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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의 표상이 된 포은 정몽주와 조선의 설계자로 만고역적이 된 삼봉 정도전

 

 

 

 

 

 

 

 

 

 

 

 

 

 

 

포은 정몽주(1337~1392)의 생몰연대는 이견이 없으나 삼봉 정도전(1337 또는 1342 ~1398)은 출생연대와 출생지를 둘러싸고 여러 이견이 있다. 고려말의 대학자이며 정치가로 두 사람이 활동한 시기는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뒤바뀌던 동북아시아의 격동기였다.

 

 

 

포은 정몽주와 삼봉 정도전은 같은 사상을 가진 동지로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꿈꾸었다.

 

고려말 성균관에서 공부한 유학자, 목은 이색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학한 벗, 친명(親明) 정책을 펼친 개혁파로 친원(親元) 정책을 펼친 수구보수세력과 맞선 것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사회개혁의 과정, 즉 내부로부터 개혁과 역성혁명이란 방법의 차이 때문에 두 사람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포은 정몽주는 성리학의 기초를 다진 인물로 추앙받는다.

역성혁명세력에 의해 죽음을 맞았으나, 조선 건국 후 정몽주 살해를 지시한 태종 이방원에 의해 복권되어 성리학의 종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포은 정몽주는 조선왕조 500년을 넘어 현대까지 충절과 의리의 대명사가 되었다.

고려의 신하였지만, 종묘의 문묘에 신주가 안치된다.

 

 

 

 

 

 

 

 

 

 

 

 

 

삼봉 정도전 역시 성리학의 대가로 성리학 이념의 이상 사회를 역사에 실현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고려에 반역하고 조선 창업에 일등공신이었지만, 조선왕조에서도 대역죄인이 되어 죽었다.

근 500 동안 만고역적이란 누명을 쓴 그의 원혼은 구천을 떠돌았다.

 

 

 

고려의 충신으로 불리는 포은 정몽주와 조선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은 모두 고려의 역적(逆賊)이다.

 

역성혁명을 통해 고려를 무너트리고 조선 창업에 이바지한 삼봉 정도전이 고려의 역적이라는 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고려의 충신으로 불리는 포은 정몽주를 고려의 역적이라는 데는 반론의 여지가 많다.

 

 

 

 

정몽주는 왕조를 바꾸는 일에는 찬성하지 않았지만, 맹자의 역성 혁명론을 바탕으로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는 일에 동참했고, 정도전에게도 영향을 준 인물이다.

 

 

이성계가 주도하여 고려 우왕과 창왕을 폐할 때 포은 정몽주는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고려를 개혁하고자 했던 정몽주가 이성계와 뜻에 동참한 이유는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라는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이다. 

 

 

 

 

 

 

 

 

 

 

 

 

 

 

 

맹자는 임금 같지 않은 임금은 바꿀 수 있다는 역성 혁명론을 주장했다. 

맹자를 추종한 성리학자의 측면에서 보면 나라를 바꾸지 않고 임금 같지 않은 임금을 바꾼 것이 역모가 아니라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고려왕조에서 쫓겨난 우왕과 창왕의 처지에서 보면 반역이다.

 

 

 

 

고려의 대학자이며 정치가로 같은 사상을 추구하며 한때 가장 절친했던 두 벗은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충신과 역적으로 명암이 갈렸다.

 

 

고려왕조에서 패자가 되었으나, 조선왕조에서는 승자가 된 포은 정몽주.

충절과 의리의 대명사가 된 포은 정몽주(1337~1392)는 길재(1353~1419) -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 - 정여창 - 조광조 등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도통(道統, 도학의 계통)의 뿌리가 되어 500년 동안 조선 성리학의 조종으로 추앙받았다.

태종 이방원에 의해 만들어지고, 중종과 정암 조광조의 후학의 정치적 타협에 의해 문묘에 배향된 포은 정몽주는 어찌 보면 이름뿐인 승자라 할 수 있다.

 

 

 

고려왕조에서 승자였으나, 조선왕조에서는 패자가 된 삼봉 정도전.

조선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1337~1398)은 태종 이방윈에 의해 500년 동안 만고역적으로 불렸다.

그러나 정도전의 사상과 철학을 바탕으로 구축된 조선의 제도와 체제는 조선 왕조 5백 년을 이어갔다.

조선의 건국과 통치 이념, 정치, 법률, 경제, 사회, 군사, 문화 등 그가 만든 조선의 제도와 체제가 조선왕조 500년을 넘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보면, 삼봉 정도전은 살아서도 승자였고, 죽어서도 진정한 승자였다고 볼 수 있다. 

 

 

 

 

 

『태종실록』 5권, 태종 3년 6월 5일(1403년)

이씨가 개국한 공은 오로지 조준과 남은에게 있다.

정도전은 언사를 잘하여 공신의 열에 있었는데, 그가 공신이 된 것은 또한 당연하나, 공으로 논하면 5, 6등 사이에 있을 것이다.

이미 간 사람들을 오늘에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남은이 만일 살아 있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부왕(태조 이성계) 때에 양정(兩鄭)이라고 일렀으니, 하나는 (정)몽주이고, 하나는 (정)도전이었다.

몽주는 왕씨의 말년 시중이 되어 충성을 다하였고, 도전은 부왕의 은혜에 감격하여 힘을 다하였으니, 두 사람의 도리가 모두 옳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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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나라의 아침을 연 조선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

 

 

 

 

 

 

 

 

 

 

 

 

 

 

조선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1342 또는 1337~1398))은 고려 성균관(국자감) 출신의 유생이다.

포은 정몽주(1337~1392) 등과 함께 목은 이색(1328~139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삼봉 정도전은 고려 공민왕의 개혁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민왕이 갑작스럽게 죽고, 이인임 등 친원(親元) 정책을 주장한 수구 세력과 마찰을 빚으며 전라도 나주의 회진현으로 유배당한다.

 

 

 

2년여 유배와 6년여의 유랑생활을 하면서 세상 민심이 고려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조선왕조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은 고려왕조는 이미 회생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고, 고려 왕조를 폐하고 성리학적 이념의나라를 창업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새로운 세상을 그려나갔다.

 

 

 

삼봉 정도전은 새 나라의 아침을 열기 위해 동북면 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갔다.

삼봉은 이성계 장군의 군대를 보고 "이런 군사를 가지고 무슨 일을 못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한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역성혁명의 시작이며 조선의 설계자와 조선의 아침을 연 주인공의 만남이다.

 

 

 

 

 

 

 

 

 

 

 

 

 

삼봉 정도전은 이성계와 만난 후 군영 앞에 있는 소나무 껍질을 벗겨 제함영송수題咸營松樹라는 시를 적었다.

 

 

蒼茫世月一株松

창망세월일주송

아득한 세월을 견딘 한 그루 소나무여

 

生長靑山幾萬重

생장청산기만중

깊고 깊은 산 속에서 잘도 자랐구나

 

好存他年相見否

호존타년상견부

좋은 시절에 서로 만나지 못했구나

 

人間俯仰使陳從

인간부앙사진중

인생살이 돌아보면 묵은 흔적뿐이구나.

 

이 시는 조선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이 이성계 장군에게 역성혁명을 하자는 내용으로 해석한다.

 

 

 

 

 

 

 

 

 

 

 

 

 

 

이성계의 추천으로 성균관으로 돌아온 삼봉 정도전은 이성계 장군의 장자방이 되어 개혁을 추진한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면서 고려 우왕을 내쫓고 창왕을 세웠고 최영과 이인임 등을 축출한다.

 

 

 

이성계는 다시 고려 창왕을 내쫓고 공양왕을 옹립하는데 이때 포은 정몽주도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포은 정몽주는 고려의 신하로 두 명을 왕을 내쫓는데 앞장섰다.

삼봉 정도전은 포은 정몽주 등의 탄핵을 받는다.

 

 

 

정몽주는 이성계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이성계와 그 일파를 죽이려 하였으나,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먼저 선수를 쳐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인다.

이성계는 귀양에서 풀려난 삼봉 정도전과 함께 새 나라 조선의 아침을 열었다.

 

 

 

 

조선의 설계자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은 단군조선(고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조선이란 국호(國號)를 지어 올렸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모든 나라 이름에 광명사상(光明思想)이 담겨 있다.

조선(朝鮮)은 조일선명(朝日鮮明), 즉 아침에 태양이 선명하게 밝아온다는 의미다.

 

  

삼봉 정도전은 국정 전반에 걸쳐 체제와 제도의 초석을 다졌다.

조선 건국의 최고 일등공신이자 태조 이성계 다음의 최고권력자 삼봉 정도전은 성리학 이념의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국정의 정책 결정 과정에 깊이 참여했다.

 

 

 

조선의 법 제도 틀을 다진 『조선경국전』을 편찬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도성을 직접 설계하고 사대문과 사소문 등 경복궁의 전각 이름도 모두 지었다.

 

조선의 정치조직 체제 초안인 『경제문감』, 숭유억불정책의 기초를 확립한 『불씨잡변』을 저술한다.

사병혁파와 요동정벌을 준비하였으나, 62세의 나이로 이방원에 의해 대역죄인이 되어 죽었다.

 

 

 

 

 

 

 

 

 

 

 

 

조선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이 꿈꾼 성리학적 이상 사회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건설되지 못했다.

그러나 삼봉 정도전이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만든 조선왕조의 모든 사상과 제도는 역사의 산물로 조선왕조 500년 동안 지속했다.

 

 

 

지구촌 역사에 조선왕조처럼 500년을 지속한 나라도 많지 않고, 삼봉 정도전과 같이 한 사람이 설계한 국가 대계(大計)가 500년을 이어간 유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불세출의 인물이었던 조선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의 이름 앞에는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다방면에 통달한 천재, 혁명가, 경세가, 대학자, 사상가, 정치가 등의 수식어가 붙는다.

 

 

 

조선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7년 만인 1398년 대역죄인이 되어 죽었다.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금기였다.

 

 

 

정도전이 설계한 조선의 법궁 경복궁은 1395년 완성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불탄 채로 270여 년 동안 버려져 있었다.

삼봉 정도전은 대역 죄인이 된 지 467년이 지난 1865년(고종 2)에 자신이 설계한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복권되었다.

 

조선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이 복권되고 40여 년이 흐른 뒤 조선(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태조실록』은 태종 이방원이 재위하던 1413년(태종 13)에 편찬되었다.

삼봉 정도전을 역모죄로 몰아 죽인 이가 바로 태종 이방원이다.

그래서 혹자는 『태조실록』에 나와 있는 정도전의 평가를 승자의 기록이라 말한다.

 

 

 

 

태조실록 14권, 테조 7년 8월 26일(1398년)

 

(정)도전이 침실 안에 숨어 있는지라. 소근(이방원의 노비) 등이 그를 꾸짖어 밖으로 나오게 하니, 도전이 자그마한 칼을 가지고 걸음을 걷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 소근 등이 꾸짖어 칼을 버리게 하니, 도전이 칼을 던지고 문밖에 나와서 말하였다.

 

"청하건대 죽이지 마시오. 한마디 말하고 죽겠습니다."

소근 등이 끌어내어 정안군(이방원)의 말 앞으로 가니, 도전이 말하였다.

"예전에 공이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주소서."

 

예전이란 것은 임신년(태조 즉위년)을 가리킨 것이다. 정안군이 말하였다.

"네가 조선의 봉화백이 되었는데도 도리어 부족하게 여기느냐? 어떻게 악한 짓을 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느냐?"

이에 그를 목 베게하였다....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매 공훈을 책정하여 1등으로 삼고 문하 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를 가하였다....

(정)도전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많은 책을 널리 보아 의논이 해박하였으며, 항상 후생을 교훈하고 이단을 배척하는 일로써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개국(開國)할 즈음에 (정도전이) 왕왕 취중에 가만히 이야기하였다.

"한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고조를 쓴 것이다."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을 이루어 진실로 상들의 공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여, 매양 임금에게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기를 권고하였으나, 임금은 듣지 않았다....

 

처음에 (정)도전이 한산 이색을 스승으로 섬기고 오천 정몽주와 성산 이숭인과 친구가 되어 친밀한 우정이 실제로 깊었는데, 후에 조준과 교제하고자 하여 세 사람을 참소하고 헐뜯어 원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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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7.01.01 07: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태종 이방원과 삼봉 정도전,

왕권정치와 신권정치의 정면 대결 - 1차 왕자의 난

 

 

 

 

 

 

 

 

 

 

 

 

 

 

 

 

조선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며, 조선 3대 왕으로 즉위한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역성혁명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창업한 근세조선의 개국공신 중 삼봉 정도전은 자타가 인정하는 단연 최고 일등공신이다.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삼봉 정도전은 이성계의 장자방이며 최고의 책사로 조선건국의 설계자이며 기획자였다.

 

 

 

 

조선은 창업 때부터 커다란 불씨를 가지고 시작되었다.

 

정안대군(태종) 이방원과 삼봉 정도전은 성리학적(주자학, 유교) 왕도정치, 즉 성리학적 이상 국가건설이라는 같은 꿈을 꾸었다.

그러나 왕권(王權) 중심의 조선을 생각하고 있던 정안대군(태종) 이방원과 신권(臣權) 중심의 조선을 생각하고 있었던 삼봉 정도전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정안대군(태종) 이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은 개국공신 배제와 왕권계승문제, 즉 왕세자 책봉 문제가 발단이 되었다. 더불어 태종 이방원의 왕권중심 성리학적 이상 국가건설과 삼봉 정도전의 신권중심으로 성리학적 이상 국가건설의 대립이 피를 부른 1차 왕자의 난을 촉발한 한 원인이 된다.

 

 

 

 

 

 

 

 

 

 

 

 

 

 

 

 

1392년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는 조선의 군주로서 왕세자를 책봉하는 권한을 가진다.

왕세자 책봉은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면 다음 보위에 오르게 되는 인물이기 때문에 왕세자 책봉은 다음 왕 결정과 다름없다. 

 

1392년(태조 1) 태조 이성계는 두 번째 부인이며 조선 최초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한다. 의안대군 이방석은 신덕왕후의 둘째 아들로 적장자가 아닌 서자이며, 태조 이성계의 막내아들로 아들로서는 여덟째가 된다.

 

 

 

 

1392년은 조선이 창업한 해로 조선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여 종법(宗法) 질서 및 조선의 모든 제도 자체가 아직 정착되지 않은 시기였다. 그래서 1392년 왕세자 책봉 때 조선 조정의 중론도 '시절이 태평하면 적장자(정실의 아들)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많은 왕자를 왕세자로 세워야 한다.'라는 의견이 원칙이었다.

 

 

성리학적 종법 질서(宗法秩序, 종법제도)는 왕실뿐만 아니라 조선의 사회구조에 관한 질서다.

질서(秩序)라는 말 자체가 혼란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차례라는 의미이듯이 왕실에서도 다음 보위에 오를 왕세자 또는 왕을 책봉하는 제도에서 차례에 맞게 적장자(嫡長子, 정실의 아들)가 일차적으로 그 지위를 상속하는 제도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8월 20일(1392년, 태조 1년)

 

어린 서자(庶子) 이방석(李芳碩)을 세워서 왕세자로 삼았다.

처음에 공신(功臣)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이 세자를 세울 것을 청하면서, 나이와 공로로써 청하고자 하니,

임금이 강씨(康氏)를 존중하여 뜻이 이방번(李芳蕃)에 있었으나, 이방번은 광망(狂妄)하고 경솔하여 볼품이 없으므로, 공신들이 이를 어렵게 여겨, 사적으로 서로 이르기를, "만약에 반드시 강씨(康氏)가 낳은 아들을 세우려 한다면, 막내 아들이 조금 낫겠다."고 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누가 세자가 될 만한 사람인가?"라고 물으니, 장자(長子)로써 세워야만 되고, 공로가 있는 사람으로써 세워야만 된다고 간절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극렴이 말하기를, "막내 아들이 좋습니다."하니, 임금이 드디어 뜻을 결정하여 세자로 세웠다.

 

 

 

삼봉 정도전이 저술한 『조선경국전』의 '세자를 정함'에는 '세자는 천하 국가의 근본이다. 옛날 선왕(先王)이 장자(長子)를 세자로 세웠으니 (형제간) 분쟁을 막기 위한 것이고, 현자(賢子)를 세운 것은 덕(德)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방석은 적장자가 아닌 서자이며, 장자가 아닌 여덟째 아들이다.

11살의 어린아이가 총명하고 자질이 엿보였다고 할 수 있으나 어질고 현명하다고 볼 수 없다.

태조 이성계가 서자이며 여덟째 아들인 의안대군 이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했지만, 그 뒤에는 신덕왕후 강씨와 삼봉 정도전이 있었다.

 

 

 

삼봉 정도전은 종법(宗法)제도와 자신이 조선의 건국이념과 통치 강령을 기 조선경국 스스로 파괴한 장본인이며, 조정의 중론(衆論)도 무시하여, 태종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도록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다.

 

 

 

 

 

 

 

 

 

 

 

 

 

 

이성계가 50이 가까워 얻은 11살의 막내아들 이방석을 왕세자 책봉 결정은 태조 이성계가 하였지만, 실제 결정은 삼봉 정도전이 하였고 형식적인 절차만 거친 것이다. 이성계는 무학대사뿐만 아니라 신하인 삼봉 정도전에게도 스승의 예로 대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3권 2월 4일(1398년, 태조 7년)

 

임금이 송헌 거사(松軒居士)로 호(號)를 하였다.

임금이 좌승지(左承旨) 이문화(李文和)에게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전조(前朝)의 충숙왕(忠肅王)이 거사(居士)라고 일컬어 예천군(醴川君) 권한공(權漢功)에게 글을 보내었다. 나도 또한 봉화백(奉化伯)에게 거사(居士)라고 일컬어 글을 보내려고 하는데, 무엇으로 호(號)를 할까?" 하니, 문화가 대답하였다. "상감의 잠룡(潛龍) 때의 헌호(軒號)가 어떠합니까?" 임금이, "좋다"하고, 드디어 송헌(松軒)으로 호를 하였다,

 

-왕(이성계)이 신하(정도전)에게 자신을 송헌거사로 낮춰서 편지를 보냈다.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살았던 곳이 송헌-

-삼봉 정도전이 창업의 공로로 받은 봉작(작위) 봉화백-

 

 

 

 

삼봉 정도전은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 창업의 최고 일등 공신이다.

조선을 설계한 정치가이며 대학자로서 개인적인 자질과 능력과는 상관없이 태종 이방원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을 제공한 장본인이 삼봉 정도전이다. 그는 이성계의 조강지처 한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철저하게 배제했다.

 

 

 

 

 

 

 

 

 

 

 

 

 

 

조선의 기획자 삼봉 정도전은 조선의 법전 경국대전의 모체가 되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국가 통치규범을 마련한 조선경국전을 저술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치사상이 집약된 재상(신권)중심의 정치조직체제를 기록한 경제문감도 저술하였다.

 

숭유억불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한 『불씨잡변』을 저술하였고, 한양 도성(경복궁)을 설계하고 북벌을 준비하기도 했다.

조선을 설계한 삼봉 정도전의 뛰어난 업적은 조선왕조가 500 동안 지속하는데 기반이 되었다.

 

 

 

 

1차 왕자의 난은 정안대군(태종) 이방원과 삼봉 정도전은 대결이며 왕권과 신권의 정면 대결다.

정안대군(태종) 이방원과 삼봉 정도전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권력을 놓고 치열하게 대립했다.

 

왕권정치와 신권정치의 틀을 세우려는 두 사람의 대결에서 삼봉 정도전이 정안대군(태종) 이방원에게 패하며 정도전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만고역적으로 낙인찍혀 있다가 조선이 패망의 길을 걸어가던 1865년(고종 2년) 경복궁 재건과 함께 복권되었다.

 

 

 

 

 

 

 

 

 

 

 

 

 

 

왕(王)은 하늘에서 정해주는 자리, 즉 천명(天命)에 의해 정해지지만, 국가 운영은 비록 자질과 능력이 부족한 임금이 보위에 있더라도  능력 있고 충성스러운 신하(재상)들만으로도 충분히 성리학적 이상 국가건설, 즉 왕도정치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삼봉 정도전이 술에 취하면 가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고 한다.

"한(漢)고조가 장자방(장량)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고조를 쓴 것이다."

 

삼봉 정도전의 이 말은 한고조 유방은 하늘이 낸 임금이지만, 실제 한(漢)나라를 세운 건 한고조 유방이 아니라 장자방(장량)이 한고조 유방을 앞세워 한(漢)나라를 세웠다는 말이다.

삼봉 정도전 자신은 조선의 장자방(장량)이고, 태조 이성계는 한고조 유방에 비유하였다.

 

 

 

   

 

왕권중심의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추구했던 정안대군(태종) 이방원과 신권중심의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추구했던 삼봉 정도전의 정면 대결, 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 이방석과 이방번, 흥안군(신덕왕후 사위 이제), 삼봉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유만수 등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정안대군(태종) 이방원과 삼봉 정도전이 대결한 1차 왕자의 난이 끝나고, 태조 이성계는 조강지처 한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 영안대군 이경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 영안대군 이경이 1398년 조선의 2대 왕 정종으로 즉위한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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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6.11.02 06: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차 왕자의 난 잘 보고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