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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자주독립과 노예역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헌신한 안동 임청각의 주인 

『환단고기』와 인연이 깊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국가 원수) 석주 이상룡 선생

 

 

 

 

 

 

 

 

 

 

 

 

고성 이씨 집안의 후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국가 원수)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은 조선 철종 9년(1858) 안동 임청각에서 태어났습니다. 의병 활동과 계몽 활동을 하던 석주 이상룡 선생은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한 다음 해인 1911년 1월 안동 임청각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습니다.

 

 

만주로 망명한 안동 임청각의 주인 석주 이상룡 선생은 우당 이회영 선생 등 동지들과 힘을 모아 항일무장투쟁의 산실인 신흥무관학교(신흥강습소)를 설립합니다.

 

 

우당 이회영, 석주 이상룡 선생 등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는 백범 김구 선생보다 현상금이 더 많이 걸렸단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 선생을 비롯한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독립군 간부 약 3,500여 명을 배출한 항일 무장독립운동의 요람이었습니다.

 

 

 

 

 

 

 

 

 

 

임청각을 처분하고 대한의 자주독립을 위해 만주로 망명해 항일독립운동의 최일선에서 활동한 석주 이상룡 선생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한민족에게 두 정부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며 서간도의 군정부(軍政府)를 군정서(軍政署)로 낮춰 개편했습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통령제에서 의원내각제로 개편한 후 초대 국무령(국가 원수)으로 추대됐습니다. 국무령을 사임하고 만주로 돌아온 석주 이상룡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32년 돌아가셨습니다.

 

 

안동 임청각이 수난을 당한 것은 석주 이상룡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의 일입니다.

1936년 일제는 석주 이상룡 선생이 태어나 자란 안동 임청각을 허물어 철로를 만들었습니다.

서울에서 경주까지 연결되는 중앙선 철도를 놓으면서 직선 철로 대신 굳이 안동 임청각을 관통하게 했습니다.

 

중앙선이 석주 이상룡 선생 등 독립운동가 다수를 배출한 안동 임청각을 지나면서 10여 km을 더 돌아 구불구불한 철로가 만들어졌습니다. 일제는 안동 임청각 50채를 강제로 철거했습니다.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은 이론과 군사훈련 등을 받는 한편 우리의 참역사와 문화도 공부했습니다.

신흥무관학교 전체 교육과정의 절반이 민족 정신교육이었습니다. 신흥무관학교에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정신을 군사훈련보다 두 배 이상 교육한 것은 민족정신을 함양케 하여 무장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함입니다. 

 

 

안동 임청각의 주인 석주 이상룡 선생은 1913년 신흥무관학교 교재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정신을 담고 있는 『대동역사大東歷史』를 집필해 교재로 사용했는데, 안타깝게도 신흥무관학교 교재였던 『대동역사』가 발견되지 않고습니다.

 

 

안동 임청각의 주인 석주 이상룡 선생과 당시 교육을 받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모두 돌아가신 상황에서 『대동역사大東歷史』의 제세한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동역사』의 내용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데 바로 <서사록西徙錄>입니다.

<서사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안동 임청각의 주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망명 일기입니다.

 

 

 

 

 

 

 

 

역사학자 이덕일 교수는 석주 이상룡 선생의 <서사록> 내용을 예로 들면서 '지식인의 예언자적 소명'이 무엇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역사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나라의 체통을 높이고 국민의 정신을 배양하기 때문이다. 지금 노예사관으로 백성을 가르치고 있으니 어찌 노예근성을 길러 참담한 지경에 들어가지 않도록 할 수 있겠는가."

 

 

임청각 주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시문집을 아들 이준형 선생이 필사해 1973년 간행한 <석주유고>와 망명 당시 일기인 <서사록>에는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역사를 왜곡 조작할 것을 알았다는 듯한 내용이 나옵니다.

 

임청각의 주인 석주 이상룡 선생은 일제가 식민사학으로 우리의 역사를 왜곡 조작하기 이전에 이미 기자동래설과 한사군 한반도설을 부정했습니다. 대한의 백성들이 일제가 조작해 만든 노예역사관의 포로가 될 것을 마치 눈앞에 벌어진 일을 보듯 말씀하셨습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석주 이상룡 선생은 "아아! 단군 이래 오천 년 역사는 영원하며 단절이 없다는 것을 의심치 않노라."라고 노래 부르시며 국조 단군을 자랑스러워했다고 합니다.

 

 

"한사군의 옛터는 모두 요동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석주유고)

 

"대개 단군의 혈통은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로부터 연면히 이어져 3천 년 동안 끊어지지 않았다.

한 침상 위인데 다시 어디에 기씨(箕氏, 기자)가 코를 골며 잠잘 곳이 있었겠는가.

 

수사(隨史, 서)에 이르기를 (수양제가) '좌우 20만 대군을 현도, 낙랑 등의 길에서 나와서 압록강 서쪽으로 모이라'고 했으니 이에 근거하면 한사군의 땅은 압록강 이서(以西)를 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리나라 사람들은 당초 사가의 격식이 없이 망령되어 노예의 근성으로 꾸며 찬술하는 솜씨를 남용하여 국가의 체통이 손상될 것을 생각지 않고 오직 타인을 숭배하는 데만 힘썼다."

(서사록 1911년 2월 24일)

 

 

 

 

 

 

 

 

 

임청각의 주인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은 고성 이씨 30세 손이고, 독립운동가 해학 이기(1848~1909) 선생은 고성 이씨 27세손입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의 역사관은 고성 이씨 집안의 대대로 이어온 역사관과 직접 관련이 있습니다.

 

 

해학 이기 선생과 석주 이상룡 선생은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를 지은 행촌 이암 선생의 후손입니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를 지으신 일십당 이맥 선생의 고조부가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를 지으신 행촌 이암 선생입니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를 지으신 행촌 이암 선생의 손자는 세종대왕 때 좌의정을 지낸 용헌 이원 선생입니다.

이원(李原) 선생의 여섯째 아들이 이증(李增) 선생이고, 이증 선생의 셋째 아들이 이명(李洺) 선생으로 조선 중종 14년(1519)에 안동 임청각을 지었습니다.

 

 

 

 

 

 

 

 

해학 이기 선생은 『환단고기』의 『태백일사』를 지은 일십당 이맥 선생의 후손으로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삼성기 上』, 『삼성기 下』,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다섯 권을 감수했습니다.

 

해학 이기 선생이 설립한 단학회를 이어받은 2대 회장 운초 계연수 선생과 석주 이상룡 선생이 손잡고 1919년 <단학회보>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단학회 2대 회장은 해학 이기 선생의 제자 운초 계연수 선생으로 운초 계연수 선생은 해학 이기 선생이 감수한 다섯 권을 책을 묶어 1911년 『환단고기』를 편찬한 분입니다.

 

고려 시대 후암 이존비와 행촌 이암, 조선 시대 용헌 이원과 일십당 이맥 선생으로 이어진 고성 이씨 가문의 우리 참역사와 문화를 지켜온 숭고한 정신이 수백 년 동안 계승되어 석주 이상룡 선생과 해학 이기 선생의 자주적 역사관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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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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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블프라이스 2019.03.16 03: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제는 이유립 선생에 이어 오늘은 환단고기와 안동 임청각 주인 석주 이상룡 선생에 대해 몰랐던 내용을 알고 갑니다^^ 요며칠 미세먼지가 없어서 정말 살것 같습니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편안한 주말 보내시길 바래요

  2. kangdante 2019.03.16 08: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과거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래마저 과거에 매몰되어서는 안되겠어요

  3. 죽풍 2019.03.16 22: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에 대한 공부를 하고 갑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독립운동을 위한 자치기관 경학사와 항일무장 투쟁의 요람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민족지도자

명문대가의 후손에서 독립운동가로 변신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석주 이상룡 선생은 단군기원 4191년 조선 철종 9년, 서력 1858년 11월 24일 경북 안동의 임청각에서 태어났습니다.

1895년 조선의 국모(명성황후)가 일본 제국주의 낭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자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석주 이상룡 선생은 외숙부 권세연과 함께 의병 활동을 했습니다.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이 일어나자 가야산에 의병 군사기지를 만드는 한편 동지들과 함께 대한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근대교육 기관인 협동학교를 세웠고 계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1910년 8월 29일 치욕적인 경술국치를 맞아 99칸짜리 임청각을 팔고 집안 식구들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습니다.

1911년 1월 54세의 석주 이상룡 선생은 엄동설한에 일가족과 50여 가구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습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수백 년을 지켜온 임청각을 팔고 만주로 떠날 때 사당에 모셔놨던 조상님 신주(위패)를 모두 땅에 묻고, 노비 문서를 불태우며 "너희들도 이제 독립군이다."라고 하시며 대한의 자주독립을 위해 힘을 보탤 것을 부탁했습니다.

 

 

만주로 간 석주 이상룡 선생은 우당 이회영 선생, 김대락, 김동삼 등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한 항일무장 투쟁 독립군 간부를 양성한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셨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께서 1913년 직접 저술한 『대동역사大東歷史』는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교재로 사용됐는데 현재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항일무장 투쟁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참역사를 바로 알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도 무장투쟁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1918년 조소앙 선생 1918년 기초한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인 무오독립선언서에 석재 이상룡 선생을 비롯한 39명이 서명했습니다.

 

조소앙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 헌장을 기초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원 비서장, 외교부장, 내무부장, 국무위원 등을 지냈으며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 때 미처 피난 가지 못하고 인민군에 의해 북한으로 납북됐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은 지청천, 김동삼 등과 함께 1919년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항일 무장투쟁에 나섰습니다.

 

우당 이회영과 석주 이상룡 선생 등이 설립한 항일무장투쟁의 요람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독립군들은 1920년 6월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와 10월 청산리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봉오동전투에서 대패한 일본 제국주의는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수만 명의 우리 동포를 무참하게 학살한 이른바 간도 대학살(경신참변) 만행을 저질렀고, 상당수 항일독립단체가 소련의 연해주로 이동합니다.

 

 

만주 지역에서 무장 항일투쟁을 하던 독립단체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는 별개로 항일무장독립투쟁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에 밑거름이 됐고, 現 육군사관학교의 모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1혁명 이후 세 곳에서 출범했습니다.

1919년 3월 7일 러시아에서 최초의 임시정부가 출범했고, 4월 11일 상해에서 두 번째 임시정부가 출범했으며, 4월 23일 서울에서 한성 정부가 수립을 선포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는 1대 이승만, 2대 이동녕 선생에 이어 안창호 선생(대리)이 국무총리를 지냈습니다.

1919년 9월 11일 러시아, 서울, 상해의 임시정부가 통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초대 국무총리에 이동휘 선생이 선임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국제연맹에 대한민국 위임통치를 독단적으로 청원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에 의해 탄핵당해 대통령직을 박탈당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한동안 내분으로 크게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1920년 만주 지역에 흩어져 있던 항일무장독립단체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 군사통일촉성회에서 통합 방안을 협의했지만, 뚜렷한 결과를 도출하지 못하고 192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립니다.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에 박은식 선생이 선출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통령제에서 국무령제로 바꾸고 사임했습니다.

 

 

68세의 석주 이상룡 선생은 1925년 9월 2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국가원수)으로 선출됐고, 1926년 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만주(간도)로 다시 돌아갑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국가 원수)를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은 만주로 돌아온 후 만주 지역에 산재한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민족유일당운동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로 나누어진 항일무장투쟁단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삼부 통합회의를 주도하시다 1932년 5월 12일 중국 길림성 서란현에서 75세를 일기로 순국하셨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역임한 석주 이상룡 선생께서는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가져가지 말라. 외세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더울 힘써 목적을 관찰하"라는 유언을 남기시고 순국하셨습니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는 정권의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1962년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을 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국가 원수)를 역임한 석주 이상룡 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 추서됐습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의 유해는 1990년 조국을 떠난 지 80년, 광복을 맞은 지 45년이 지난 1990년 10월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은  근 100년 동안 무국적자였다가 2009년이 되어서야 단재 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대한민국 국적이 회복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집안은 3대에 걸쳐 9명이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충의로운 집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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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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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블프라이스 2019.03.06 04: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몰랐던 근현대사 역사를 공부하고 갑니다^^ 즐거운 수요일 보내시길 바래요

  2. 청결원 2019.03.06 06: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 뿌연 미세먼지 많은 날이지만
    건강 유의 하시고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3. kangdante 2019.03.06 08: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상룡 선생에 대해 잘 보고 갑니다
    오늘도 건강한 하루되세요.. ^.^

  4. 죽풍 2019.03.06 22: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