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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4대 사화(士禍, 선비들의 재앙)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 복위 문제로 임사홍, 신수근 등 궁중세력이 사림세력을 숙청한 갑자사화(甲子士禍)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이후 사간원, 홍문관, 사헌부, 즉 삼사(三司)에서 연산군에게 직간하는 신하가 사라졌다.

조선 시대 4대 사화 중 두 번째 사화인 갑자사화(甲子士禍)는 연산군과 궁중 세력 부중(府中, 조정 대신) 세력을 숙청한 사화(士禍)다.

 

 

 

 

연산군은 갑자사화(1504)가 일어나기 1년 전인 1503년 예조판서 이세좌가 연회에서 임금이 따라 주는 술을 흘렸다는 이유로 귀양을 보냈다가 다시 풀어준다. 이세좌는 성종의 명으로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가지고 간 인물이다.

 

 

 

1504년에 경기도 관찰사 홍귀달의 손녀가 후궁으로 간택되었으나, 홍귀달이 손녀가 병중이라는 이유를 들어 입궐을 늦춘 사건이 발생한다. 연산군은 이세좌와 홍귀달을 불경죄로 몰아 죽인다.

 

이세좌와 홍귀달의 불경죄 사건은 갑자사화를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연산군은 이세좌의 죄를 청하지 않은 삼사(三司) 관리에게도 직무유기의 죄를 물었다.

 

 

 

 

 

 

 

 

 

 

 

 

 

 

 

왕실과 인척이며 사돈관계인 임사홍과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은 궁중 세력이다.

 

 

 

조선의 9대 왕 성종은 재위 시 폐비 윤씨 사건을 100년간 발설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사한 불행한 가족사이며, 백성을 위해 선정을 펼쳐야 하는 임금이 복수의 칼을 들면 조정에 피바람이 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종의 염려는 현실이 되었다.

 

 

임사홍과 신수근이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의 사건을 말해주기 전에 연산군은 이미 어머니 폐비 윤씨의 사건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폭정을 일삼던 조선 10대 왕 연산군은 1504년(연산군 10) 사약을 받고 사사된 어머니 폐비 윤씨의 복위 문제를 들고 나온다.

 

연산군이 아들로서 억울하게 돌아가신 어머니의 한을 풀어 드려 효심을 다하고, 폐위된 여인의 아들이 아니라 왕비의 아들로서 임금의 권위도 갖고 싶었을 것이다. 폐비 윤씨에게 제헌왕후로 추존하고 묘를 회능으로 승격시키겠다고 한다.

 

 

 

 

갑자사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과 왕실 인척 임사홍은 부중(府中, 훈구와 사림 세력) 세력과 대립하고 있었다.

절대 권력으로 복수하려던 연산군과 권력을 탐하려는 임사홍과 신수근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연산군은 어머니가 폐비가 되는데 관련된 사람, 폐비 윤씨의 사사와 관련된 사람,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한 사람은 누구도 예외 없이 숙청했다.

 

 

 

 

 

 

 

 

 

 

 

 

 

 

조선 시대 4대 사화 중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연산군이 임금으로 재위 중에 일어났다.

수십 명이 화를 입은 무오사화에 비해 갑자사화는 그 피해가 컸다.

 

약 240여 명이 갑사사화 때 화를 입었으며, 그 중 1백 2십여 명이 처형됐다.  

이미 세상을 떠나 무덤 속에 묻혀 있던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남효온, 심회, 한치형, 이파 등은 부관참시 되었다.

 

 

 

 

 

조선 10대 왕 연산군과 궁중 세력 임사홍과 신수근은 폐비 윤씨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부중(府中, 훈구와 사림의 조정 대신) 세력을 일거에 숙청했다.

 

 

조정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갑자사화로 연산군은 절대 권력을 손에 쥐었으나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고립됐다.

임사홍과 같은 간신 몇몇을 빼고는 모두를 적으로 만들었다.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에게 추존된 제헌왕후의 시호는 삭탈 됐고 능도 격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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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6.10.29 06: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갑자사화의 관해 잘 보고 가네요

  2. 고프다 2016.10.30 00: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오늘도 너무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조선 시대 4대 사화(士禍, 선비들의 재앙)

연산군 4년(1498년) 유자광 등 훈구(공신)세력이 사림(士林, 선비)세력을 숙청한 무오사화(戊午士禍)

 

 

 

 

 

 

 

 

 

 

 

 

 

 

조선 9대 왕 성종은 훈구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자 사림 세력을 등용하여 훈구세력의 독주를 막았다.

1494년 연산군이 조선의 10대 왕으로 즉위했다.

 

연산군 즉위 초는 사림세력과 함께 제도를 개혁해가며 태평성대를 이어갔다.

 

 

 

 

국정이 안정되자 사림세력은 임금도 성리학(주자학, 도학)의 이념에 맞춰 이상적인 군주가 되어야 한다고 하며 연산군에게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임금과 신하(사림) 간에 감정의 골은 깊어지며 대립을 하게 된다.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일을 알고부터 방탕한 생활을 넘어 폭군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1498년(연산군 4년, 무오년) 조선 9대 왕 성종의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사림세력이 큰 화를 당하는 조선 시대 4대 사화의 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가 일어난다.

 

 

 

『성종실록』 편찬과정에서 사관 김일손(1464~1498)은 사초에 실록청 당산관 이극돈을 비판하는 글과 자신의 스승 김종직(1431~1492)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빗대어 비판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넣었다.

 

 

 

이극돈이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승하할 때 전라감사로 있었는데 국상 중임에도 전라감사가 기생들과 어울려 놀았다고 김일손이 사초에 써넣었고, 이극돈은 그 내용을 삭제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김일손이 거절했다.

 

 

실록청 당상관 이극돈(1435~1503)은 유자광(1439~1512)을 찾아가서 말을 하고 결국 연산군에게 보고한다.

 

 

 

 

 

 

 

 

 

 

 

 

 

 

이극돈은 사림(선비) 출신이었고, 유자광 서자로 태어나 과거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직업군인(갑사甲士)으로 무인(武人)의 길을 걸었다. 이극돈은 성종의 즉위를 지지한 공로로 공신(훈구)이 되었고, 유자광은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공신(훈구)이 되었다.

 

 

 

연산군이 즉위하고는 상당수 훈구(공신)세력이 세상을 떠난 상태였고, 사림세력이 조정의 요직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처럼 연산군 재위 초기는 훈구세력보다 사림세력이 입김이 강했던 시기였다.

 

 

연산군은 사림세력과 갈등의 골이 깊어져 골머리를 앓고 있었고, 유자광은 김종직이 살아 있을 때 가까운 사이였음에도 서로에게 해묵은 감정도 있었다.

무오사화(1498년)는 연산군과 유자광, 이극돈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벌어졌다. 

 

 

 

 

 

연산군이 볼 때 김일손이 이극돈을 비판하는 내용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으나, 연산군의 증조할아버지 세조가 왕위를 찬탈했다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성종실록』에 올린 것은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조선 7대 왕 세조, 8대 왕 예종, 9대 왕 성종, 10대 왕 연산군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조의 왕위 찬탈에 가담한 공신들도 역적으로 보는 것이 된다.

김종직은 세조 때 출사하여 성종 때까지 관직에 있었다.

 

 

 

 

 

 

 

 

 

 

 

 

 

조선 시대 4대 사화 중 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는 유자광, 이극돈과 사림세력 간의 개인적인 감정에서 시작되었다. 

 

유자광이 김일손을 심문하면서 세조의 사생활과 단종, 그리고 황보인 김종서 등을 거론하며 사건을 키웠다.

유자광은 이 사초 사건을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빌미로 역모사건으로 몰고 갔으며 무오사화라는 피바람을 일으킨다. 

 

 

 

 

조선 시대 4대 사화 중 첫 번째 무오사화는 선비들이 재앙을 입은 사화(士禍)이지만, 실록청에서 실록을 만들던 사관(史官)들이 주로 많이 당한 재앙이라 하여 사화(史禍)라고도 한다.

 

 

김일손, 이목, 허반 권유경, 권오복 등은 능지처참형을 당했고, 다수의 사림세력이 삭탈관직되어 유배당했다.

1492년 이미 세상을 떠난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했으며 김종직의 문하의 사림세력이 대거 숙청됐다.

 

 

이극돈과 윤효손, 유순과 김전, 어세겸 등은 불충한 기록의 사초를 임금에게 직접 보고하지 않은 죄를 물어 파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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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조선 10대 왕 폭군 연산군(燕山君) 이융

 

 

 

 

 

 

 

 

 

 

 

 

 

 

 

조선의 10대 왕 연산군 이융조선 왕조 519년 역사에서 최초로 폐위된 임금이다.

재위 기간에 상식을 넘어서는 연산군의 폭정으로 반정이 일어났고, 연산군은 패륜 군주의 대명사,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다.

 

 

연산군은 1476년(성종 7) 조선의 9대 왕 성종 대왕과 제헌왕후(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자(元子) 이융의 어머니 제헌왕후는 시기와 질투로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만들어 1479년(성종 10)에 폐위되었다.

 

 

 

 

 

연산군이 4살 되던 해 제헌왕후가 폐위되어 궁궐에서 쫓겨나면서 정현왕후(성종의 새 왕비, 중종의 어머니)의 손에 자란다.

1483년(성종 14)에 연산군 이융은 세자로 책봉된다. 세자 이융을 바라보는 조정 대신들의 마음은 편치않았다.

세자 이융이 다음 보위를 오를 것이 명백하므로 보복에 대한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제헌왕후(폐비 윤씨)를 폐위하고 사사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인수대비는 세자 이융보다 정현왕후의 아들 진성대군(연산군의 이복동생 중종)을 더 아꼈다. 차별로 상처를 받고 고독하고 우울하게 자란 세자 이융의 인성이 올바를 수 없었다.

 

학문과는 거리가 멀었고 순탄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낸 세자 이융의 이런 내 고통은 변덕스럽고 폭력적인 성격의 폭군 연산군으로 점차 변화해 가게 된다. 

 

 

 

 

 

 

 

 

 

 

 

 

 

 

 

 

1494년 조선의 9대 왕 성종이 승하한다.

성종은 향후 100년간 폐비 윤씨의 일을 거론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1494년 조선의 9대 왕 성종 대왕이 승하하자 연산군은 조선의 10대 왕으로 등극한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 1년(1495)에 성종의 묘지문(墓誌文)을 보고 폐비 윤씨가 죄를 짓고 폐위되어 사사된 줄 알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방을 정비하고 퇴폐와 부정부패를 일소하기 위해 암행어사 파견, 인재 등용을 위해 별시문과 실시, 『국조보감』, 『여지승람』 등을 수정하여 출간하는 등 연산군은 즉위 초에 사림 세력과 함께 국정을 쇄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신하들을 배척하며 독단적인 국정 운영을 하였고, 점차 폭정으로 가며 폭군의 모습을 드러낸다.  

 

 

 

 

1498년(연산군 4)에 세조의 왕위 찬탈을 은유적으로 비난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제자 김일손이 성종실록에 기록하면서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조선왕조 519년 역사에서 사화(士禍)는 무오(戊午), 갑자(甲子), 기묘(己卯), 을사(乙巳)사화 네 번이 일어났다.

사화가 일어난 해의 간지(干支, 천간지지, 60갑자)를 합쳐 '00 사화'라 한다.

사화(士禍)란 사림(선비 세력)의 화(禍)를 말한 것으로, 사림(士林, 선비) 세력이 화(禍)를 당한 것을 말이다.

 

 

 

 

 

사림 세력이 본격적으로 조정에 진출한 것은 선대왕 성종 때였다.

김종직을 시작으로 출사한 사림 세력은 훈구(공신) 세력을 견제하려는 성종의 정치적 의도도 깔렸었다.

 

김종직이 <조의제문>에서 세조를 비난했다고 하나 이는 증손자인 연산군의 왕권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훈구(공신, 훈신)세력의 이극돈과 유자광 등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림 세력을 몰아세웠다.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로 반목과 대립의 관계를 지속하던 훈신세력(공신, 훈구파)과 사림 세력의 균형은 깨지고 사림세력은 죽거나 유배 가는 등 초토화된다. 

 

 

훈구세력도 온전하지 못했다.

불경한 사초 기록을 보고 즉시 보고하지 않은 죄를 물어 대부분 좌천됐다.

 

 

 

 

 

 

 

 

 

 

 

 

 

 

조선의 법궁(法宮, 정궁) 경복궁에는 경회루가 있다.

경회루는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소로 만들어졌으며, 때론 임금과 신하가 연회를 즐기고, 기우제와 과거 시험이 치러지기도 한 곳이다. 그러나 폭군 연산군에게 경복궁 경회루는 탐욕과 향락을 즐기는 놀이터였다.

 

사치와 향락에 빠진 연산군에게 직언하는 신하는 남아 있지 않았고, 나라의 곳간은 비어갔다.

급기야 공신들의 공신전(공신들에게 주었던 토지)마저 몰수한다.

 

 

 

 

사림 세력은 사라졌고, 외척 세력과 부중(府中)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희대의 간신 임사홍은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을 꼬드겨서 폐비 윤씨의 일을 연산군에게 말하며 갑자사화가 일어난다.

 

 

 

1504년(연산군 10)에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그나마 남아 있던 사림 세력은 몰살의 지경까지 이르게 되고 훈신세력(훈구파), 부중세력(부중파) 역시 이 참화를 비켜가지 못했다.

 

 

연산군은 어머니 제헌왕후(폐비 윤씨)가 폐위되는 과정, 어머니 폐비 윤씨의 복위 반대 등 폐비 윤씨와 관련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유배 보낸다. 연산군은 할머니 인수대비를 폭행에 가까울 정도로 밀어 버려 그 후유증으로 승하한다.

성종의 후궁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는 귀인 정씨의 아들이 직접 때려죽이게 하였고 두 아들 역시 귀양보냈다가 죽였 

 

 

 

 

연산군의 폭정은 형벌을 내릴 때도 그대로 나타났다.

불에 달군 쇠로 몸을 지지는 낙신(烙),

온몸을 토막 내어 죽이는 촌참(寸斬),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내걸은 부관참시(剖棺斬屍) ,

죽인 후에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는 쇄골표풍(碎骨飄風)과 손바닥을 뚫고, 가슴을 빠개는 형벌이 너무나도 참혹했다.

 

 

조선의 10대 왕 연산군은 1506년(연산군 12) 반정이 일어나면서 왕위에서 폐위되었다.

악녀와 요녀로 불린 장녹수와 후궁, 연산군의 아들, 신수근과 임사홍 등 연산군 주위에 있던 핵심 인사들은 모두 죽었다.

 

 

 

연산군이 왕세자로 있을 때 세자빈으로 들어온 왕비(폐비 신씨, 연산군 11년의 존호 제인덕왕비)는 폐위되었다.

폐비 신씨의 본관이 거창이라 거창군부인이라 한다.

 

연산군은 1506년 유배지 강화 교동도에서 병사했다.

폐위된 왕이라 묘호는 없고 무덤도 능(陵)이 아니라 묘(墓), 실록 역시 연산군일기로 편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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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의 저자들

안함로 , 원동중 , 이암 , 범장 , 이맥

 

 

 

 

안함로는 신라 진평왕 때의 도통한 승려이다. 성은 김씨이고, 안홍법사, 안함법사, 안함태安含殆 화상 등으로 불린다. 불교가 흥했던 신라의 대표적 고승 열 분을 기리는 신라 십성十聖 가운데 한 분이다.


23세(601, 진평왕 23) 때 수나라로 가서, 열반에 이르는 십승十乘의 비법과 심오한 불교 경전과 진문眞文을 공부하고 5년 후 서역의 승려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일찍이 세속 너머의 세계에 뜻을 두었던 안함로는, 사물에 통달하고 지혜가 밝아, 번뇌의 속박을 벗어나 가고 머무름을 뜻대로 하였다. 또한 물 위를 걷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범상치 않은 신통력을 보였다고 한다(『해동고승전』). 이로 보건대, 그는 신교神敎의 선맥仙脈을 계승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삼성기 상』 서두를 통해서도, 안함로는 불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유불선儒佛仙과 상고시대 신교 문화를 회통한 당대의 고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선덕여왕 9년(640) 만선도량萬善道場에서 62세로 입적하였다.

 

 

 

 

원동중에 대한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세조가 팔도 관찰사에게 수거하도록 유시한 도서 목록(『세조실록』)에 안함로와 더불어 『삼성기』의 저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이전의 인물임은 분명하다. 이유립은 원동중을 고려 때 인물로 비정하였다.

 

 

 

 

고려사』 「열전」에 오를 정도로 유명한 인물인 행촌 이암은 고려 25대 충렬왕 때 고성 이씨 이우李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행촌이란 호는 자신이 유배되었던 강화도의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암은 뛰어난 학자와 관리가 배출된 고성 이씨 집안의 9세손이다. 증조부 이진李瑨은 고종 때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학사를 역임하였고, 조부 이존비李尊庇 역시 과거에 급제하여 문한文翰학사, 진현관進賢館 대제학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부친 이우李瑀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나 문음제를 통해 경상도 김해와 강원도 회양의 부사를 지냈다.

 

『태백일사』 「고려국본기」에 의하면, 이존비는 환국과 배달의 역사에 대해 근본을 통하고 환단사상에 대해 깊은 안목을 가진 대학자였다. 할아버지 이존비의 정신을 그대로 전수받은 후손이 바로 행촌 이암이다.

 

이암은 10세 때 아버지의 명을 따라 강화도 마리산의 보제사에 들어가 3년 동안 유가의 경전과 우리 고대사에 대한 기록을 탐독하였다. 비록 십대의 어린 나이지만, 그때 그는 외래풍이 뒤덮고 있는 고려를 그 옛날처럼 동방의 맑고 깨끗한 나라로 일신하리라는 큰 뜻을 품게 되었다. 그가 당시 마리산 꼭대기의 참성단에 올라 지은 시에서 이것을 느낄 수 있다.

 

17세(1313)에 문과에 급제한 이암은, 고려가 원나라에게 내정 간섭을 받던 시기의 여덟 국왕 가운데 여섯 분을 모시면서 격동의 삶을 살았다. 충선왕 때 나라의 관인을 관장하는 직책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두 차례 유배를 당하고, 왕의 책봉을 위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후 수년 동안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62세(1358년) 때 공민왕의 부름에 환도하여 오늘날의 국무총리 격인 수문하시중 자리에 올랐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한 개혁군주이다. 그러한 공민왕의 곁에 이암이 있었다. 문하시중이 된 그 다음 해 홍건적이 침입하자, 이암은 서북면西北面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가 되어 적군 4만 명을 격퇴시켰고, 1년 후 홍건적의 2차 침입 때는 경북 안동으로 피난가는 공민왕을 호종하였다.

 

당시 고려 조정은 임금 앞에서도 자신을 ‘신臣’이라고 말하지 않을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친원파의 간신으로 가득하였다. 하지만 이암은 청렴결백하여 사사로이 재물과 권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홍건적을 격퇴하고 왕을 호종한 공로로 좌정승에 제수되기도(1361) 했지만, 공민왕의 부름에 응한 지 5년 만에(1363) 사퇴하고 야인이 되었다.

 

행촌에게는 고려와 조선의 여느 정치가, 학자와는 남다른 면모가 있었다. 그는 어릴 때 유학 서적뿐 아니라 동서 문화의 원류인 신교 사서를 탐독하여 신교의 삼신문화에 정통하였다. 첫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3년을 보낼 때도 우주의 이치와 천문, 풍수, 지리 등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그리고 유배에서 풀려나(1335) 천보산 태소암에서 1년간 머물 때, 소전素佺거사로부터 인류 문명의 황금시절이었던 환단(환국-배달-고조선)시대를 기록한 고서적들을 전수받았다. 신교문화에 통한 이암을 알아본 소전거사가 석굴 속에 감춰져 있던 사서들을 전해 준 것이다.

 

이암은 나중에 그것들을 근거로 『단군세기』를 쓰고, 당시 소전과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환단시대의 도학을 논한 『태백진훈太白眞訓』을 지었다. 이때 복애거사 범장과 청평거사 이명도 소전거사에게 비기秘記를 전수받아, 범장은 『북부여기』를, 이명은 『진역유기』를 저술하였다. 이 사서들은 『단군세기』와 함께 한민족의 상고 역사와 문화의 본래 면목을 드러낸 소중한 문헌들이다.

 

이암이 언제부터 『단군세기』를 집필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단군세기』 서문을 보면, 그는 67세(1363)에 사직에서 물러난 후 강화도로 건너가 선행리 홍행촌에 해운당海雲堂을 지어 기거하면서 『단군세기』의 마지막 손질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해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민족의 현실을 통탄하며 역사를 똑바로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 웅변하는 『단군세기』 서문에서 이암은 ‘인간은 어떻게, 왜, 무엇을 위해 생겨나는가’, ‘인간으로서 가장 멋진 삶은 무엇인가’ 등의 의문에 대해 명쾌한 필치로 답하고 있다. 인성론을 중심으로 신교의 역사관을 정리한 이 서문은 대학자로서의 지적인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된 만고의 명문장이다. 행촌 이암은 실로 동방 한민족의 역사를 유교사관도 불교사관도 아닌 한민족 고유의 신교사관으로 저술한, 신교사관의 정립자이다.

 

 

 

 

고려 말에 금성錦城(현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난 범장(?~?)은 여말 충신으로 잘 알려진 정몽주의 제자이다. 호가 복애伏崖라 하여, 복애거사로 불리었다.

 

그의 증조부 범승조范承祖는 남송南宋의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냈는데 원元에 의해 남송이 멸망하자(1279) 고려에 망명하였다. 조부 범유수范有障가 여진족 정벌에 공이 있어 금성군錦城君에 책봉된 것을 계기로, 금성을 본관으로 삼으면서 금성錦城 범씨范氏가 되었다.

 

공민왕 18년(1369)에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윤德寧府尹에 이어 낭사읠舍의 책임자인 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을 지냈다. 그후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사관仕官의 뜻을 꺾고, 뜻을 같이하는 70여 명과 함께 만수산萬壽山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조선의 태조와 태종이 여러 차례 벼슬을 권했으나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키며 끝내 출사하지 않고 고향(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 복만마을)으로 내려와 성리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중국 서적 『고려사高麗史 사적개요史籍槪要』에 의하면, 고향에 돌아온 그가 노닐던 곳인 ‘복암伏岩’에서 이름을 따 자신의 호 ‘복애’를 지었다.

 

저서로는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도학과 충절을 지킨 신라와 고려의 인물을 소개한 책), 『동방연원록東方淵源錄』, 그리고 원천석元天錫과 함께 편찬한 『화해사전華海師全』(정몽주의 스승인 신현申賢의 행적과 고려 말 역사를 기록한 책) 등이 있다.

 

이암의 생애를 소개하면서 밝혔듯이, 범장은 젊은 시절에 천보산에서 이암과 이명을 만나 한민족 상고 역사의 진실을 드러낼 것을 결의한 후 『북부여기』와 『가섭원부여기』를 저술하였다. 이는 당시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 고려가 다시 일어나 한민족의 옛 영광을 회복하고, 나아가 고조선 → 북부여 → 삼국시대 → 고려로 이어져 온 국통 맥을 온전히 이어가기를 바라는 애국충정의 발로였다.

 

 

 

 

이맥(1455~1528)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행촌 이암의 고손자이며 호는 일십당一十堂이다. 1474년(성종 5)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뜻이 없어 학문에만 힘쓰다가 1498년(연산군 4) 44세 때 비로소 식년시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사헌부 장령에 이르렀다. 이때 장숙용張淑容(장녹수)이 연산군의 총애를 내세워 분에 넘치게 재물을 탐하고 사치를 일삼자 여러 차례 탄핵 상소를 올리다가 괴산에 유배되었다(1504). 귀양살이 시절에,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책과 노인들에게서 채록한 이야기를 토대로 우리의 옛 역사를 기록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높은 관직을 제수받아 사간원의 대사간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이의를 제기하는 대신들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머물렀다. 이는 강직한 성품 탓에 조정에 적이 많았던 까닭이다. 1517년(중종 12) 연산군의 후사를 세우려 할 때에도 이맥은 “연산은 종묘에 죄를 얻었으니 속적屬籍이 마땅히 끊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66세 때인 1520년, 그는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인 찬수관撰修官이 되자 세조, 예종, 성종 때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수거하여 궁궐 깊이 감춰 두었던 상고 역사서를 접하게 되었다. 그 금서에서 알게 된 사실史實과 예전 귀양시절에 정리해 둔 글들을 합쳐 한 권의 책으로 묶고,‘정사正史에서 빠진 태백의 역사’라는 뜻으로 『태백일사』라 이름붙였다. 그러나 중국을 사대하는 조선의 악습과, 성리학에 위배되는 학설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세태 때문에 그 책을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집안에 비장하였다.

 

『태백일사』는 한민족의 7천 년 상고 역사를 환국, 배달, 고조선 각 시대별로 세밀하게 다루면서 당시 신교 문화의 신관, 우주관, 인간관, 역사관, 윤리관을 조목조목 전한다. 한마디로 신교 문화 역사서의 완결본인 『태백일사』를 지은 이맥은 가히 한민족 신교문화의 집대성자라 할 수 있다.

 

 

증산도 열어나가는 상생 후천개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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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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