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문화' 태그의 글 목록

명절 차례와 기제사 등은 제천문화(祭天文化)에서 전해져 

인간의 생활윤리 기본규범이 된 보은문화(報恩文化)

 

 

 

 

 

 

 

 

 

 

 

 

지구촌에는 조상의 음덕에 감사하며 늘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보은하는 문화가 오랫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이와 같은 보은문화는 서양의 고대 문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지만, 가톨릭(기독교)이 생겨나면서부터 그런 전통문화 대부분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아직도 조상에 대한 음덕을 기리는 문화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이라고 해도 대한민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정월 초하루 설날과 팔월 한가위(추석) 명절, 기제사 때 돌아가신 조상님에게 차례와 제사를 모시는 문화는 쉽게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도 근현대사에 서양 기독교가 유입되면서 유일신관의 신앙관으로 돌아가신 조상님께 명절 차례나 기제사를 모시는 보은문화가 사라져갔습니다.

생명의 근본을 잊지 않고 그 은혜를 기리는 전통문화가 마치 우상숭배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환국(桓國)은 인류의 시원 역사입니다.

9천여 년 전 7분의 환국의 환인 천제와 약 6천 년 전 18분의 신시 배달국의 환웅 천황, 47분의 단군조선 단군 왕검들께서는 제사장이 되어 우주의 주재자, 삼신상제님께 감사에 대한 보은 예식과 국가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 지속적인 보살핌을 주실 것을 기원하며 제천 의례를 행하였습니다.

 

이 제천문화가 동서양으로 퍼져 나가 오늘날 인간의 생활윤리 기본규범이 되는 보은문화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제천문화는 단순히 우주의 주재자이신 삼신 상제님의 은혜에 대한 보은 예식과 기원의 예식을 넘어서 하늘의 가르침, 즉 재세이화 하여 홍익인간 하라는 하늘의 숭고하고도 거룩한 천명을 받들어 신교(神敎, 신의 가르침, 天理) 문화를 현실 세계에 펼쳐나가겠다는 다짐을 하며 실천해온 고유문화인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삼신상제님께 제사를 모시는 천제(天祭), 즉 제천 의례는 제정일치 사회에서 나라의 제왕(천자)이 제사장이 되어 올리는 나라의 가장 큰 의례이며 축전이었습니다.

 

하늘의 삼신상제님께 천제(天祭), 즉 제천 의례를 직접 올릴 수 없었던 일반 백성은 일상의 삶 속에서 제천 문화의 연장선으로 삼신상제님과 조상님에 대한 감사와 기원의 예식을 행하였습니다.

 

 

 

 

 

 

 

 

 

 

 

 

관혼상제와 같은 전통 의례(하나님이 계신 별 북두칠성을 형상화한 문양과 문품, 의식 등이 들어간다.)와 정화수(정한수) 신앙, 그리고 인류 역사의 상고시대 전 인류의 보편문화였던 신교(神敎)로부터 퍼져 나간 도교, 유교, 불교의 칠성 신앙(북두칠성은 상제님이 계신 별), 그리고 설날과 한가위 명절 차례와 기제사 등 제사문화로 신교(神敎)의 제천문화가 면면히 이어져 왔습니다.

 

 

일반 백성은 가정에서 자신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해 주신 부모님과 조상님을 제1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명절 차례와 제사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우주의 주재자, 삼신상제님을 우주에서 가장 큰 조상신, 인류의 가장 큰 조상으로 대조신(大祖神)이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혈통을 모시는 명절 차례와 제사 문화는 곧 모든 인류의 근원이 되시는 우주에서 가장 큰 조상신으로서 삼신상제님에 대한 보은문화가 기저에 깔린 것입니다. 

 

 

근현대사 서양의 문화와 사상이 유입되면서 아름답고 숭고한 우리의 문화는 자신들이 놀고 즐기는데 불필요한 거추장스러운 형식과 존재로, 때로는 샤머니즘적 우상숭배라는 미명아래 그 가치가 폄하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설날과 한가위 명절 차례와 기제사와 같은 전통 보은문화가 형식적인 모습만 남아 있는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혹자는 제사 문화가 중국 유교 문화에서 전래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교와 도교의 시조가 신시 배달국 5대 태우의 환웅 천황의 막내 아드님이신 태호복희씨입니다.

 

태호복희씨의 하도(河圖)를 바탕으로 두 종교가 문화를 발전 축적하면서 하늘의 천명을 현실의 실천 이념으로 만들었고, 우리나라는 조선 시대에 본격적으로 관혼상제 등 예식이 유교에 따라 체계화되어 현재의 명절 차례와 기제사 의례가 확립된 것입니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 바로 하늘에 대한 제천문화와 조상님과 부모님을 참되게 섬기는 우리 민족의 전통 보은문화의 숨결에서 얻어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반포지효(反哺之孝)

어버이의 은혜에 보은하는 자식의 지극한 효도를 이르는 사자성어

새끼 까마귀가 자란 뒤에 어미 까마귀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며 효를 다한다.

 

수구초심(首丘初心)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사자성어

여우가 죽을 때 자신이 태어난 곳(언덕)을 향해 머리를 둔다.

 

금수(禽獸)조차도 근본을 잊지 않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근본을 잊어가다가 이제는 근본을 버리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청결원 2016.02.04 06: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은문화의 관해 잘 보고 가네요

  2. 아쿠나 2016.02.04 08: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말씀 잘 보고 갑니다 ^^

  3. 죽풍 2016.02.04 09: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곧 설날이 다가옵니다.
    조상님께 예를 갖춰 제사상을 차려야겠지요.
    잘 보고 갑니다.
    행복하세요. ^^

  4. 훈잉 2016.02.04 09: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설날이군요 ㅎㅎ.
    개인적으로 제사문화는 정말 좋은 문화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5. 뉴론♥ 2016.02.04 10: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 보면 왜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번거로운 일인데요 오늘이 입춘이네요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6. 뉴클릭 2016.02.04 11: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앞으로 다가왔네요 ^^
    행복 가득한 하루를 보내세요 ^^

  7. 행복생활 2016.02.04 16: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잘 알아 갑니다 !!
    좋은 하루가 되세요!

  8. 유라준 2016.02.04 16: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은이란 근본적인 덕목이 아닌가 하네요.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오후 되세요.

  9. 세컨드잡스 2016.02.04 17: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녀갈게요~ 행복한 오늘을 보내셔요~

  10. 여행쟁이 김군 2016.02.04 22: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은문화에 대해서 잘 알고 갑니당^^
    즐거운 저녁시간 되시길 바래요! ㅋ

환단고기』의 주제는 제천문화 - 단군세기」 서문의 삼신일체와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

 

 

 

 

우리 증산도 태상종도사님께서 생전에 도생(道生,신도)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 한민족은 역사를 잃어버린 불쌍한 민족이다. 우리 역사를, 본래의 역사를 찾아 주어라."

 

10여 년 전에, 한 역사학 교수가 논문을 쓸 때 태상종도사님이 지원을 해 주신 적이 있었는데 대전에서 진지를 드시면서 "『환단고기』가 우리 역사의 원 바탕이오. 우리 역사의 원형이니 한번 잘 연구해 봐요."하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강단사학에서는 환단고기를 언급한다든지, 인용을 하면 학계에서 인정을 못 받아요. 왜냐면 이건 강단사학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주론과 신관, 인성론을 근본으로 해서 우리의 원형 역사가 전개되었다고, 종교, 역사, 우주론이 융합이 돼 있어서, 그런 융합적인 세계관이 인식 안 되면 『환단고기』 자체를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위서론자들이 쓴 논문을 보고 판단할 때

'첫째, 『환단고기』를 부분적으로 읽은 것이지, 제대로 읽은 사람이 없다. 『환단고기』 역사관의 배경에 깔려 있는 가장 중요한 구절은 대부분 그냥 스쳐지나가고 있다' 이렇게 결론 내렸습니다.

 

예를 들어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단군세기 서문의 '삼신일체'에 대해, 기독교의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을 끌고 왔다고 합니다.

 

기독교 삼위일체론은 성부 성자와 성령,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삼위(三位)로서, 위격은 분명히 다르지만 실제로 근본은 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신일체(三神一體)는 '삼신은 스스로 세 가지 본성을 가지신 한 하나님(일신一神)'이라는 뜻입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 서문을 보면 "성명정지무기(性命精之無機)는 삼신일체상제야(三神一體上帝也)시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천지가 뒤짚어지는 구절입니다. 아무리 한문에 도를 통했어도 해석이 잘 안됩니다. 글자 뜻을 보면 '성명정이 일체(oneness), 하나가 된 우주의 조화경계에 머무르시는 분은 바로 삼신의 조화권을 쓰시고 우주를 다스리시는 통치자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환단고기』는 하늘과 땅과 인간, 우주 삼계를 다스리시는 우주의 통치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한민족 문화의 대의인 제천(祭天)문화의 실체입니다.

 

 

 

 

우리 한민족의 문화는 한마디로 제천 문화입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축제, 온 민족이 하나 되어 천지와 하나 된 광명의 인간으로 거듭 태어난 날, 그것을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이니 하는 제천 행사로 얘기하고 있는데, 그 실체가 바로 하늘과 땅과 인간, 삼계우주를 다스리시는 일상제(一上帝, 한 분 하나님)가 있다는 것입니다...

 

 

(2012년 3월 23일 세종문화회관 환단고기 심포지움, 증산도 종도사님 말씀 中)

 

 

==========================================================================

 

 

2005년 3월 4일 증산도 종도사님 말씀 中

 

 

 

 

기독교 삼위일체의 진실

기독교의 삼위일체, 성부와 성자와 성신(성령)의 논리를 잘 알아야 기독교가 다 정리된다.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라고 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성령)이 하나다.

헌데 그 삼위일체가 왜곡됐다. 삼위일체를 다 아는 것 같은데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빌리 그레엄이, 자기 아들이 “아버지 성신이 뭐야?” 그러니까 “성신? 그게 말이야, 제일 쉬운 것 같은데 제일 어려운 거야. 그건 나도 몰라.” 그랬다는 것 아닌가. 자동차 보닛을 딱 열어놓고 “여기 보면 엔진이 있고 배터리가 있고 뭐가 있잖아? 이게 각각 셋이지만 발동을 걸면 ‘부릉부릉’해가지고 이 세 개가 돌아가야 차가 가는 거야.” 이런 식으로밖에 얘기를 못한다.

 

그 사람들이 말하는 아버지는 이 우주 만물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 즉 만물 속에 다 깃들어있는, 생명의 뿌리가 되는, 만물이 존재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생명의 신비, 실체, 그런 신을 말한다.

만물 속에 신이 깃들어 있으면서 이 만물을 초월해 있는 신, 그것을 신의 내재성과 초월성이라고 한다.

 

신은 만물 속에 깃들어 있으면서 또 만물을 초월해 있다. 신의 내재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강조한다.

그게 신의 특성이다. 얼굴 없는 신, 자연신이다.

기독교는 만물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원신이라고 한다. 아버지를 그렇게만 안다. 인간으로 올 수 없는, 우주 만물을 창조한 생명의 근원으로서 신을 말할 뿐이다.

 

 

요한계시록

1장 8절,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20장 11절,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21장 5절,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그러나 요한계시록 뚜껑을 열면, 이 우주를 통치하시는 아버지가 “그것만이 아니다!” 하면서 요한을 무릎 꿇려놓고 “봐라! 내가 내려간다.” 그런 말씀을 하신다. 백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이 말이다.

 

그 하나님은 형상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 인간모습을 하고 우주의 신들을 부리고 자연계를 다스리는 통치자 하나님, 주신(主神)이다. 거버닝 가드(governing god)다.

 

그리고 아까 말한 신은 프라이모디얼 가드(primordial god)다,

원신, 자연신이다. 신은 이렇게 음양이다.

 

 

성신(성령)은 무엇인가? 아버지가 있으면 어머니가 있어야 된다. 어머니의 역할을 하는 신이 바로 성신(성령)이다.

신의 남성적 측면, 신의 여성적 측면이 있는데, 성신(성령)이 성부와 성자, 아버지와 아들, 신과 인간을 하나로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즉 아버지가 아들을 보낼 때, 또 아들이 아버지의 진리 열어주고 체험을 하게 할 때, 그 모든 역할을 성신이 하는 것이다. 신이 들어서 된다.

 

 

 

 

대우주에 충만해 있는 본래의 신, 원신이 구체적으로 사역을 할 때는 성신(성령)으로 온다. 성신(성령)이 없으면 만물로 태어나지도 못하고, 작용하지도 못하고, 인간들이 어떤 진리를 체험도 못하고, 사물의 속을 들여다보지도 못한다. 모든 것은 성신(성령)을 받아야 된다.

 

기독교는 그 성신(성령)문화 하나가지고 2천년을 뻗었다. 그런데 정작 아버지를 모른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아쿠나 2014.12.10 06: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군세기에 대해서 알아보시는 분들에게
    유용한 정보가 되겠어요~
    저도 잘보고 가구요~ 존하루되세요 ^^

  2. 카푸리오 2014.12.10 07: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들려 잘 보고 갑니다.
    하루도 행복하세요~

  3. 죽풍 2014.12.10 08: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천문화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아 갑니다.
    오늘도 멋진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

  4. 뉴론7 2014.12.10 08: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증산도도 괜찮은 종교라고 하더군요

  5. 브라질리언 2014.12.10 09: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가 어찌 멋대로 할 수 있는가 부분이 참 와닿네요

  6. 한콩이 2014.12.10 09: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갑니다~~ 즐거운 하루되세요^^

  7. 명태랑 짜오기 2014.12.10 10: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8. 세상속에서 2014.12.10 15: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환단고기 포스팅 잘봤습니다.
    좋은 하루되시구 수고하세요.

  9. Hansik's Drink 2014.12.10 16: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녀간답니다 ^^ 좋은 하루 보내세요~

  10. 땅이. 2014.12.10 18: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포스팅이네요 잘보고갑니다 포스팅 최고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굿입니다 ~~~

  11. 유라준 2014.12.10 22: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히 삼신일체가 기독교의 교리와는 다르네요.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12. 천추 2014.12.10 23: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독교와의 교리와 어떻게 틀린가에 대해서 많이 이해를 하겠습니다만 아직은 어렵네요.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천원지방 사상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보본(報本)제천문화 -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형태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에 의해 형성된 원형(圓形)과 방형(方形)의 천지제단(天地祭壇)은 우리의 문화로 녹아들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한 봉분(封墳,무덤)의 앞부분은 방형(方形)이며 뒷부분은 원형(圓形)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지난 2005년에 서울 강동구에서 전방후원분이 발굴되었다는 뉴스로 한동안 떠들썩 하다가 명확하게 규명되지 못하고 해프닝?으로 끝난 적이 있었다.

 

 

 

 

 

현재 전방후원분이 잘 보존되고 있는 곳으로는 전라남도 나주군 반남면 자미산 일대에 산재해 있는 30여 기(基)의 반남 고분군(古墳群)은 중마한 유적으로 비정되고 있다. 처음 이 고분들을 주목했던 것은 일본인들로, 일본은 '고분시대古墳時代'를 하나의 시대로 시기구분하는데, 반남 고분군이 일본의 고분들과 같모양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들 고분의 겉모양은 원형, 또는 방대형(方臺形)이며 한 봉토내에 1개 또는 여러 개의 도제웅관(陶製甕棺)을 간직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

 

 

 

 

이런 무덤 형태는 한반도 내에서는 유례가 없는 것으로 다만 일본의 천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들에서 유사한 형태가 보일 뿐이다.

 

신촌리 6호분과 덕산리 2호분은 전방후원형이라는 점, 덕산리 3호분, 대안리 9호분처럼 무덤 주위에 도랑을 조성한 점 등은 일본고분시대에 조성된 고분들과 형태가 유사하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 고분들의 조성 시기를 보통 4-7세기로 비정하고 있다.

 

 

나주 고분들의 정확한 조성 시기는 학자들에 따라 다르나,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는 3세기에 조성되었음을 전해주고 있다.

나주 고분과 일본 고분들은 한반도 내에 있던 왜의 중심세력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일본고분시대를 열었음을 말해주는

좋은 증거이다.

 

 

 

 

 

주목할 것은 전방후원분이 (약간의 변형이 되었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무덤형태라는 사실이다.

즉 조상을 모신 산소가 전방후원분의 대표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원형의 봉분(封墳)에 조상님의 주검을 모시고, 방형의 제단에서 조상님께 제(祭)를 올리는 제사의식은 원형의 천단(天但)과 방형(方形)의 지단(地)에서 황천상제와 황지기, 그리고 조상님께 천제(天祭)를 올렸던 보본(報本)제천문화가 일상생활 속에 살아있는 현장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인류의 시원문화인 신교(神敎)의 제천문화는 지금도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아쉬운 점은 신교 문화의 종주국인 우리나라 보다 일본에 더 많은 신교(神敎) 문화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아쿠나 2014.11.14 06: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천문화에 대해서 알아시는 분들에게
    좋은 포스팅인듯 해요~
    저도 잘보고 가구요 ~ 즐건 하루되세요 ^^

  2. 뉴론7 2014.11.14 08: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 갑니다 행복한 하루되세요

  3. 한콩이 2014.11.14 09: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 배우고갑니다!
    즐거운 하루되세요^^

  4. 죽풍 2014.11.14 10: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방후원분에 대해서 공부하고 갑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

  5. 천추 2014.11.14 10: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좋은 글 잘 공부하고 갑니다.
    행복한 하루되기기 바랍니다.

  6. 브라질리언 2014.11.14 10: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은 외국에비해 유적지를 사랑하지 않는것 같아요 ㅠㅠ

  7. 비키니짐(VKNY GYM) 2014.11.14 12: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돌좋은 정보 잘 보고갑니다.
    즐거운 하루되세요^^

  8. 가나다라마ma 2014.11.14 12: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반도에도 많은 국가들이 세워졌다가 사라져서 다양한 고분이 있기는 한데 저렇게 독특한 건 저도 못 본 것 같아요.
    서울에서 발견 된 것이 전방후원분이었으면 유적공원으로 만들어 복원해서 사람들에게 큰 즐거움이 되었을텐데 아쉽네요.

  9. 주부s 2014.11.14 14: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10. With E 2014.11.14 22: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스팅 작성시간이 5:00 ... 잠은 언제주무시나요? ㅎㅎ

  11. 유라준 2014.11.15 01: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과의 유사한 무덤이군요.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홍산문화의 원형 제단, 전 세계로 퍼져나간 제천문화(祭天文化)와 제천단(祭天壇, 피라미드)

 

 

 

 

 

홍산문화에서 발견된 원형 제단이 오로지 제단의 기능만 하였다면, 방형의 계단형 적석총은 무덤이면서 제단의 기능을 함께한 것으로 피라미드(Pyramid)형 돌무덤의 대표적인 원형이다. 이런 양식은 고인돌과 고구려의 적석총에서 발견된다.

 

 

 

 

"고구려 전기 수도였던 만주 집안 지역에는 무려 1만 기 이상의 고구려 고분이 산재해 있다. 기원전 3,4세기 고구려 중기에 오면 돌무지무덤에 3단 5단 7단식으로 층수가 증가하면서 마치 계단식 피라미드형의 돌무덤으로 축조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장군총(將軍塚)과 태왕릉(太王陵)으로 둘 다 7층으로 축조되어 있다. 과거 일제시대에 장군총의 맨 위층인 제7층 정상부의 사방 변두리에서는 난간 구멍이 발견되었고 피라미드의 정상부와 층급에서 많은 양의 기와와 벽돌이 발견되었다." (선문대 석좌교수 이형구 박사의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中)

 

 

 

선문대학교 석좌교수 이형구 박사는 이와 같은 정황으로 미루어 피라미드 위에 원래는 어떤 목조 건축물(묘상건축墓上建築)이 세워졌던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능묘 위에 세우는 일종의 사당(祠堂, 육상종묘陸上宗廟)과 같은 성격의 건축물을 이른바 향당(享堂)이라고 하였다. 역시 제사의 대상을 위한 시설로서 동이족 묘제의 하나이다.

 

 

 

 

홍산문화에서 발원한 제천문화는 동서양 문화의 원형(元形)으로서 동양에만 국한 되지 않고 수메르 외에도 이집트, 중국, 티베트 등 전 세계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고대 중근동 지역의 지구라트(ziggurat)와 피라미드(pyramid)이다.

 

이들은 우주의 통치자이신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던 제천문화의 유산으로 이것은 초기 피라미드의 원형이 천제를 올리기 위해 윗부분이 평평한 단(壇)으로 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현 서양문명의 뿌리인 고대 메소포타미아문명은 BCE 3300년 경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서 태동한 슈메르문명에서 발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메소포타미아의 평지 위에 정착한 슈메르인들은 산처럼 높은 대형 제단인 지구라트를 쌓고 하늘에 제사지냈다.

 

한민족처럼 하늘을 숭배하는 제천문화와 천자사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벨탑도 사실은 바빌론 지역의 지구라트이다. 지구라트는 후에 이집트로 흘러 들어가 피라미드가 되었다.

 

 

 

 

동양의 제천단과 이들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우선 모두 노천의 평지에 제단을 쌓는 교사제의 축단(築壇)문화와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지구라트와 피라미드 등 제천 성소가 '우주의 축'(Cosmic axis)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고대의 봉선의식이 행해졌던 중국 산동성 태산(泰山)이 제나라와 노나라 지역에서 우주의 중심축(The axis of cosmos)으로 여겼던 성산(聖山)이었다는 것에서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제천의 장소가 하늘과 땅, 인간을 하나로 이어주는 성역(聖域)였음을 의미한다(샤먼의 상징인 우주목과 의식이 행해지는 장소가 천지인 삼재三를 이어주는 성스러운 신물이자 장소로 작용한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단, 음양론이 발달했던 동양에서 '천단은 원형으로 지단은 방형(천원지방)'으로 구분했던 것에 비해, 음양론이 발달하지 못한 그 외 지역에서는 제천단이 방형의 피라미드 형태로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동의 지구라트나 남미(유가탄 반도의 치첸이트사)에 있는 마야시대의 쿠쿨칸 피라미드는 모두 꼭대기에 제단이 있는 형태로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반면 지구라트의 변형된 형태인 이집트 피라미드가 파라오의 무덤이었다는 학자들의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제천단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동양의 피라미드인 장군총이 무덤이면서 제사를 지내던 제단(제지단祭地壇)이었다는 점에서, 이집트 피라미드가 후대에 제천단이라는 본래의 성격을 잃어버리고 파라오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한 무덤으로 의미가 축소 혹은 왜곡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뉴론7 2014.10.17 05: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조경수업배우는데 지구라트에 대해서는 알거 같네염 역사공부는 조경수업하면 많이 알게되는거 같네염 ㅎㅎ.

  2. 아쿠나 2014.10.17 06: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천문화와..제천단에 대해서 알아보시는 분들께
    좋은 정보인듯 해요 ~ 잘 보고 갑니다 ^^

  3. 명태랑 짜오기 2014.10.17 10: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천단에 대해서 잘 알고 갑니다.
    즐거운 금요일 되세요^^

  4. 죽풍 2014.10.17 10: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계 어느 나라든, 하늘, 땅 그리고 인간에 대한 숭배가 있었고,
    성역으로 지정해 제를 지냈다는 생각입니다.
    오늘도 좋은 공부 하고 갑니다. ^^

  5. 유라준 2014.10.17 23: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홍산문화가 제대로 밝혀졌으면 좋겠네요.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한민족 정체성의 확장 ‘알타이 연대’를 꿈꾸며 (고조선과 북방 민족 간의 관계)

<김창규 | 주 키르기스스탄 대사> 경향신문 독자투고 일부발췌

 

알타이 연대라고 하면 민족적 시원이 유사한 터키,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투르크계 민족들과 한국, 몽골 등 몽골계 민족들 간의 연대를 위한 협력 형태를 의미한다.

 

유라시아 지역에 오랫동안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알타이계 민족들이 민족적 시원의 유사성과 문화와 감정의 동질성에 대해 비교적 높은 인식을 공유하고 있으며 알타이 연대에 대한 열망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알타이 연대를 구축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곳에 미개척 시장이 있다든가 자원이 광대하다든가 하는 현실적 이유가 아니다.

 

알타이 연대의 구축을 통해서 우리 국민들이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유라시아 대륙은 지금까지 우리의 인식 범위 밖에 있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해양을 통한 발전 전략과 함께 유라시아 대륙을 통한 발전 전략을 한데 놓고 균형적인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한반도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인식의 폭을 대륙으로 확장할 수 있다.


알타이 연대의 구축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이들과의 협력을 통해 우리 민족의 시원이라든가 한글의 기원 등 우리가 명쾌하게 밝혀 내지 못한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어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세계는 글로벌 시대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알타이 연대에 대한 관심과 당위성이 학계를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고 있다. 이제 우리도 축적된 저력을 국내에 가두어 두기보다는 이를 널리 활용하여 세계 평화와 공영에 기여할 때가 됐다.

 

 

-----------------------------------------------------------------------------------------------------------------------

 

 

 

고조선과 북방 민족 간의 관계

 

⊙ 고조선과 흉노족
『단군세기』에는 고조선과 북방 민족 간의 관계를 알려 주는 귀중한 기록들이 있다. 3세 가륵단군 6년(BCE 2177) 조에 나오는“ 임금께서 열양 욕살 삭정索靖을 약수弱水 지방에 유배시켜 종신토록 감옥에 가둬 놓았다. 후에 용서하여 그 땅에 봉하시니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라는 기록과 4세 오사구단군이 재위 원년인 BCE 2137년에 자신의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한’에 봉했다는 기록, 또 30세 내휴단군 5년(BCE 905)에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 32세 추밀단군 3년(BCE 847)에 선비산鮮卑山의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 등이 그것이다.

 

흉노, 선비, 돌궐, 몽골 등 여러 북방민족과 한민족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그들의 세력 부침을 알아보기로 한다.

 

주지하다시피 몽골 고원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남러시아와 동유럽 일대에는 광대한 초원(스텝) 지대가 이어진다. 이들 지역은 유목생활을 영위하는 몽골계와 투르크계에 속하는 다양한 유목민들의 공간이었다. 동양사에서는 중국 북방의 여러 유목민과 중국 간의 갈등이 아주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었다. 중국인들은 이러한 북방민족을 융戎, 적狄, 호胡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면서, 물리치고 억압해야 할 무지하고 흉악한 오랑캐로 여겼다.

 

그러나 북방민족을 오랑캐로 여긴 것은 어디까지나 중화사상에 빠진 중국인들의 편견 때문이다. 북방 유목민들은 분명 정착 농경민과는 다른 생활방식을 채택한 사람들이지만 결코 야만인은 아니었던 것이 실제로 기마술과 야금술 및 금속가공 기술은 중국인들보다 앞서 있었다.

 

 

⊙ 동방의 삼신과 제천 문화 생활화한 흉노

 『단군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흉노의 시조는 한민족이다. 흉노는 그 수가 계속 늘어나 진나라 때 와서는 이미 오르도스와 몽골고원, 천산산맥 일대를 주름잡고 있었다. 흉노는 그 우두머리를 선우單于라 하였다. 흉노는 한나라 초기 묵특선우冒頓單于(BCE 209~BCE 174) 때 서쪽의 월지와 동쪽의 동호東胡를 격파하고 아시아 최초로 대유목 제국을 세웠다. 묵특선우는 흉노 제국을 신교의 삼신문화의 고향인 고조선처럼 셋으로 나눠 통치하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자신은 중앙을 통치하고 동쪽은 좌현왕이, 서쪽은 우현왕이 통치하게 하였다. 좌현왕은 우현왕보다 우선시 되었는데 보통 선우의 아들을 좌현왕으로 삼았다.

 

 

선우는 자신을‘ 탱리고도撑梨孤塗선우’라 하였는데, 탱리撑梨는‘ 하늘’을 뜻하는 흉노어‘ 텡그리Tengri’의 음역이고,‘ 고도’는 아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탱리고도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를 의미한다. 흉노는 천지와 일월을 숭배하고, 나아가 조상을 숭배하였고, 일 년에 세 번 큰 제사를 지냈다. 특히 정월의 춘제春祭와 오월의 용성대제龍城大祭는 대규모 천제였다. 중국 측의 기록에 의하면 흉노는 하늘에 제사지낼 때 이용하는 큰 금상이 있었다고 한다. 흉노의 한 왕인 휴도왕의 땅에 있던‘ 제천금인祭天金人’이 그것이다. 선우는 매일 해와 달에게 절하고 자신이 거처하는 게르(천막집)의 문도 항상 동쪽을 향해 배치하였다. 이처럼 문을 동향으로 한 것은 동쪽을 중시하는 동이족의 관습과 일치하는 것이다.

 

중국 역사서에서 흉노는 BCE 4세기 전국시대에 처음 등장한다.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흉노는 틈만 있으면 연, 조, 진 나라를 침략하는 골칫거리였다. 이 세나라는 모두 흉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장성을 쌓았다. 이것을 연결한 것이 진시황 때 이루어진 만리장성이다. 진시황은 장군 몽염에게 삼십만 군을 주어 흉노에게 반격을 가하고 서쪽의 농서군에서 동쪽의 요동군 갈석에 이르는 장성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만리장성 축조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고 결국 2세 황제인 호해 때 진나라는 진승과 오광의 반란으로 망했다. 흉노의 위협이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멸망시킨 원인의 하나였던 것이다.

 

진에 이어, 유방이 세운 한나라도 흉노의 공격에 시달렸을 뿐, 흉노를 제압하는데 실패하였다. 한고조 유방의 경우 흉노와의 전쟁에서 포위당했다가 가까스로 뇌물을 주고 빠져나오기도 하였다. 이후 공주와 공납을 보내 굴욕적으로 평화를 유지하였다. 한 무제 때 와서는 다시 흉노와 전쟁을 시작하였는데 이 전쟁은 근 50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한 무제는 흉노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큰 손해를 보았다. 장진퀘이에 의하면 흉노와의 전쟁은 백성들의 생활을 곤궁하게 만들고 국력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무제는 다시는 변방으로 출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은‘ 윤대輪臺의 조서’를 발표하고 자신의 실책을 반성하였다.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하고 그곳에 군현을 설치하려 한 것도 흉노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만조선이 흉노와 손을 잡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 무제 때 한국사와 연관하여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흉노의 비왕 가운데 한 사람인 휴도왕의 아들이 자기 어머니와 함께 한나라의 포로가 된 것이다. 흉노 왕자는 왕의 말을 돌보는 일을 맡았는데, 후에 품위 있는 거동과 성실함이 한 무제의 눈에 띄어 무제의 측근이 되었다. 무제는 이 흉노 왕자 김일제金日磾를 뒤에‘투후’로 봉하였다. 투후는 오르도스의 제후라는 뜻이다. 그 후손 중에는 왕후(원제의 비 효원왕후)도 있다. 일설에 의하면 왕망王莽도 김일제의 고손이다.

 

외척인 김일제 가문은 왕망이 정권을 잡으면서 최고의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왕망이 몰락하자 위험한 처지에 몰렸다. 정확한 경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들은 한반도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 문무왕 비문과 중국 시안[西安]에서 발견된 당나라 시대의 묘비명에서 김일제가 신라 김씨 왕가의 조상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사서 기록에 의하면 한 무제가 김일제에게 김씨 성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한서』「 김일제전」).

 

1세기 초 한나라에서 망명한 김일제 후손이 신라와 가야에 들어와서 왕권을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가야가 있었던 지역에서 기마민족의 유적이 대거 발견되었다. 유물들 가운데 청동제 솥인 동복銅鍑은 흉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제사의식을 위해 말에 싣고 다니던 물건으로, 유럽의 훈족 루트에서도 많이 발견되었다.

 

흉노 제국은 BCE 1세기 중반에 내분이 일어나 둘로 분열되었다. 호한야선우가 이끄는 동흉노는 한나라와 동맹을 맺고 중국 북쪽에 머물렀지만 한나라와의 타협하기를 거부한 질지선우가 이끄는 서흉노는 중앙아시아 쪽으로 이주하였다. 동흉노는 한 세기 뒤에는 다시 남북 흉노로 분열되었다. 남흉노는 고비사막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한나라의 번병藩兵(수비병)이 되었다. 몽골 초원은 북흉노가 지배하였다. 그러나 북흉노는 한 제국과 남흉노 연합세력의 공격 때문에 91년에는 몽골리아를 포기하고 중앙아시아의 일리강 유역으로 이주하였다.

 

이러한 이주에는 가뭄과 병충해 같은 자연환경의 악화에도 기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후한서』「 남흉노전」에는“ 흉노국은 매년 가뭄과 해충의 습격으로 헐벗은 땅이 수천 리에 달하고 초목은 전부 말라버려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과 가축의 수가 삼분의 이에 이르렀다”라는 기록이 있다. 북흉노는 일리강 인근 오아시스 국가들을 지배하기도 했지만 결국 몽골리아 초원의 새로운 패자인 선비족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2세기 중반 즈음에 더 서쪽으로 옮겨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초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이들은 역사적인 기록에서 사라져 버린 듯했지만, 4세기 중반에 갑자기‘ 훈hun’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훈족은 370년경 흑해 북부에 나타남으로써 처음으로 유럽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들은 볼가강을 건너 남러시아 초원지대에 거주하던 알란족을 공격했고, 이어서 알란족과 함께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을 공격하여 유럽 대륙에 민족이동의 대물결을 야기하였다. 공포에 질려 도주한 게르만족이 밀물처럼 로마 국경 안으로 몰려들자 이를 제어하지 못한 서로마 제국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게르만족의 이동은 서양 역사에서 고대의 종말을 초래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바로 이 게르만족의 이동은 훈족의 공격 때문에 촉발된 것이었다.

 

훈족은 이 시기 이후 거의 한 세기 동안 동서 유럽 여러 지역을 침략하여 유럽인에게 커다란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훈족은 아틸라 대왕(395~453) 때에 이르러 유럽 일대를 지배하는 거대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를 훈제국이라 부르는데 우랄산맥에서 동유럽 일대에 걸친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였다.

 

 

⊙ 선비족

 북흉노가 1세기 말 멀리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떠나 버리자 흉노의 본거지이던 몽골 고원은 일시적으로 공백지대가 되었다. 그리하여 흉노의 지배를 받아오던 여러 유목집단들이 초원을 지배하기 위한 각축이 시작되었다. 각축에서 선비족이 승리하여 북방지역을 통일하였다. 2세기 중반에는 단석괴檀石槐라는 영웅이 나타나 선비의 여러 부족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였다. 이 선비제국은 북으로 바이칼호, 서로 신장의 일리강, 동으로 만주 일대에 걸치는 넓은 땅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선비제국도 다른 유목민들이 세운 다른 제국처럼 여러 부족집단들의 연합체였다.

 

단석괴가 사망하자 선비제국은 순식간에 여러 집단로 분할되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한나라가 망하고 그 뒤를 이어 동탁, 원소, 조조, 유비 등 군웅이 패권을 놓고 다투는 삼국시대와 그 뒤를 이은 위진魏晉 제국이 붕괴하면서 중원이 혼란에 빠지자 선비족은 그 틈을 이용하여 대거 북중국으로 밀고 들어갔다. 탁발拓跋, 모용慕容, 우문宇文, 단段, 걸복乞伏 등의 선비족의 여러 부가 이때 거의 모두 남하하였다고 한다. 중국사에서 말하는 소위 5호16국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탁발부는 대국代國을 세웠고, 모용부는 전연前燕·후연後燕·서연西燕·남연南燕 등의 나라를 세웠다. 또 산서 지역의 흉노는 한漢·전조前趙·후조 등을 세웠다. 이 가운데서 탁발부의 대국은 다른 국가들을 모두 정복하고 북중국을 통일하였다. 이 나라가 북위北魏이다. 북위는 후에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되었는데 다시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로 이름이 바뀌었다. 수나라는 바로 북주의 귀족인 수국공隋國公 양견이 나라 이름을 수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수는 다시 당으로 이어지는데 수·당의 기원은 바로 선비족인 탁발씨였던 것이다.

 

5호16국 시대에 북방 유목민족들이 중국 본토로만 진출한 것은 아니다. 한반도로도 적지 않은 수가 왔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 김호동 교수는 북방 유목민의 일부가 신라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4~5세기경에 조성된 신라의 대형 적석목관분 무덤에서 중앙아시아의 문화적 기류를 느끼게 하는 유물이 대거 발견되는 것은 이처럼 선비족이 들어왔음을 증명한다. 훈족의 출현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서부에서 민족대이동이 일어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대륙의 동부에서도 그에 못지않게 커다란 민족이동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북방 유목민들의 이동의 파고는 유럽에서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가져오고 중국에서는 북방민족이 중원을 장악한 5호16국 시대를 열었으며 한반도와 일본에서는 기마민족의 정권을 성립시켰다. 한마디로 말해 유목민은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를 유목민의 대이동으로 크게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 돌궐족

『단군세기』에는 흉노의 시조에 대한 언급뿐 아니라 투르크계인‘ 강거康居’에 대한 기록도 나온다. 강거는 흉노의 서쪽에 자리 잡은 유목민으로서『 사기』에도 나온다. 가륵단군 8년에 강거가 반란을 일으키자 단군이 지백특에서 토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지백특은 티베트를 가리킨다. 18세 동엄단군 때에는 지백특 사람이 공물을 바치러 왔다는 기록도 있다. 이 기록은 고조선의 활동영역이 티베트 인근까지 뻗쳤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단군세기』에 직접 나오지 않지만 투르크 계통의 민족으로서 동양 고대사와 서양 중세사에 큰 영향을 미친 민족이 있다. 바로 투르크족이다. 투르크족은 6세기 중반에 서쪽으로 카스피해에서, 동쪽으로 몽골과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강력한 유목제국을 세웠다. 이 제국을 건설한 사람들은 스스로 족속 이름을‘ 투르크(Turk)’라 하였는데, 중국 측 자료에는‘ 돌궐突厥’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터키Turkey라는 나라 이름도 바로 이 투르크에서 비롯한 것이다.

 

돌궐 제국은 기원 후 1세기 중반에 흉노가 붕괴된 뒤 실로 500년 만에 초원의 유목민을 통합하고 출현한 국가였다.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돌궐 제국은 553년에 토문土門이라는 이름의 수령이 몽골리아에 있던 몽골족 국가 유연柔然을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이다. 돌궐은 몽골계인 유연의 예속 하에 있던 집단으로 알타이 지역에서 야금 일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돌궐족은 알타이 산지에서 나는 철광석을 제련하는 등 금속가공에 뛰어난 솜씨를 보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돌궐 제국의 건설자인 토문이 죽자 그 영토는 아들 무한과 아우 이스테미에게로 나뉘어졌다. 카간의 칭호를 쓴 아들은 몽골 지역을 차지하여 동돌궐이 되었고,‘ 야브구’라는 칭호를 사용한 이스테미의 나라는 서돌궐이 되었다. 서돌궐은 중앙아시아 일대에 위치하였다.

 

서돌궐은 곧 사산조 페르시아와 협력하여 헤프탈Hephtal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어서 동돌궐은 동쪽으로 거란족을 복속시키고, 북으로 바이칼호에 이르렀다. 남으로는 고비사막을 넘어 당시 북주·북제로 나뉘어 있던 북중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당시 북주와 북제는 서로 대립하였기 때문에 북방의 돌궐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경쟁적으로 재물을 갖다 바쳤다.

그러나 중국에 당나라가 들어서자 상황은 급속히 바뀌기 시작하였다. 돌궐의 내분이 격화되고 자연재해가 겹쳤기 때문이다. 결국 당나라는 쇠약해진 돌궐, 초원의 대제국을 일거에 무너뜨려 버렸다.

 

그러나 돌궐은 중국의 지배를 받은 지 반세기 만에 놀랍게도 제국을 부흥시켰다. 만리장성 주변 내몽골 지방에 살면서 당나라의 감시와 통제를 받던 부족민 사이에서 670년대 후반부터 독립을 향한 움직임이 나타나 돌궐 제국을 재건한 것이다. 이것이 제2 돌궐제국이다.

 

다시 일어난 돌궐 제국은 752년에 그 지배하에 있던 세 부족의 반란으로 무너졌다. 세 부족 가운데 하나인 위구르가 몽골의 모든 유목민을 제압하고 돌궐의 뒤를이어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위구르족은 9세기 중반에 몽골고원에서 천재가 빈발한 때에 유목민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망하게 되었다. 돌궐의 후예들은 차츰 서진하여 이란 지역에 왕조(가즈나 왕조)를 세우기도 하고 이슬람을 받아들여 이슬람의 노예와 용병 노릇을 하였다. 그러다가 동로마 제국으로 침투하여 셀주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건설하였다.

 

 

⊙ 몽골족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단군세기』 4세 오사구단군 조에는 단군이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한蒙古里汗’에 봉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BCE 2137년의 일이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에는‘ 동호東胡’라는 이름의 족속이 나온다. 동호는 만리장성 너머 몽골과 만주 일대에 걸쳐 살던 사람들을 포괄적으로 부른 명칭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몽골족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국시대에 동호가 주로 교류한 나라는 연燕나라였는데, 동호는 4세기에 매우 세력이 강했던 것이 분명하다.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동호의 인질로 잡혀 있었다는『 사기』의 기록이 그것을 말해 준다. 동호 역시 흉노처럼 야금술과 궁술, 기마 전투술이 뛰어났고, 진개는 인질로 있는 동안 동호의 앞선 기술을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연나라가 쌓은 장성은 바로 이 동호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몽골 일대의 동호는 한대에 흉노의 묵돌선우에게 패한 후(BCE 209년) 약화되었다. 그 후 동호라는 이름은 사서에서 사라지고 선비鮮卑, 오환烏桓으로 바뀌어 등장한다. 선비보다 약했던 오환은 삼국시대 조조의 공격으로 붕괴되어 조씨 권력의 기동부대로 전락하였다. 이것이‘ 오환돌기烏桓突騎’ 부대이다.

 

선비족의 영웅이었던 단석괴 이후 선비 제국이 붕괴되면서 여러 부족(탁발拓跋, 모용慕容, 유연柔然, 거란契丹, 실위室韋)이 분립하였는데 이들 중 앞의 세 부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강력한 국가를 건립하였다. 거란은‘ 키탄’이라 불리는데, 거란의 영웅 야율아보기는 10세기 초 요나라를 건국하였다. 야율아보기는 907년 천제를 거행하고 칭호를‘ 탱그리 카간’이라 하였다. 거란족에게도 카간은 천제의 대행자인 천자였다. 야율아보기는 곧 몽골고원을 장악하고 발해(대진국)을 멸망시켰다. 거란 제국은 이어서 현재의 북경과 대동 일대에 이르는 북중국을 장악하고 송나라와 대치하였다. 거란 제국은 거란족 외에 몽골계 유목민, 한족, 발해 유민, 여진족, 탕구트인 등 다양한 족속을 포괄하였다. 또 중국과 달리 발해의 5경 제도를 계승하였다. 거란 제국은 12세기 초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금나라에 의해 계승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금나라는 여진족과 거란족의 연합정권이었기 때문이다.

 

몽골 제국을 세운 칭기즈칸(1162~1227)은 실위족에 속한다. 그러나 실위는 다양한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칭기즈칸이 등장하기 이전에 몽골초원 지역은 투르크계와 몽골계, 퉁구스계가 뒤섞인 다양한 집단의 상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집단 가운데‘ 울루스’가 세력이 컸는데, 칭기즈칸이 속한 울루스는‘ 몽골울루스’였다. 칭기즈칸은 19세에 몽골 울루스의 칸으로 선출되고 곧 동쪽의 타타르 울루스, 중앙의 케레이트 그리고 서쪽의 나이만과 메르키트 등 여러 울루스를 차례로 격파하고 통합하였다. 마침내 1206년 쿠릴타이(몽골 족장회의)에서 몽골 집단 전체의 카간으로 추대되었다.

 

칭기즈칸은 곧 눈길을 초원 밖으로 돌려 중앙아시아 일대를 정복하였다. 그의 아들들은 1222~1223년에 아조프 해 연안에서 러시아 군대와 싸워 이기고 1223년에는 키에프 공국을 공격하였다. 1227년 칭기즈칸이 사망하자 그 후계자들은 정복의 범위를 더 넓혔다.

 

칭기즈칸의 후예인 오고타이(2대 카간 1229~1241), 구유크(3대 카간 1246~1248), 몽케(3대 카간1251~1259), 쿠빌라이(4대 카간 1260~1294)는 정복사업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북부의 금나라를 정복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금의 멸망 후에는 네 방향으로 정복사업을 추진하였다. 유럽 원정(1236~242)을 수행한 다음 중동을 공격하여 카프카즈 지역과 셀주크 투르크를 속국으로 삼고(1243) 바그다드를 점령하였다.(1258) 고려도 1236~1241년에 걸쳐 몽골의 공격을 받아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1279년 남송을 멸망시킨 쿠빌라이는 섬나라인 일본과 자바까지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동남아시아는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몽골 제국은 그 지배 지역이 매우 이질적이고 다양하였다. 그러나 효율적인 역참제를 통해 결속을 이뤄 낼 수 있었다. 몽골의 역참제는 제국 전역을 연결하는 조밀하고 광대한 교통 네트워크였다. 동으로 고려와 만주, 서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이란과 러시아에 이르는 교통로 상에 역참을 두었고, 남쪽으로는 안남과 버마까지 연결되었다. 역참에는 운송 수단인 말과 수레, 배를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숙박시설도 있었고 패부牌符라는 증명서만 있으면 얼마든지 역참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문서와 서신, 관원과 공적 물자가 신속하게 이동되었다.

 

이러한 역참제를 기반으로 몽골 제국은 상업을 진흥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몽골제국은 중국의 전통적 한족 왕조와 달리 상인을 우대했고 국제무역을 적극 지원했다. 심지어‘ 오르톡’이라는 상인조합에게 행정을 포함한 다양한 국가사업을 맡겼다. 또 통행세를 폐지하고 통상로를 안전하게 만드는 데 신경을 썼기 때문에 몽골 제국 시대에는 동서양 간에 교류가 매우 활발하게 이뤄졌다.

 

몽골 제국은 종교인에게도 관용정책을 취하여 각 종교의 지도자에게 면세 혜택까지 부여하였다. 페르시아나 중국 측 기록에도 남아 있듯이 이슬람·기독교·유대교·유교·불교·도교의 사제나 승려가 그러한 혜택을 누렸다.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여태까지 국가의 탄압을 받던 소수 교단이 활력을 얻게 되었다. 중국과 중동에서는 네스토리우스파가 활발한 활동을 했고 유럽의 가톨릭도 적극적으로 선교사를 몽골 제국으로 파견하였다.

 

이러한 몽골 제국의 개방적인 동서교류 정책은 인류 역사상 어느 시기보다도 활발한 인적 왕래, 종교의 전파, 상품의 확산을 가져다 주었다. 이것이 소위‘ 팍스 몽골리카’의 실체였다. 이 시대에 위대한 여행기들이 나온 것은 이러한 팍스 몽골리카를 배경으로 한 것임이 틀림없다.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는 서양인으로서 몽골 제국에 가서 쿠빌라이 칸의 신하로 살다가 귀국하여 견문록을 남겼다. 반대로 동에서 서로 가서 여행기를 남긴 사람들도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장춘진인長春眞人(1148~1127)이다. 산동성 사람으로 도교의 도사이던 그는 칭기즈칸의 부름을 받고 몽골군의 원정에 종군하였다. 알타이산을 넘어 천산북로를 따라 사마르칸트에 갔고 후에 남쪽으로 힌두쿠시 산맥을 넘었다. 장춘진인의 기행문은 『장춘진인서유록長春眞人西遊錄』으로서 13세기 몽골 제국 시대의 동서교통에 대한 귀중한 자료이다.

 

이처럼 몽골이 주도하던 13~14세기 때에는 동서 간에 활발한 교류가 있었고, 이러한 교류는 다시 근대를 열어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요컨대 몽골 지역을 중심으로 한 북방 지역에서 일어났던 흉노, 선비, 돌궐, 몽골 등 여러 족속은 상고 시대에 우리 민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사의 흐름을 이끈 주도 세력으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원문: 상생출판 환단고기)

 

 

증산도 열어나가는 상생 후천개벽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리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진리의 해답을 꼭 찾으시기를 기원드립니다.

무료책신청 여기를 꾹 눌러주세요. ^_^

클릭 ->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