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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정치권력의 대립 훈구파(공신세력)와 사림파(유림儒林, 선비세력)

 

 

 

 

 

 

 

 

 

 

 

 

 

조선왕조시대 국가를 움직였던 양대세력으로 공신세력 훈구파와 유림(儒林), 즉 선비세력 사림파로 구분한다.

태조 이성계의 조선 창업에 이바지한 유림(儒林)의 학자와 무장(武將)이 훈구공신이 되었다.

 

훈구(勳舊)는 말 그대로 오랫동안 국가와 임금을 위하여 공(功)을 세운 사람 훈구공신(勳舊功臣) 또는 훈구대신(勳舊大臣)이라 한다. 사림(士林)은 유림(儒林)이라고도 하며, 선비세력을 말한다.

 

 

 

조선 건국 이후 이방원의 1, 2차 왕자의 난에서 활약한 인물도 공신첩이 주어졌다.

조선 3대 왕 태종은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공신을 어느 정도 정리해서 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세종 때까지도 훈구공신이 활동하였으며, 조선 건국 이후 유림의 선비들도 과거제도를 통해 지적으로 조정에 들어왔다.

 

 

 

 

 

 

 

 

 

 

 

 

공신(功臣)은 건국, 반정, 전쟁, 반란 등에서 국가와 임금을 위해 공을 세운 신하를 말한다.

단종 때까지만 해도 세종과 문종의 유지를 받든 고명대신 외에는 특정세력이 정치권력을 독점하지 않았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독점하고, 어린 단종을 내쫓아 왕위를 찬탈하면서 특정세력이 권력을 독점한다,

세조 즉위에서 성종 즉위까지 수많은 공신이 양산되었고, 그 과정에서 훈구공신(勳舊功臣)세력이 권력을 독점했다.

 

세조가 남발한 공신첩으로 권력을 장악한 훈구공신은 예종과 성종 초기에 임금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지게 된다.

성종은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사림(士林, 선비)세력을 등용한다.

 

 

 

 

성종은 경상도 선산부사 김종직을 조정으로 불러들였고, 점차 사림세력이 조정의 청요직을 맡는다.

김종직은 고려말 정몽주에서 길재로 이어지는 조선 유림(선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김종직은 성종의 지원으로 사림파 세력의 정계진출에 기반이 되었고, 세력이 커지면서 명실공히 훈구파(공신세력)와 맞서는 정치세력으로서의 사림파(선비세력)로 자리 잡았다.

 

 

 

 

 

 

 

 

 

 

 

 

 

훈구파는 자신과 세력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유림의 선비세력, 즉 사림파와 대립했고, 때론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훈구파와 사림파는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의 충돌이었고, 사림파 역시 권력을 잡으면 보수 기득권세력이 되었다.

 

 

훈구파(공신세력과 외척세력)와 사림파(유림의 선비세력)의 충돌로 사람파가 큰 화를 입은 것을 사화(士禍), 즉 선비들이 입은 재앙이라 한다. 조선 시대 4대 사화는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 1504년(연산군 10) 무오사화,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가 있다.

 

 

 

 

 

조선왕조시대에 훈구, 사림 등은 본래부터 사용하던 말이었고, 근대에 와서 훈구파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림파라 하였다.

정치세력으로 공신세력(훈구파)과 선비세력(사림파) 외에 외척세력도 있다.

 

 

사류(士類)를 배경으로 한 정치세력 훈구파, 사림파 등은 이병도가 근대에 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다.

일제 식민사학계의 거두 이병도는 한국사대관(조선사대관, 국사대관)에서 조선이 3백 년 동안 당파싸움하다 결국 패망했다고 주장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시각으로 쓴 조선사대관』(『한국사대관』, 『국사대관』)에서 이병도는 조선의 사림과 훈구공신 등 정치세력을 훈구파(勳舊派), 절의파(節義派), 청담파(淸談派), 사림파(士林派)로 구분했다.

 

 

 

 

 

 

 

 

 

 

 

 

 

조선왕조는 세계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단일 왕조로 5백년을 이어간 나라다.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문제가 되는 임금과 관료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임금과 선비를 비롯한 백성이 한마음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학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은 뛰어난 성과를 만들었다.

 

 

훈구파의 권력독점과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성리학적 이념으로 도덕성을 회복하는 정치를 하자는 세력이 사람파다.

사림파는 선조 즉위 후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지만,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등으로 분열하여 대립한다.

 

 

 

 

조선 시대 초기에 유학을 신봉하는 무리라는 유림(儒林), 선비의 무리라는 사류(士類)와 선비의 집안이라는 사족(士族)으로 불렸다.

사림파는 사족, 사류, 유림보다 더 큰 집단을 의미하며, 정치세력과 재야의 선비세력을 모두 포함한다.

 

 

 

굳이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누어서 그렇지 임금을 보좌한 문무 대신을 이르는 말이다.

소수 무장(武將)을 제외하면, 대다수 사림(士林, 유림儒林)이 공(功)을 쌓아 훈구파가 됐다.

공신세력 훈구파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나라와 임금에게 공을 쌓아서 얻은 벼슬로 세력화하여 권력을 독점하려고 시도하거나, 권력을 독점하면서 여러 폐해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명종 때 윤원형 일파 등 외척세력이 권력을 전횡하였고, 문정왕후와 윤원형, 정난정이 죽으면서 사림파 다시 살아난다.

선조 즉위 후는 사람파가 권력의 주도권을 잡았고, 사림세력은 동인과 서인으로 내부분열하였다.

서인 세력이 인조반정을 주도하여 권력을 잡았고, 서인은 숙종 때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였다. 

 

 

 

붕당정치의 전개와 폐해 -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

http://gdlsg.tistory.com/1572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20일(1392년)

지금은 평민들과 섞여 살면서 혹은 고상한 말과 미묘한 이치로써 사류(士類)들을 현혹하기도 하고....

 

 

 

『정종실록』 3권, 정종 2년 1월 28일(1400년)

내가 부덕한 몸으로 신민(臣民)의 위에 자리하여, 종실(宗室), 훈구(勳舊), 대소 신하의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다함에 힘입어서 태평에 이를까 하였더니....

 

 

 

『태종실록』 17권, 태종 9년 4월 2일(1409년)

양촌(권근)은 국가의 보배요, 유림(儒林)의 사표인데..... 

정탁은 타고난 기질이 참되고 순수하며, 마음잡음이 충후하여 우뚝한 세족(世族) 후손이요, 위대한 유림(儒林)의 종장(宗匠)이라....

고신(告身)을 서경(署經) 하는 법은 비록 아래 사람에게 있으나 오히려 또한 족속(族屬)과 적서(嫡庶)를 분변(分辯)하여서 사류(士類)를 말게 하는데....

전제(田制)를 설정한 것은 본래 사족(士族)을 우대하고 염치를 기르기 위한 것입니다.

경은 태상왕(이성계)의 훈구(勳舊)로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충성을 다하였고....

 

 

 

『세종실록』 22권, 세종 5년 11월 15일(1423년)

이제부터 산학박사는 사족(士族)의 자제로....

 

 

 

『세조실록』 14권, 세조 4년 9월 17일(1458년)

의정부, 육조와 충훈부에서 다시 정인지의 죄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그날 정인지가 나에게 너라고 칭하며 말하기를, '그같이 하는 것을 모두 나는 취하지 않겠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비록 술이 몹시 취하였다 하더라도, 옛사람이 이르기를, '술에 취하면 그 본정을 드러내 보인다.'라고 하였으니, 정인지가 한 말은 너무 방자하였다. 그러나 훈구(勳舊)이기 때문에 가벼이 벌을 줄 수는 없다." 하였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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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죽풍 2017.01.12 22: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파는 어느시대를 막론하고 당쟁을 불러옵니다.
    얼마나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지가 중요하겠죠.
    잘 보고 갑니다. ^^

조선왕조 시대 3대 기인(奇人) - 매월당 김시습, 북창 정염(정북창), 토정 이지함

 

 

 

 

 

 

 

 

 

 

 

 

 

 

 

기인(奇人)은 일반인과 함께 세상을 살지만, 말과 행동, 정신과 사상이 보통사람과 다른 사람을 일컫는다.

기인은 일반인보다 가진 재주가 신통하고 비범한 사람이라 하여 이인(異人)이라고도 말한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 세종 17~성종 24), 북창 정염(정북창, 1506~1549, 중종 1~명종 4), 토정 이지함(1517~1578, 중종 12~선조 11)을 조선왕조 시대 3대 기인이라 부른다.

 

 

 

 

 

 

 

 

 

 

 

 

 

 

조선왕조 시대 3대 기인, 비운의 천재 첫 번째 기인은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소문이 자자했던 매월당 김시습은 임금의 부름을 받고 5살에 궁궐에 들어간다.

어린 김시습이 쓴 글을 보고 세종대왕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왕조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 문인 매월당 김시습은 시, 소설, 평문 등 수많은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조선왕조 최고의 사상가 매월당 김시습의 사상은 성리학(유교), 불교, 단학(도교) 등 다방면에 무불통지(無不通知)한 달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매월당 김시습의 정신과 사상은 동양의 철학과 사상, 즉 유불선(유교 불교 도교)을 넘나드는 폭넓은 세계관을 가지고 이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세조)의 왕위찬탈에 비분강개한 매월당 김시습은 끓어오르는 울분을 절제하며 조선 팔도를 유랑하면서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방랑으로 점철된 삶을 산다.

 

 

 

 

매월당 김시습은 옛글을 모방하여 세종대왕이 반포한 훈민정음 28자는 신라 눌지왕 때 박제상(363~419)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징심록(澄心錄)에서 발췌했다고도 한다.

 

매월당 김시습은 박제상이 저술한 징심록과 박제상의 아들 백결선생 박문량이 저술한 금척지(金尺誌)를 보고 징심록 추기(澄心錄追記)를 썼다. 징심록의 한 부분이 부도지다.

 

 

 

 

 

조선 시대 3대 기인으로 꼽히는 매월당 김시습은 문학가이며 사상가요, 철학가이며 종교인이다.

조선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와 신귀설, 태극설, 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 법화경별찬, 고금제왕국가흥말론, 위치필법삼대론 등을 비롯한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매월당 김시습의 사상과 철학이 담긴 여러 저서에는 인간의 마음, 우주의 이법, 귀신의 세계, 유불선 종교 철학, 도덕과 가치관, 국가와 사회와 가정의 질서, 성인과 임금과 신하 등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것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조선왕조 시대 3대 기인, 비운의 천재 두 번쨰는 북창 정염(정북창(1506~1549)이다.

 

재위 8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승하한 조선 12대 왕 인종은 북창 정염(정북창)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다.

조선 11대 왕 중종 때 개혁정치를 했던 정암 조광조는 동소문(혜화문) 밖에서 가죽신을 만드는 갖바치를 자주 찾아가서 학문적 고견을 들었다.

 

 

조광조와 갖바치는 양반과 천민이라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을 터놓은 벗이었으며, 조광조에게 갖바치는 정신적 지주였다.

조광조는 갖바치를 왕세자(인종)에게 후일에 반드시 크게 써 줄 것을 건의하였다. 그래서 인종은 세자시절부터 병풍 위에 영의정 갖바치, 좌의정 서경덕, 우의정 정북창 등 삼정승의 이름을 써놓고 있었다.

 

 

 

 

 

북창 정염(정북창)의 아버지 정순붕은 조선 13대 왕 명종이 즉위한 해에 일어난 을사사화(1545년)에서 윤원형 등 소윤 세력과 결탁하여 윤임 등 대윤 세력을 숙청하는 일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용호대사로도 불리는 정북창(정염)은 조선왕조 시대 도교의 내단 사상, 즉 단학의 중시조 또는 비조로 모셔지고 있다.

 

북창 정염(정북창)은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다. 

따로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지 않았으며, 책을 한두 번 보면 모두 외웠고, 천문, 지리, 의약, 복서, 율려, 산수, 한어(漢語)와 배우지 않은 외국어도 능통했다. 맑은 영혼으로 신(神)에 통했으며, 선가(禪家, 불교)의 육통법을 시험하기 위해 입산 3일 만에 유불선(유교 불교 도교)에 정통하였다.

 

 

 

 

정북창은 애초에 관직에 뜻이 없었으나 아버지 정순붕의 강압적인 권유로 과거(사마시)에 응시하여 잠시 관직에 있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소윤 세력은 명종을 허수아비 왕으로 만들고 부정부패와 매관매직 등 권력을 전횡한다.

 

아버지 정순붕 역시 소윤의 윤원형 일파에 협조하여 대윤 등 사림세력을 죽이는데 앞장선 공로로 우의정까지 올랐다. 

북창 정염(정북창)은 불의한 세상의 모습을 보고 속세연을 끊는다.

 

 

 

산속에 은거하면서 한양 쪽은 보지도 않기 위해 문과 창문을 모두 북쪽으로 내어 살았다.

정염의 호가 북창(北窓)이 된 바로 이 때문이다.

도교(단학)의 신선술 수련서인 『용호비결(북창비결)』을 저술하였고, 미래의 예언을 담은 『궁을가』를 썼다.

 

 

 

미수 허목(허미수)은 정북창을 "정염(정북창)은 남과 더불어 말할 때는 단 한마디라도 공자의 학문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니, 이미 그 깨달음은 중(선禪)과 같고, 그 행적은 노자와 같았으나, 사람을 가르치는 데는 한결같이 성인으로 종(宗)을 삼아서였을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조선왕조 시대 3대 기인으로 비운의 천재 세 번째는 토정(土亭) 이지함(1517~1578)이다.

 

토정 이지함은 목은 이색의 7대손으로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이개는 종증조부(증조할아버지의 형제)가 된다.

새해 초가 되면 사람들은 한 해 운수를 토정비결을 보면서 길흉화복을 알아본다.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공부한 토정 이지함은 성리학(주자학)을 비롯하여 주역(역학), 천문, 지리, 산술, 노장사상(도교), 불경, 의약, 복서 등 다양한 학문에 통달한 박학다식한 천재였으며, 뛰어난 재주를 겸비한 기인이었다.

 

 

 

 

 

명문 집안 양반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종증조부 이개는 단종복위운동에 연류되어 멸문지화를 당했고, 아버지 이치도 갑자사화에 연류되어 유배되었고, 명종 때 당시 사관이었던 친구 안명세는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를 비판하는 글을 써놓아 참형을 당했다.

 

처가집은 조선 2대 왕 정종의 후손이었으나, 역모에 연류되어 장인이 능지처참을 당하면서 처가도 몰락한다.

평탄하지 않은 인생사에 토정 이지함은 조선 팔도를 유랑하며 솥으로 된 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고 남루한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토정 이지함이 벼슬길에 나선 것은 그가 57세 되던 1573년(선조 6)에 이르러서다.

선비로서 학식과 인품이 뛰어난 토정 이지함은 주변의 천거로 포천현감으로 발령받는다.

 

포천 현감으로 부임하자 산해진미를 차려 놓은 밥상을 보고, 백성이 먹는 평범한 밥상을 차려 올리라고 하였다.

한양 마포 나루 인근에서 흙담 움막집에서 지냈다 하여 토정(土亭)이란 호가 붙었다.

 

 

 

 

 

조선 팔도를 방랑할 때 소금을 만들어 팔고, 물고기를 잡아 팔고, 바가지를 만들어 파는 등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직접 실험해 보았던 염업과 수산업, 수공업 등으로 백성을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획기적인 대책을 조정에 건의하기도 했다.

충청도 아산현감으로 있을 때 세계 최초의 사회복지기관인 걸인청을 만들어 빈민구제에도 힘썼다.

 

 

 

 

토정 이지함의 고손자 이정익은 고조부의 유고를 모아 토정유고를 간행했다.

당대 최고의 선비(학자)였던 율곡 이이와 남명 조식 등 많은 학자와 교류하였고,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뛰어난 학자이며 기인이었다.

 

임진왜란 의병장이며 학자인 조헌과 천민출신의 대학자 서기, 대학자 구봉 송익필(송구봉) 등도 토정 이지함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며, 조카 이산해는 숙부인 이지함에게 학문을 배워 영의정에까지 오른다.

 

 

 

 

격변의 시기에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을 제시한 토정 이지함은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현실에 적용한 시대를 앞서 간 실학사상의 선구자이며 실천가로 세계 최초의 국부론 주창자라고도 한다. 

 

토정비결은 토정 이지함 사후 3백 년이 지나 일반백성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토정비결이 토정 이지함이 저술한 것이 아니라는 의견이 있다.

 

 

 

 

 

조선 시대 3대 기인 매월당 김시습, 북창 정염(정북창), 토정 이지함이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그들의 뛰어난 학문세계는 유학에 국한되지 않고, 유교 불교 도교를 넘나드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과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가 권력을 전횡하며 국정을 농단하던 불운한 시대에 태어나 한평생 세상을 등진 그들은 타고난 재주와 학문을 미처 세상에 펴보지도 못한 비운의 천재들이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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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6.11.08 06: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선 3대 기인의 대해 잘 보고 가네요

봉건주의체제 조선왕조시대 국정농단(國政壟斷)과 권력 정횡(權力專橫)

 

 

 

 

 

 

 

 

 

 

 

 

 

 

 

 

519년의 역사를 지속한 봉건주의적 사회였던 조선왕조시대 사리사욕을 위해 권력을 전횡하고 국정을 농단한 일부 왕비와 특정 세력과 위정자가다.

 

 

흔히 봉건주의를 세습체제사회라고 하고, 봉건왕조시대가 끝나고 출현한 현재의 민주주의(공산주의, 자본주의)를 선출체제사회라고 한다. 전혀 다른 이질적인 사회구조 같지만, 최고권력자와 위정자 등 일부를 선출하는 방식을 제외하면 봉건왕조시대나 민주주의 사회나 대동소이하다.

 

 

 

 

 

조선왕조시대 건국 이념인 백성을 위한 애민(愛民)과 위민정치(爲民政治)와 국민이 주인인 현재의 민주공화국이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도 있으나, 두 시대가 지향하는 바는 백성과 국민을 위한 정치구조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은 예나 지금이나 국정, 즉 정치의 제1목표다. 

 

 

그러나 부(경제)와 권력은 언제나 유착되어 있고, 국가를 움직이는 두 수레바퀴가 되어 현재도 상당 부분 세습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바뀌지 않는 사실은 조선왕조시대나 현재의 민주주의 사회나 권력의 정점에서 무소불위를 권력을 휘두르는 최고권력자와 특정 세력과 위정자, 또 그 옆에서 기생하며 온갖 아첨과 음해 부정부패와 사리사욕을 일삼아 호의호식하는 거머리 같은 인간들이 있다.

  

 

 

 

 

 

 

 

 

 

 

 

 

 

 

 

 

조선왕조시대 공식적인 국정운영체제인 수렴청정을 이용하여 국정을 농단하고 권력을 전횡한 조선왕실의 문정왕후, 정순왕후 김씨, 조대비 등이 있다.

 

또, 무리를 형성하여 국정농단과 권력을 전횡한 훈구(공신)세력, 외척세력, 사림(士林,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등)세력 등과 한명회, 임사홍, 김자점, 유자광, 이이첨, 홍국영, 김좌근, 이완용 등과 같이 국정을 농단하고 권력을 전횡한 인물도 있다. 

 

 

 

 

조선왕조시대 왕의 위상은 국가와 동격이었으며, 국가 권력의 구심점으로서 백성에게는 정신적인 지주와 같았다.

왕과 신하들은 국정의 기본 방향을 부강한 나라와 백성(국민)을 위한 정치다.

 

그런데 그런 조선의 왕 중에 허수아비 왕으로 살다간 조선의 최고권력자가 있었다.

자신이 유약했던지 또는 자질과 능력이 부족했던지, 상대방이 강했다든지 또는 상대방에게 세뇌되었던지 간에 국정의 방향이 백성과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과 특정 세력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이 사유화된 모든 책임은 최고권력자 임금에게 있다.

 

 

 

 

 

 

 

 

 

 

 

 

 

 

 

 

정종, 명종, 경종,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 등 조선의 왕들이 왕이면서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고 해서 재위 시 치세(治世)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큰 흐름에서 보면 본인과 주변 인물에 의해서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던 왕들이다.

특히 조선 후기 외척 세력의 세도정치는 조선을 몰락하게 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다.

 

 

 

동생 정안대군(태종) 이방원에 의해 왕이 되어 재위 2년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 즉위했던 조선 2대 왕 정종,

어머니 문정왕후와 외삼촌 윤원형, 노비이며 기생출신 정난정에게 재위 내내 휘둘린 조선 13대 왕 명종,

장희빈의 아들로 태어나 노론과 소론의 권력 투쟁 속에서 재위 4년 만에 갑작스럽게 승하한 조선 20대 왕 경종,

안동 김씨, 반남 박씨, 풍양 조씨 세도정치에 희생양이 된 23대 왕 순조, 24대 왕 헌조, 25대 왕 철종,

대리청정이 끝나고도 중전 민씨와 그 일파,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꼭두각시가 된 26대 왕 고종, 27대 왕 순종 등이 있다.

 

 

 

 

 

 

 

 

 

 

 

 

 

 

 

 

조선왕조에서 허수아비 왕의 대명사가 된 왕은 11대 왕 중종대왕의 아들로 13대 왕으로 즉위한 명종대왕 이환이다.

명종은 중종의 2계비 문정왕후의 아들이다. 

 

 

1545년 명중의 즉위와 함께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 즉 소윤(小尹) 세력이 윤임 등의 대윤(大尹) 세력을 숙청하는 을사사화가 일어난다. 1547년(명종 2)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대윤의 남은 세력과 사림(士林, 선비)을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숙청하여 대윤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고 문정왕후와 윤원형, 정난정의 시대가 된다.

 

 

 

 

명종은 문정왕후와 소윤 외척 세력 윤원형, 정난정 등이 국정을 농단하고 권력을 전횡하던 1553년(명종 8) 나름의 왕권강화를 위해 중용한 인물이 자신의 왕비 인순왕후 청송 심씨의 외삼촌 이량이다.

 

명종이 변화를 꾀하기 위해 이량을 이조판서에 아들 이정빈을 이조정랑에 등용하였다.

잘못된 선택인지 인재가 없어서였는지 불행하게도, 이량과 이정빈 부자(父子)는 외척 세력이다. 명종의 처외삼촌 이량은 임금의 신임을 믿고 자신만의 력을 만들어 권력을 전횡하였고, 사리사욕과 부정축재로 유배되어 죽었다.

 

 

 

 

 

 

 

 

 

 

 

 

 

 

 

1565년(명종 21) 문정왕후 윤씨가 죽고, 윤원형과 정난정이 유배되어 자살하기까지 20년을 허수아비 왕으로 살았다. 

명종은 22년의 재위기간 내내 문정왕후 윤씨와 윤원형, 정난정의 국정농단과 권력 전횡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조선왕조시대에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난 왕으로 연산군과 광해군이 있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국가의 최고권력자로서 국정을 농단하고 권력을 전횡한 폭정으로 쫓겨난 임금이다.

 

다소 과대하게 포장된 면이 있지만, 폭정의 대명사가 된 연산군과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릴 여지가 있는 광해군은 반정 세력에 의해 권좌에서 끌려 내려왔다. 

 

 

 

 

 

 

 

 

 

 

 

 

 

 

 

대자연질서는 상극(相克)으로 발전과 성장을 하고, 상생(相生)으로 통일과 성숙을 한다.

선천(先天)은 자연질서가 상극(相克)의 질서로 돌아가 적자생존, 약육강식, 우승열패 하는 세상이다.

상극의 대자연질서는 만물이 분열하고 대립하지만, 서로가 창조적 경쟁을 하여 인류의 역사가 문명과 문화를 발전하고 성장시켜왔다.

 

 

대자연의 질서가 상극의 성장 시대를 마감하고 성숙의 시대, 상생(相生)의 자연질서로 전환할 때까지 우리가 보아온 부정적인 모습은 동안 지속할 것이다.  

 

 

 

 

 

자연의 질서가 춘하추동, 상생과 상극을 반복하듯 역사도 반복한다.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도 봉건주의적 왕조시대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시대에도 권력을 전횡하고 국정을 농단한 사례는 허다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고권력자가 있다.

그런데 최고권력자의 독단적인 국정운영과 위정자, 그리고 친인척, 주변 인물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권력을 전횡하지 않은 정권은 단 한 번도 없다. 부와 권력에 눈먼 자들의 부정과 부패는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것이고, 단지 경중(輕重)의 차이만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시대는 권력 행사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면, 근현대 민주주의는 권력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형태다.

즉,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사리사욕에 눈이 먼 허수아비 최고 통치권자와 위정자, 그리고 그들 권력에 빌붙어 국정을 농단하고 권력을 전횡한 이들에 대한 모든 책임은 그들을 선출한 국민에게 있다는 것이다.

 

 

 

 

국정농단(國政壟斷) - 나라의 정치를 함에서 국민(백성)이 근본이 되고 국가를 위해 정치를 해야 하는데, 국민(백성)과 국가는 내팽개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독점화, 사유화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표현. 

 

권력 전횡(權力專橫) - 권력을 쥔 자, 즉 최고권력자와 위정자, 그 옆에 빌붙은 거머리 같은 인간들이 사사로운 이익과 특정 세력의 위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독선적인 행위.

 

 

 

조선왕조시대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고 국정을 마비시킨 국정농단의 주범과 권력을 전횡한 하수인은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스스로 자멸의 길로 걸어갔으며, 때론 공멸의 위기로 몰고 갔다.

 

인간으로서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고, 오직 동물적인 욕구충족만을 위해 산 그들은 단 한 사람 예외 없이 권력의 입맛에 길들어진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법이 아닌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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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6.11.04 06: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선왕조 이야기 잘 보고 가네요

  2. 고프다 2016.11.05 00: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선왕조와 관련해서 너무 잘 보고 갑니다^^

조선 시대 민중신앙이 된 예언서 정감록 예언

 

 

 

 

 

 

 

 

 

 

 

조선 시대 예언서 정감록에 나오는 예언의 내용은 간결하다.

원본이 없는 정감록은 기본적인 내용은 같으나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는 이본(異本) 70여 종이 전한다.

 

정감록 내용은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예언이 덧붙여졌다.

이심(李沈), 이연 형제와 정감(鄭鑑) 세 사람이 말을 주고 받는 대화체로 엮어진 예언정감록 예언은 저자가 누구인지 만들어진 시기 또한 알지 못한다.

 

 

 

 

 

 

 

 

 

 

 

 

정감록이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널리 알려졌다는 것은 그때 만들어졌을 수도 있고, 그 이전에 만들어져 전해 오다가 조선 중기 이후 널리 퍼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감록과 조선 시대 기록을 비교해 볼 때 현재까지는 조선 중기에 만들어졌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나라의 흥망성쇠에 인류의 마지막 심판으로 이어지는 정감록의 예언은 여러 역모 사건을 거치면서 급기야 조선 후기에 금서로 정해진다. 

 

고달픈 백성의 삶은 조선 중기 이후 정감록은 민중에게 신앙처럼 여겨졌다. 정감록 예언에 나오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백성의 갈망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증명한다.

 

 

 

 

 

 

 

 

 

 

 

 

정감록은 동양사상(음양오행, 풍수지리 등)을 근거로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조선 시대 도참서(圖讖書, 참위서), 비기(秘記), 비결(秘訣)이다.

 

조선 시대 예언서 정감록에 나오는 예언의 내용은 구체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정감록 예언은 모두 파자(破字), 우의(寓意), 은어(隱語), 시구(詩句) 등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처럼 다소 난해하다.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 예언의 핵심은 정도령도 십승지도 아니다. 정감록 예언에서 3대 핵심 예언이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국가 운명 예언과 앞으로 인류가 맞이할 마지막 심판 예언 과정에서 과연 나를 살리고 죽이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내용이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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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라준 2016.07.02 09: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감록이 뜻하는 것이 무언인지 정말 궁금하네요.
    잘 보고 갑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2. 뉴클릭 2016.07.02 2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잘 보고 갑니다 ^^
    의미있는 오늘이 되셔요!!

  3. 행복생활 2016.07.03 00: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이야기 잘 보구 갈게요~

환단고기의 저자들

안함로 , 원동중 , 이암 , 범장 , 이맥

 

 

 

 

안함로는 신라 진평왕 때의 도통한 승려이다. 성은 김씨이고, 안홍법사, 안함법사, 안함태安含殆 화상 등으로 불린다. 불교가 흥했던 신라의 대표적 고승 열 분을 기리는 신라 십성十聖 가운데 한 분이다.


23세(601, 진평왕 23) 때 수나라로 가서, 열반에 이르는 십승十乘의 비법과 심오한 불교 경전과 진문眞文을 공부하고 5년 후 서역의 승려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일찍이 세속 너머의 세계에 뜻을 두었던 안함로는, 사물에 통달하고 지혜가 밝아, 번뇌의 속박을 벗어나 가고 머무름을 뜻대로 하였다. 또한 물 위를 걷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범상치 않은 신통력을 보였다고 한다(『해동고승전』). 이로 보건대, 그는 신교神敎의 선맥仙脈을 계승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삼성기 상』 서두를 통해서도, 안함로는 불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유불선儒佛仙과 상고시대 신교 문화를 회통한 당대의 고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선덕여왕 9년(640) 만선도량萬善道場에서 62세로 입적하였다.

 

 

 

 

원동중에 대한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세조가 팔도 관찰사에게 수거하도록 유시한 도서 목록(『세조실록』)에 안함로와 더불어 『삼성기』의 저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이전의 인물임은 분명하다. 이유립은 원동중을 고려 때 인물로 비정하였다.

 

 

 

 

고려사』 「열전」에 오를 정도로 유명한 인물인 행촌 이암은 고려 25대 충렬왕 때 고성 이씨 이우李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행촌이란 호는 자신이 유배되었던 강화도의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암은 뛰어난 학자와 관리가 배출된 고성 이씨 집안의 9세손이다. 증조부 이진李瑨은 고종 때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학사를 역임하였고, 조부 이존비李尊庇 역시 과거에 급제하여 문한文翰학사, 진현관進賢館 대제학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부친 이우李瑀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나 문음제를 통해 경상도 김해와 강원도 회양의 부사를 지냈다.

 

『태백일사』 「고려국본기」에 의하면, 이존비는 환국과 배달의 역사에 대해 근본을 통하고 환단사상에 대해 깊은 안목을 가진 대학자였다. 할아버지 이존비의 정신을 그대로 전수받은 후손이 바로 행촌 이암이다.

 

이암은 10세 때 아버지의 명을 따라 강화도 마리산의 보제사에 들어가 3년 동안 유가의 경전과 우리 고대사에 대한 기록을 탐독하였다. 비록 십대의 어린 나이지만, 그때 그는 외래풍이 뒤덮고 있는 고려를 그 옛날처럼 동방의 맑고 깨끗한 나라로 일신하리라는 큰 뜻을 품게 되었다. 그가 당시 마리산 꼭대기의 참성단에 올라 지은 시에서 이것을 느낄 수 있다.

 

17세(1313)에 문과에 급제한 이암은, 고려가 원나라에게 내정 간섭을 받던 시기의 여덟 국왕 가운데 여섯 분을 모시면서 격동의 삶을 살았다. 충선왕 때 나라의 관인을 관장하는 직책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두 차례 유배를 당하고, 왕의 책봉을 위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후 수년 동안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62세(1358년) 때 공민왕의 부름에 환도하여 오늘날의 국무총리 격인 수문하시중 자리에 올랐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한 개혁군주이다. 그러한 공민왕의 곁에 이암이 있었다. 문하시중이 된 그 다음 해 홍건적이 침입하자, 이암은 서북면西北面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가 되어 적군 4만 명을 격퇴시켰고, 1년 후 홍건적의 2차 침입 때는 경북 안동으로 피난가는 공민왕을 호종하였다.

 

당시 고려 조정은 임금 앞에서도 자신을 ‘신臣’이라고 말하지 않을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친원파의 간신으로 가득하였다. 하지만 이암은 청렴결백하여 사사로이 재물과 권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홍건적을 격퇴하고 왕을 호종한 공로로 좌정승에 제수되기도(1361) 했지만, 공민왕의 부름에 응한 지 5년 만에(1363) 사퇴하고 야인이 되었다.

 

행촌에게는 고려와 조선의 여느 정치가, 학자와는 남다른 면모가 있었다. 그는 어릴 때 유학 서적뿐 아니라 동서 문화의 원류인 신교 사서를 탐독하여 신교의 삼신문화에 정통하였다. 첫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3년을 보낼 때도 우주의 이치와 천문, 풍수, 지리 등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그리고 유배에서 풀려나(1335) 천보산 태소암에서 1년간 머물 때, 소전素佺거사로부터 인류 문명의 황금시절이었던 환단(환국-배달-고조선)시대를 기록한 고서적들을 전수받았다. 신교문화에 통한 이암을 알아본 소전거사가 석굴 속에 감춰져 있던 사서들을 전해 준 것이다.

 

이암은 나중에 그것들을 근거로 『단군세기』를 쓰고, 당시 소전과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환단시대의 도학을 논한 『태백진훈太白眞訓』을 지었다. 이때 복애거사 범장과 청평거사 이명도 소전거사에게 비기秘記를 전수받아, 범장은 『북부여기』를, 이명은 『진역유기』를 저술하였다. 이 사서들은 『단군세기』와 함께 한민족의 상고 역사와 문화의 본래 면목을 드러낸 소중한 문헌들이다.

 

이암이 언제부터 『단군세기』를 집필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단군세기』 서문을 보면, 그는 67세(1363)에 사직에서 물러난 후 강화도로 건너가 선행리 홍행촌에 해운당海雲堂을 지어 기거하면서 『단군세기』의 마지막 손질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해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민족의 현실을 통탄하며 역사를 똑바로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 웅변하는 『단군세기』 서문에서 이암은 ‘인간은 어떻게, 왜, 무엇을 위해 생겨나는가’, ‘인간으로서 가장 멋진 삶은 무엇인가’ 등의 의문에 대해 명쾌한 필치로 답하고 있다. 인성론을 중심으로 신교의 역사관을 정리한 이 서문은 대학자로서의 지적인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된 만고의 명문장이다. 행촌 이암은 실로 동방 한민족의 역사를 유교사관도 불교사관도 아닌 한민족 고유의 신교사관으로 저술한, 신교사관의 정립자이다.

 

 

 

 

고려 말에 금성錦城(현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난 범장(?~?)은 여말 충신으로 잘 알려진 정몽주의 제자이다. 호가 복애伏崖라 하여, 복애거사로 불리었다.

 

그의 증조부 범승조范承祖는 남송南宋의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냈는데 원元에 의해 남송이 멸망하자(1279) 고려에 망명하였다. 조부 범유수范有障가 여진족 정벌에 공이 있어 금성군錦城君에 책봉된 것을 계기로, 금성을 본관으로 삼으면서 금성錦城 범씨范氏가 되었다.

 

공민왕 18년(1369)에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윤德寧府尹에 이어 낭사읠舍의 책임자인 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을 지냈다. 그후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사관仕官의 뜻을 꺾고, 뜻을 같이하는 70여 명과 함께 만수산萬壽山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조선의 태조와 태종이 여러 차례 벼슬을 권했으나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키며 끝내 출사하지 않고 고향(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 복만마을)으로 내려와 성리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중국 서적 『고려사高麗史 사적개요史籍槪要』에 의하면, 고향에 돌아온 그가 노닐던 곳인 ‘복암伏岩’에서 이름을 따 자신의 호 ‘복애’를 지었다.

 

저서로는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도학과 충절을 지킨 신라와 고려의 인물을 소개한 책), 『동방연원록東方淵源錄』, 그리고 원천석元天錫과 함께 편찬한 『화해사전華海師全』(정몽주의 스승인 신현申賢의 행적과 고려 말 역사를 기록한 책) 등이 있다.

 

이암의 생애를 소개하면서 밝혔듯이, 범장은 젊은 시절에 천보산에서 이암과 이명을 만나 한민족 상고 역사의 진실을 드러낼 것을 결의한 후 『북부여기』와 『가섭원부여기』를 저술하였다. 이는 당시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 고려가 다시 일어나 한민족의 옛 영광을 회복하고, 나아가 고조선 → 북부여 → 삼국시대 → 고려로 이어져 온 국통 맥을 온전히 이어가기를 바라는 애국충정의 발로였다.

 

 

 

 

이맥(1455~1528)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행촌 이암의 고손자이며 호는 일십당一十堂이다. 1474년(성종 5)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뜻이 없어 학문에만 힘쓰다가 1498년(연산군 4) 44세 때 비로소 식년시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사헌부 장령에 이르렀다. 이때 장숙용張淑容(장녹수)이 연산군의 총애를 내세워 분에 넘치게 재물을 탐하고 사치를 일삼자 여러 차례 탄핵 상소를 올리다가 괴산에 유배되었다(1504). 귀양살이 시절에,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책과 노인들에게서 채록한 이야기를 토대로 우리의 옛 역사를 기록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높은 관직을 제수받아 사간원의 대사간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이의를 제기하는 대신들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머물렀다. 이는 강직한 성품 탓에 조정에 적이 많았던 까닭이다. 1517년(중종 12) 연산군의 후사를 세우려 할 때에도 이맥은 “연산은 종묘에 죄를 얻었으니 속적屬籍이 마땅히 끊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66세 때인 1520년, 그는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인 찬수관撰修官이 되자 세조, 예종, 성종 때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수거하여 궁궐 깊이 감춰 두었던 상고 역사서를 접하게 되었다. 그 금서에서 알게 된 사실史實과 예전 귀양시절에 정리해 둔 글들을 합쳐 한 권의 책으로 묶고,‘정사正史에서 빠진 태백의 역사’라는 뜻으로 『태백일사』라 이름붙였다. 그러나 중국을 사대하는 조선의 악습과, 성리학에 위배되는 학설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세태 때문에 그 책을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집안에 비장하였다.

 

『태백일사』는 한민족의 7천 년 상고 역사를 환국, 배달, 고조선 각 시대별로 세밀하게 다루면서 당시 신교 문화의 신관, 우주관, 인간관, 역사관, 윤리관을 조목조목 전한다. 한마디로 신교 문화 역사서의 완결본인 『태백일사』를 지은 이맥은 가히 한민족 신교문화의 집대성자라 할 수 있다.

 

 

증산도 열어나가는 상생 후천개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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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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