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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환단고기 북콘서트> - 3부 천상의 문이 다시 열리다.

훈족의 제왕 아틸라 뿌리 흉노족의 역사와 시조, 정복자 칭기즈칸의 뿌리 몽골족의 역사와 시조


















4,300여 년  전 한韓민족 최초의 국가인 배달국의 정통성을 계승한 신인왕검께서 나라를 세우셨으니 옛 조선(고조선)입니다.

중화 사대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에 의하여 단군신화가 되어 버린 단군왕검의 옛 조선은 실존한 역사입니다.



단군왕검의 고조선은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태평성대였다는 요순시대, 즉 요임금의 당나라와 순임금의 우나라에 이어 하상주에 이르기까지 인류 창세 역사의 원형문화를 전수해준 고조선은 천자(天子, 황제)가 통치하는 동방의 대제국이었으며, 문명 대국이었습니다. 



서력 기원전 2333년 제1세 신인왕검부터 서력 기원전 238년 제47세 고열가 단군까지 총 2,096년간 존속한 고조선은 70여 개의 제후국이 있었습니다. 훈족의 제왕 아틸라의 뿌리인 흉노족의 역사와 시조, 세계의 정복자로 널리 알려진 칭기즈칸의 뿌리인 몽골족의 역사와 시조도 고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환단고기>에 나와 있습니다.



중국 역사의 시조라고 불리는 요순시대부터 단군조선의 영향을 받지 않은 나라가 없을 정도이며, 흉노족(훈족), 몽골족, 여진족, 선비족, 돌궐족, 거란족 등의 다양한 민족의 역사가 단군조선의 영토에서 시작됩니다. 수나라를 건국한 문제 양견은 단군조선의 후예인 선비족 출신으로 수나라의 시조가 됐고,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도 선비족 출신으로 당나라의 시조가 됩니다.



단군조선의 후예인 거란족의 야율아보기는 요나라를 건국해 요나라의 시조가 됐고, 여진족 아골타는 거란족과 연합해 금나라를 세워 시조가 됩니다. 선비족에서 갈려 나간 실위족(몽골족) 출신의 정복자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칸이 원나라의 시조가 됩니다. 

청나라(후금)를 세운 누르하치는 여진족 출신으로 금나라를 열었던 아골타의 19세손입니다.


 













유럽은 과거 아시아 강력한 기마부대를 앞세운 훈족과 몽골족의 유목민, 그리고 오스만투르크족에게 호되게 당한 치욕스러운 역사가 있습니다. 5세기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하여 서로마제국의 붕괴까지 영향을 미친 훈족의 제왕 아틸라의 뿌리는 흉노족입니다.



13세기 세계의 정복자인 몽골족 칭기즈칸과 후예들이 동방을 넘어 동유럽까지 휩쓸면서 유럽인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15세기에는 유럽 전역을 벌벌 떨게 했던 오스만제국은 단군조선의 후예인 선비족의 분파인 돌궐족이며, 오스만제국은 훈족(흉노족)과 몽골족을 영향을 모두 받은 선비족과 흉노족(훈족)과 몽골의 후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훈족의 제왕 아틸라의 뿌리인 흉노족의 역사와 시조는 단군조선의 제3대 가륵 단군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가륵 단군께서 지방 장관 격인 '욕살'의 위치에 있던 삭정을 약수 지역으로 귀양을 보냈고, 나중에 그 죄를 사한 후 약수 지역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약수에 있던 삭정이 흉노족(훈족)의 시조가 됐고 이때부터 흉노족(훈족)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훈족의 제왕 아틸라의 뿌리인 흉노족의 역사와 문화는 단군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흉노족(훈족)의 국가통치와 모든 문화에는 인류 창세역사 시대부터 고조선까지 이어져 온 원형문화가 이어졌습니다.



'흉노(凶奴)'란 중국 한漢족이 너무나 무섭고 강력한 상대인 훈족에 대한 두려움을 숨긴 채 대내외적으로 무시하기 위해 비하한 것입니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축조하게 된 이유도 바로 강력한 군사력으로 중국의 중원을 공포로 몰아넣은 훈족(흉노족)의 침공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은 것입니다.















세계적인 정복자로 불린 몽골족 출신 칭기즈칸의 뿌리도 단군조선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서는 고조선 제4세 오사군 단군께서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한(蒙古里汗)'에 봉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제4세 오사군 단군의 통치 시대부터 칭기즈칸의 뿌리인 몽골족의 역사와 시조가 시작된 것입니다.

2세기경 선비족 출신의 영웅 단석괴가 사망한 후 선비족은 탁발족, 모용족, 유연족, 거란족, 실위족 등으로 부족이 분리됩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몽골제국을 세운 칭기즈칸의 실위족은 선비족이 뿌리이며 선비족의 뿌리는 단군조선입니다.

위대한 영웅이며 세계의 정복자인 실위족 칭기즈칸이 부족을 통일하고 주변국을 정복하면서 몽골족의 역사, 곧 명실상부한 거대한 제국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실위족의 후예지만, 몽골제국의 역사는 칭기즈칸으로부터 시작됐기 때문에 칭기즈칸을 몽골족의 시조리고 할 수 있습니다. 칭기즈칸의 몽골제국 통치방식과 제천문화를 비롯한 백성들의 삶의 문화에서도 단군조선의 문화가 그대로 전수됐습니다. 단군조선이 역사의 문을 닫은 후 1,500여 년이 지난 시기라 문화의 원형이 다소 변형되기는 했지만, 몽골족의 문화에는 원형문화의 코드가 그대로 살아있었습니다. 



정리하면, 중국의 역사는 대부분 한韓민족의 후예들이 국가와 역사의 시조가 됐고, 한韓민족의 후예가 통치한 역사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이민족이 지배한 역사입니다. 흉노족의 역사와 시조도 단군조선의 후예이며 몽골족의 역사와 시조도 단군조선의 후예입니다. 서방을 공포에 떨게 한 훈족의 제왕 아틸라의 뿌리와 세계를 휩 정복자 칭기즈칸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동방의 대제국 단군조선을 만나게 됩니다. 

















<강화도 환단고기 북콘서트> - 3부 천상의 문이 다시 열리다.

훈족의 제왕 아틸라의 뿌리 흉노족의 역사와 시조, 정복자 칭기즈칸의 뿌리 몽골족의 역사와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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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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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녁노을* 2020.05.17 05: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가요.
    즐거운 휴일 되세요^^

  2. 가족바라기 2020.05.17 10: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3. 모아모아모아 2020.05.17 16: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포스팅 잘보고
    공감하고 가요~~^^
    좋은 주말되세요 ~~

  4. 넌 계획이다 있구나! 2020.05.17 17: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 갑니다~
    행복한 주말되세요~~^^

탁월한 지도력으로 세계를 제패한 위대한 정복자 몽골제국 칭기즈칸(테무친) 명언

 

 

 

 

 

 

 

 

 

 

현재의 몽골에서 과거 몽골제국 영화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몽골 초원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나 아시아와 유럽, 세계를 제패한 몽골제국 칭기즈칸을 위대한 정복자라 말한다.

 

20년 전 미국의 위싱턴 포스트 지와 타임 지에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난 1천 년간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고, 인류 역사를 바꾼 인물로 위대한 정복자 칭기즈칸(테무친)을 꼽았다.

 

 

칭기즈칸을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을 일삼은 정복자로 보는 사람도 있다.

몽골제국이 아시아와 유럽을 제패할 당시만 해도 몽골제국에는 글자가 없었다. 후대에 몽골제국에 점령 당한 주변국의 역사기록에 칭기즈칸이 약탈과 살육을 자행한 정복자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세계를 제패한 정복자 몽골제국 칭기즈칸은 솔선수범의 자세와 뛰어난 리더십을 갖춘 인물이었다.

포용력과 통솔력과 인재 발탁에는 인종과 종교를 가리지 않고 능력이 있는 부하는 신뢰와 함께 권한도 주었다.

 

엄정한 공덕 평가는 부하들이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며 조직력을 극대화하였다.

칭기즈칸은 자신의 신념과 확신을 부하들과 함께 공유하였고, 철저한 현실주의 감각과 날카로운 결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몽골제국 칭기즈칸이 세계를 제패하며 정복한 땅은 알렉산더 대왕과 나폴레옹, 그리고 독일의 히틀러가 차지한 땅을 합친 것보다 넓다. 말을 타고 적진을 헤쳐나가는 유목민 특유의 적의 허를 찌르기동력과 필사의 결의, 그리고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전술을 황색공포라고 표현한다.

 

 

칭기즈칸의 몽골군대는 상대방과 전투에 일하기 전 약한 적이든 강한 적이든 주도면밀하게 탐색하여 적군에 대해 세심하게 정보를 파악하였다. 또 몽골군대는 상호 부대 간 유기적인 배치와 함께, 보급 체계와 무기체계의 단순화는 원거리 원정을 가능하게 하였다.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은 정복하는 나라와 민족의 문화와 종교를 인정하고 주변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몽골제국이 초기 정복에는 약탈에 가까운 습격의 개념에 가까웠다고 한다.

여러 문제점이 생기는 것을 본 칭기즈칸은 개인적 약탈을 금지하고 전쟁 전리품을 군사들의 전투 기여도에 따라 분배하도록 한다.

칭기즈칸을 비롯한 지휘관 누구도 호의호식을 금지하고, 칭기즈칸을 포함한 모두가 급에 관계없이 이름을 부르도록 하는 평등의 원칙을 세웠다.

 

이는 전체구성원을 하나로 결속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전쟁 중에 전사한 몽골군은 반드시 시체를 찾아와 죽어도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고, 군사들은 사력을 다해 전쟁에 임했다.

 

 

 

 

 

 

 

 

 

 

칭기즈칸은 유라시아대륙 점령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였다.

몽골군 편성과 행정을 하나로 하여 10명을 한 단위로 묶고, 10단 위를 또 한 단위로 묶는 특유의 방식을 사용하였다.

또 백호장 천호장 제도를 두어 점령지를 체계적으로 묶어 나갔다. 1~2억 정도의 유라시아 점령지를 불과 4~10만 몽골 기병들이 다스릴 수 있는 것을 후대의 역사가들은 기적이라고 말했다.

 

 

 

 

 

 

 

 

 

 

"내 자손이 비단옷을 입고 벽돌집에 사는 날, 내 제국은 망할 것이다."

칭기즈칸의 이 말은 그대로 적중했다.

 

 

최근 고구려학술대회에서 세계를 제패한 위대한 정복자 칭기즈칸이 대진국(발해)의 대야발 후손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대야발은 아버지 대중상과 함께 대진국(발해)을 세운 대조영의 동생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記 편에는 4세 오사구 단군께서 단군의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한蒙古里汗'에 봉하였으며 지금의 몽골족은 그 후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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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6.01.09 06: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칭기즈칸의 대해 잘 보고 가네요

  2. 뉴론♥ 2016.01.09 07: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 영화로도 출시가 되었는데 그 시절에 불로장생을 꿈꾸던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어짜피 시간되면 갈걸 욕심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ㅎㅎ

  3. 죽풍 2016.01.09 10: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칭기스칸은 영화로 한 번 봤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

  4. 훈잉 2016.01.09 10: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칭기즈칸은 정말 위대한 인물이였습니다 ㅎㅎ.
    옜날에 위인전을 볼때 저희나라 위인들을 포함해서 칭기즈칸은 절대 빠지지 않았죠.
    영화에서도 칭기츠칸을 정말 무서워했구요

  5. 뉴클릭 2016.01.09 11: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 좋은 하루가 되세요~

  6. 행복생활 2016.01.09 11: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테무친 만화를 재밌게 보고 있는데 말이죠 ^^
    잘 보고 갑니다 ^^

  7. ☆Unlimited☆ 2016.01.09 11: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월이 지나도 명언은 살아있네요. 잘 보고 갑니다~

  8. Shinny 2016.01.09 12: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칭기츠칸 정말 대단하네요. 흥미있게 읽어보았습니다

  9. 아쿠나 2016.01.09 12: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명언들이네요~
    즐건 주말되세요 ^^

  10. 유라준 2016.01.09 20: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11. Deborah 2016.01.09 20: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단한 사람입니다. 선견지명이 있었던것 같아요.

한민족 정체성의 확장 ‘알타이 연대’를 꿈꾸며 (고조선과 북방 민족 간의 관계)

<김창규 | 주 키르기스스탄 대사> 경향신문 독자투고 일부발췌

 

알타이 연대라고 하면 민족적 시원이 유사한 터키,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투르크계 민족들과 한국, 몽골 등 몽골계 민족들 간의 연대를 위한 협력 형태를 의미한다.

 

유라시아 지역에 오랫동안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알타이계 민족들이 민족적 시원의 유사성과 문화와 감정의 동질성에 대해 비교적 높은 인식을 공유하고 있으며 알타이 연대에 대한 열망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알타이 연대를 구축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곳에 미개척 시장이 있다든가 자원이 광대하다든가 하는 현실적 이유가 아니다.

 

알타이 연대의 구축을 통해서 우리 국민들이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유라시아 대륙은 지금까지 우리의 인식 범위 밖에 있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해양을 통한 발전 전략과 함께 유라시아 대륙을 통한 발전 전략을 한데 놓고 균형적인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한반도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인식의 폭을 대륙으로 확장할 수 있다.


알타이 연대의 구축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이들과의 협력을 통해 우리 민족의 시원이라든가 한글의 기원 등 우리가 명쾌하게 밝혀 내지 못한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어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세계는 글로벌 시대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알타이 연대에 대한 관심과 당위성이 학계를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고 있다. 이제 우리도 축적된 저력을 국내에 가두어 두기보다는 이를 널리 활용하여 세계 평화와 공영에 기여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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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북방 민족 간의 관계

 

⊙ 고조선과 흉노족
『단군세기』에는 고조선과 북방 민족 간의 관계를 알려 주는 귀중한 기록들이 있다. 3세 가륵단군 6년(BCE 2177) 조에 나오는“ 임금께서 열양 욕살 삭정索靖을 약수弱水 지방에 유배시켜 종신토록 감옥에 가둬 놓았다. 후에 용서하여 그 땅에 봉하시니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라는 기록과 4세 오사구단군이 재위 원년인 BCE 2137년에 자신의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한’에 봉했다는 기록, 또 30세 내휴단군 5년(BCE 905)에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 32세 추밀단군 3년(BCE 847)에 선비산鮮卑山의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 등이 그것이다.

 

흉노, 선비, 돌궐, 몽골 등 여러 북방민족과 한민족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그들의 세력 부침을 알아보기로 한다.

 

주지하다시피 몽골 고원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남러시아와 동유럽 일대에는 광대한 초원(스텝) 지대가 이어진다. 이들 지역은 유목생활을 영위하는 몽골계와 투르크계에 속하는 다양한 유목민들의 공간이었다. 동양사에서는 중국 북방의 여러 유목민과 중국 간의 갈등이 아주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었다. 중국인들은 이러한 북방민족을 융戎, 적狄, 호胡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면서, 물리치고 억압해야 할 무지하고 흉악한 오랑캐로 여겼다.

 

그러나 북방민족을 오랑캐로 여긴 것은 어디까지나 중화사상에 빠진 중국인들의 편견 때문이다. 북방 유목민들은 분명 정착 농경민과는 다른 생활방식을 채택한 사람들이지만 결코 야만인은 아니었던 것이 실제로 기마술과 야금술 및 금속가공 기술은 중국인들보다 앞서 있었다.

 

 

⊙ 동방의 삼신과 제천 문화 생활화한 흉노

 『단군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흉노의 시조는 한민족이다. 흉노는 그 수가 계속 늘어나 진나라 때 와서는 이미 오르도스와 몽골고원, 천산산맥 일대를 주름잡고 있었다. 흉노는 그 우두머리를 선우單于라 하였다. 흉노는 한나라 초기 묵특선우冒頓單于(BCE 209~BCE 174) 때 서쪽의 월지와 동쪽의 동호東胡를 격파하고 아시아 최초로 대유목 제국을 세웠다. 묵특선우는 흉노 제국을 신교의 삼신문화의 고향인 고조선처럼 셋으로 나눠 통치하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자신은 중앙을 통치하고 동쪽은 좌현왕이, 서쪽은 우현왕이 통치하게 하였다. 좌현왕은 우현왕보다 우선시 되었는데 보통 선우의 아들을 좌현왕으로 삼았다.

 

 

선우는 자신을‘ 탱리고도撑梨孤塗선우’라 하였는데, 탱리撑梨는‘ 하늘’을 뜻하는 흉노어‘ 텡그리Tengri’의 음역이고,‘ 고도’는 아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탱리고도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를 의미한다. 흉노는 천지와 일월을 숭배하고, 나아가 조상을 숭배하였고, 일 년에 세 번 큰 제사를 지냈다. 특히 정월의 춘제春祭와 오월의 용성대제龍城大祭는 대규모 천제였다. 중국 측의 기록에 의하면 흉노는 하늘에 제사지낼 때 이용하는 큰 금상이 있었다고 한다. 흉노의 한 왕인 휴도왕의 땅에 있던‘ 제천금인祭天金人’이 그것이다. 선우는 매일 해와 달에게 절하고 자신이 거처하는 게르(천막집)의 문도 항상 동쪽을 향해 배치하였다. 이처럼 문을 동향으로 한 것은 동쪽을 중시하는 동이족의 관습과 일치하는 것이다.

 

중국 역사서에서 흉노는 BCE 4세기 전국시대에 처음 등장한다.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흉노는 틈만 있으면 연, 조, 진 나라를 침략하는 골칫거리였다. 이 세나라는 모두 흉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장성을 쌓았다. 이것을 연결한 것이 진시황 때 이루어진 만리장성이다. 진시황은 장군 몽염에게 삼십만 군을 주어 흉노에게 반격을 가하고 서쪽의 농서군에서 동쪽의 요동군 갈석에 이르는 장성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만리장성 축조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고 결국 2세 황제인 호해 때 진나라는 진승과 오광의 반란으로 망했다. 흉노의 위협이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멸망시킨 원인의 하나였던 것이다.

 

진에 이어, 유방이 세운 한나라도 흉노의 공격에 시달렸을 뿐, 흉노를 제압하는데 실패하였다. 한고조 유방의 경우 흉노와의 전쟁에서 포위당했다가 가까스로 뇌물을 주고 빠져나오기도 하였다. 이후 공주와 공납을 보내 굴욕적으로 평화를 유지하였다. 한 무제 때 와서는 다시 흉노와 전쟁을 시작하였는데 이 전쟁은 근 50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한 무제는 흉노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큰 손해를 보았다. 장진퀘이에 의하면 흉노와의 전쟁은 백성들의 생활을 곤궁하게 만들고 국력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무제는 다시는 변방으로 출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은‘ 윤대輪臺의 조서’를 발표하고 자신의 실책을 반성하였다.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하고 그곳에 군현을 설치하려 한 것도 흉노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만조선이 흉노와 손을 잡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 무제 때 한국사와 연관하여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흉노의 비왕 가운데 한 사람인 휴도왕의 아들이 자기 어머니와 함께 한나라의 포로가 된 것이다. 흉노 왕자는 왕의 말을 돌보는 일을 맡았는데, 후에 품위 있는 거동과 성실함이 한 무제의 눈에 띄어 무제의 측근이 되었다. 무제는 이 흉노 왕자 김일제金日磾를 뒤에‘투후’로 봉하였다. 투후는 오르도스의 제후라는 뜻이다. 그 후손 중에는 왕후(원제의 비 효원왕후)도 있다. 일설에 의하면 왕망王莽도 김일제의 고손이다.

 

외척인 김일제 가문은 왕망이 정권을 잡으면서 최고의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왕망이 몰락하자 위험한 처지에 몰렸다. 정확한 경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들은 한반도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 문무왕 비문과 중국 시안[西安]에서 발견된 당나라 시대의 묘비명에서 김일제가 신라 김씨 왕가의 조상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사서 기록에 의하면 한 무제가 김일제에게 김씨 성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한서』「 김일제전」).

 

1세기 초 한나라에서 망명한 김일제 후손이 신라와 가야에 들어와서 왕권을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가야가 있었던 지역에서 기마민족의 유적이 대거 발견되었다. 유물들 가운데 청동제 솥인 동복銅鍑은 흉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제사의식을 위해 말에 싣고 다니던 물건으로, 유럽의 훈족 루트에서도 많이 발견되었다.

 

흉노 제국은 BCE 1세기 중반에 내분이 일어나 둘로 분열되었다. 호한야선우가 이끄는 동흉노는 한나라와 동맹을 맺고 중국 북쪽에 머물렀지만 한나라와의 타협하기를 거부한 질지선우가 이끄는 서흉노는 중앙아시아 쪽으로 이주하였다. 동흉노는 한 세기 뒤에는 다시 남북 흉노로 분열되었다. 남흉노는 고비사막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한나라의 번병藩兵(수비병)이 되었다. 몽골 초원은 북흉노가 지배하였다. 그러나 북흉노는 한 제국과 남흉노 연합세력의 공격 때문에 91년에는 몽골리아를 포기하고 중앙아시아의 일리강 유역으로 이주하였다.

 

이러한 이주에는 가뭄과 병충해 같은 자연환경의 악화에도 기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후한서』「 남흉노전」에는“ 흉노국은 매년 가뭄과 해충의 습격으로 헐벗은 땅이 수천 리에 달하고 초목은 전부 말라버려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과 가축의 수가 삼분의 이에 이르렀다”라는 기록이 있다. 북흉노는 일리강 인근 오아시스 국가들을 지배하기도 했지만 결국 몽골리아 초원의 새로운 패자인 선비족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2세기 중반 즈음에 더 서쪽으로 옮겨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초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이들은 역사적인 기록에서 사라져 버린 듯했지만, 4세기 중반에 갑자기‘ 훈hun’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훈족은 370년경 흑해 북부에 나타남으로써 처음으로 유럽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들은 볼가강을 건너 남러시아 초원지대에 거주하던 알란족을 공격했고, 이어서 알란족과 함께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을 공격하여 유럽 대륙에 민족이동의 대물결을 야기하였다. 공포에 질려 도주한 게르만족이 밀물처럼 로마 국경 안으로 몰려들자 이를 제어하지 못한 서로마 제국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게르만족의 이동은 서양 역사에서 고대의 종말을 초래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바로 이 게르만족의 이동은 훈족의 공격 때문에 촉발된 것이었다.

 

훈족은 이 시기 이후 거의 한 세기 동안 동서 유럽 여러 지역을 침략하여 유럽인에게 커다란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훈족은 아틸라 대왕(395~453) 때에 이르러 유럽 일대를 지배하는 거대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를 훈제국이라 부르는데 우랄산맥에서 동유럽 일대에 걸친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였다.

 

 

⊙ 선비족

 북흉노가 1세기 말 멀리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떠나 버리자 흉노의 본거지이던 몽골 고원은 일시적으로 공백지대가 되었다. 그리하여 흉노의 지배를 받아오던 여러 유목집단들이 초원을 지배하기 위한 각축이 시작되었다. 각축에서 선비족이 승리하여 북방지역을 통일하였다. 2세기 중반에는 단석괴檀石槐라는 영웅이 나타나 선비의 여러 부족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였다. 이 선비제국은 북으로 바이칼호, 서로 신장의 일리강, 동으로 만주 일대에 걸치는 넓은 땅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선비제국도 다른 유목민들이 세운 다른 제국처럼 여러 부족집단들의 연합체였다.

 

단석괴가 사망하자 선비제국은 순식간에 여러 집단로 분할되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한나라가 망하고 그 뒤를 이어 동탁, 원소, 조조, 유비 등 군웅이 패권을 놓고 다투는 삼국시대와 그 뒤를 이은 위진魏晉 제국이 붕괴하면서 중원이 혼란에 빠지자 선비족은 그 틈을 이용하여 대거 북중국으로 밀고 들어갔다. 탁발拓跋, 모용慕容, 우문宇文, 단段, 걸복乞伏 등의 선비족의 여러 부가 이때 거의 모두 남하하였다고 한다. 중국사에서 말하는 소위 5호16국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탁발부는 대국代國을 세웠고, 모용부는 전연前燕·후연後燕·서연西燕·남연南燕 등의 나라를 세웠다. 또 산서 지역의 흉노는 한漢·전조前趙·후조 등을 세웠다. 이 가운데서 탁발부의 대국은 다른 국가들을 모두 정복하고 북중국을 통일하였다. 이 나라가 북위北魏이다. 북위는 후에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되었는데 다시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로 이름이 바뀌었다. 수나라는 바로 북주의 귀족인 수국공隋國公 양견이 나라 이름을 수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수는 다시 당으로 이어지는데 수·당의 기원은 바로 선비족인 탁발씨였던 것이다.

 

5호16국 시대에 북방 유목민족들이 중국 본토로만 진출한 것은 아니다. 한반도로도 적지 않은 수가 왔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 김호동 교수는 북방 유목민의 일부가 신라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4~5세기경에 조성된 신라의 대형 적석목관분 무덤에서 중앙아시아의 문화적 기류를 느끼게 하는 유물이 대거 발견되는 것은 이처럼 선비족이 들어왔음을 증명한다. 훈족의 출현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서부에서 민족대이동이 일어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대륙의 동부에서도 그에 못지않게 커다란 민족이동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북방 유목민들의 이동의 파고는 유럽에서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가져오고 중국에서는 북방민족이 중원을 장악한 5호16국 시대를 열었으며 한반도와 일본에서는 기마민족의 정권을 성립시켰다. 한마디로 말해 유목민은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를 유목민의 대이동으로 크게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 돌궐족

『단군세기』에는 흉노의 시조에 대한 언급뿐 아니라 투르크계인‘ 강거康居’에 대한 기록도 나온다. 강거는 흉노의 서쪽에 자리 잡은 유목민으로서『 사기』에도 나온다. 가륵단군 8년에 강거가 반란을 일으키자 단군이 지백특에서 토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지백특은 티베트를 가리킨다. 18세 동엄단군 때에는 지백특 사람이 공물을 바치러 왔다는 기록도 있다. 이 기록은 고조선의 활동영역이 티베트 인근까지 뻗쳤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단군세기』에 직접 나오지 않지만 투르크 계통의 민족으로서 동양 고대사와 서양 중세사에 큰 영향을 미친 민족이 있다. 바로 투르크족이다. 투르크족은 6세기 중반에 서쪽으로 카스피해에서, 동쪽으로 몽골과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강력한 유목제국을 세웠다. 이 제국을 건설한 사람들은 스스로 족속 이름을‘ 투르크(Turk)’라 하였는데, 중국 측 자료에는‘ 돌궐突厥’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터키Turkey라는 나라 이름도 바로 이 투르크에서 비롯한 것이다.

 

돌궐 제국은 기원 후 1세기 중반에 흉노가 붕괴된 뒤 실로 500년 만에 초원의 유목민을 통합하고 출현한 국가였다.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돌궐 제국은 553년에 토문土門이라는 이름의 수령이 몽골리아에 있던 몽골족 국가 유연柔然을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이다. 돌궐은 몽골계인 유연의 예속 하에 있던 집단으로 알타이 지역에서 야금 일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돌궐족은 알타이 산지에서 나는 철광석을 제련하는 등 금속가공에 뛰어난 솜씨를 보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돌궐 제국의 건설자인 토문이 죽자 그 영토는 아들 무한과 아우 이스테미에게로 나뉘어졌다. 카간의 칭호를 쓴 아들은 몽골 지역을 차지하여 동돌궐이 되었고,‘ 야브구’라는 칭호를 사용한 이스테미의 나라는 서돌궐이 되었다. 서돌궐은 중앙아시아 일대에 위치하였다.

 

서돌궐은 곧 사산조 페르시아와 협력하여 헤프탈Hephtal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어서 동돌궐은 동쪽으로 거란족을 복속시키고, 북으로 바이칼호에 이르렀다. 남으로는 고비사막을 넘어 당시 북주·북제로 나뉘어 있던 북중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당시 북주와 북제는 서로 대립하였기 때문에 북방의 돌궐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경쟁적으로 재물을 갖다 바쳤다.

그러나 중국에 당나라가 들어서자 상황은 급속히 바뀌기 시작하였다. 돌궐의 내분이 격화되고 자연재해가 겹쳤기 때문이다. 결국 당나라는 쇠약해진 돌궐, 초원의 대제국을 일거에 무너뜨려 버렸다.

 

그러나 돌궐은 중국의 지배를 받은 지 반세기 만에 놀랍게도 제국을 부흥시켰다. 만리장성 주변 내몽골 지방에 살면서 당나라의 감시와 통제를 받던 부족민 사이에서 670년대 후반부터 독립을 향한 움직임이 나타나 돌궐 제국을 재건한 것이다. 이것이 제2 돌궐제국이다.

 

다시 일어난 돌궐 제국은 752년에 그 지배하에 있던 세 부족의 반란으로 무너졌다. 세 부족 가운데 하나인 위구르가 몽골의 모든 유목민을 제압하고 돌궐의 뒤를이어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위구르족은 9세기 중반에 몽골고원에서 천재가 빈발한 때에 유목민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망하게 되었다. 돌궐의 후예들은 차츰 서진하여 이란 지역에 왕조(가즈나 왕조)를 세우기도 하고 이슬람을 받아들여 이슬람의 노예와 용병 노릇을 하였다. 그러다가 동로마 제국으로 침투하여 셀주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건설하였다.

 

 

⊙ 몽골족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단군세기』 4세 오사구단군 조에는 단군이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한蒙古里汗’에 봉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BCE 2137년의 일이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에는‘ 동호東胡’라는 이름의 족속이 나온다. 동호는 만리장성 너머 몽골과 만주 일대에 걸쳐 살던 사람들을 포괄적으로 부른 명칭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몽골족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국시대에 동호가 주로 교류한 나라는 연燕나라였는데, 동호는 4세기에 매우 세력이 강했던 것이 분명하다.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동호의 인질로 잡혀 있었다는『 사기』의 기록이 그것을 말해 준다. 동호 역시 흉노처럼 야금술과 궁술, 기마 전투술이 뛰어났고, 진개는 인질로 있는 동안 동호의 앞선 기술을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연나라가 쌓은 장성은 바로 이 동호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몽골 일대의 동호는 한대에 흉노의 묵돌선우에게 패한 후(BCE 209년) 약화되었다. 그 후 동호라는 이름은 사서에서 사라지고 선비鮮卑, 오환烏桓으로 바뀌어 등장한다. 선비보다 약했던 오환은 삼국시대 조조의 공격으로 붕괴되어 조씨 권력의 기동부대로 전락하였다. 이것이‘ 오환돌기烏桓突騎’ 부대이다.

 

선비족의 영웅이었던 단석괴 이후 선비 제국이 붕괴되면서 여러 부족(탁발拓跋, 모용慕容, 유연柔然, 거란契丹, 실위室韋)이 분립하였는데 이들 중 앞의 세 부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강력한 국가를 건립하였다. 거란은‘ 키탄’이라 불리는데, 거란의 영웅 야율아보기는 10세기 초 요나라를 건국하였다. 야율아보기는 907년 천제를 거행하고 칭호를‘ 탱그리 카간’이라 하였다. 거란족에게도 카간은 천제의 대행자인 천자였다. 야율아보기는 곧 몽골고원을 장악하고 발해(대진국)을 멸망시켰다. 거란 제국은 이어서 현재의 북경과 대동 일대에 이르는 북중국을 장악하고 송나라와 대치하였다. 거란 제국은 거란족 외에 몽골계 유목민, 한족, 발해 유민, 여진족, 탕구트인 등 다양한 족속을 포괄하였다. 또 중국과 달리 발해의 5경 제도를 계승하였다. 거란 제국은 12세기 초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금나라에 의해 계승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금나라는 여진족과 거란족의 연합정권이었기 때문이다.

 

몽골 제국을 세운 칭기즈칸(1162~1227)은 실위족에 속한다. 그러나 실위는 다양한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칭기즈칸이 등장하기 이전에 몽골초원 지역은 투르크계와 몽골계, 퉁구스계가 뒤섞인 다양한 집단의 상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집단 가운데‘ 울루스’가 세력이 컸는데, 칭기즈칸이 속한 울루스는‘ 몽골울루스’였다. 칭기즈칸은 19세에 몽골 울루스의 칸으로 선출되고 곧 동쪽의 타타르 울루스, 중앙의 케레이트 그리고 서쪽의 나이만과 메르키트 등 여러 울루스를 차례로 격파하고 통합하였다. 마침내 1206년 쿠릴타이(몽골 족장회의)에서 몽골 집단 전체의 카간으로 추대되었다.

 

칭기즈칸은 곧 눈길을 초원 밖으로 돌려 중앙아시아 일대를 정복하였다. 그의 아들들은 1222~1223년에 아조프 해 연안에서 러시아 군대와 싸워 이기고 1223년에는 키에프 공국을 공격하였다. 1227년 칭기즈칸이 사망하자 그 후계자들은 정복의 범위를 더 넓혔다.

 

칭기즈칸의 후예인 오고타이(2대 카간 1229~1241), 구유크(3대 카간 1246~1248), 몽케(3대 카간1251~1259), 쿠빌라이(4대 카간 1260~1294)는 정복사업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북부의 금나라를 정복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금의 멸망 후에는 네 방향으로 정복사업을 추진하였다. 유럽 원정(1236~242)을 수행한 다음 중동을 공격하여 카프카즈 지역과 셀주크 투르크를 속국으로 삼고(1243) 바그다드를 점령하였다.(1258) 고려도 1236~1241년에 걸쳐 몽골의 공격을 받아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1279년 남송을 멸망시킨 쿠빌라이는 섬나라인 일본과 자바까지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동남아시아는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몽골 제국은 그 지배 지역이 매우 이질적이고 다양하였다. 그러나 효율적인 역참제를 통해 결속을 이뤄 낼 수 있었다. 몽골의 역참제는 제국 전역을 연결하는 조밀하고 광대한 교통 네트워크였다. 동으로 고려와 만주, 서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이란과 러시아에 이르는 교통로 상에 역참을 두었고, 남쪽으로는 안남과 버마까지 연결되었다. 역참에는 운송 수단인 말과 수레, 배를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숙박시설도 있었고 패부牌符라는 증명서만 있으면 얼마든지 역참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문서와 서신, 관원과 공적 물자가 신속하게 이동되었다.

 

이러한 역참제를 기반으로 몽골 제국은 상업을 진흥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몽골제국은 중국의 전통적 한족 왕조와 달리 상인을 우대했고 국제무역을 적극 지원했다. 심지어‘ 오르톡’이라는 상인조합에게 행정을 포함한 다양한 국가사업을 맡겼다. 또 통행세를 폐지하고 통상로를 안전하게 만드는 데 신경을 썼기 때문에 몽골 제국 시대에는 동서양 간에 교류가 매우 활발하게 이뤄졌다.

 

몽골 제국은 종교인에게도 관용정책을 취하여 각 종교의 지도자에게 면세 혜택까지 부여하였다. 페르시아나 중국 측 기록에도 남아 있듯이 이슬람·기독교·유대교·유교·불교·도교의 사제나 승려가 그러한 혜택을 누렸다.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여태까지 국가의 탄압을 받던 소수 교단이 활력을 얻게 되었다. 중국과 중동에서는 네스토리우스파가 활발한 활동을 했고 유럽의 가톨릭도 적극적으로 선교사를 몽골 제국으로 파견하였다.

 

이러한 몽골 제국의 개방적인 동서교류 정책은 인류 역사상 어느 시기보다도 활발한 인적 왕래, 종교의 전파, 상품의 확산을 가져다 주었다. 이것이 소위‘ 팍스 몽골리카’의 실체였다. 이 시대에 위대한 여행기들이 나온 것은 이러한 팍스 몽골리카를 배경으로 한 것임이 틀림없다.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는 서양인으로서 몽골 제국에 가서 쿠빌라이 칸의 신하로 살다가 귀국하여 견문록을 남겼다. 반대로 동에서 서로 가서 여행기를 남긴 사람들도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장춘진인長春眞人(1148~1127)이다. 산동성 사람으로 도교의 도사이던 그는 칭기즈칸의 부름을 받고 몽골군의 원정에 종군하였다. 알타이산을 넘어 천산북로를 따라 사마르칸트에 갔고 후에 남쪽으로 힌두쿠시 산맥을 넘었다. 장춘진인의 기행문은 『장춘진인서유록長春眞人西遊錄』으로서 13세기 몽골 제국 시대의 동서교통에 대한 귀중한 자료이다.

 

이처럼 몽골이 주도하던 13~14세기 때에는 동서 간에 활발한 교류가 있었고, 이러한 교류는 다시 근대를 열어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요컨대 몽골 지역을 중심으로 한 북방 지역에서 일어났던 흉노, 선비, 돌궐, 몽골 등 여러 족속은 상고 시대에 우리 민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사의 흐름을 이끈 주도 세력으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원문: 상생출판 환단고기)

 

 

증산도 열어나가는 상생 후천개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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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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