제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후금(청나라) 군대는 철수하였고, 강홍립은 조선에 남게 된다.

대명 사대주의자들이 포진하고 있는 조선 조정의 대소 신료들은 오랑캐 여진족과 화약을 맺은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국가와 백성의 안위는 뒷전이고 누구하나 책임지는 자도 없었다.

그러다 정묘호란의 책임을 강홍립에게 뒤집어 씌다.

 

조정 신료들은 인조에게 강홍립을 참수하라고 빗발치듯 요구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강홍립의 참수를 끝내 거부했고, 그해 7월 강홍립(1560~1627)은 병사했다.

 

 

 

 

 

광해군은 무리한 국정운영, 사리사욕과 부정부패를 일삼는 간신배들이 조정과 지방에서 판치는 등 실정이 많았다.

그러나 북방의 강대국 명나라와 신흥 강대국 후금(청나라) 사이에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 외교를 하였다.

 

반면,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와 반정을 주도한 대명 사대주의자들은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워 후금을 배척하여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자초했다.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3월 25일(1627년)

 

"강홍립과 박난영 등이 오랑캐에게 잡혀간 지 10년이나 되었는데 끝까지 머리를 깍지 아니하였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 마땅히 그의 관직을 회복하여 그의 성의를 나타내 주어야겠으니 대신에게 물으라."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3월 3일(1627년)

 

"조선 국왕은 지금 정묘년 모월 모일에 금국(金國)과 더불어 맹약을 한다.

우리 두 나라가 이미 화친을 결정하였으니 이후로는 서로 맹약을 준수하여 각각 자기 나라를 지키도록 하고 잗단 일로 다투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요구하지 않기로 한다.

 

만약 우리 나라가 금국을 적대시하여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며, 만약 금국이 불량한 마음을 품고서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역시 하늘이 앙화를 내릴 것이니, 두 나라 군신은 각각 신의를 지켜 함께 태평을 누리도록 할 것이다. 천지 산천의 신명은 이 맹약을 살펴 들으소서."....

 

 

"조선 국왕은 지금 대금국 이왕자와 맹약을 한다. 두 나라가 이미 아름다운 화친을 맺었으니, 이후로는 마음과 뜻을 함께 하여야 한다. 만약 조선이 금국을 적대시하여 병마(兵馬)를 정비하거나 성보(城堡)를 새로 세워 불선한 마음을 갖는다면 하늘이 앙화를 내릴 것이며 이왕자도 만일 불량한 마음을 갖는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다. 만약 양국의 두 왕이 마음을 같이 하고 덕을 같이 하여 공도로써 처신한다면 하늘의 보호를 받아 많은 복을 누릴 것이다."

 

 

 

 

 

『인조실록』 16권, 인조 5년 7월 27일 1627년

 

강홍립(姜弘立)이 병사하였다.

상이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도록 명하고, 또 해조로 하여금 상사에 수요되는 물품을 제급하게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생각건대 강홍립은 사직에 제사를 올린 뒤 명을 받고 국경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기쁜 마음으로 오랑캐에게 항복하였는가 하면 적을 이끌고 나라를 침범하여 임금이 되려는 뜻을 가졌으니 죄가 역적 예(豫)보다 지나치고 악이 역적 윤(潤)보다 심하여 실로 천하의 난적(亂賊) 중에 심한 자입니다.

 

그러나 국가에 법이 없고 정론이 행해지지 않아 주벌이 가해지지 않은 채 제 집에서 죽었으니 신명과 사람의 통분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상사에 부의(賻儀)까지 한다면 어떻게 신하들에게 충성을 권장하고 천하의 악을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감히 분부를 받들 수 없으므로 죄를 무릅쓰고 진달합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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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생명마루 신림점 2016.12.11 23: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편안한 밤 되세요^^

한양 도성(都城)3번씩이나 버리고 도망간 인조의 굴욕과 치욕

후금(청나라)의 조선 침략전쟁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조선왕조 5백 년 역사에서 3번씩이나 한양 도성을 버리고 도망간 임금은 조선 16대 왕 인조(1595~1649, 재위 1623~1649)가 유일하다. 인조는 내란(內亂) 이괄의 난과 후금(청나라)의 조선 침략 전쟁인 정묘호란(1627년, 인조 5)과 병자호란(1636년, 인조 14~15)의 외침(外侵) 때 도주했다.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이 명나라와 의리를 저버리고 오랑캐 야만 후금(청나라)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조반정에 성공하여 보위에 오른 인조와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서인(西人)은 배금친명(排金親明)의 외교정책을 고수한다.

 

 

 

광해군이 국정운영에서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비롯하여 많은 실정이 인조반정의 빌미를 제공했지만, 국가와 백성을 위한 광해군의 중립적인 실용주의 외교정책까지 반정 세력의 대명일월(大明日月, 숭명崇明)사상으로 말미암아 폐기됐다. 

  

 

대명사대(大明事大)의 명분으로 외교정책을 고수하던 조선은 후금(청나라)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와 사대주의 조정 신료들은 한양 도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그리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한낱 오랑캐로 여기던 청나라에 굴욕과 치욕을 당하게 된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발생하면서 인조는 한양 도성을 버리고 충청도 공주로 도망갔다.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 이괄은 북방의 수비 병력 상당수를 반란군으로 만들어 한양 도성을 향해 남하했고,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하며 내려와 반란을 일으킨 지 불과 20일도 안 돼 한양을 점령했다.

 

 

 

 

이괄의 난은 자중지란이 일어나 이괄과 핵심 주동자가 죽으면서 끝났다.

이괄의 난에 참여한 서북지역 병력은 3만 명에서 1만 명으로 감소한 상태였지만, 조정은 북방의 전력은 고려하지 않고 한양 도성과 경기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중앙군을 확대한다.

 

 

 

 

명청전쟁(명나라와 후금), 1618~1644)의 전쟁이 한창이었지만, 인조와 조정 신료들은 북방 경비를 강화하지 않았다.

국가와 백성의 안위를 책임진 임금과 조정 신료들의 잘못된 정책과 아무 대비책 없는 북방 경비는 후금(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부른다.

 

 

 

 

 

 

 

 

 

 

 

 

 

 

인조를 위한 변명을 한다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재위 초기 광해군 실정(失政)의 후유증과 이괄의 난, 그리고 작은 역모 사건이 빈발하였고, 반정을 주도한 서인(西人) 세력의 권력은 비대해져 가고 있었다.

 

 

 

 

 

하늘이 안 도와주는지,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인지, 임금다운 자질이 부족해서인지, 권력에 눈먼 위정자들 때문인지 인조는 개인적으로도 가장 불행한 임금 중 한 명이 된다.

 

 

인조는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첫 번째로 한양 도성을 버리고 도망갔고,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두 번째로 도성을 버리고 도망갔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세 번째로 도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결국에는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여진족(청나라)에게 무릎 꿇고 조선 백성 50만 명이 청나라로 끌려가게 하였다.

 

 

 

 

후금(청나라)이 침략한 정묘호란 전쟁에서 조선은 패하고 오랑캐로 여기던 여진족(후금, 청나라)과 형제의 의를 맺는다.

대명 사대(大明事大)주의자들은 그들이 야만족이라 무시했던 오랑캐(후금, 청나라) 부족이 두 번째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올리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다.

인조는 조선이 멸망하기 전까지 가장 굴욕적이고 치욕적인 임금이 된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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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6.12.10 06: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병자호란의 관해 잘 보고 가네요

  2. 고프다 2016.12.11 01: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덕분에 잘 보고 잘 알아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