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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문화연구소 주최 - 보천교(普天敎) 학술대

대한민국 역사에서 철저하게 잊힌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 민족종교 보천교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산실 보천교의 재발견

 

 

 

 

 

 

 

 

 

 

 

일제강점기 대한의 자주독립을 위해 수많은 애국지사가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국내에서도 독립을 위해 투쟁한 애국지사가 있었지만, 많은 독립운동가가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혹독한 탄압과 핍박을 피해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천교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항일 무장독립운동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민족종교 보천교는 국내와 해외에서 대한의 자주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를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 지원과 민족운동의 산실이었던 보천교는 조선총독부의 민족정기 말살 정책으로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에서 큰 역할을 했던 민족운동의 산보천교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잊힌 존재가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 민족 2천만 명 중 600만 명 이상이 보천교(普天敎) 신도였습니다. 

 

전라북도 정읍에 본부를 둔 보천교는 일제강점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단체였습니다.

 

 

 

 

 

 

 

 

 

 

보천교는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항일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문화를 보존하고 확산하는 데도 공헌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산실 보천교 재발견> 학술대회는 근현대사의 중심에 있었던 보천교의 위상과 역할을 재조명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산실 보천교 재발견> 학술대회를 통해 철저하게 사라지고 잊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참된 역사를 복원하고, 일제강점기 민중의 희망이었던 보천교의 진실한 역사를 밝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상생문화연구소 보천교 학술대회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산실 보천교 재발견

 

 

일시: 2017년 11월 15일(수요일) 오전 9:30 ~ 오후 6:00

장소: 국회, 의원회관 2층 대회의실

주최: 상생문화연구소

후원: STB 상생방송

문의: 070-8644-3019, 010-9094-1209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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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죽풍 2017.11.08 23: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제 강점기 때 민족운동을 했던 보천교가 있었군요.
    잘 알아 갑니다. ^^

  2. 버블프라이스 2017.11.09 02: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제강점기때 민족운동을 했던 보천교 관련정보는 처음 들어봅니다.
    11월 15일날 수요일 오전 9시30~ 오후 6시까지 국회, 의원회관 2층 대회의실에서 열리는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산실 보천교 재발견 학술대회 정보 체크하고 갑니다^^ 정말 멋진 행사인 것 같습니다.

미국과 일본의 격전지 남태평양, 일제강점기 일본이 남양군도에 인력 송출(이주)한 조선인 노무자

 

 

 

 

 

 

 

 

 

 

 

 

 

일제강점기였던 1939년 일본이 국가총동원법 시행을 전후하여 조선인 노무자를 국내 또는 국외로 보낸 것에는 공통점과 다른 점이 있다. 

 

 

 

공통점은 온갖 거짓말과 감언이설로 현혹하고 때론 압박하여 모집과 알선 형식으로 데려가 조선인을 차별하고 감시와 통제 속에 인권은 유린당하고 노예 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다른 점은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하기 전에는 조선인 노무자 인력 송출에 어느 정도 개인의 선택권이 주어졌다는 것이고, 국가총동원법을행하고 나서는 조선인 강제징용이란 말 그대로 개인이 거부한다고 해도 강제로 동원했다는 점이다.

 

 

 

 

 

 

 

 

 

 

 

 

1946년 7월 1일 미국은 남태평양 마셜 제도에 있는 조그만 비키니 섬에서 핵폭탄 실험을 했다.

 

비키니 섬이 있는 마샬 제도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식민지는 아니었지만, 위임 통치형식으로 점령하고 있던 곳으로 식민지와 다름없는 남양군도의 한 섬이다. 중서 태평양의 마크로네시아 지역을 일본은 남양군도(南洋群島)라고 불렀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독일의 식민지였던 남양군도를 일본 제국주의가 점령하여 통치하게 된다.

남양군도는 군사와 경제적 측면에서 일본에 중요한 곳이었다. 

 

남양군도의 서쪽은 동남아시아, 동쪽은 미국으로 일본 제국주의는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기치 아래 팽창주의 망상에 사로잡혀 남양군도를 침략전쟁에 전진기지로 만들었다.

 

 

 

 

 

 

 

 

 

 

 

일본은 남양군도를 영구점령하기 위해 탐사를 하고 개발에 착수한다.

초기에는 사탕수수 농장과 제당 사업, 고구마(카사바) 등을 하면서 부족한 인력을 조선인과 오키나와(유구 왕국) 출신으로 채워나갔다.

 

 

일제강점기 일본 본토 정부와 조선총독부, 국책회사, 언론 등이 앞장서서 조선인 노무자를 모집하여 남양군도에 인력을 송출하는 이주정책을 수립하여 대대적으로 홍보한다.

 

일본은 일제강점기 남양군도 조선 노무자 인력송출을 조선인 노무자를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해준 농업이민 정책이라고 홍보했다.

일본 정부는 동양척식회사와 기업과 협회 등을 내세우고 매일신보와 동아일보 등이 남양군도에 대한 긍정적인 기사를 내보낸다.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대 일본은 상업실습제도, 이민개척 등을 통해 남양군도가 지상낙원이라고 거짓 선전하며 조선인 노무자를 모집하여 인력을 송출(이주)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이주정책(인력 송출)으로 큰 희망을 품고 남양군도 도착한 조선인 노무자의 눈에 비친 남양군도는 지상낙원이 아니었다.

 

 

남양군도의 관리하는 남양청과 일본군 군사시설, 일본인 거주지, 그리고 사탕수수와 제당 공장 등 산업 시설을 제외하면 남양군도는 거친 황무지 땅이었고, 습하고 높은 기온과 온갖 해충, 식수 부족 등 일본이 선전한 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인력송출로 남양군도에서 일한 조선과 오키나와 출신 노무자는 일본인보다 노임을 적게 받으면서도 가장 힘들고 어려운 현장에 투입되어 일했다. 일본이 점령한 남양군도의 조선인 노무자는 독신과 가족이 함께 온 경우도 있었고, 일본에 체류하던 조선인이 남양군도에 들어온 경우도 있었다. 

 

 

일본은 남양군도의 안정된 지배체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 조선인 독신 노무자보다 가족동반 노무자 이주를 장려했다.

 

 

남양군도의 주 생산품이었던 사탕수수 가격이 1920년대 중반 급격하게 폭락하면서 해고된 조선인 노무자는 조선으로 귀국한 경우도 있었고, 일부는 현지인과 결혼하여 정착한 경우도 있었다. 

 

 

 

 

 

 

 

 

 

 

 

 

남양군도에 인력 송출된 조선인 노무자의 노동환경과 생활환경은 강제노역(강제징용)은 아니었지만, 강제징용에 준하는 힘든 생활의 연속이었다.

 

 

 

1917년 90명의 조선인 노무자가 남양군도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1938년까지 남양군도 조선인 거주자는 늘었다 줄기를 반복했다. 일본의 국가총동원법은 1939년부터 시행됐다.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에 의하면 1920년대에서 1930년 후반까지 최소 80여 명이 거주했고, 1938년에는 704명이 거주한 것으로 조사됐다. 1930년대에는 200여 명에서 5백여 명의 조선인 노무자가 남양군도에 거주한 것으로 나와 있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도 13회에 걸쳐 1,200여 명의 조선인 노무자와 그 가족이 남양군도 농업이민 정책으로 이주했고, 이때부터 남양군도에 조선인 노무자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일제강점기 조선에 대한 기록 중 정확한 통계치도 일부 있지만, 일본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통계는 모두 추정한 수치다.

왜냐하면, 일본은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는 대다수 기록을 조직적으로 폐기 또는 은폐하였고, 전쟁 중 유실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한 조선인 피해 사실과 정확한 숫자를 확인하는 작업은 이미 세월이 너무 흘러버린 뒤라서 자료를 찾을 수 없다. 그나마 발굴된 일부 자료와 숫자가 세상에 알려지고,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통계 추정치만 있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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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블프라이스 2017.08.06 02: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절대 잊혀져서는, 잊지 말아야 하는 역사,
    일제강점기 일본의 남양군도 조선인 노무자 인력송출(이주) 글 아주 잘 읽고 갑니다^^
    기분좋은 일요일 되세요

  2. 죽풍 2017.08.06 22: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제강점기 때 자신들의 과오를 덮기 위해 통계도 조작하였거나 숨겼지 않았을까 싶네요.
    무엇 하나 솔직함과 진정성이 없는 일본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린 조선인 강제징용과 이중징용 피해자

아직도 무국적자로 살아가는 사할린 고려인 강제징용 피해자와 후손

 

 

 

 

 

 

 

 

 

 

 

 

 

일본 열도의 최북단에 있는 섬, 홋카이도(북해도)와 마주한 러시아 사할린은 한때 러시아와 일본이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던 섬이다. 월타족과 니브흐족(퉁구스계), 홋카이도의 원주민 아이누 등이 거주하던 사할린은 몽골(원나라)과 명나라, 청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19세기 들어서면서 러시아가 정착민을 보내 실효적 지배를 했다. 

 

 

사할린은 19세기 중반 러시아와 일본이 남북으로 분할하여 지배하였고, 일본이 러시아에 사할린을 넘겨주고 쿠릴 열도 남쪽의 4개 섬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사할린 섬의 남쪽 절반을 러시아로부터 양도받았고,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우리 민족은 생존을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이주를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강제동원 때문에 사할린으로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카레이스키, 즉 고려인이라고 불렀다.

사할린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숫자는 단체에 따라 차이가 크다.

 

 

일본의 강제 동원에 의해 사할린으로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는 최소 5만여 명에서 최대 15만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일본 패망 후 사할린에 남은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의 숫자는 4만여 명으로 대동소이하다.

 

 

 

사할린의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가 일제강점기 다른 지역의 강제징용 피해자들과 다른 점은 이중징용 피해자가 있다는 것이다.

일본이 침략 전쟁의 전선을 확대하면서 군수물자와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일본 본토 중심으로 인력을 재배치한다.

사할린 지역 탄광의 석탄 채굴량을 줄이거나 중단하고, 후쿠시마, 나가사키(군함도 등), 이바라키 등지로 이중징용을 보낸다.

 

 

 

 

 

 

 

 

 

 

 

 

동토의 땅 사할린에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탄광과 벌목장, 군사시설, 토목 현장 등지에서 강제노역했다.

사할린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차별과 폭행, 배고픔과 12시간 이상의 중노동, 질병 등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은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도 부지기수다.

 

 

 

사할린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사할린에 끌려와 강제노역에 시달렸고, 이후 일본 열도 및 그 외의 다른 곳으로 재배치된 이중징용 피해자가 많았다. 사할린의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중에는 힘든 노역에도 삶의 희망을 주는 가족과 함께 거주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이 이중징용(일본은 전환배치라고 표현)을 시행하면서 다른 지역으로 배치된 조선인(고려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가족과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사할린에 남아 있던 약 4만 3천여 명의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는 이중징용 피해자에서 제외된 숫자다. 

 

 

 

 

 

 

 

 

 

 

 

 

소련이 사할린 거주 우리 민족과 함께 고려인이라고 부른 소련 내의 다른 지역에 살던 우리 민족이 있었다.

바로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 지역 등지에 있던 조선인(고려인)으로 이들은 소련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었다.

 

고려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대한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부모 형제와 생이별하고 머나먼 타국 땅에서 목숨을 바쳤던 독립군과 일본의 핍박을 피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으러 조국을 떠났던 사람의 후손들이다.

 

 

대한민국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는지 아니면 잊힌 존재인지 모르겠지만, 사할린 조선인(고려인) 강제징용 피해자와 후손, 그리고 연해주 등지에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로 이주당한 조선인(고려인) 후손들 대다수가 아직도 대한민국 국적이 없는 무국적자라는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약 5만에서 15만여 명의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가 사할린 강제노역에 동원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는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자 자국민 약 40여만 명을 철수시켰고, 사할린에 강제동원한 조선인 강제징용 생존자들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할린에 버려두고 철수해 버렸다.

 

 

이후 일본은 일본인 여성과 결혼한 일부 한국인 남성만 일본으로 귀환시켰다. 일제는 패망 직후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인(고려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소련의 스파이로 몰아 집단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미국과 소련은 1946년 11월 27일 사할린 지역 억류자 귀환 대상자 협정을 체결했는데, 미국과 소련은 일본인에 대한 귀환만 허용했다.

 

살을 에는듯한 강추위와 치가 떨리는 노역에 시달리다 이제는 사할린을 떠나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일본의 강제노역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소련으로부터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사할린을 점령한 소련(러시아)은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국적을 주지 않았으며, 그로인해 사할린에 남게 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후손들 역시 러시아 국적을 받지 못해 무국적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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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블프라이스 2017.07.30 03: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제와 이어지는 내용이군요?
    오늘은"일본의 사할린 조선인 강제징용과 이중징용 피해자" 관련해서 역사공부를 하고 갑니다^^
    기분좋은 주말 되세요

  2. 청결원 2017.07.30 07: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르고 있던 역사 공부 잘 하고 갑니다

  3. koreanuri@hanmail.net 2017.11.04 21: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사할린..
    참으로 우리 겨레와는 연원이 많은 땅입니다.
    먼 옛날 대진국(발해)시대.. 그 보다 이전은 두고라도 대진국시대에 사할린은 발해의 영역이었습니다.

    여기서 영역이라함은 쿠릴타이 회의를 하는 종족이기 때문입니다. 땅을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공유의 개념의로 보는 것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이 땅을 팔라고 하자 무슨 말인지 모르고 그토록 쉽고 땅을 빼앗기고 죽음을 당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땅은 여러 겨레와 나라가 필요에 따라 함께 이용하는 영역으로 공유하였다는 것입니다.

    대진국은 왜국과 교류를 위해 동해를 통해 사신을 파견하였습니다. 왜는 18세기 까지만 하더라도 북해도(홋카이도) 마저도 점유하지 못한 상태였으니 강국 대진국이 사할린을 영역으로 두었을 것임은 물론입니다.

    원주민이 몽골에 이어 청나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더라도 사할린이 결코 왜倭나 러시아의 땅일 수 없음은 명백합니다.

    더 연구할 과제이긴 하지만 러와 왜가 사할린은 남북으로 분할지배하는 회담에서 러시아가 왜국 대표에게 왜 조선땅을 가지고 너희 땅이라고 하느냐고 발언한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또 일설에는 사할린이란 말이 사슴의 섬이란 말이고, 이순신 장군이 복무하던 녹둔도鹿屯島가 바로 사할린이다. 두만강 가운데 작은 섬에서 무슨 여진족과 이순신 장군이 전쟁을 하였겠는가? 합니다. 鹿屯島란 말이 사슴의 섬이란 뜻이니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이고 이런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상당한 자료가 있다는 주장을 몇 년 전에 보았습니다.

    카레이스키
    러시아 사람들은 대한사람을 카레이스키 혹은 고링스키라고 합니다.
    여기서 카레이란 바따르케레이의 케레이(=겨레)에서 온 말로 범알타이권역의 케레이들이 우리와 연원이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 러시아와 왜가 북방4개의 도서(쿠릴열도의 섬) 반환을 다투고 있지만 사할린에 대해선 별 다툼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역사적 연원으로 보아 연해주(블라디보스톡)을 북경조약으로 청나라로 부터 넘겨 받는 과정에서 러시아가 차지한 사할린도 간도, 연해주와 함께 우리가 되찾아야 할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카이레스키 우리 겨레들..
    우린 지금 인구가 줄어든다면서 왜 우리 겨레 우리 동포들을 받아 들이지 못하는지? 어서 우리 국력이 좀 더 나아져야 하겠습니다. 현재로선 국력이 나아진다는 것은..
    1. 국민소득 4만불 달성
    2, 자주국방 확립
    이 두가지라 하겠습니다. 국력이 나아져서 사할린의 모든 겨레에게 대한의 국적을 주고 (대한으로의) 거주 이전의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내가 구상하고 있는 대배달연합 1단계에는 사할린이 함께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밝 누 리.
    [밝은 우리의 온 삶터]
    .

일제강점기 일본의 최북단 섬 홋카이도(북해도北海島) 탄광과 군사시설 건설현장 등에서

강제노역동원된 조선인 강제징용 해자

 

 

 

 

 

 

 

 

 

 

 

 

 

북해도(홋카이도)는 본래 아이누가 살던 섬으로 일본의 영토가 아니었다.

홋카이도는 1868년 메이지유신 때 만들어진 일본 제국 헌법에서도 북해도(홋카이도)는 일본 영토에 포함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 제국 헌법에는 조선(대한민국)의 독도, 유구 열도(오키나와 유구왕국), 사할린, 쿠릴열도(북방 4도) 역시 일본 영토에 포함되지 않았다.

 

 

 

대부분 교과서와 학자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북해도(홋카이도)를 개척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본의 북해도(홋카이도) 개척 역사는 왜곡된 것으로 일본 측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다.

자국의 영토가 아닌 곳을 힘으로 개척한다는 것은 식민지화를 했다는 것으로 점령이며, 침략이 올바른 표현이다.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북해도)는 대한민국(남한)5분의 4에 육박하는 면적을 가진 섬이다.

천연자원이 풍부한 홋카이도는 특히 석탄이 많이 매장된 곳이다.

 

홋카이도(북해도) 지역의 석탄 매장량은 일본 전체  매장량의반을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매장량을 자랑하는 곳이었.

홋카이도(북해도) 탄광은 19세기 후반부터 채굴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일본인 남녀가 모두 채굴작업을 하였고, 기계가 아닌 사람이 직접 채굴하고 운반까지 하다 보니 생산량이 많지 않았다.

육상탄광이나 해저탄광에서의 채굴작업은 갱도붕괴의 위험성, 산소 부족과 석탄가루를 그대로 마시는 등 열악한 노동환경도 문제가 컸다. 그리고 석탄 갱도의 특성상 높은 온도 때문에 채굴작업을 하는 남녀 모두 아랫 속옷만 걸친 채 작업을 해야만 했다.

 

 

 

 

 

 

 

 

 

 

 

 

일본 최북단의 섬 북해도(홋카이도)에 석탄 매장량이 많았기 때문에 석탄을 채굴하는 탄광 역시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석탄 채굴에 필요한 인력을 충원하고, 남하하는 소련군으로부터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홋카이도(북해도)에 비행장과 군사시설을 만드는데 조선인 강제징용자를 대거 동원했다.

 

 

혹독한 노동환경 속에서 혹한의 추위와 배고픔, 질병의 위험 앞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머나먼 타국 땅에서 고향의 부모 형제를 애타게 그리다 가슴 속에 한을 머금고 죽어갔다.  

 

 

 

 

 

 

 

 

 

 

 

 

일제강점기 홋카이도에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만 약 15만 명에 달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홋카이도(북해도)는 일본의 여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가 많이 끌려간 곳이지만,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자진 도일(渡日)하여 탄광에서 일한 조선인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백성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이 할 수 있는 직업위험하고, 힘들고, 지저분한 일에 한정되어 있었다.

먹고 살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조선인 탄광 노무자는 일본인과 인권, 임금, 근로조건 등에서 차별을 받으며 일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 홋카이도(북해도)에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탄광에서 가장 많이 일했으며, 군수공장과 항만, 비행장, 도로, 댐 건설 등 군사기지 건설 현장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홋카이도(북해도) 전역의 2백 개가 넘는 곳에서 12시간이 넘는 혹독한 노동과 폭언과 폭행,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했다.

 

 

 

홋카이도(북해도)의 가와기타 해군비행장을 건설하는 공사장에서는 10세 안팎의 조선인 어린이까지 일본인의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강제노역에 동원됐다는 증언이 나왔고, 조선인 어린이 강제징용 피해자가 나타나면서 사실로 확인까지 됐다.

 

 

 

 

 

 

 

 

 

 

 

 

 

일제강점기 홋카이도(북해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중 탄광 붕괴와 사고, 일본에 의해 사망한 숫자는 현재까지 파악된 숫자만 2천여 명이 넘는다. 홋카이도(북해도)에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사망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숫자는 일본군과 일본 기업 사망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고 매장되거나 화장된 조선인 강제징용 사망자 숫자까지 포함한다면 그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실제 일본과 한국의 단체가 홋카이도(북해도) 지역에서 사망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숫자와 사망자 유골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무명 또는 무연고자 사망자 숫자가 적지 않았다고 했다.

 

일본은 전쟁에서 패망한 후 홋카이도 지역에 묻혀있던 다른 지역 출신 일본인 사망자 유해는 모두 이장했기 때문에 집단으로 발견된 유골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은 홋카이도(북해도) 지역에서 사망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를 화장하거나 아무 데나 묻어버렸다.

1997년부터 대한민국과 일본의 시민단체가 일제강점기 홋카이도(북해도)에 끌려가 사망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유골 발굴을 시작했다.

 

머나먼 이국땅에 비참한 삶을 살다 억울하게 불귀의 객이 돼버린 조선인 강제징용 사망자 숫자는 현재로서 파악 자체가 불가능한 실정이다.

 

 

지난 2015년 일제강점기 홋카이도(북해도) 지역에 끌려가 사망한 조선인 강제징용 사망자 115명의 유골이 70년 만에 죽어서나마 꿈에도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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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블프라이스 2017.07.29 02: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흑백이지만 갱도의 특성상 높은 온도 떄문에 속옷만 입고 남녀가 작업을 하는 모습만 봐도 얼마나 환경이 안좋았는지 알 수 있는 사진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일제강점기 홋카이도(북해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관련해서 역사공부를 하고 갑니다.
    편안한 주말 되시길 바래요 도생님.

일제강점기 해저탄광 갱도붕괴로 바다 밑에 수장(水葬)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와 장생탄광(長生炭鑛) - (2)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 노무자가 석탄 채굴작업을 한 장생탄광은 해저탄광으로 당시 여느 탄광처럼 비좁고 두웠으며, 높은 습도와 고온의 열기 속에 속옷(훈도시)만 걸친 채 석탄 채굴 작업을 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작업 현장은 지역을 불문하고 생지옥이었다.

 

 

 

장생탄광에서 일한 대부분의 조선인 노무자는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사람들이었고,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왔다 장생탄광에서 일한 조선인도 일부 있었다. 일본인과 조선인 등 1천 명 남짓 일하던 장생탄광에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높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숙소에서 너덧 평 되는 방 한 칸에 근 20명씩 합숙시켰다.

 

조선인 노무자 숙소는 일본의 철저한 감시와 통제를 받았고 탈출도 힘들었지만, 도망가다 붙잡히면 죽지 않을 정도로 폭행을 당했고 하루 12시간 이상의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다.

 

 

 

 

 

 

 

 

 

 

 

 

육상탄광과 해저탄광은 언제든지 붕괴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작업을 해야 하는 곳이다.

장생탄광은 해저탄광으로 수압 때문에 갱도가 붕괴할 수 있는 또 다른 위험을 안고 채굴작업을 해야 했다.

 

장생탄광은 길이가 10여 km 되는 긴 갱도가 바다 밑으로 뚫려있었다.

183명의 바다 밑에 수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생탄광 수몰 사고에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2명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장생탄광은 붕괴하기 몇 달 전부터 바닷물이 유입됐고, 며칠 전부터는 바닷물 유입이 급격히 늘어났다고 한다. 장생탄광에 다량의 바닷물이 유입되면서 붕괴 위험이 커졌지만, 일본인 감독은 석탄 생산량 목표달성에 급급한 나머지 조선인 강제징용 노무자들을 재촉하며 채굴작업을 강행했다.

 

 

 

 

 

 

 

 

 

 

 

 

장생탄광 수몰 사고는 당시 일본이 태평양전쟁 중이라 언론보도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고의적으로 사고를 감추면서 일본 사회에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은 이전에도 수차례의 탄광 매몰 사고가 발생하여 수백 명이 목숨을 잃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18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을 그냥 묻혀버렸다.

 

 

 

일제강점기 해저탄광에서 목숨을 잃은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장생탄광 수몰 사건의 역사의 실체가 알려진 것은 우베 지역의 일본인 향토사학자가 1976년 장생탄광 수몰 사고 논문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이후 일본 시민단체까지 나서면서 장생탄광 수몰 사고로 숨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를 위한 추모비 건립 운동이 시작됐다.

 

 

 

 

 

 

 

 

 

 

 

 

장생탄광 수몰 사고로 희생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숫자는 일본의 공식적인 발표에 의하면 총 사망자 183명(일본인 47명 조선인 136명)이다.

 

그런데 당시 사고현장에서 살아남은 조선인 생존자와 채굴 작업을 마친 조선인 노무자의 증언에 의하면 평상시에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200여 명 이상이 장생탄광에서 석탄 채굴작업을 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136명이 희생된 장생탄광 수몰 사고는 단순히 높은 수압에 의해 해저탄광 갱도가 무너진 사고가 아니다.

 

지하 25m 내외로 파고들어 간 장생탄광 해저갱도는 지나가는 배의 엔진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인 바닷물과 불과 5m 내외까지 갱도를 확장하고, 해저갱도의 버팀목(동바리)을 부실하게 설치하면서 일어난 인재다.

 

 

 

 

 

 

 

 

 

 

 

 

태평양전쟁에 미쳐 날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전쟁의 소모품으로 사용되다가 1942년 2월 3일 9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바다 위로 솟은 두 개의 환기구에 물이 솟구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갱도가 수몰되면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수장됐다. 

 

일제강점기 장생탄광에 끌려온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해저탄광에서 언제 붕괴할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에 안고 혹독한 노역에 시달리다 비참하게 죽어갔다.

 

 

 

장생탄광은 10여 km의 해저갱도에 공기를 순환시키기 위해 바다 위로 두 개의 환기구를 만들었다.

장생탄광 수몰 사고가 발생한 지 70여 년이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환기구 역할을 하던 바다 위 콘크리트 원통 기둥은 세월의 흔적은 남았지만,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바다 밑 해저탄광에서 일본인의 차별과 모욕, 폭행과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던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아직도 차갑고 어두운 바다 밑에 그대로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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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녁노을* 2017.07.23 05: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타까운 일이지요.ㅜ.ㅜ

    잘 보고갑니다.
    행복한 휴일 되세요

  2. 버블프라이스 2017.07.23 17: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와 장생탄광" 지난 내용에 이어서 일제강점기 때 있었던 제가 알지 못했던 역사에 대해 감사히 공부하고 갑니다^^

  3. 죽풍 2017.07.23 21: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장생탄광 사고는 예고된 사고였군요.
    바닷물과 불과 5m 거리까지 갔으니 사고가 날 수밖에 없네요.
    잘 보고 갑니다. ^^

일제강점기 해저탄광 갱도붕괴로 바다 밑에 수장(水葬)된 

조선인 강제징용(강제노역) 피해자와 장생탄광 - (1)

 

 

 

 

 

 

 

 

 

 

 

 

 

석탄산업은 조선과 철강 등과 함일본의 산업 혁명을 주도했던 근대화의 상징이다.

석탄산업은 일본 제국주의가 군사 대국화와 팽창주의 과정에서 일본 근대화의 기반이 된 산업 중 하나다.

산업근대화를 이룬 일본은 주변국을 침략하는 군사적 목적의 전쟁에 이용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강제징용 피해자는 석탄산업뿐만 아니라 조선과 철강산업을 비롯한 공사장, 벌목장, 군수기지 건설 현장 등 인력이 필요한 거의 모든 분야에 노무자로 강제동원됐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군수물자를 동원한 일본 제국주의는 모든 산업 분야에서 안전보다는 생산량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사고로 목숨을 잃은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도 많다.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고 나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일(渡日)한 조선인도 많았다.

일제강점기 자진 도일한 조선인 역시 강제징용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대도시와 지방에서 군수 산업공장과 탄광 등 최악의 노동 조건 속에서 노역에 시달렸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강제노역한 곳들은 일본인도 기피하는 위험하고 힘든 작업현장뿐이었고, 일본인은 작업을 감독하거나 위험하지 않고 수월한 곳에 배정되어 작업했다.

 

 

일본의 국민 총동원령은 일본과 일제의 식민지였던 조선인을 일본군 강제징집과 학도병, 군속(군무원), 강제징용(강제노역), 일본군 위안부 등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소모품과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해저탄광 장생탄광은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60km 남짓 떨어진 야마구치 현 우베 탄전 지역에 있다.

장생탄광이 위치한 야마구치 현 우베 지역은 50여 개의 탄광이 몰려 있었기 때문에 사고도 자주 발생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강제연행되어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수몰 사고가 난 장생탄광뿐만 아니라 지역을 불문하고 공통적으로 일어났던 일들이 있다.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는 일본인에게 일방적으로 차별과 학대, 폭행을 당했으며, 열악한 생활과 작업환경으로 여러 질병에 시달렸으며, 배고픔과 영양실조, 탈출과 사고사 등이 자주 발생했다.

 

 

 

 

 

 

 

 

 

 

일본 본토뿐만 아니라 중국과 만주, 남태평양과 동남아시아 등지로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 노무자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본인에게 노예보다 못한 차별을 받으며 혹독한 조건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다.

 

 

너무나도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폭행과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던 조선인 강제징용 노무자들이 탈출하다가 걸려 엄청난 폭행을 당하다가 죽어간 사람도 많았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강제징집 피해자들은 일본이 저지른 전쟁에 강제로 끌려가 이역만리 타국에서 쓸쓸하게 죽어갔다.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도코나미 해안에 있는 해저탄광인 장생탄광(조세이탄광)은 일본의 해저탄광 중 하나다.

장생탄광에는 먹고살기 위해 자진하여 도일(渡日)한 조선인 노무자도 있었지만, 대다수 조선인 노무자는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일제강점기 국민 총동원령이 한창 시행되던 1942년 2월 3일 오전 9시경 일본에 의해 강제동원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136명이 해저탄광인 장생탄광이 수몰되면서 어두운 바다 밑 석탄 갱도에 갇혀 생을 마감했다.

 

 

장생탄광 수몰 사고로  자진 도일(渡日) 조선인과 강제징용 조선인 노무자 136명과 일본인 등 18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조선인 희생자는 10대부터 50대까지 연령대로 이 중 20대 희생자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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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블프라이스 2017.07.22 0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피해자와 장생탄광 ' 포스트 잘 읽고 갑니다.
    장생탄광 수몰사고로 우리 조선인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피해가 심했었군요.. 몰랐던 역사에 대해 공부하고 갑니다. 건강한 주말 되세요^^

  2. 청결원 2017.07.22 06: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몰랐던 역사를 알게 되었네요..

  3. 죽풍 2017.07.22 20: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픈 역사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강해야 하고 위정자가 없어야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

일제강점기 일본의 강제징병으로 전쟁터로 내몰린 

조선인 군인과 군무원(군속), 학도병

 

 

 

 

 

 

 

 

 

 

 

 

 

일제강점기 일제가 조선인을 전쟁에 강제동원하여 군인(학도병 포함)과 군속(군무원)으로 끌려간 정확한 통계는 없고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 정부, 및 양국 단체마다 각기 추정하는 숫자에는 차이가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강제동원,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한국인 피해자의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는 것은 현재나 앞으로도 불가능하다.

대한민국과 일본 정부의 무관심, 행위를 부정하고, 기록을 폐기하고, 기록이 사라졌고,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다. 

 

 

 

 

 

 

 

 

 

 

 

 

1930년대는 일제에 의한 한민족 말살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면서,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인적·물적 수탈정책을 펼쳤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주의는 전장을 확대하였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부족한 병력을 충원해야 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지였던 조선인을 강제 징병하기 위해 1937년 12월 조선인 특별지원병제를 공포한다.

 

 

 

 

 

 

 

 

 

 

일제강점기 강제징병은 1938년 초기 지원병 형식을 취했지만, 이미 일본군 내부에서는 강제동원을 결정한 사안이었고, 자발적으로 지원한 사람도 먹고 살기 위해서, 또는 일제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지원한 사람들이다.

 

강압적인 강제연행과 친일파 조선인을 앞세워 회유하면서 조선인은 일본군 군복을 입고 전쟁에 투입되었다.

 

 

 

 

 

 

 

 

 

 

1938년 2월 육군 특별지원병, 1943년 8월 해군 특별지원병제, 1943년 10월 학도지원병제, 1942년 5월 육·해군 강제징병(1944년 4월 시행) 등으로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일본군대로 끌려간 조선인은 약 20여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의 강제징병으로 일본군대에 끌려간 조선인 외에 준병력으로 강제동원된 민간인 군속(군무원)도 많았다.

군속(군무원)으로 강제연행된 사람, 강제노역(징용)으로 끌려갔다 군속이 된 사람 등 조선인 군무원은 약 40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강제징병으로 강제동원 된 조선인 일본군(학도병 포함)과 조선인 군속(군무원) 약 60여만 명 중 약 30%가 사망 또는 행방불명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인 군무원(군속)은 직접 총을 들고 싸우는 전투병력은 아니지만, 민간인이면서 준병력이다.

일본군 아래에서 기본적인 군사훈련 등을 받고 일본이 점령한 곳의 포로수용소 감시원, 군기지 건설 작업, 문관 등으로 근무했다.

 

 

 

일제강점기 강제징병으로 끌려가 일본군이 되고, 일본군 군속(군무원)이 되었지만, 일본과 전쟁을 하는 당사자들에게는 똑같은 일본인으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 일본군대와 일본군 군속(군무원)으로 끌려갔던 조선인 중 일부는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죽음을 맞기도 했다.

 

일본군대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은 일제가 패망하면서 미군의 포로가 되고, 소련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일제강점기 강제징병으로 끌려간 조선인 본군(학도병 포함)과 군속(군무원) 명부를 한국 정부에 전달했다.

1971년, 1991년, 1992년 세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정부에 일제강점기 일본군에 의해 강제징용된 24만여 명의 조선인 군인과 군속(군무원) 명부와 2만여 명의 사망자 명부, 강제노역(강제징용) 명부를 포함하여 약 37만여 명으로 명부를 전달했다.

 

 

일본 정부가 전달한 약 37만여 명의 명부 외에 태평양 전쟁 말기였던 1945년 초부터 8월까지 일본에 의해 강제징병 된 조선인 군인과 군속(군무원) 명부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없어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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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죽풍 2017.06.11 00: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제강점기때 징집된 조선인이 60만이나 되는군요.
    잘 보고 갑니다. ^^

  2. 버블프라이스 2017.06.11 02: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제강점기 학도병 관련해서는 "포화 속으로"이란 영화를 본적이 있는데요, 제가 모르는 내용이 정말 많이 있네요. 공부하고 갑니다^^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만행

강제노역(강제징용)에 동원한 조선인 집단학살 사건

 

 

 

 

 

 

 

 

 

 

 

 

 

 

일제강점기 조선인은 일본인으로부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일본의 강제노역(강제징용)에 끌려간 조선인은 가혹한 노동과 굶주림에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한 맺힌 절규를 남기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죽어갔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강제노역(징용)에 끌려간 숫자는 대한민국 정부와 단체마다 차이가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1910년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강제병합하기 이전부터 우리 민족은 일본에 의해 강제이주와 강제징집 및 강제동원을 당했다. 1876년 불평등 강화도조약 이후 1945년까지 약 800만 명의 우리 동포가 일본에 의해 목숨을 잃었으며, 약 5백만 명의 동포가 조국을 떠났다.

 

 

 

 

 

 

 

 

 

 

 

 

 

 

일제강점기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일본인과 조선인을 비롯하여 점령지 사람들을 전쟁 수행을 위하여 강제노역(징용)에 이용하였다.

 

 

 

조선인이 강제노역(징용)에 동원된 지역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할린, 만주, 중국 본토 및 하이난(해남도)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와 사이판, 마셜제도, 팔라우, 필리핀, 파푸아뉴기니 등 남·서태평양 인근 지역과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모든 지역으로 약 4천여 곳이나 된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와 점령지에 사는 사람은 국적과 상관없이 일본에 의해 강제노역에 동원됐고, 당시 조선인 외에도 중국(만주)과 동남아시아, 남서 태평양 일대에 살던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고 목숨을 잃었다.

 

 

 

 

 

 

 

 

 

 

 

 

강제노역(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은 군기지 건설, 군수공장, 탄광, 광산, 항만, 제철소, 조선소, 토목건축현장, 벌목장, 농장 등지에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국가총동원법이 시행되고 국민징용령, 징병제, 여성정신근로령, 학도근로령 등의 법령이 공포되고, 약 800만 명이 군인, 학도병, 군무원, 노동자, 위안부(성노예) 등으로 한반도와 해외 일본군 점령지 등지로 강제동원 당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국가총동원법 아래 강제노역(징용)에 끌려가 수많은 우리 동포가 일제에 의해 집단 학살당하였다.

 

이미 알려진 집단학살 숫자보다 최악의 상황에서 학대받으며 제대로 먹지 못해 굶어 죽고, 치료를 못 받아 병들어 죽고, 사고로 죽고, 맞아 죽는 등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희생된 숫자가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일부 밝혀진 집단학살 외에 사망한 피해자 집계 자체가 불가능한 실정이다.

 

 

 

 

 

 

 

 

 

 

 

 

에무지섬에서 2천 5백여 명을 집단학살한 사건

 

미시마(쿠릴) 열도 5천여 명을 집단학살한 사건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 때 1,700여 명을 집단학살한 사건

 

일제 패망 후 부산 어뢰를 만드는 군수공장 지하에서 1천여 명 집단학살 사건

 

서태평양 팔라우제도강제노역(징용) 조선인 4천 5백여 명 중 2천여 명이 집단 학살당한 사건

 

남태평양 마셜군도 강제노역(강제징용)에 동원된 조선인 4백여 명 및 원주민 2백여 명 집단학살 사건

 

 

 

 

 

 

 

 

 

 

 

 

1945년 8월 24일 약 4천 명의 강제노역(강제징용) 조선인이 승선한 우키시마호가 도쿄 앞바다에서 폭침으로 인해 약 3천 5백여 명 집단 학살당한 사건 

 

 

4, 5세 어린아이부터 여성과 노인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조선인을 일본인이 무참하게 살해한 이른바 가미시스카 학살과 미즈호 학살의 사할린 집단학살 사건

 

 

일본이 패망하고 나서 중국 하이난(해남도) 섬 강제노역(강제징용)에 끌려간 2천여 명 중 1천 명은 강제노역 도중에 사망하고 1천 명을 칼과 곡괭이 등으로 무참하게 집단학살한 천인갱(千人坑) 사건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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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블프라이스 2017.06.06 03: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모르는 사건들도 많이있네요. 다시한번 정말 잊지 말아야하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조선인 강제징용 집단학살 사건'역사 공부 잘하고 갑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도생님

  2. 죽풍 2017.06.06 21: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은 그 당시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를 알까요?
    그때 몰랐다면 지금은 알까요?
    일본에 대해 다시 알아야 할 우리입니다.

1919년 3·1만세 운동 이후 일제강점기 최대 학생 항일운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 후 억압과 핍박, 착취와 차별, 수탈 등을 일삼으며 식민통치를 이어가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하는 친일파를 비롯하여 조선의 모든 백성은 일제가 탐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1926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황제의 장례식, 인산일(因山日) 서울에서는 대규모의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학생(現 고등학생)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나 7천여 명의 일본군과 경찰의 대대적인 진압과 체포로 전국적으로 퍼지지는 못했다. 6·10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지는 못했지만, 비밀결사와 동맹휴학 등의 학생 항일운동의 성과는 만들었다.

 

 

 

 

일제 식민통치 방식이 1910년대에는 무단통치시대였으며, 1920년대는 소위 문화통치시대였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시대와 명칭만 바뀌었을 뿐 일제의 우리 민족 탄압과 차별은 계속되고 있었다.

 

 

1926년 11월 광주 지역 여러 고등학교에 조선의 독립을 위한 학생 항일운동 조직 성진회가 조직되었다.

성진회 소속의 학생들은 1927년 2월 광주사범학교, 5월 광주 고등보통학교에서 일본학생과 차별에 항의하여 시위와 동맹휴교운동을 벌였다.

 

 

 

 

 

 

 

 

 

 

 

 

1928년 4월 전라도 광주 인근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 이경채가 조선독립선언문을 만들어 돌리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지자 광주고등보통학교의 비밀결사조직 성진회 소속 학생들을 중심으로 휴교운동을 벌인다.

 

1929년 3월 광주고등보통학교 조선인 학생 퇴학당하고, 6월 일본 학생이 조선 학생을 비하하면서 충돌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1929년 10월 30일 일제강점기 최대 학생 항일운동인 광주학생운동이 촉발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3·1만세 운동 이후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한 최대의 항일학생운동 광주학생운동은 차별과 무시에서 비롯됐다.

 

광주에서 출발하여 나주역에 도착한 열차 안에서 일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이 머리를 잡고 모욕을 주면서 희롱하였다. 이때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박기옥의 4촌 동생 박준채도 같이 하교하는 중이었다.

 

 

일본 학생들이 4촌 누나를 멸시하고 희롱하는 모습을 본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본 광주중학교 학생들 간에 충돌이 발생했고, 출동한 일본 경찰은 일본 학생 편을 든다.

 

 

 

 

 

 

 

 

 

 

 

 

 

 

11월 1일 광주역에서 한·일 학생 간에 소규모 충돌이 발생하자 학교 교사들이 말리면서 양측의 충돌이 더는 커지지 않았다.

11월 3일 조선인 학생들은 명치(메이지)유신을 기념하는 명치절 행사에 기미가요를 따라 부르지 않았다.

 

 

신사참배를 다녀오던 일본 중학교들과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간에 폭력사태가 벌어지면서 일본인과 경찰도 폭력사태에 개입하게 되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가운데 조선인 학생 수십 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해산한다. 

 

 

한·일 학생 간의 충돌은 처음에는 우발적인 사건으로 시작됐으나, 일제의 식민통치 20년 동안 우리 민족을 무시하고 억압과 차별, 수탈과 착취를 당했던 울분이 폭발하면서 전국적인 학생 중심의 항일투쟁으로 확산한다.

 

 

 

 

 

 

 

 

 

 

11월 12일 광주 지역의 여러 고등학교 학생들과 신간회 등 항일투쟁을 하던 여러 단체가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면서 외지에서 참가한 사람까지 합세하여 대규모 2차 거리 시위를 벌였다.

 

 

광주학생운동은 일제강점기 최대 학생 항일운동으로 1차 시위 때와 달리 2차 시위 때는 1천 명이 넘는 광주 지역 중고등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일제 타도와 민족 해방 등의 구호를 외치고 격문을 뿌리는 과정에서 수백 명이 일경에 체포되지만,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광주지역 학생들은 다음 해까지 항일투쟁을 계속한다.

 

 

 

 

 

 

 

 

 

 

 

 

여러 단체와 일반인의 적극적인 지지와 호응과 참여가 뒷받침된 광주학생운동은 3·1 만세운동 이후 일제강점기 최대 학생 항일운동이 되어 국내는 물론 국외까지 퍼진다.

 

 

 

1930년 3월까지 전국의 300곳이 넘는 학교가 동맹휴교에 동참하였고, 수만 명에 이르는 학생이 항일 시위에 참여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은 일제강점기 최대 학생 항일운동이며 3·1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투쟁으로 2천여 명의 학생이 정학, 5백여 명의 학생이 퇴학 조치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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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7.04.30 07: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가네요 주말 잘 보내세요

  2. 뉴론7 2017.04.30 07: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은 언제나 제국주의가 남아 있어서 어렵긴 하네요.

  3. 버블프라이스 2017.05.01 01: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부하고 갑니다.
    또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길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며 민족사학의 선구자 -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제강점기였던 1928년 5월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8년간의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 2월, 겨울의 찬 바람이 아직 가시지 않은 날, 이국땅 만주 여순감옥에서 나라를 빼앗긴 한(恨) 많은 백성으로 굴곡진 우리 근대사의 선구자, 단재 신채호 선생이 영면하게 된다. 당신님의 유언은 너무나 간단했다.

"내가 죽거든 내 시체가 왜놈들의 발길에 차이지 않게 화장하여 그 재를 멀리 바닷물에 뿌려 주오."

 

일제의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된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은 대구 감옥에서 투옥 중 단재 신채호 선생의 소식을 듣고 "단재가 죽었으니 이제 이 나라의 정기(正氣)가 사라졌구나."하고 탄식하였다.

 

 

 

 

 

 

단재 신채호는 일제강점기 백암 박은식 선생과 더불어 민족 사학을 이끈 쌍두마차였다.

위대한 역사가는 단재는 일제에 의해서 뿌리째 단절된 한민족의 역사 정신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한평생을 다 받쳤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보면

"역사란 무엇이뇨. 그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발전 확대하는 상태를 말한다. 만일 역사가 조선사라면 우리 민족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발전 확대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我)는 우리나라와 민족으로 이해하고,

비아(非我)는 우리나라 또는 우리 민족과 대립하는 다른 나라와 다른 민족으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해석됐다.

 

 

그러나 단재 신채호 선생은 다른 부분에서 아(我)는 대아(大我)와 소아(小我)로 구분하였다.

즉, 대아(大我)는 정신적, 영혼적 아(我)라는 것이고,

소아(小我)는 물질적, 육체적 아(我)가 있다고 하였다.

그렇듯 물질적, 육체적 아(我)인 소아(小我)는 사라지고 죽지만, 정신적, 영혼적 아(我)인 대아(大我)는 불사(不死)한다는 것이다.

 

 

 

 

 

 

결국 아(我)는 대아(大我)다. 대아(大我)는 민족의 혼이요, 국혼(國魂)이다. 혼(魂)은 자유자재한 것이며 영원불멸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 죽지 않는다. 우리 민족이 그 국혼(대아)을 오랫동안 잊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우리 민족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것는 우리가 그동안 아(我)에서도 소아(小我)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결국 정신이 없는 민족, 혼 빠진 민족으로 국권을 빼앗긴 나라 없는 백성으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불멸하는 아직도 우리의 마음 저 밑바닥에서 꿈틀대고 살아 움직이는 대아(大我), 민족의 정신과 민족의 혼(魂)을 일깨워 비아(非我)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비록 나라는 빼앗겼지만, 아직 살아 있는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서 단재 신채호 선생과 백암 박은식 선생이 민족사학을 들고 나온 것이다. 일본의 왕을 신격화하여 만든 신도(神道)와 불교, 기독교(천주교)만 종교로 인정한 일본 제국주의의 한민족 민족정신 개조정책인 동화정책을 이겨낼 의 원천이 바로 대아(大我)인 민족의 정신, 민족혼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석가나 공자, 예수, 그리고 일본의 정신(일본 국교 신도)은 대아(大我)가 아니며, 아(我)에 침입하여 들어온 비아(非我)였다는 것을 『조선상고사』에서 한민족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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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쿠나 2015.02.06 06: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채호선생에 대해서 정리 잘 해주셔서
    알아보시는 분들에게 유용하겠어요 ^^
    저도 잘 보고 가요 ^^

  2. 뉴론♥ 2015.02.06 07: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분들이 없었으면 지금도 없었게지욤 잘 기억해야 겠네염.

  3. 한콩이 2015.02.06 07: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채호 선생님에 대해 잘 알아갑니다~ 즐거운 하루되세요^^

  4. 죽풍 2015.02.06 0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뉴론의 말씀처럼 이런 분이 지금의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주었으면,,,
    정말 이 시대를 살아가기 어렵고 힘듭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님에서 위안을 얻고 갑니다.
    오늘도 행복하소서. ^^

  5. 명태랑 짜오기 2015.02.06 10: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민족 정신과 민족 혼을 강조 했던 신채호 선생님 덕분에 오늘 우리들이 있는것 같네요^^

  6. 낮에도별 2015.02.06 14: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님에 대해 잘 알아갑니다 ^^

  7. 라콤 2015.02.06 16: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재 신채호 선생에 대해서 덕분에 잘 알아갑니다.
    항상 행복한 날들이 되시길 바래요

  8. 세상속에서 2015.02.06 16: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재 신채호 선생에 대해서 많이 알아가요^^

  9. 꿈다람쥐 2015.02.06 19: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채 신채호 선생 절대로 잊으면 안되는 위인이십니다.

  10. 유라준 2015.02.06 21: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아'가 없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죠.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한국사는 죽었다."

역사비평가 이주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이 신간 '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역사의아침)에서 한국사에 '사망선고'를 내렸다.

 

이 책에서 그는 작정한 듯 주류 역사학계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조선사편수회가 창안한 식민사관이 지금도 주류 역사학계를 통해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 연구위원은 한국 사학계의 태두로 불리는 고(故) 이병도 선생 등 주류 역사학자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하는 것은 물론 국사편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 등 국가기관들도 앞장서서 식민사관을 확대 재생산 해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주류 역사학계 전체를 비판한 것은 아니며 주류 역사학계에도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하는 분들이 굉장히 많다"면서 "문제는 식민사관"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병도 박사 등 주류 역사학계를 비판하는 것은 하나의 금기가 됐고 학계에 있는 분들은 날카롭게 문제를 제기하기 힘든 상황"이라면서 "주류 역사학자들이 쓴 텍스트 등 근거를 갖고 문제를 제기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역사관은 총체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을 함축하고 개인, 사회, 국가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을 담아내고 있어 단순히 역사학계만의 문제가 아니다"면서 "식민사관이 죽어야 희망이 있다"고 역설했다.

(연합뉴스 인터뷰 일부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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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의한 역사왜곡은 일제강점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계연수 선생의 환단고기 편찬

 

『환단고기』는 1864년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난 운초 계연수(1864~1920)가, 지인들로부터 구한 한민족의 정통 사서들을 한 권으로 엮은 책이다.

 

안함로의 『삼성기』는 그의 집안에 전해 내려오던 것이고, 원동중의 『삼성기』는 인근의 태천에 살던 백관묵에게서 구하였다. 『단군세기』또한 백관묵의 소장본이고, 『북부여기』는 삭주 사람 이형식의 소장본이었다.『태백일사』는 그의 스승이자 항일운동 동지인 해학 이기의 집안에서 전해 오던 것이었다.

 

계연수는 원래 우리 옛 역사와 민족혼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여러 양반가와 사찰을 돌아다니며 비장 서책과 금석문, 암각문 등 옛 사료를 많이 수집하였다. 약초를 캐어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뿐 오로지 역사 밝히기에 골몰하다가 1897년 이기의 문하에 들어간 이후 여러 권의 역사서를 발간하였다.

 

이기는 정약용의 학통을 계승한 실학자로서 당대의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또한 『단군세기』를 쓴 이암과 『태백일사』를 쓴 이맥의 직계 후손으로 우리의 고대사에도 해박하였다. 이기의 지도 아래 계연수가 발간한 역사서의 결정판이 바로 『환단고기』이다.

 

1911년 계연수는, 그의 벗이자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와 오동진 두 사람의 자금 지원으로 만주 관전현에서 『환단고기』30부를 간행하였다. 이로써, 9천 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외세에 나라를 완전히 빼앗긴 동방 한민족이 절망과 통탄의 벼랑 끝에 서 있던 그때, 민족의 국통 맥을 천지에 선포하는 위대한 사서가 출간된 것이다.

 

 

계연수 선생의 죽음을 지켜본 이유립 선생

 

운초는 항일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천마산대, 서로군정서 등의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57세 때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런데 당시 압록강에 처참하게 버려진 그의 시신이 수습되는 광경을 지켜본 한 소년이 있었다. 그가 바로 훗날 『환단고기』를 널리 대중화시킨 이유립(1907~1986)이다.

 

 

일본인의 환단고기 왜곡

환단고기』가 일본어로 번역·출판되는 의외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광오이해사본을 입수하여 검토한 일본인 변호사 가지마 노보루鹿島昇가 『환단고기』를 일본 천황가의 뿌리를 밝혀 줄 수 있는 책이라 여긴 것이 발단이었다. 가지마는 ‘『환단고기』는 아시아의 지보至寶’라 극찬하고 자국의 정계와 재계의 후원을 끌어내어 1982년 ‘실크로드 흥망사’라는 부제를 붙인 일본어판 『환단고기』를 출간하였다.

 

하지만 이 일본어판은 환국 → 배달 → 고조선 → 고구려 → 대진국(발해) → 고려로 이어지는 우리 역사를 배달 → 야마토일본 → 나라일본 → 헤이안시대로 이어지는 일본 역사로 둔갑시켜 놓았다.

동방 한민족의 역사가 중동 유대족의 역사에서 발원하였다는 황당한 주장도 하였다.

(상생출판 환단고기 완역본 中)

 

 

증산도 열어나가는 상생 후천개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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