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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韓문화 중심채널 STB 상생방송 특집방송

독립운동가 의열단원 김지섭 의가 90주년 특별기획

STB 특선다큐 - <일제의 심장을 겨누다>

 

 

 

 

 

 

 

 

 

 

 

 

2년 전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가 1910년 부친 홍범식 충청남도 금산 군수의 상을 치른 후 독립운동가 김지섭 선생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되었습니다. 벽초 홍명희의 부친 홍범식 선생이 금산 군수로 재임하던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라'는 유서를 당시 금산재판소에 근무하던 김지섭 선생에게 아들 홍명희에게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자결했습니다.

 

 

의열단원으로 독립운동 최일선에서 활동했던 추강(秋岡) 김지섭생은 188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상주보통학교 교사가 되었고 재판소 시험에 합격하여 전북 전주를 거쳐 충남 금산 재판소에서 근무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자유롭게 독립운동을 할 수 없었던 김지섭 선생은 1920년 만주로 망명했고, 1922년 의열단에 가입한 후 조선총독부를 벌벌 떨게 한 의열단원으로 맹활약했니다. 한韓문화 중심채널 STB 상생방송은 독립운동가이며 의열단원으로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김지섭 선생의 의열투쟁사를 되새기는 특별기획 프로그램을 준비했습니다.

 

 

 

 

 

 

 

 

 

 

독립운동가 추강 김지섭 선생은 군자금을 모으는 한편 의열단원으로 폭파와 암살 등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서 활동했습니다.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 의열단장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은 의열단 조직의 목표와 투쟁 방법을 천명한 '공약 10조'를 결의했고, 반드시 죽야 할 일곱 대상의 '7가살'과 반드시 파괴해야 할 다섯 개 기관의 '5파괴' 대상을 명시적으로 규정했습니다.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 선생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은 1924년 일본 도쿄에서 일본 총리와 조선 총독을 비롯한 여러 대신이 모이는 제국회의가 열린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일제의 만행을 세계만방을 알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폭탄 투척 거사를 계획했습니다.

 

 

의열단원 중에서도 일본인처럼 보이고 일본어를 잘 구사하는 김지섭 선생이 가장 먼저 지원습니다.

독립운동가 의열단원 추강 김지섭 선생은 사립 광화신숙에서 일어를 전공했기 때문에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의열단원 김지섭 선생은 상해에서 일본으로 가는 석탄 운반선을 타고 일본 밀항에 성공했습니다.

 

 

 

 

 

 

 

 

 

 

1924년 열릴 예정이었던 제국회의가 중단됐다는 소식을 듣고 국가와 민족의 가장 큰 원흉인 수괴 일본 왕 히로히토로 목표를 수정합니다. 의열단원 김지섭 선생은 일본 왕이 사는 궁성을 사전 답사했고 마침내 일본 왕이 사는 궁성으로 향했습니다.

궁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자 폭탄을 투척하며 나아갔지만, 이중교 앞을 지키는 호위경관과 일본군의 1, 2차 저지선을 통과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독립운동가 김지섭 선생이 상해에서 일본으로 밀항해 올 때 오랫동안 습기가 들어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해 일본 왕이 사는 궁성으로 들어갈 때 던진 폭탄이 제대로 폭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일본 왕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려던 의열단원 김지섭 선생의 거사가 비록 불발로 끝났지만, 신(神)으로 떠받들고 있는 일본 왕을 향한 거사는 일본인에게 가장 충격을 준 의거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대일본제국 헌법 제1조와 3조>

'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 '천황은 신성불가침하기 때문에 천황제나 천황을 반대하면 안 된다'

 

 

 

 

 

 

 

 

 

 

독립운동가이며 의열단원이었던 추당 김지섭 선생은  1924년 11월 6일 무기징역을 선고 1927년 2년 징역으로 감형되었습니다.

체포와 재판 과정에서 숱한 고문을 받았던 의열단원 김지섭 선생은 1928년 2월 20일 원수의 땅 일본 옥사에서 44세의 나이로 순국하셨습니다.

 

 

한韓문화 중심채널 STB 상생방송이 김지섭 선생의 의거 90주년을 맞아 특별기획 프로그램을 준비했습니다.

독립운동가이며 의열단원으로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가신 추강 선생의 삶과 의열투쟁사에 흐르는 정신사를 통해 바람직한 미래상을 그려보는 프로그램입니다.

 

 

 

 

STB 상생방송 특집방송 - 김지섭 선생의 의거 90주년 특별기획

STB 특선다큐 - <일제의 심장을 겨누다>

방송 일시: 2020년 3월 6일 오후 6시, 재방송 3월 8일 점심 1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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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tb.co.kr/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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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녁노을* 2020.03.03 06: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건강하세요^^

  2. kangdante 2020.03.03 08: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원봉으로 인해
    의열단이 웬지 의구심을 갖는 경우도 많아진 것 같아요

  3. 모아모아모아 2020.03.03 11: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개벽을 접하고 갑니다.
    행복한 하루되세요.

  4. 청결원 2020.03.03 15: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건강한 하루 보내시고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5. Bella Luz 2020.03.04 14: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좋은글 읽고 갑니다~^^건강 조심하세요~~

항일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 단원 나석주 의사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 폭탄투척 의거

 

 

 

 

 

 

 

 

 

 

 

 

 

 

 

조선총독부 산하의 동양척식회사와 조신식산은행은 일제가 조선 경제를 착취한 경제수탈 중추기관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본뜬 국책회사로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주의에 강제병합되기 전인 1908년 대한제국의 경제를 독점하고 토지강탈과 자원수탈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식산은행(산업은행)은 동양척식회사와 함께 조선 경제 수탈의 중추기관으로 전쟁에 미친 일제가 조선의 쌀을 대량으로 일본에 들여가는 소위 '산미증식계획(1902~1934)'에 자금줄 노릇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 백범 김구의 경호원이며 의열단 단원으로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투척 의거를 한 나석주(1892~1926) 의사는 황해도 재령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나석주 의사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 후 국내외 애국지사들이 무장투쟁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만주에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간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국내에 들어온 나석주 의사는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본 경찰과 면장 등 친일파를 처단하며 항일운동을 한다.

 

일본의 감시가 심해지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에서 임시정부 요인의 경호를 맡는다.

나석주 의사는 중국 한단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백범 김구, 심산 김창숙 등이 동포들의 민족혼을 일깨우고 항일의지를 북돋우기 위해 조선 경제와 자원 수탈의 핵심기관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의열단 단원 나석주 의사가 폭탄투척 의거를 하기로 결정된다.

 

 

1926년 12월 의열단 단원 나석주 의사는 폭탄투척 거사를 준비하고 마중덕이란 중국인으로 위장해 인천으로 입국한다. 

황해도 출신으로 서울 지리에 어두운 나석주 의사를 옆에서 도와준 분은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의 부인이며 여성 항일독립운동가인 박자혜(1895~1944) 여사였다.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 의사는 먼저 조선의 경제와 자원을 수탈한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했다.

그러나 투척한 폭탄이 터지지 않고 불발되면서 나석주 의사는 동양척식주식회사로 옮겨가 일본인 직원을 사살하고 폭탄을 투척했지만, 역시 불발된다.

 

 

 

 

 

 

 

 

 

 

 

 

투척한 폭탄이 불발되고 일본 경찰의 추격과 함께 도심 한가운데서 총격전이 벌어진다.

폭탄투척 의거에 실패한 나석주 의사는 일본 경찰과 교전 중 권총으로 자결했다.

나석주 의사가 순국하기 전 일본 경찰과 동양척식회사 일본인 직원 등 3명을 사살하고 4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혈혈단신으로 조선 경제와 자원 수탈의 심장부에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경찰과 총격 중 순국한 나석주 의사의 의거는 일제가 보도를 통제하면서 사건 발생 17일 뒤에야 언론을 통해 보도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 백범 김구 선생의 경호원과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 단원 나석주 의사는 조선인의 고혈을 빨아먹던 경제수탈의 심장부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투척 의거에 목숨을 바쳤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하기 전 상해에 있을 때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의 생일을 맞아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저당 잡히고 고기와 반찬을 사서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에게 가져다 드렸다.

 

당시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쓰레기통을 뒤져가며 반찬을 만들어 아들을 뒷바라지할 정도로 생활이 궁핍했다. 나석주 의사는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얼마후면 어차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릴 것이기에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저당 잡혀 반찬을 사다 드린 것이다.

 

 

 

 

곽낙원 여사는 손님들이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자 지천명(50세)의 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現 경찰청장)의 자리에 있던 아들 백범 김구 선생의 종아리를 때렸다. 곽낙원 여사는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 개인의 사소한 생일을 동지에게 알려 옷을 저당 잡혀 생일상까지 차려 먹었다는 이유로 백범 김구 선생의 종아리를 때리며 멸사봉공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의열단 단원으로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한 의거는 나석주 의사 한 분의 의거가 아니다.

 

나석주 의사는 목숨을 바치면서 폭탄투척 의거를 실행했고, 그 뒤에는 백범 김구 선생과 어머니 곽낙원 여사, 심산 김창숙 선생, 단재 신채호 선생의 부인 박자혜 여사, 의열단 단원과 수많은 애국지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친 피와 땀, 숭고한 애국정신 등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희생과 봉사가 있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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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블프라이스 2017.04.16 00: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열단 단원 나석주 의사의 폭탄투척 의거 포스트 잘 읽고 공감 누르고 갑니다. 편안한 주말 되세요^^

항일무장독립투쟁 비밀결사조직 의열단 단원 김상옥 의사(義士)

일제강점기 왜경(倭警)의 심장부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일제강점기 종로경찰서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투쟁한 항일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혹독한 고문을 자행하는 등 독립운동 탄압의 상징기관으로 수많은 독립투사가 고초를 당한 악명 높은 곳이었다.

 

 

 

일제 경찰의 심장부와 같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의열단 단원 김상옥(1890~1923) 의사는 한양에서 태어나 자랐다.

김상옥 의사는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좌절하지 않고 일하면서 학업을 계속했다. 

 

자수성가하여 경제적으로 자립한 김상옥 의사는 영덕철물상회를 운영했고, 말총 모자와 일반생필품을 만들어 팔았다.

김상옥 의사는 뜻을 같이하는 한훈, 유장렬 등과 대한광복단을 결성하고 전라도 지역 친일파를 처단하고 오성헌병분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1919년 3.1만세 운동을 전후하여 김상옥 의사는 박민호, 윤익중, 정설교 등과 함께 비밀결사조직 혁신단을 만들어 혁신공보를 발행하며 민족의식과 독립 의지를 고취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서 한 달 넘게 고초를 당한다. 

 

 

 

 

 

 

 

 

 

 

 

 

 

종로경찰서에서 풀려난 김상옥 의사는 대종교 신도 중심으로 조직된 북간도 독립군부대 북로정서군에서 파견된 김동순과 윤익중, 서대순 등과 조선 총독 암살과 조선총독부 폭파를 준비하던 중 거사가 발각되어 상해로 망명한다.

 

중국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과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교류하면서 강력한 무장투쟁을 하던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 단원이 된다.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의열단은 1919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큰 별 약산 김원봉을 비롯한 11명의 애국지사가 모여 만든 단체다.

 

의열단을 창립한 약산 김원봉과 애국지사들은 그동안 무폭력 독립운동과 무장독립운동의 한계를 절실히 느껴 폭렬(爆烈) 투쟁의 비밀결사조직을 만들었다.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 단원들은 거침없는 폭렬투쟁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며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장 역할을 하였다.

 

 

의열단 단원들은 일제의 고관과 친일파 암살, 식민지 핵심관 폭파 등의 강력한 암살 폭파 무장투쟁으로 일제의 치를 떨게 했다.

식민통치 사령탑 조선총독부와 독립군 탄압의 대명사였던 종로경찰서도 의열단 단원들의 폭파 대상이었다.

 

 

 

 

 

 

 

 

 

 

 

 

 

의열단 단원이 된 김상옥 의사는 국내에 들어와 군자금을 모집하고 상해로 돌아갔다.

폭렬투쟁의 항일독립운동을 천명한 비밀결사조직 의열단은 반드시 죽이고 파괴해야 할 '7가살'과 '5파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1922년 권총 3정과 탄약 800발, 폭탄 등을 국내로 반입한다.

 

 

김상옥 의사는 의열단 단원 안홍한, 오복영 등과 함께 조선 총독 사이토 마사코를 암살하고 종로경찰서를 폭파하기 위해 서울로 들어왔다. 당시 종로경찰서는 체포된 독립군이 모진 고문을 받았던 독립투사의 한(恨)이 서린 곳이었다. 

 

 

 

의열단 단원 김상옥 의사는 1923년 1월 12일 독립군 탄압의 대명사였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다.

김상옥 의사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매부 고봉근의 집에서 일본으로 가는 조선 총독 사이토 마사코를 서울역에서 처단하기 위해 거사를 준비한다.

 

 

 

 

 

 

 

 

 

 

 

 

종로경찰서는 폭탄을 투척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검거에 나섰고,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1월 17일 새벽 김상옥 의사는 삼판동 매부 고봉근의 집에서 김상옥 의사를 체포하려던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다.

명사수였던 김상옥 의사는 수십 명의 일본 경찰과 맞서 4명을 살상하고 일본 경찰의 포위망을 탈출한다.

 

 

 

남산을 넘어 안정사에서 승복으로 변장하고 수유리를 거쳐 효제동 이혜수 동지의 집에 은신했으나, 1월 22일 일본 경찰에게 포위를 당한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의열단 단원 김상옥 의사 단 한 명을 체포하기 위해 4~500여 명의 일본 경찰이 겹겹이 포위한다. (혹자는 당시 일본 경찰의 규모가 1천 명에 이르렀다고도 한다.) 

 

 

 

 

 

 

 

 

 

 

 

 

 

 

수백 명의 일본 경찰은 양손에 권총을 쥐고 민가의 지붕을 넘나들며 신출귀몰하는 김상옥 의사를 쉽게 체포하지 못했다.

김상옥 의사 한 명과 수백 명의 일본 경찰은 3시간여 동안 총격전이 벌어졌고, 일본 경찰 수십 명이 김상옥 의사의 쌍권총에 쓰러졌다.

 

 

 

김상옥 의사는 마지막 한 발의 총알로 자결하면서 34세의 나이로 장렬하게 순국했다.

폭렬투쟁의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 단원 김상옥 의사는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기세로 만천하에 대한 남아의 기백을 보여 주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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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7.04.08 07: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상옥 의사의 관해 잘 보고 가네요

  2. Deborah 2017.04.08 19: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상욱 의사님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가네요

무장독립투쟁단체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義烈團)을 창립한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병합과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약 3개월간 한반도 전역에서 비폭력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비폭력 3.1만세 운동을 일제는 총칼을 앞세워 무력으로 진압했고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다.

 

 

1919년 3.1운동 직후 출범한 국내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된다.

약산 김원봉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은 무력을 앞세운 일제에 대항하여 조국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3.1만세 운동과 같은 비폭력 독립운동이 아니라 강력한 무장독립투쟁단체가 필요하다고 뜻을 모았다.

 

 

 

 

약산 김원봉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초기에 무장독립투쟁을 주장하면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았다.

1919년 11월 10일 만주 길림성에서 약산 김원봉, 황상규, 권준 등을 비롯한 13명의 애국지사가 모여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義烈團)의 창립했다.

 

의열단 단원은 최초 13명이었으며, 신흥무관학교 출신과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과 동향인 경남 밀양 출신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여 경제 수탈과 백성을 핍박하고 학살한 일본 제국주의 수뇌부와 친일파를 암살하고 일제의 식민통치 주요 기관 등을 파괴하는 공작이 주 임무다.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는 최대 천 명을 넘었다고 한다.

 

 

 

의열단(義烈단) 단원들은 맹세와 같은 행동목표 공약 10조(公約十條) 아래, 반드시 파괴해야 할 관공서와 주요기관 등 5파괴(五破壞)와 반드시 척살해야 할 대상자 조선총독부 고관, 일본군 수뇌부, 친일파 등 7가살(七可殺)의 행동지침을 갖고 활동했다.

 

1923년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은 북경에 있던 단재 신채호를 찾아와 의열단 선언문을 써 달라고 부탁한다.

단재 신채호는 의열단의 정신과 무장투쟁 실천 강령 등을 담아 6천여 자에 달하는 조선혁명선언문(의열단 선언문)을 작성했다.

 

 

 

 

 

 

 

 

 

 

 

1920년 부산경찰서 폭탄투척의거와 경남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1921년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의거,

1922년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암살미수사건,

1923년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동경 니주바시 폭탄투척 의거,

1924년 친일파 정검주 척살 의거, 친일파 배정자, 이용구 암살미수사건,

1926년 동양척식회사, 조선식산은행 폭탄투척 의거 등 수십 차례에 걸쳐 파괴와 암살 등 무장투쟁활동을 하였다.

 

 

 

약산 김원봉은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의 단장으로 의열단원들과 수많은 거사를 모의했다.

그러나 의열단의 활동이 계속될수록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거세지고, 독립운동 자금 조달 문제와 의열단 내의 밀정 때문에 거사를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잇따른 작전 실패가 이어지면서 의열단 단원들의 희생만 늘어가자 1929년 의열단을 해체한다.

 

의열단 단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부사령관, 임시정부 군무부장(現 국방부장관)직을 역임한 약산 김원봉은 일제가 백범 김구 선생보다 현상금을 더 많이 내건 인물로도 유명하다.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을 창립한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은 1898년 경남 밀양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약산 김원봉이 학업을 시작할 때부터 대한제국은 실질적으로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동화중학교에 다녔으나 일제가 동화중학교를 폐쇄하였다.

서울로 올라간 약산 김원봉은 1916년 서울 중앙학교를 졸업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다.

 

약산 김원봉의 고모부 황상규는 1913년 무장독립투쟁단체 대한광복회의 창립에 참여했으며 약산 김원봉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준 인물로 황상규는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 창립 후 고문이 된다.

 

 

 

김원봉은 중국 천진에서 독일인이 운영하는 덕화학당과 남경의 금릉 대학을 다녔으며, 신흥무관학교에서도 몇 달간 군사지식을 배운다. 고모부 황상규를 고문으로 하여 13명의 동지와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을 창립하고 의열단 단장이 됐다.

 

 

1926년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을 비롯한 20여 명이 항일무장투쟁군대 양성을 목표로 중국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 사관학교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갔다. 한동안 강력한 무력투쟁으로 일제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 공포의 대상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은 1929년 공식적으로 해체한다. 

 

 

 

 

 

 

 

 

 

 

약산 김원봉은 1932년 조선혁명간부학교, 1935년 민족혁명당, 1938년 장개석의 지원으로 조선의용대를 만들었다.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고, 김원봉이 조직한 조선의용대 출신이 주력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이 창설된다.

약산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을 거쳐 임시정부 군무부장(現 국방부장관)이 된다.

 

 

해방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약했던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은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당시 고향 밀양에 돌아온 약산 김원봉을 환영하는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해방 후 미 군정의 통치를 받은 남한은 좌우 이념대립이 극심했다.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사회주의와 손을 잡았던 약산 김원봉은 1946년 29개 좌파계열 단체가 연합한 민주주의 민족전선 공동의장이 된다.

 

 

 

 

 

 

 

 

 

 

1946년 미 군정이 쌀값을 통제하자 쌀가격이 폭등하면서 일어난 이른바 '대구 총파업 사건'의 배후 약산 김원봉을 지목한다.

'대구 총파업 사건'은 미 군정의 잘못으로 시위가 일어났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이 노동자(김용태)를 살해하자 벌어진 시민항쟁 성격의 시위였다. 그런데 미 군정은 이 사건을 좌익세력이 주도한 폭동으로 조작했다.

 

소위 '대구 총파업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약산 김원봉은 1947년 일제강점기 악질 친일파 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구타와 고문을 받는 수모까지 당하고, 우익깡패까지 약산 김원봉을 테러하는 사건까지 벌어진다.

 

 

 

 

1948년 4월 의열단 단장 출신의 약산 김원봉은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연석회에 참가하기 위해 북한에 갔다가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내각 국가검열상, 노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대한민국을 침략하면서 6.25전쟁이 발발했다.

이른바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약산 김원봉의 4형제와 친척들 상당수가 총살당한다.

북한에 있던 약산 김원봉은 1958년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면서 자살 또는 학살당했다는 후문(後聞)이 전할 뿐이다.

 

 

 

의열단 단장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現 국방부장관), 광복군 부사령관을 지낸 약산 김원봉은 남북연석회에 참석하려고 북한에 갔다가 눌러앉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70년 동안 대한민국과 북한의 위정자들은 김원봉의 북한 체류와 사상문제를 각기 자신들이 설정한 이념적 잣대로 평가하였다.

일제강점기 약산 김원봉의 독립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과 항일투쟁, 순수한 열정마저도 버림받았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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