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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중앙집권 정책에 반발하여 일어난 이시애의 난

이시애의 난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유자광과

반역 연루설에 곤욕을 치른 세조의 최측근 한명회와 신숙주

 

 

 

 

 

 

 

 

 

 

 

 

 

 

 

이시애의 난은 세조 13년(1467)에 함길도(함경도) 일어난 반란이다.

세종대왕 재위 시 북방 여진족을 소탕하여 최윤덕 장군은 4군을 개척하였고, 북방의 호랑이 김종서 장군은 6진 개척하여 조선의 국경이 넓어졌다. 함길도(함경도)는 이때 조선의 영토에 편입됐다.

 

 

 

세종대왕은 함길도 지역을 조선의 영토로 확고히 하고자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삼남 지역의 백성을 비롯하여 다른 지역도 북방에 이주시켰다. 이른바 북방사민정책으로 토착민과 이주민에게 많은 혜택을 줬다.

군역과 부역 등 국역(國役)을 면제해줬고, 관직을 주거나 올려주고 토착민관리로 임명하여 자치를 허용해줬다.

 

 

 

 

세조의 중앙집권 정책에 반발하여 1467년(세조 13) 5월 10일 이시애가 난을 일으켰다.

세조는 호패법을 시행하고 조세 수입을 확충하는 등 국방력 강화와 국가 재정을 위해 지방을 통제하면서 중앙의 권한을 강화했다.

군역과 부역이 부과되고, 호패법으로 이주가 제한되었으며, 중앙에서 관리를 직접 임명하여 보내는 등 그동안 유지됐던 특혜가 사라지면서 불만이 쌓여갔다.

 

 

 

 

 

 

 

 

 

 

 

 

 

 

 

함길도(함경도) 회령부사를 지낸 이시애는 모친의 장례식 때 동생 이시합, 매부 이명효 등과 반란을 모의하였다.

지방 수령의 자문 역할을 하는 기구 유향소를 중심으로 지역 토호들에게 "병마절도사 강효문 외 여러 명이 반역을 음모하고 있고, 조정에서 군대를 보내 함길도 군민을 모두 죽이려 한다."라고 유언비어를 퍼트리며 백성을 선동하였다. 

 

 

1467년 5월 함길도 병마절도사 강효문을 비롯하여 길주 목사 설정신, 부령 부사 김익수 등 지방 수령을 죽이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3개월간의 교전 끝에 반란의 주모자 이시애와 이시합이 체포되면서 이시애의 난은 끝났다.

 

 

 

 

 

 

이시애가 난을 일으켰을 때 세조(1417~1468)의 최측근 한명회(1415~1487)와 신숙주(1417~1475)가 봉변을 당한다.

 

이시애의 난 초기 이시애는 '함길도 병마절도사 강효문이 조정의 한명회와 신숙주 등과 내통해 반역을 꾸민 것을 알고 강효문을 죽였다.'라는 헛소문을 퍼트렸고, 이 말은 세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세조는 5월 19일 신숙주를 의금부에 하옥시키고 병으로 집에 있던 한명회는택 연금하였다.

신숙주의 둘째 아들 신면은 함길도 관찰사로 있다가 이시애의 난이 일어난 직후인 1467년 5월 22일에 반란군에 의해 죽었다.

이시애의 난으로 아들도 죽고 의금부에 하옥된 신숙주와 세조의 최측근이며 사돈관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한명회가 헛소문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헛소문을 듣고 자신을 임금으로 만들어준 최측근 신하를 감금한 세조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세조의 장자방과 위징 같은 존재 한명회와 신숙주는 또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시애의 난 때 서자 출신 갑사(직업군인) 유자광(1439~1512)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유자광은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세조에게 이시애의 난 평정에 관한 상서를 올렸다.

 

 

1467년(세조 13) 6월 14일 세조는 유자광의 상소를 읽고 "이글은 내 뜻에 매우 합당한 진실로 기특한 재목이다. 내가 장차 임용(임용)하여서 그 옳은 것을 시행하라."라고 하였다.

 

다음날 세조는 유자광을 궁으로 불러들였고 겸사복으로 승진시켰다.

세조의 후광을 바탕으로 서자출신 유자광은 병조정랑에 오른다.

 

 

 

 

 

유자광은 1468년(세조 14) 온양별시문과에 도전했으나 낙방하지만, 세조의 명으로 합격 처리된다.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때까지 간에 붙었다가 쓸개에 붙었다 하는 등 만인이 감탄할 정도의 처세술로 승승장구한다.

 

 

중종반정으로 유자광은 정국공신 1등 숭정대부 무령군에 봉해졌으며유자광에게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를 주지만, 대간들이 정승을 지내지 않은 이에게는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끝내 오르지 못했다.

1512년(중종 7) 탄핵을 받아 유배되어 죽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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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죽풍 2016.12.07 18: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헛소문에 놀아나는 정권은 말로가 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권 수립에 일등공신도 헛소문 하나에 최측근도 몰락의 길을 가는군요.
    잘 보고 갑니다. ^^

  2. 비키니짐(VKNY GYM) 2016.12.07 22: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정보 잘보고 갑니다 ^^

계유정난으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장자방(장량) 한명회, 위징 신숙주, 좌장 권람

 

 

 

 

 

 

 

 

 

 

 

 

 

 

 

조선 7대 왕 세조, 예종, 성종 재위 시 많은 정승이 있었지만, 수양대군(1417~1468)이 계유정난부터 보위에 오르까지 최측근에서 맹활약하여 재상(정승)까지 오른 3인방이 있다.

 

세조의 장자방 한명회(1415~1487), 위징 신숙주(1417~1475), 좌장 권람(1416~1465)은 세조(1417~1468)의 3대 권신(權臣)으로 불린다.

 

 

 

세조는 한명회를 장자방(장량)이라고 치켜세웠다.

장자방(장량)은 한나라 고조 유방의 책사로 한나라 창업에 일등공신이다.

장량(장자방)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한고조 유방의 곁을 떠나버렸다.

 

 

세조는 신숙주를 자신에게 당나라 명재상 위징과 같은 존재라고 칭찬했다.

위징은 당나라 태종에게 직언하는 충직한 신하다.

당태종은 위징이 죽자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을 잃었다.'라고 하며 슬퍼했다.

 

 

권람은 세조의 좌장(座長, 우두머리)격으로 수양대군에게 책사 한명회를 소개하고 왕위찬탈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한명회, 신숙주, 권람은 단종대왕에게는 역적이지만, 세조에게는 충직한 신하다.

 

 

 

 

 

 

 

 

 

 

 

 

 

 

세조의 최측근 3인방 위징 신숙주, 좌장 권람, 장자방(장량) 한명회는 모두 임금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승지직을 거쳤다.

세조의 최측근 3인방 권람, 신숙주, 한명회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관직에 함께 제수된 적이 있었다.

 

 

 

세조의 위징 신숙주는 1462년(세조 8) 5월 20일에 영의정 관직에 제수된다.

세조의 좌장 권람은 1462년(세조 8) 5월 20일에 우의정에서 좌의정으로 승차한다.

세조의 장자방(장량) 한명회는 1466년(세조 12) 10월 19일에 영의정 관직에 제수된다.

신숙주와 한명회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 자리에 올랐지만, 권람만 유일하게 영의정에 오르지 못했다.

 

 

 

세조실록 28권, 세조 8년 5월 20일(1462년)

신숙주를 영의정으로, 권남을 좌의정으로, 한명회를 우의정으로 삼았다.

 

 

수양대군(세조)과 권람의 만남은 권람이 1450년(문종 즉위년) 집현전 교리로 있을 때였다. 

세종 때부터 시작하여 1456년(세조 2)에 간행역대병요』를 편찬하는데 같이 참여하면서 알게 됐다.

중국의 고대부터 조선 태조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전쟁사를 다룬 책이 역대병요歷代兵要다. 

 

 

 

 

 

 

 

 

 

 

 

 

 

 

 

 

세조와 한명회의 만남은 1452년에 권람이 수양대군에게 한명회를 추천하면서부터다.

한명회의 친구인 권람은 경덕궁(태조 이성계의 잠저) 지기였던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 소개했다.

수양대군(세조)과 한명회는 권람의 소개로 만난 지 1년 2개월여 만에 계유정난(1453년 10월 10일)을 일으켰다.

 

 

 

단종실록 2권, 단종 즉위년 7월 28일(1542년)

권남이 말하기를

"한명회는 어려서부터 기개가 범상하지 않고, 포부도 작지 않으나, 명(命)이 맞지 않아 지위가 낮아서 사람들이 아는 자가 없습니다. 공(公)이 만일 발난(拔亂)할 뜻이 있으시면 이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세조가 말하기를

"예로부터 영웅은 또한 둔건(屯蹇, 세상이 험악하여 처세하기 어려움)함이 많으니 지위가 낮은들 무엇이 해롭겠냐?

내가 비록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나, 이제 논하는 바를 들으니 참으로 국사(國士)로다. 내가 마땅히 대면하여 상의하겠다."

 

 

 

 

 

 

권람의 사위가 28세에 병조판서에 올라 역모죄로 죽은 남이 장군이다.

권람은 문무를 겸비했고 대학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계유정난을 주도하고 공신이 되어 정치인의 걸어갔다.

 

 

세조의 장자방(장량) 한명회는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였다고 하니 학자로서의 자질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기획하고, 두 딸을 왕비로 만들어 자신의 부귀영화만 탐한 사람인 것을 보면 비상한 머리를 가진 전형적인 책사(策士, 모사)로 평가다. 연산군 때 폐비 윤씨 폐출 사건을 막지 않은 죄를 물어 부관참시를 당한다.

 

 

 

 

 

 

 

 

 

 

 

 

 

 

수양대군(세조)과 신숙주의 첫 만남은 알 수 없고, 두 사람의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의 대화를 하는 것을 보면 이전부터 알고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종실록 2권, 단종 즉위년 8월 10일(1452년)

세조가 신숙주를 불러 그 마음을 떠보다

 

정수충(鄭守忠)이 세조의 집에 가니,

세조가 그와 더불어 서서 이야기를 하는데, 마침 집현전 직제학 신숙주(申叔舟)가 문 앞으로 지나갔다.

세조가 부르기를, "신 수찬(申修撰)!" 하니, 신숙주가 곧 말에서 내려 뵈었다.

 

세조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어찌 과문불입(過門不入) 하는가?"하고,

이끌고 들어가서 함께 술을 마시면서 농담으로 말하기를,

"옛 친구를 어찌 찾아와 보지 않는가? 이야기하고 싶은지 오래였다. 사람이 비록 죽지 않을지라도 사직에는 죽을 일이다." 하니,

신숙주가 대답하기를,

"장부가 편안히 아녀자(兒女子)의 수중(手中)에서 죽는다면 그것은 ‘재가부지(在家不知)’라고 할 만하겠습니다." 하므로,

세조가 즉시 말하기를,

"그렇다면 중국으로나 가라." 하였다.

 

 

 

 

단종실록 3권, 단종 즉위년 9월 10일(1452년)

세조가 말하기를

"나는 국정에 참여하지 아니하고 또 여러 재상이 있으니, 비록 두어 달 원행을 하더라고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물며 임금이 어리신데 종실 대신이 명을 받아 분주히 간다면 중국 조정에서도 또한 우리나라의 체통이 있음을 알 것입니다."

 

 

 

 

1452년 9월 10일 수양대군은 명나라 사은사를 자청하였고, 집현전 직제학 신숙주는 사은사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함께 다녀왔다. 

 

세조가 신숙주는 자신에게 위징과 같은 존재라고 칭찬했지만, 신숙주는 변절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신숙주는 집현전 출신의 천재 학자답게 8개 국어에 능통했다고 전하며, 국조보감, 국조오례의, 고려사, 고려사요절, 동국정운, 영모록, 세종실록, 세조실록, 예종실록 여러 서적 편찬과 교정, 찬수에 참여하였다.

 

 

 

 

 

 

 

 

 

 

 

 

 

 

세조실록 7권, 세조 3년 3월 15일(1457년)

'신숙주는 곧 나의 위징이다.'

 

 

 

세조실록 31권, 세조 9년 10월 11일(1463년)

신숙주에게 명하여 술을 올리게 하고,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의 임금과 신하로서는 당나라 태종이 위징에 대한 관계와 같은 것이 없었다. 경은 나의 위징이다."

 

 

 

성종실록 209권, 성종 18년 11월 14일(1487년)

세조가 일찍이 말하기를

'한명회는 나의 자방이다.'라고 하였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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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6.12.06 06: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조 이야기 잘 보고 가네요

  2. 비키니짐(VKNY GYM) 2016.12.06 09: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좋은 정보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3. 고프다 2016.12.06 17: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4. 죽풍 2016.12.06 17: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명회도 어찌보면 세조에게 있어 장량처럼 1등 공신이겠죠.
    잘 보고 갑니다. ^^

환단고기의 저자들

안함로 , 원동중 , 이암 , 범장 , 이맥

 

 

 

 

안함로는 신라 진평왕 때의 도통한 승려이다. 성은 김씨이고, 안홍법사, 안함법사, 안함태安含殆 화상 등으로 불린다. 불교가 흥했던 신라의 대표적 고승 열 분을 기리는 신라 십성十聖 가운데 한 분이다.


23세(601, 진평왕 23) 때 수나라로 가서, 열반에 이르는 십승十乘의 비법과 심오한 불교 경전과 진문眞文을 공부하고 5년 후 서역의 승려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일찍이 세속 너머의 세계에 뜻을 두었던 안함로는, 사물에 통달하고 지혜가 밝아, 번뇌의 속박을 벗어나 가고 머무름을 뜻대로 하였다. 또한 물 위를 걷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범상치 않은 신통력을 보였다고 한다(『해동고승전』). 이로 보건대, 그는 신교神敎의 선맥仙脈을 계승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삼성기 상』 서두를 통해서도, 안함로는 불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유불선儒佛仙과 상고시대 신교 문화를 회통한 당대의 고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선덕여왕 9년(640) 만선도량萬善道場에서 62세로 입적하였다.

 

 

 

 

원동중에 대한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세조가 팔도 관찰사에게 수거하도록 유시한 도서 목록(『세조실록』)에 안함로와 더불어 『삼성기』의 저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이전의 인물임은 분명하다. 이유립은 원동중을 고려 때 인물로 비정하였다.

 

 

 

 

고려사』 「열전」에 오를 정도로 유명한 인물인 행촌 이암은 고려 25대 충렬왕 때 고성 이씨 이우李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행촌이란 호는 자신이 유배되었던 강화도의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암은 뛰어난 학자와 관리가 배출된 고성 이씨 집안의 9세손이다. 증조부 이진李瑨은 고종 때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학사를 역임하였고, 조부 이존비李尊庇 역시 과거에 급제하여 문한文翰학사, 진현관進賢館 대제학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부친 이우李瑀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나 문음제를 통해 경상도 김해와 강원도 회양의 부사를 지냈다.

 

『태백일사』 「고려국본기」에 의하면, 이존비는 환국과 배달의 역사에 대해 근본을 통하고 환단사상에 대해 깊은 안목을 가진 대학자였다. 할아버지 이존비의 정신을 그대로 전수받은 후손이 바로 행촌 이암이다.

 

이암은 10세 때 아버지의 명을 따라 강화도 마리산의 보제사에 들어가 3년 동안 유가의 경전과 우리 고대사에 대한 기록을 탐독하였다. 비록 십대의 어린 나이지만, 그때 그는 외래풍이 뒤덮고 있는 고려를 그 옛날처럼 동방의 맑고 깨끗한 나라로 일신하리라는 큰 뜻을 품게 되었다. 그가 당시 마리산 꼭대기의 참성단에 올라 지은 시에서 이것을 느낄 수 있다.

 

17세(1313)에 문과에 급제한 이암은, 고려가 원나라에게 내정 간섭을 받던 시기의 여덟 국왕 가운데 여섯 분을 모시면서 격동의 삶을 살았다. 충선왕 때 나라의 관인을 관장하는 직책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두 차례 유배를 당하고, 왕의 책봉을 위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후 수년 동안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62세(1358년) 때 공민왕의 부름에 환도하여 오늘날의 국무총리 격인 수문하시중 자리에 올랐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한 개혁군주이다. 그러한 공민왕의 곁에 이암이 있었다. 문하시중이 된 그 다음 해 홍건적이 침입하자, 이암은 서북면西北面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가 되어 적군 4만 명을 격퇴시켰고, 1년 후 홍건적의 2차 침입 때는 경북 안동으로 피난가는 공민왕을 호종하였다.

 

당시 고려 조정은 임금 앞에서도 자신을 ‘신臣’이라고 말하지 않을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친원파의 간신으로 가득하였다. 하지만 이암은 청렴결백하여 사사로이 재물과 권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홍건적을 격퇴하고 왕을 호종한 공로로 좌정승에 제수되기도(1361) 했지만, 공민왕의 부름에 응한 지 5년 만에(1363) 사퇴하고 야인이 되었다.

 

행촌에게는 고려와 조선의 여느 정치가, 학자와는 남다른 면모가 있었다. 그는 어릴 때 유학 서적뿐 아니라 동서 문화의 원류인 신교 사서를 탐독하여 신교의 삼신문화에 정통하였다. 첫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3년을 보낼 때도 우주의 이치와 천문, 풍수, 지리 등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그리고 유배에서 풀려나(1335) 천보산 태소암에서 1년간 머물 때, 소전素佺거사로부터 인류 문명의 황금시절이었던 환단(환국-배달-고조선)시대를 기록한 고서적들을 전수받았다. 신교문화에 통한 이암을 알아본 소전거사가 석굴 속에 감춰져 있던 사서들을 전해 준 것이다.

 

이암은 나중에 그것들을 근거로 『단군세기』를 쓰고, 당시 소전과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환단시대의 도학을 논한 『태백진훈太白眞訓』을 지었다. 이때 복애거사 범장과 청평거사 이명도 소전거사에게 비기秘記를 전수받아, 범장은 『북부여기』를, 이명은 『진역유기』를 저술하였다. 이 사서들은 『단군세기』와 함께 한민족의 상고 역사와 문화의 본래 면목을 드러낸 소중한 문헌들이다.

 

이암이 언제부터 『단군세기』를 집필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단군세기』 서문을 보면, 그는 67세(1363)에 사직에서 물러난 후 강화도로 건너가 선행리 홍행촌에 해운당海雲堂을 지어 기거하면서 『단군세기』의 마지막 손질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해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민족의 현실을 통탄하며 역사를 똑바로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 웅변하는 『단군세기』 서문에서 이암은 ‘인간은 어떻게, 왜, 무엇을 위해 생겨나는가’, ‘인간으로서 가장 멋진 삶은 무엇인가’ 등의 의문에 대해 명쾌한 필치로 답하고 있다. 인성론을 중심으로 신교의 역사관을 정리한 이 서문은 대학자로서의 지적인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된 만고의 명문장이다. 행촌 이암은 실로 동방 한민족의 역사를 유교사관도 불교사관도 아닌 한민족 고유의 신교사관으로 저술한, 신교사관의 정립자이다.

 

 

 

 

고려 말에 금성錦城(현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난 범장(?~?)은 여말 충신으로 잘 알려진 정몽주의 제자이다. 호가 복애伏崖라 하여, 복애거사로 불리었다.

 

그의 증조부 범승조范承祖는 남송南宋의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냈는데 원元에 의해 남송이 멸망하자(1279) 고려에 망명하였다. 조부 범유수范有障가 여진족 정벌에 공이 있어 금성군錦城君에 책봉된 것을 계기로, 금성을 본관으로 삼으면서 금성錦城 범씨范氏가 되었다.

 

공민왕 18년(1369)에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윤德寧府尹에 이어 낭사읠舍의 책임자인 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을 지냈다. 그후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사관仕官의 뜻을 꺾고, 뜻을 같이하는 70여 명과 함께 만수산萬壽山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조선의 태조와 태종이 여러 차례 벼슬을 권했으나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키며 끝내 출사하지 않고 고향(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 복만마을)으로 내려와 성리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중국 서적 『고려사高麗史 사적개요史籍槪要』에 의하면, 고향에 돌아온 그가 노닐던 곳인 ‘복암伏岩’에서 이름을 따 자신의 호 ‘복애’를 지었다.

 

저서로는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도학과 충절을 지킨 신라와 고려의 인물을 소개한 책), 『동방연원록東方淵源錄』, 그리고 원천석元天錫과 함께 편찬한 『화해사전華海師全』(정몽주의 스승인 신현申賢의 행적과 고려 말 역사를 기록한 책) 등이 있다.

 

이암의 생애를 소개하면서 밝혔듯이, 범장은 젊은 시절에 천보산에서 이암과 이명을 만나 한민족 상고 역사의 진실을 드러낼 것을 결의한 후 『북부여기』와 『가섭원부여기』를 저술하였다. 이는 당시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 고려가 다시 일어나 한민족의 옛 영광을 회복하고, 나아가 고조선 → 북부여 → 삼국시대 → 고려로 이어져 온 국통 맥을 온전히 이어가기를 바라는 애국충정의 발로였다.

 

 

 

 

이맥(1455~1528)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행촌 이암의 고손자이며 호는 일십당一十堂이다. 1474년(성종 5)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뜻이 없어 학문에만 힘쓰다가 1498년(연산군 4) 44세 때 비로소 식년시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사헌부 장령에 이르렀다. 이때 장숙용張淑容(장녹수)이 연산군의 총애를 내세워 분에 넘치게 재물을 탐하고 사치를 일삼자 여러 차례 탄핵 상소를 올리다가 괴산에 유배되었다(1504). 귀양살이 시절에,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책과 노인들에게서 채록한 이야기를 토대로 우리의 옛 역사를 기록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높은 관직을 제수받아 사간원의 대사간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이의를 제기하는 대신들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머물렀다. 이는 강직한 성품 탓에 조정에 적이 많았던 까닭이다. 1517년(중종 12) 연산군의 후사를 세우려 할 때에도 이맥은 “연산은 종묘에 죄를 얻었으니 속적屬籍이 마땅히 끊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66세 때인 1520년, 그는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인 찬수관撰修官이 되자 세조, 예종, 성종 때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수거하여 궁궐 깊이 감춰 두었던 상고 역사서를 접하게 되었다. 그 금서에서 알게 된 사실史實과 예전 귀양시절에 정리해 둔 글들을 합쳐 한 권의 책으로 묶고,‘정사正史에서 빠진 태백의 역사’라는 뜻으로 『태백일사』라 이름붙였다. 그러나 중국을 사대하는 조선의 악습과, 성리학에 위배되는 학설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세태 때문에 그 책을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집안에 비장하였다.

 

『태백일사』는 한민족의 7천 년 상고 역사를 환국, 배달, 고조선 각 시대별로 세밀하게 다루면서 당시 신교 문화의 신관, 우주관, 인간관, 역사관, 윤리관을 조목조목 전한다. 한마디로 신교 문화 역사서의 완결본인 『태백일사』를 지은 이맥은 가히 한민족 신교문화의 집대성자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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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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