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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린 조선인 강제징용과 이중징용 피해자

아직도 무국적자로 살아가는 사할린 고려인 강제징용 피해자와 후손

 

 

 

 

 

 

 

 

 

 

 

 

 

일본 열도의 최북단에 있는 섬, 홋카이도(북해도)와 마주한 러시아 사할린은 한때 러시아와 일본이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던 섬이다. 월타족과 니브흐족(퉁구스계), 홋카이도의 원주민 아이누 등이 거주하던 사할린은 몽골(원나라)과 명나라, 청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19세기 들어서면서 러시아가 정착민을 보내 실효적 지배를 했다. 

 

 

사할린은 19세기 중반 러시아와 일본이 남북으로 분할하여 지배하였고, 일본이 러시아에 사할린을 넘겨주고 쿠릴 열도 남쪽의 4개 섬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사할린 섬의 남쪽 절반을 러시아로부터 양도받았고,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우리 민족은 생존을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이주를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강제동원 때문에 사할린으로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카레이스키, 즉 고려인이라고 불렀다.

사할린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숫자는 단체에 따라 차이가 크다.

 

 

일본의 강제 동원에 의해 사할린으로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는 최소 5만여 명에서 최대 15만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일본 패망 후 사할린에 남은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의 숫자는 4만여 명으로 대동소이하다.

 

 

 

사할린의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가 일제강점기 다른 지역의 강제징용 피해자들과 다른 점은 이중징용 피해자가 있다는 것이다.

일본이 침략 전쟁의 전선을 확대하면서 군수물자와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일본 본토 중심으로 인력을 재배치한다.

사할린 지역 탄광의 석탄 채굴량을 줄이거나 중단하고, 후쿠시마, 나가사키(군함도 등), 이바라키 등지로 이중징용을 보낸다.

 

 

 

 

 

 

 

 

 

 

 

 

동토의 땅 사할린에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탄광과 벌목장, 군사시설, 토목 현장 등지에서 강제노역했다.

사할린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차별과 폭행, 배고픔과 12시간 이상의 중노동, 질병 등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은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도 부지기수다.

 

 

 

사할린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사할린에 끌려와 강제노역에 시달렸고, 이후 일본 열도 및 그 외의 다른 곳으로 재배치된 이중징용 피해자가 많았다. 사할린의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중에는 힘든 노역에도 삶의 희망을 주는 가족과 함께 거주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이 이중징용(일본은 전환배치라고 표현)을 시행하면서 다른 지역으로 배치된 조선인(고려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가족과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사할린에 남아 있던 약 4만 3천여 명의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는 이중징용 피해자에서 제외된 숫자다. 

 

 

 

 

 

 

 

 

 

 

 

 

소련이 사할린 거주 우리 민족과 함께 고려인이라고 부른 소련 내의 다른 지역에 살던 우리 민족이 있었다.

바로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 지역 등지에 있던 조선인(고려인)으로 이들은 소련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었다.

 

고려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대한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부모 형제와 생이별하고 머나먼 타국 땅에서 목숨을 바쳤던 독립군과 일본의 핍박을 피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으러 조국을 떠났던 사람의 후손들이다.

 

 

대한민국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는지 아니면 잊힌 존재인지 모르겠지만, 사할린 조선인(고려인) 강제징용 피해자와 후손, 그리고 연해주 등지에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로 이주당한 조선인(고려인) 후손들 대다수가 아직도 대한민국 국적이 없는 무국적자라는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약 5만에서 15만여 명의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가 사할린 강제노역에 동원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는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자 자국민 약 40여만 명을 철수시켰고, 사할린에 강제동원한 조선인 강제징용 생존자들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할린에 버려두고 철수해 버렸다.

 

 

이후 일본은 일본인 여성과 결혼한 일부 한국인 남성만 일본으로 귀환시켰다. 일제는 패망 직후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인(고려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소련의 스파이로 몰아 집단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미국과 소련은 1946년 11월 27일 사할린 지역 억류자 귀환 대상자 협정을 체결했는데, 미국과 소련은 일본인에 대한 귀환만 허용했다.

 

살을 에는듯한 강추위와 치가 떨리는 노역에 시달리다 이제는 사할린을 떠나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일본의 강제노역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소련으로부터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사할린을 점령한 소련(러시아)은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국적을 주지 않았으며, 그로인해 사할린에 남게 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후손들 역시 러시아 국적을 받지 못해 무국적자가 되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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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블프라이스 2017.07.30 03: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제와 이어지는 내용이군요?
    오늘은"일본의 사할린 조선인 강제징용과 이중징용 피해자" 관련해서 역사공부를 하고 갑니다^^
    기분좋은 주말 되세요

  2. 청결원 2017.07.30 07: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르고 있던 역사 공부 잘 하고 갑니다

  3. koreanuri@hanmail.net 2017.11.04 21: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사할린..
    참으로 우리 겨레와는 연원이 많은 땅입니다.
    먼 옛날 대진국(발해)시대.. 그 보다 이전은 두고라도 대진국시대에 사할린은 발해의 영역이었습니다.

    여기서 영역이라함은 쿠릴타이 회의를 하는 종족이기 때문입니다. 땅을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공유의 개념의로 보는 것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이 땅을 팔라고 하자 무슨 말인지 모르고 그토록 쉽고 땅을 빼앗기고 죽음을 당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땅은 여러 겨레와 나라가 필요에 따라 함께 이용하는 영역으로 공유하였다는 것입니다.

    대진국은 왜국과 교류를 위해 동해를 통해 사신을 파견하였습니다. 왜는 18세기 까지만 하더라도 북해도(홋카이도) 마저도 점유하지 못한 상태였으니 강국 대진국이 사할린을 영역으로 두었을 것임은 물론입니다.

    원주민이 몽골에 이어 청나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더라도 사할린이 결코 왜倭나 러시아의 땅일 수 없음은 명백합니다.

    더 연구할 과제이긴 하지만 러와 왜가 사할린은 남북으로 분할지배하는 회담에서 러시아가 왜국 대표에게 왜 조선땅을 가지고 너희 땅이라고 하느냐고 발언한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또 일설에는 사할린이란 말이 사슴의 섬이란 말이고, 이순신 장군이 복무하던 녹둔도鹿屯島가 바로 사할린이다. 두만강 가운데 작은 섬에서 무슨 여진족과 이순신 장군이 전쟁을 하였겠는가? 합니다. 鹿屯島란 말이 사슴의 섬이란 뜻이니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이고 이런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상당한 자료가 있다는 주장을 몇 년 전에 보았습니다.

    카레이스키
    러시아 사람들은 대한사람을 카레이스키 혹은 고링스키라고 합니다.
    여기서 카레이란 바따르케레이의 케레이(=겨레)에서 온 말로 범알타이권역의 케레이들이 우리와 연원이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 러시아와 왜가 북방4개의 도서(쿠릴열도의 섬) 반환을 다투고 있지만 사할린에 대해선 별 다툼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역사적 연원으로 보아 연해주(블라디보스톡)을 북경조약으로 청나라로 부터 넘겨 받는 과정에서 러시아가 차지한 사할린도 간도, 연해주와 함께 우리가 되찾아야 할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카이레스키 우리 겨레들..
    우린 지금 인구가 줄어든다면서 왜 우리 겨레 우리 동포들을 받아 들이지 못하는지? 어서 우리 국력이 좀 더 나아져야 하겠습니다. 현재로선 국력이 나아진다는 것은..
    1. 국민소득 4만불 달성
    2, 자주국방 확립
    이 두가지라 하겠습니다. 국력이 나아져서 사할린의 모든 겨레에게 대한의 국적을 주고 (대한으로의) 거주 이전의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내가 구상하고 있는 대배달연합 1단계에는 사할린이 함께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밝 누 리.
    [밝은 우리의 온 삶터]
    .

일제강점기 일본의 최북단 섬 홋카이도(북해도北海島) 탄광과 군사시설 건설현장 등에서

강제노역동원된 조선인 강제징용 해자

 

 

 

 

 

 

 

 

 

 

 

 

 

북해도(홋카이도)는 본래 아이누가 살던 섬으로 일본의 영토가 아니었다.

홋카이도는 1868년 메이지유신 때 만들어진 일본 제국 헌법에서도 북해도(홋카이도)는 일본 영토에 포함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 제국 헌법에는 조선(대한민국)의 독도, 유구 열도(오키나와 유구왕국), 사할린, 쿠릴열도(북방 4도) 역시 일본 영토에 포함되지 않았다.

 

 

 

대부분 교과서와 학자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북해도(홋카이도)를 개척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본의 북해도(홋카이도) 개척 역사는 왜곡된 것으로 일본 측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다.

자국의 영토가 아닌 곳을 힘으로 개척한다는 것은 식민지화를 했다는 것으로 점령이며, 침략이 올바른 표현이다.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북해도)는 대한민국(남한)5분의 4에 육박하는 면적을 가진 섬이다.

천연자원이 풍부한 홋카이도는 특히 석탄이 많이 매장된 곳이다.

 

홋카이도(북해도) 지역의 석탄 매장량은 일본 전체  매장량의반을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매장량을 자랑하는 곳이었.

홋카이도(북해도) 탄광은 19세기 후반부터 채굴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일본인 남녀가 모두 채굴작업을 하였고, 기계가 아닌 사람이 직접 채굴하고 운반까지 하다 보니 생산량이 많지 않았다.

육상탄광이나 해저탄광에서의 채굴작업은 갱도붕괴의 위험성, 산소 부족과 석탄가루를 그대로 마시는 등 열악한 노동환경도 문제가 컸다. 그리고 석탄 갱도의 특성상 높은 온도 때문에 채굴작업을 하는 남녀 모두 아랫 속옷만 걸친 채 작업을 해야만 했다.

 

 

 

 

 

 

 

 

 

 

 

 

일본 최북단의 섬 북해도(홋카이도)에 석탄 매장량이 많았기 때문에 석탄을 채굴하는 탄광 역시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석탄 채굴에 필요한 인력을 충원하고, 남하하는 소련군으로부터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홋카이도(북해도)에 비행장과 군사시설을 만드는데 조선인 강제징용자를 대거 동원했다.

 

 

혹독한 노동환경 속에서 혹한의 추위와 배고픔, 질병의 위험 앞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머나먼 타국 땅에서 고향의 부모 형제를 애타게 그리다 가슴 속에 한을 머금고 죽어갔다.  

 

 

 

 

 

 

 

 

 

 

 

 

일제강점기 홋카이도에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만 약 15만 명에 달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홋카이도(북해도)는 일본의 여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가 많이 끌려간 곳이지만,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자진 도일(渡日)하여 탄광에서 일한 조선인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백성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이 할 수 있는 직업위험하고, 힘들고, 지저분한 일에 한정되어 있었다.

먹고 살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조선인 탄광 노무자는 일본인과 인권, 임금, 근로조건 등에서 차별을 받으며 일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 홋카이도(북해도)에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탄광에서 가장 많이 일했으며, 군수공장과 항만, 비행장, 도로, 댐 건설 등 군사기지 건설 현장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홋카이도(북해도) 전역의 2백 개가 넘는 곳에서 12시간이 넘는 혹독한 노동과 폭언과 폭행,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했다.

 

 

 

홋카이도(북해도)의 가와기타 해군비행장을 건설하는 공사장에서는 10세 안팎의 조선인 어린이까지 일본인의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강제노역에 동원됐다는 증언이 나왔고, 조선인 어린이 강제징용 피해자가 나타나면서 사실로 확인까지 됐다.

 

 

 

 

 

 

 

 

 

 

 

 

 

일제강점기 홋카이도(북해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중 탄광 붕괴와 사고, 일본에 의해 사망한 숫자는 현재까지 파악된 숫자만 2천여 명이 넘는다. 홋카이도(북해도)에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사망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숫자는 일본군과 일본 기업 사망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고 매장되거나 화장된 조선인 강제징용 사망자 숫자까지 포함한다면 그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실제 일본과 한국의 단체가 홋카이도(북해도) 지역에서 사망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숫자와 사망자 유골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무명 또는 무연고자 사망자 숫자가 적지 않았다고 했다.

 

일본은 전쟁에서 패망한 후 홋카이도 지역에 묻혀있던 다른 지역 출신 일본인 사망자 유해는 모두 이장했기 때문에 집단으로 발견된 유골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은 홋카이도(북해도) 지역에서 사망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를 화장하거나 아무 데나 묻어버렸다.

1997년부터 대한민국과 일본의 시민단체가 일제강점기 홋카이도(북해도)에 끌려가 사망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유골 발굴을 시작했다.

 

머나먼 이국땅에 비참한 삶을 살다 억울하게 불귀의 객이 돼버린 조선인 강제징용 사망자 숫자는 현재로서 파악 자체가 불가능한 실정이다.

 

 

지난 2015년 일제강점기 홋카이도(북해도) 지역에 끌려가 사망한 조선인 강제징용 사망자 115명의 유골이 70년 만에 죽어서나마 꿈에도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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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블프라이스 2017.07.29 02: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흑백이지만 갱도의 특성상 높은 온도 떄문에 속옷만 입고 남녀가 작업을 하는 모습만 봐도 얼마나 환경이 안좋았는지 알 수 있는 사진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일제강점기 홋카이도(북해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관련해서 역사공부를 하고 갑니다.
    편안한 주말 되시길 바래요 도생님.

일제강점기 해저탄광 갱도붕괴로 바다 밑에 수장(水葬)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와 장생탄광(長生炭鑛) - (2)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 노무자가 석탄 채굴작업을 한 장생탄광은 해저탄광으로 당시 여느 탄광처럼 비좁고 두웠으며, 높은 습도와 고온의 열기 속에 속옷(훈도시)만 걸친 채 석탄 채굴 작업을 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작업 현장은 지역을 불문하고 생지옥이었다.

 

 

 

장생탄광에서 일한 대부분의 조선인 노무자는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사람들이었고,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왔다 장생탄광에서 일한 조선인도 일부 있었다. 일본인과 조선인 등 1천 명 남짓 일하던 장생탄광에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높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숙소에서 너덧 평 되는 방 한 칸에 근 20명씩 합숙시켰다.

 

조선인 노무자 숙소는 일본의 철저한 감시와 통제를 받았고 탈출도 힘들었지만, 도망가다 붙잡히면 죽지 않을 정도로 폭행을 당했고 하루 12시간 이상의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다.

 

 

 

 

 

 

 

 

 

 

 

 

육상탄광과 해저탄광은 언제든지 붕괴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작업을 해야 하는 곳이다.

장생탄광은 해저탄광으로 수압 때문에 갱도가 붕괴할 수 있는 또 다른 위험을 안고 채굴작업을 해야 했다.

 

장생탄광은 길이가 10여 km 되는 긴 갱도가 바다 밑으로 뚫려있었다.

183명의 바다 밑에 수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생탄광 수몰 사고에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2명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장생탄광은 붕괴하기 몇 달 전부터 바닷물이 유입됐고, 며칠 전부터는 바닷물 유입이 급격히 늘어났다고 한다. 장생탄광에 다량의 바닷물이 유입되면서 붕괴 위험이 커졌지만, 일본인 감독은 석탄 생산량 목표달성에 급급한 나머지 조선인 강제징용 노무자들을 재촉하며 채굴작업을 강행했다.

 

 

 

 

 

 

 

 

 

 

 

 

장생탄광 수몰 사고는 당시 일본이 태평양전쟁 중이라 언론보도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고의적으로 사고를 감추면서 일본 사회에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은 이전에도 수차례의 탄광 매몰 사고가 발생하여 수백 명이 목숨을 잃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18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을 그냥 묻혀버렸다.

 

 

 

일제강점기 해저탄광에서 목숨을 잃은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장생탄광 수몰 사건의 역사의 실체가 알려진 것은 우베 지역의 일본인 향토사학자가 1976년 장생탄광 수몰 사고 논문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이후 일본 시민단체까지 나서면서 장생탄광 수몰 사고로 숨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를 위한 추모비 건립 운동이 시작됐다.

 

 

 

 

 

 

 

 

 

 

 

 

장생탄광 수몰 사고로 희생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숫자는 일본의 공식적인 발표에 의하면 총 사망자 183명(일본인 47명 조선인 136명)이다.

 

그런데 당시 사고현장에서 살아남은 조선인 생존자와 채굴 작업을 마친 조선인 노무자의 증언에 의하면 평상시에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200여 명 이상이 장생탄광에서 석탄 채굴작업을 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136명이 희생된 장생탄광 수몰 사고는 단순히 높은 수압에 의해 해저탄광 갱도가 무너진 사고가 아니다.

 

지하 25m 내외로 파고들어 간 장생탄광 해저갱도는 지나가는 배의 엔진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인 바닷물과 불과 5m 내외까지 갱도를 확장하고, 해저갱도의 버팀목(동바리)을 부실하게 설치하면서 일어난 인재다.

 

 

 

 

 

 

 

 

 

 

 

 

태평양전쟁에 미쳐 날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전쟁의 소모품으로 사용되다가 1942년 2월 3일 9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바다 위로 솟은 두 개의 환기구에 물이 솟구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갱도가 수몰되면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수장됐다. 

 

일제강점기 장생탄광에 끌려온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해저탄광에서 언제 붕괴할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에 안고 혹독한 노역에 시달리다 비참하게 죽어갔다.

 

 

 

장생탄광은 10여 km의 해저갱도에 공기를 순환시키기 위해 바다 위로 두 개의 환기구를 만들었다.

장생탄광 수몰 사고가 발생한 지 70여 년이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환기구 역할을 하던 바다 위 콘크리트 원통 기둥은 세월의 흔적은 남았지만,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바다 밑 해저탄광에서 일본인의 차별과 모욕, 폭행과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던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아직도 차갑고 어두운 바다 밑에 그대로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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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녁노을* 2017.07.23 05: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타까운 일이지요.ㅜ.ㅜ

    잘 보고갑니다.
    행복한 휴일 되세요

  2. 버블프라이스 2017.07.23 17: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와 장생탄광" 지난 내용에 이어서 일제강점기 때 있었던 제가 알지 못했던 역사에 대해 감사히 공부하고 갑니다^^

  3. 죽풍 2017.07.23 21: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장생탄광 사고는 예고된 사고였군요.
    바닷물과 불과 5m 거리까지 갔으니 사고가 날 수밖에 없네요.
    잘 보고 갑니다. ^^

일제강점기 해저탄광 갱도붕괴로 바다 밑에 수장(水葬)된 

조선인 강제징용(강제노역) 피해자와 장생탄광 - (1)

 

 

 

 

 

 

 

 

 

 

 

 

 

석탄산업은 조선과 철강 등과 함일본의 산업 혁명을 주도했던 근대화의 상징이다.

석탄산업은 일본 제국주의가 군사 대국화와 팽창주의 과정에서 일본 근대화의 기반이 된 산업 중 하나다.

산업근대화를 이룬 일본은 주변국을 침략하는 군사적 목적의 전쟁에 이용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강제징용 피해자는 석탄산업뿐만 아니라 조선과 철강산업을 비롯한 공사장, 벌목장, 군수기지 건설 현장 등 인력이 필요한 거의 모든 분야에 노무자로 강제동원됐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군수물자를 동원한 일본 제국주의는 모든 산업 분야에서 안전보다는 생산량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사고로 목숨을 잃은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도 많다.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고 나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일(渡日)한 조선인도 많았다.

일제강점기 자진 도일한 조선인 역시 강제징용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일본 대도시와 지방에서 군수 산업공장과 탄광 등 최악의 노동 조건 속에서 노역에 시달렸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강제노역한 곳들은 일본인도 기피하는 위험하고 힘든 작업현장뿐이었고, 일본인은 작업을 감독하거나 위험하지 않고 수월한 곳에 배정되어 작업했다.

 

 

일본의 국민 총동원령은 일본과 일제의 식민지였던 조선인을 일본군 강제징집과 학도병, 군속(군무원), 강제징용(강제노역), 일본군 위안부 등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소모품과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해저탄광 장생탄광은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60km 남짓 떨어진 야마구치 현 우베 탄전 지역에 있다.

장생탄광이 위치한 야마구치 현 우베 지역은 50여 개의 탄광이 몰려 있었기 때문에 사고도 자주 발생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강제연행되어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수몰 사고가 난 장생탄광뿐만 아니라 지역을 불문하고 공통적으로 일어났던 일들이 있다.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는 일본인에게 일방적으로 차별과 학대, 폭행을 당했으며, 열악한 생활과 작업환경으로 여러 질병에 시달렸으며, 배고픔과 영양실조, 탈출과 사고사 등이 자주 발생했다.

 

 

 

 

 

 

 

 

 

 

일본 본토뿐만 아니라 중국과 만주, 남태평양과 동남아시아 등지로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 노무자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본인에게 노예보다 못한 차별을 받으며 혹독한 조건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다.

 

 

너무나도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폭행과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던 조선인 강제징용 노무자들이 탈출하다가 걸려 엄청난 폭행을 당하다가 죽어간 사람도 많았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강제징집 피해자들은 일본이 저지른 전쟁에 강제로 끌려가 이역만리 타국에서 쓸쓸하게 죽어갔다.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도코나미 해안에 있는 해저탄광인 장생탄광(조세이탄광)은 일본의 해저탄광 중 하나다.

장생탄광에는 먹고살기 위해 자진하여 도일(渡日)한 조선인 노무자도 있었지만, 대다수 조선인 노무자는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일제강점기 국민 총동원령이 한창 시행되던 1942년 2월 3일 오전 9시경 일본에 의해 강제동원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136명이 해저탄광인 장생탄광이 수몰되면서 어두운 바다 밑 석탄 갱도에 갇혀 생을 마감했다.

 

 

장생탄광 수몰 사고로  자진 도일(渡日) 조선인과 강제징용 조선인 노무자 136명과 일본인 등 18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조선인 희생자는 10대부터 50대까지 연령대로 이 중 20대 희생자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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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블프라이스 2017.07.22 0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피해자와 장생탄광 ' 포스트 잘 읽고 갑니다.
    장생탄광 수몰사고로 우리 조선인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피해가 심했었군요.. 몰랐던 역사에 대해 공부하고 갑니다. 건강한 주말 되세요^^

  2. 청결원 2017.07.22 06: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몰랐던 역사를 알게 되었네요..

  3. 죽풍 2017.07.22 20: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픈 역사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강해야 하고 위정자가 없어야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사망한 조선인 강제징용과 강제징집, 일본군 위안부 희생자

일제에 의해 오키나와로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 강제징집, 위안부 피해자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강제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등으로 오키나와를 비롯한 140개 유구열도(류큐열도)에 끌려와 사망한 조선인 숫자는 파악이 안 된다.

 

 

오키나와(沖繩)는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류큐왕국을 강제병합하고 붙인 이름이다.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한 일본 왕은 미국의 맥아더에게 오키나와(류큐왕국, 유구열도)를 일본에서 분리하지 말고, 오키나와의 주권은 일본에 그대로 놓아둔 채 미국이 원하는 기간 동안 오키나와를 조차하는 형식으로 점령하라고 했다.

 

 

 

 

 

 

 

 

 

 

 

 

일본과 미국의 밀약으로 류큐왕국(오키나와를 비롯한 14개 섬) 국민들은 100여 년 동안 일본인으로 수십 년 동안 미국의 군사적 식민지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중국과 조선, 일본 등과 수백 년 동안 교류했던 독립국 류큐왕국의 옛 영토 중 대만과 인접해 있는 섬이 무인도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다.

 

오키나와 미군기지는 대한민국 평택 미군기지 시대가 열기기 전까지 수십 년 동안 해외 미군기지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류큐왕국(오키나와) 원주민과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는 전쟁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오키나와에 끌려온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를 군부(軍夫)라고 불렀다.

 

당시 오키나와에는 일본군이 되어 전쟁터로 끌려간 숫자가 파악되지 않은 조선인 강제징집 피해자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온 조선인 여성 1천여 명도 있었다.

 

 

 

 

 

 

 

 

 

 

 

 

오키나와는 덥고 습한 날씨의 아열대 기후 지역이다.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오키나와의 비행장과 격납고, 터널 포진지와 지상과 지하 진지구축 등 다양한 군사시설을 만드는데 강제동원됐다.

 

 

짐승보다 못한 차별을 받고, 굶주림과 노예와 다름없는 가혹한 노역에 시달리다 병들어 사망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도 있었고, 자살공격대로 내몰려 사망한 사람, 집단학살과 강압적인 집단자결(옥쇄)로 사망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일제강점기 오키나와에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원인은 미군의 비행기 폭격과 함포사격, 탱크와 박격포 등 미국(연합국)이 오키나와를 초토화시킨 무자비한 공격에 의해서다.

 

 

 

 

 

 

 

 

 

 

 

 

연합군 비행기의 집중 폭격과 300만 발에 육박하는 포탄이 집중된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쟁 도구로 이용된 류큐왕국(오키나와) 원주민과 조선인 강제징용 사망자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비, ()의 비()2006 일본 시민단체와 오키나와 강제징용 피해자 강인창님의 주도로 건립됐다.

 

 

 

오키나와 전투는 본래 승산이 없는 전투라는 것을 일본은 알고 있었다.

오키나와 전투의 목적은 오직 일본 본토가 미국(연합국)과 일전을 불사하기 위한 시간벌기 작전, 본토 방어 작전 준비다.

 

일본은 남서 태평양 일대의 점령지를 모두 빼앗기면서 일본 본토를 사수하기 위해 일본 본토에서 건너온 병력과 오키나와 원주민(민간인)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강제징집했다.

 

 

 

 

 

 

 

 

 

 

 

 

일본은 미국이 진격하기 전에 오키나와를 비롯한 유구 열도의 여러 섬을 하루라도 빨리 군사 기지화해야 했다.

1945년 초부터 오키나와에 방어진지 구축 등 군사시설을 만드는 노역에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동원해 미군과의 결전을 준비하며 총력을 기울였다.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는 오키나와 비행장과 방공호를 겸한 지하사령부와 등 진지 구축, 탄약과 포탄 등 군수물자 운반에 동원되었고, 군사시설이 완공되면 기밀유지를 위해 집단 학살을 당했다고도 한다.

조선인 강제징용자 중 일부는 군무원(군속)으로 배치되어 전장의 최일선에 투입되었다.  

 

 

오키나와에 끌려온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다른 곳으로 끌려간 강제징용 피해자들처럼 배급을 받지 못해 굶주림 속에서 중노동을 했고, 곡괭이와 삽을 제외한 어떤 장비도 지급되지 않아 맨손으로 비행장과 군사시설을 만들다시피 했다.

 

 

 

 

 

 

 

 

 

 

 

오키나와 전투는 일본군 전원이 옥쇄한다는 각오로 시간을 벌기 위한 전투였다.

일본 천황을 보위하고 일본 본토를 사수하기 위해 조선인과 오키나와 원주민이 총알받이로 동원되었다.

 

일본군은 비행기로 적의 군함에 돌격하여 자폭하는 가미카제 자살특공대와 함께 오키나와 상륙작전을 저지하는 인간 폭탄의 자살특공대도 있었는데, 그 가운데 조선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오키나와에 끌려온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식량 배급을 받지 못한 가운데 가혹한 노역에 시달라다가 사료용 고구마 한 개를 훔쳐 먹다 걸려 일본 헌병에게 죽지 않을 정도로 많이 맞았고, 볍씨를 훔쳐 먹었다는 이유로 집단 총살을 당하기도 했다.

 

 

 

 

 

 

 

 

 

 

 

 

미국(연합군)이 본격적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하면서 유구열도 중에서 가장 큰 섬인 오키나와에서 20만여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1945년 4월부터 80여 일간 미국과 일본 간에 격렬하게 치러진 오키나와 전투에서만 약 1만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총알받이가 된 강제징집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피와 눈물을 흘리며 가슴속에 큰 한(恨)을 품고 죽어갔다.

 

가족과 생이별하며 머나먼 이국땅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것도 모자라, 오키나와에서 숨져간 조선인 강제징용과 강제징집 피해자들이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만인의 공분을 사고 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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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7.07.16 07: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가네요

  2. 버블프라이스 2017.07.16 18: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은 '일제강점기 오키나와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관련해서 몰랐던 역사 공부를 하고 갑니다^^
    비가 어제 오늘 내리면서 더위는 잠시 식었는데요, 이제 곧 또 폭염날씨가 이어질 꺼라고 하네요.
    항상 건강하세요^^

  3. 죽풍 2017.07.16 2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진과 그림을 보니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가 상상이상일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