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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황제 무제(유철)와 북부여 고두막한(동명성왕) 단군의 동북아 영토 전쟁

 

 

 

 

 

 

 

 

 

 

 

 

우리의 역사는 얼마나 잘못됐을까요?

북부여 역사를 얼마나 왜곡시켜 놓았는지 크게 잘못된 몇 가지를 살펴보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 단군과 현손(玄孫, 4대손)되는 고구려 시조 고주몽 성제(聖帝)와의 관계를 부자(父子)간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본래 동명성왕으로 불린 분은 북부여 5세 고두막한 단군인데 고구려 시조 고주몽 성제를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둔갑시켜 버렸습니다.

 

한나라 무제(유철)가 북부여를 침공하여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려다 동명성왕 고두막한 단군에게 참패하여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한나라 무제의 사관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하지도 않은 낙랑, 임둔, 진번, 현도를 중국과 일제 식민사학은 한반도에 갖다 놓았습니다.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를 예맥이 만든 국가라고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합니다.

 

 

 

 

 

 

 

 

 

 

 

 

 

한漢나라 무제의 동북아 영토 전쟁 시작

 

 

한漢나라 무제(유철)은 우거 정권(위만의 손자)을 무너트리기 위해 쳐들어옵니다.

그러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며 연패를 당합니다. 1년 넘게 계속된 전쟁에서 우거 정권의 내부 분열과 이간책으로 한漢나라 무제는 결국 우거 정권(옛 번조선)을 점령합니다.

 

한무제는 한漢나라의 군현을 설치하려다 우거 제거에 공을 세운 한韓민족의 강한 저항에 번조선(위만이 침탈한 고조선의 변방) 유민들의 자치를 인정하는데 그쳐야 했습니다.

 

 

 

 

 

 

 

 

 

 

 

 

북부여 역사 왜곡의 시작 사마천 사기

 

 

사마천은 사기를 쓸 때, 한漢나라 무제가 동명성왕 고두막한에게 대패한 치욕을 숨기고자 의도적으로 북부여사를 누락시킨 데서 비롯됩니다. 그 후 중국의 모든 사서에서 북부여 역사가 사라지게 됩니다.

 

고려와 조선의 사대주의 사서들이 이것을 그대로 모방하고, 일제 식민사학자와 국내 강단 사학자들이 다시 그것을 생각 없이 답습한 결과입니다.

 

 

 

 

 

 

 

 

 

 

북부여 시조 해모수 단군과 고구려 시조 고주몽 성제(聖帝)의 관계 왜곡

 

 

강단사학자들은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근거로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 단군을 고구려 시조 고주몽 성제의 아버지로 설정합니다.

 

'해모수와 유화부인 사이에 고주몽이 태어나 고구려를 열었다.'라고 하여, 북부여 해모수 단군과 고구려 고주몽 성제를 거의 동시대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180여 년에 걸친 북부여 6대 단군의 역사를 완전히 증발시켜 버린 것입니다.

 

 

 

 

 

 

 

 

 

 

 

 

한漢나라 무제와 북부여 동명성왕 고두막한 단군과의 동북아 영토 전쟁

 

한나라 무제는 동북아의 패권을 잡으려는 욕심에 요동을 넘어 북부여까지 침공하게 됩니다.

당시 북부여 4세 고우루 단군은 한漢나라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병사(病死)하고 맙니다.

 

북부여가 역사 속에서 사라질 수 있는 한韓민족 상고사 최대의 위기에서 한漢나라 무제의 군대를 물리쳐 북부여를 구한 분이 바로 동명성왕 고두막한입니다.

 

고두막한이 졸본(卒本)에서 나라를 열었다 하여 졸본부여라 하며 스스로 동명왕(東明王)이라 칭합니다.

동명성왕 고두막한은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인물로 백성들에게 구국 영웅으로 추앙받아 북부여 5세 단군으로 즉위합니다.

 

 

 

북부여 4세 고우루 단군의 동생 해부루가 잠시 보위에 있었으나 동명성왕 고두막한 단군의 등장에 가섭원(동쪽 차릉)으로 이주하여 동부여를 세우게 됩니다. 고구려 시조 고주몽 성제께서 젊은 시절 잠시 몸을 의탁했던 곳이 바로 동부여(가섭원 부여)입니다.

 

 

 

 

 

 

 

 

 

 

『환단고기』가 전하는 한漢나라와 북부여의 동북아 영토 전쟁

 

 

 

한무제의 침략을 격퇴한 고두막한

 

재위 13년 계유(단기 2226, BCE 108)년에 한漢나라 유철(劉徹, 무제)이 평나(平那, 現 하북성 창려)를 침범하여 우거를 멸하더니 그곳에 4군(四郡)을 설치하려고 군대를 크게 일으켜 사방으로 쳐들어 왔다.

 

이에 고두막한이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이르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을 격파하였다. 이때 유민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전쟁을 지원하니 군세를 크게 떨쳤다.

(『환단고기』 완역본 『북부여기』 上 255쪽) 

 

 

 

 

일찍이 북부여가 쇠하면서 한나라 도적이 불길처럼 성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개연히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큰 뜻을 세우셨다.

 

이에 졸본(卒本)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호를 동명(東明)이라 하셨다.

어떤 사람은 이분을 고열가(고조선의 마지막 47세 단군)의 후예라 말한다.

(『환단고기』 완역본 『북부여기』 下 259쪽)

 

 

 

 

 

 

 

 

 

 

 

 

동명(東明)

흔히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을 동명왕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동명東明'은 졸본에서 동명국(졸본부여)을 세우고 즉위한 고두막한의 호이다.

그래서 고두막한을 '동명왕'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동명과 주몽을 같은 인물로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김천령(金千齡, 연산군 때의 문관)은 자신이 지은 부(賦)에서 "동명이 창업하고 주몽이 계승하였다. (동명계기혁업 주몽승기여파東明啓其赫業 朱蒙承其餘波)"라고 하여, 동명과 주몽이 전혀 다른 인물임을 전하였다.

 

그런데 '동명'이라는 호칭은 몽골어에서 흔히 발견되는 'Tumn'의 음역(音譯)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 칭호는 '대족장·만호장'이라는 뜻으로 흉노제국의 두만선우(頭曼單于)처럼 유목 군장의 이름에서 자주 발견된다.

(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머니즘』, 252~256쪽)

(환단고기 북부여기 주註 282쪽)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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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라준 2016.06.10 07: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보면, 정말 많이 안타깝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2. 죽풍 2016.06.10 09: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

  3. 생명마루한의원 일산점 2016.06.10 10: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행복하고 즐거운 금요일 보내세요~

  4. 훈잉 2016.06.10 10: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5. Deborah 2016.06.10 12: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졍말 그렇네요.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될 것 같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6. 뉴클릭 2016.06.10 12: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 보고 간답니다 ^^
    행복 가득한 하루가 되세요 ㅎㅎ

  7. 행복생활 2016.06.10 15: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구 갈게요~

중국과 일본에 의한 한韓민족의 역사 왜곡

동북아 5대 역사 조작극 - 일제 식민사관의 한국 고대사 역사 조작 한사군 한반도 설

『환단고기』 - ① 한무제(漢武帝) 때 사관 사마천 사기에 없는 한사군 한반도 설

 

 

 

 

 

 

 

 

 

 

 

 

흔히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동양 최고의 역사서라고 합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의 명을 받고 중국의 역사를 기록한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중국의 시조라 받들고 있는 헌원으로부터 한 무제에 이르기까지 약 3천 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마천한 무제에게 말 한마디 잘못하여 죽음 직전에까지 갔었고, 결국 궁형을 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겨우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사마천에게 한 무제는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이며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사마천 사기史記에는 한사군 한반도 설의 역사가 없다.

 

 

사마천에게는 중국의 과거 역사도 중요했겠지만, 무엇보다 현 황제에 대한 치적을 돋보이게 기술하는 것이 급선무였을 것입니다. 그런 사마천의 사기에 일제 식민사관이 만든 한사군 한반도 설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사기의 첫 페이지부터 조작한 역사를 기록한 사마천이 자신의 생살(生殺)여탈권을 쥐고 있는 한 무제의 소위 고조선 정벌 낙랑, 임둔, 현도, 진번의 한사군을 사기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일제 식민사관이 만든 한사군 한반도 설의 실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사군 한반도 설은 일제 식민사관이 만든 대표적인 한국 고대사 역사 조작극입니다.

 

 

 

 

 

 

 

 

 

 

 

 

한 무제가 위만 정권을 치기 위해 좌장군 순체로 하여금 5만 명을 거느리고 육상으로 공격하고, 누선장군 양복으로 하여금 7천 명의 수군을 거느리고 위만 정권을 협공하게 됩니다.

 

 

순체와 양복 두 장수는 서로 공을 다투다가 시간만 끌게 되고 한 무제는 순체와 양복 두 장군을 사형에 처합니다.

순체는 사형을 당했지만, 양복은 사형 직전 돈을 써서 목숨을 부지하였으나 평민이 됩니다.

한나라는 사신까지 보냈지만 역시 실패하자 위산과 공손수 등 사신으로 갔던 사람마저 죽여버립니다.

 

한 무제가 전쟁의 선봉장이었던 두 장군과 사신들을 죽였다는 것은 당시의 동북아 국제정세에서 한나라의 위급한 형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무제는 힘으로 위만 정권을 쓰러트리지 못하였습니다.

위만 정권의 지도층의 분란과 내부 교란 책으로 위만 정권은 결국 무너지게 됩니다. 이때 한 무제는 위만 정권의 몰락에 기여한 사람을 각기 제후로 임명하게 됩니다.

 

 

 

 

 

 

 

 

 

 

 

 

사마천 『사기』에 나와 있는 역사의 진실

 

 

 

위만조선은 일제 식민사관으로 조작한 한국의 고대사입니다.

 

위만 정권은 기원전 108에 멸망합니다. 그리고 사마천의 사기는 그보다 근 20년이 지난 서기전 91년경에 완성됩니다. 

사마천은 한漢나라의 사관으로 한나라와 위만 정권과의 전쟁을 직접 목격한 사람입니다.

 

 

 

한나라와 위만 정권과의 전쟁을 사마천의 사기 조선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양군구욕장솔막후의兩軍俱辱 將率莫候矣,

(한漢나라 장수 순체와 양복의 육군과 수군) 양군이 모두 치욕을 당하였고, 장수들 중 누구도 제후로 봉해지지 않았다."

 

"이고수정조선위사군以故遂定朝鮮爲四郡, 이로써 조선(위만정권)을 평정하고 사군을 설치하였다.

삼은 홰청후(澅淸侯) 봉하고, 한음은 추저후(萩苴候) 봉하고, 왕겹은 평주후(平州侯)로 봉하고, 우거의 아들 장강은 기후(幾侯)로 봉하고, 최는 아버지가 도중에 죽었으나 큰 공이 있어 온(열)양후(溫(涅)陽侯)로 삼았다. (조선 5군 설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한나라가 전쟁에서 참패했다는 의미이며, 한사군漢(四郡)이 아니라 위만 정권 몰락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제후로 봉한 5군입니다. 그리고 조선 5군은 하북성, 산동성, 산서성 지역에 있었으며, 또한 한漢나라의 직할령(直轄領)이 아니라 자치령(自治領)이었습니다

 

 

 

 

 

 

 

 

 

 

 

 

일제 식민사관이 만든 한사군 한반도 설을 근거로 중국은 동북공정을 추진

 

 

사마천의 『사기』가 세상에 나오고 근 2백 년이 지나 반고班固(32~92년)한서漢書가 나오게 됩니다.

반고의 『한서』에는 한 무제가 조선(위만 정권)을 멸망시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기』와 한서』의 기록 등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사학이 조작한 역사 한사군 한반도 설의 근거로 이용니다.

 

한서 무제본기에는 4군

한서 지리지에는 2군

한서 오행지에는 3군

당나라 장수절이 저술한 사기의 주석서 사기정의에는 2군으로, 남송 배인의 『사기집해』에는 4군으로 나옵니다.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 장수절의 사기정의』, 배인의 『사기집해』 등 모든 기록이 일관성도 없고 또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일제 식민사관이 조작한 역사 한사군 한반도 설의 실체이며, 조작한 한사군 한반도 설을 바탕으로 중국은 고대 한반도가 중국의 영토였다고 주장하며 국가가 주도하는 역사 왜곡 프로젝트 동북공정을 추진하였습니다.

 

 

 

 

 

중국과 일본에 의한 한韓민족 역사 왜곡

동북아 5대 역사 조작극 - 사마천 『사기史記』 금살치우(擒殺蚩尤)

중국의 시조 황제 헌원과 『환단고기』의 배달국 치우천황

http://gdlsg.tistory.com/1407

 

 

 

 

 

 

 

 

 

 

환단고기 해제에서 전하는 한사군 한반도 설

 

 

 

『환단고기』 완역본 해제 361쪽

 

낙랑국은 낙랑군과 다르다.

최숭이 세운 낙랑은 요서 지역에 있는 자신의 고향, 낙랑에서 이름을 따 왔다.

이 낙랑은 번조선 수도 왕검성이 있던 지금의 하북성 창려현 지역으로 비정 된다. 이에 반해 낙랑군은 한 무제가 번조선을 패망시키고 그곳에 설치하려 했던 4군(四郡) 중의 하나이다. 심백강은 낙랑군이라는 지명이 서요하 상류인 요락수(饒樂水)(시라무렌 강)와 현재의 대능하인 백랑수(白狼水)에서 나온 것이라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낙랑군은 현재의 난하와 요하 사이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심백강 황하에서 한라까지 56~57쪽)

 

 

 

『환단고기』 완역본 해제 365쪽

 

한사군에 대해 2009년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漢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고자 하였으나, 토착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리하여 그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결국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 (34쪽)라고 서술한다. 한사군 설치를 다소 애매하게 표현한 이 서술은 '한사군이 설치되었으나 고조선 유민의 반발에 결국 철폐되었다.'로 이해된다.

 

 

 

『환단고기』 완역본 해제 562쪽

 

한서 무제본기에 중국은 한 무제가 의도하였을 뿐인 한사군이 요서 지역에 실제로 설치된 것으로 기록하였다.

일본은 그 한사군을 한반도 북부로 옮겨 한국사를 대륙사에서 반도사로 축소시키고 한국사가 위만조선에서 한사군으로 이어진 것으로 설정하였다.

일본의 한사군 재在 한반도 설을 중국이 동북공정에 악용하여 고대 중국의 강역을 한강 이북 지역까지 확장하였다.

서양 교과서도 중국의 동북공정에 동조하여 한나라와 당나라 때 영토를 한반도 북부까지 표시하고 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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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Unlimited☆ 2016.05.27 08: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2. 죽풍 2016.05.27 09: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사군 한반도설에 대해 잘 알아 갑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

  3. 생명마루한의원 일산점 2016.05.27 11: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활기차고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4. 뉴클릭 2016.05.27 14: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잘 보고 갑니다 ^^
    의미있는 하루를 보내세요 ^^

  5. Deborah 2016.05.27 15: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공부 잘하고 갑니다. 멋진 하루 되세요

  6. 행복생활 2016.05.27 17: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녀갑니다 ㅎㅎ 좋은 하루가 되셔요~

  7. koreanuri@hanmail.net 2016.08.23 10: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아주 좋은 내용입니다.

    알긴 앎니다.
    사마천의 사기만 해도 수박 겉핥기로 여기 저기 넘기며 읽긴 읽었습니다.
    또 한사군에 대한 기록이 사기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석연치 않습니다.
    안개속인듯, 아는 듯 모르는 듯 지냅니다.
    님이 쓰신 글을 보니 이젠 다른사람들에게도 확실히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님의 이 글을 퍼가도 되는지요?
    일부 사진과 글을 내가 쓰고 게시하는 다른 글에 사용하여도 되겠습니까?
    (별도의 승락이 없더라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단 사용금지 요청을 하면 언제고 삭제하겠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밝 누 리.
    [밝은 우리의 온 삶터]

한민족 정체성의 확장 ‘알타이 연대’를 꿈꾸며 (고조선과 북방 민족 간의 관계)

<김창규 | 주 키르기스스탄 대사> 경향신문 독자투고 일부발췌

 

알타이 연대라고 하면 민족적 시원이 유사한 터키,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투르크계 민족들과 한국, 몽골 등 몽골계 민족들 간의 연대를 위한 협력 형태를 의미한다.

 

유라시아 지역에 오랫동안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알타이계 민족들이 민족적 시원의 유사성과 문화와 감정의 동질성에 대해 비교적 높은 인식을 공유하고 있으며 알타이 연대에 대한 열망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알타이 연대를 구축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곳에 미개척 시장이 있다든가 자원이 광대하다든가 하는 현실적 이유가 아니다.

 

알타이 연대의 구축을 통해서 우리 국민들이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유라시아 대륙은 지금까지 우리의 인식 범위 밖에 있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해양을 통한 발전 전략과 함께 유라시아 대륙을 통한 발전 전략을 한데 놓고 균형적인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한반도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인식의 폭을 대륙으로 확장할 수 있다.


알타이 연대의 구축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이들과의 협력을 통해 우리 민족의 시원이라든가 한글의 기원 등 우리가 명쾌하게 밝혀 내지 못한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어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세계는 글로벌 시대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알타이 연대에 대한 관심과 당위성이 학계를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고 있다. 이제 우리도 축적된 저력을 국내에 가두어 두기보다는 이를 널리 활용하여 세계 평화와 공영에 기여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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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북방 민족 간의 관계

 

⊙ 고조선과 흉노족
『단군세기』에는 고조선과 북방 민족 간의 관계를 알려 주는 귀중한 기록들이 있다. 3세 가륵단군 6년(BCE 2177) 조에 나오는“ 임금께서 열양 욕살 삭정索靖을 약수弱水 지방에 유배시켜 종신토록 감옥에 가둬 놓았다. 후에 용서하여 그 땅에 봉하시니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라는 기록과 4세 오사구단군이 재위 원년인 BCE 2137년에 자신의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한’에 봉했다는 기록, 또 30세 내휴단군 5년(BCE 905)에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 32세 추밀단군 3년(BCE 847)에 선비산鮮卑山의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 등이 그것이다.

 

흉노, 선비, 돌궐, 몽골 등 여러 북방민족과 한민족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그들의 세력 부침을 알아보기로 한다.

 

주지하다시피 몽골 고원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남러시아와 동유럽 일대에는 광대한 초원(스텝) 지대가 이어진다. 이들 지역은 유목생활을 영위하는 몽골계와 투르크계에 속하는 다양한 유목민들의 공간이었다. 동양사에서는 중국 북방의 여러 유목민과 중국 간의 갈등이 아주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었다. 중국인들은 이러한 북방민족을 융戎, 적狄, 호胡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면서, 물리치고 억압해야 할 무지하고 흉악한 오랑캐로 여겼다.

 

그러나 북방민족을 오랑캐로 여긴 것은 어디까지나 중화사상에 빠진 중국인들의 편견 때문이다. 북방 유목민들은 분명 정착 농경민과는 다른 생활방식을 채택한 사람들이지만 결코 야만인은 아니었던 것이 실제로 기마술과 야금술 및 금속가공 기술은 중국인들보다 앞서 있었다.

 

 

⊙ 동방의 삼신과 제천 문화 생활화한 흉노

 『단군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흉노의 시조는 한민족이다. 흉노는 그 수가 계속 늘어나 진나라 때 와서는 이미 오르도스와 몽골고원, 천산산맥 일대를 주름잡고 있었다. 흉노는 그 우두머리를 선우單于라 하였다. 흉노는 한나라 초기 묵특선우冒頓單于(BCE 209~BCE 174) 때 서쪽의 월지와 동쪽의 동호東胡를 격파하고 아시아 최초로 대유목 제국을 세웠다. 묵특선우는 흉노 제국을 신교의 삼신문화의 고향인 고조선처럼 셋으로 나눠 통치하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자신은 중앙을 통치하고 동쪽은 좌현왕이, 서쪽은 우현왕이 통치하게 하였다. 좌현왕은 우현왕보다 우선시 되었는데 보통 선우의 아들을 좌현왕으로 삼았다.

 

 

선우는 자신을‘ 탱리고도撑梨孤塗선우’라 하였는데, 탱리撑梨는‘ 하늘’을 뜻하는 흉노어‘ 텡그리Tengri’의 음역이고,‘ 고도’는 아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탱리고도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를 의미한다. 흉노는 천지와 일월을 숭배하고, 나아가 조상을 숭배하였고, 일 년에 세 번 큰 제사를 지냈다. 특히 정월의 춘제春祭와 오월의 용성대제龍城大祭는 대규모 천제였다. 중국 측의 기록에 의하면 흉노는 하늘에 제사지낼 때 이용하는 큰 금상이 있었다고 한다. 흉노의 한 왕인 휴도왕의 땅에 있던‘ 제천금인祭天金人’이 그것이다. 선우는 매일 해와 달에게 절하고 자신이 거처하는 게르(천막집)의 문도 항상 동쪽을 향해 배치하였다. 이처럼 문을 동향으로 한 것은 동쪽을 중시하는 동이족의 관습과 일치하는 것이다.

 

중국 역사서에서 흉노는 BCE 4세기 전국시대에 처음 등장한다.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흉노는 틈만 있으면 연, 조, 진 나라를 침략하는 골칫거리였다. 이 세나라는 모두 흉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장성을 쌓았다. 이것을 연결한 것이 진시황 때 이루어진 만리장성이다. 진시황은 장군 몽염에게 삼십만 군을 주어 흉노에게 반격을 가하고 서쪽의 농서군에서 동쪽의 요동군 갈석에 이르는 장성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만리장성 축조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고 결국 2세 황제인 호해 때 진나라는 진승과 오광의 반란으로 망했다. 흉노의 위협이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멸망시킨 원인의 하나였던 것이다.

 

진에 이어, 유방이 세운 한나라도 흉노의 공격에 시달렸을 뿐, 흉노를 제압하는데 실패하였다. 한고조 유방의 경우 흉노와의 전쟁에서 포위당했다가 가까스로 뇌물을 주고 빠져나오기도 하였다. 이후 공주와 공납을 보내 굴욕적으로 평화를 유지하였다. 한 무제 때 와서는 다시 흉노와 전쟁을 시작하였는데 이 전쟁은 근 50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한 무제는 흉노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큰 손해를 보았다. 장진퀘이에 의하면 흉노와의 전쟁은 백성들의 생활을 곤궁하게 만들고 국력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무제는 다시는 변방으로 출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은‘ 윤대輪臺의 조서’를 발표하고 자신의 실책을 반성하였다.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하고 그곳에 군현을 설치하려 한 것도 흉노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만조선이 흉노와 손을 잡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 무제 때 한국사와 연관하여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흉노의 비왕 가운데 한 사람인 휴도왕의 아들이 자기 어머니와 함께 한나라의 포로가 된 것이다. 흉노 왕자는 왕의 말을 돌보는 일을 맡았는데, 후에 품위 있는 거동과 성실함이 한 무제의 눈에 띄어 무제의 측근이 되었다. 무제는 이 흉노 왕자 김일제金日磾를 뒤에‘투후’로 봉하였다. 투후는 오르도스의 제후라는 뜻이다. 그 후손 중에는 왕후(원제의 비 효원왕후)도 있다. 일설에 의하면 왕망王莽도 김일제의 고손이다.

 

외척인 김일제 가문은 왕망이 정권을 잡으면서 최고의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왕망이 몰락하자 위험한 처지에 몰렸다. 정확한 경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들은 한반도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 문무왕 비문과 중국 시안[西安]에서 발견된 당나라 시대의 묘비명에서 김일제가 신라 김씨 왕가의 조상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사서 기록에 의하면 한 무제가 김일제에게 김씨 성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한서』「 김일제전」).

 

1세기 초 한나라에서 망명한 김일제 후손이 신라와 가야에 들어와서 왕권을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가야가 있었던 지역에서 기마민족의 유적이 대거 발견되었다. 유물들 가운데 청동제 솥인 동복銅鍑은 흉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제사의식을 위해 말에 싣고 다니던 물건으로, 유럽의 훈족 루트에서도 많이 발견되었다.

 

흉노 제국은 BCE 1세기 중반에 내분이 일어나 둘로 분열되었다. 호한야선우가 이끄는 동흉노는 한나라와 동맹을 맺고 중국 북쪽에 머물렀지만 한나라와의 타협하기를 거부한 질지선우가 이끄는 서흉노는 중앙아시아 쪽으로 이주하였다. 동흉노는 한 세기 뒤에는 다시 남북 흉노로 분열되었다. 남흉노는 고비사막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한나라의 번병藩兵(수비병)이 되었다. 몽골 초원은 북흉노가 지배하였다. 그러나 북흉노는 한 제국과 남흉노 연합세력의 공격 때문에 91년에는 몽골리아를 포기하고 중앙아시아의 일리강 유역으로 이주하였다.

 

이러한 이주에는 가뭄과 병충해 같은 자연환경의 악화에도 기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후한서』「 남흉노전」에는“ 흉노국은 매년 가뭄과 해충의 습격으로 헐벗은 땅이 수천 리에 달하고 초목은 전부 말라버려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과 가축의 수가 삼분의 이에 이르렀다”라는 기록이 있다. 북흉노는 일리강 인근 오아시스 국가들을 지배하기도 했지만 결국 몽골리아 초원의 새로운 패자인 선비족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2세기 중반 즈음에 더 서쪽으로 옮겨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초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이들은 역사적인 기록에서 사라져 버린 듯했지만, 4세기 중반에 갑자기‘ 훈hun’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훈족은 370년경 흑해 북부에 나타남으로써 처음으로 유럽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들은 볼가강을 건너 남러시아 초원지대에 거주하던 알란족을 공격했고, 이어서 알란족과 함께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을 공격하여 유럽 대륙에 민족이동의 대물결을 야기하였다. 공포에 질려 도주한 게르만족이 밀물처럼 로마 국경 안으로 몰려들자 이를 제어하지 못한 서로마 제국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게르만족의 이동은 서양 역사에서 고대의 종말을 초래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바로 이 게르만족의 이동은 훈족의 공격 때문에 촉발된 것이었다.

 

훈족은 이 시기 이후 거의 한 세기 동안 동서 유럽 여러 지역을 침략하여 유럽인에게 커다란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훈족은 아틸라 대왕(395~453) 때에 이르러 유럽 일대를 지배하는 거대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를 훈제국이라 부르는데 우랄산맥에서 동유럽 일대에 걸친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였다.

 

 

⊙ 선비족

 북흉노가 1세기 말 멀리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떠나 버리자 흉노의 본거지이던 몽골 고원은 일시적으로 공백지대가 되었다. 그리하여 흉노의 지배를 받아오던 여러 유목집단들이 초원을 지배하기 위한 각축이 시작되었다. 각축에서 선비족이 승리하여 북방지역을 통일하였다. 2세기 중반에는 단석괴檀石槐라는 영웅이 나타나 선비의 여러 부족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였다. 이 선비제국은 북으로 바이칼호, 서로 신장의 일리강, 동으로 만주 일대에 걸치는 넓은 땅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선비제국도 다른 유목민들이 세운 다른 제국처럼 여러 부족집단들의 연합체였다.

 

단석괴가 사망하자 선비제국은 순식간에 여러 집단로 분할되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한나라가 망하고 그 뒤를 이어 동탁, 원소, 조조, 유비 등 군웅이 패권을 놓고 다투는 삼국시대와 그 뒤를 이은 위진魏晉 제국이 붕괴하면서 중원이 혼란에 빠지자 선비족은 그 틈을 이용하여 대거 북중국으로 밀고 들어갔다. 탁발拓跋, 모용慕容, 우문宇文, 단段, 걸복乞伏 등의 선비족의 여러 부가 이때 거의 모두 남하하였다고 한다. 중국사에서 말하는 소위 5호16국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탁발부는 대국代國을 세웠고, 모용부는 전연前燕·후연後燕·서연西燕·남연南燕 등의 나라를 세웠다. 또 산서 지역의 흉노는 한漢·전조前趙·후조 등을 세웠다. 이 가운데서 탁발부의 대국은 다른 국가들을 모두 정복하고 북중국을 통일하였다. 이 나라가 북위北魏이다. 북위는 후에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되었는데 다시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로 이름이 바뀌었다. 수나라는 바로 북주의 귀족인 수국공隋國公 양견이 나라 이름을 수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수는 다시 당으로 이어지는데 수·당의 기원은 바로 선비족인 탁발씨였던 것이다.

 

5호16국 시대에 북방 유목민족들이 중국 본토로만 진출한 것은 아니다. 한반도로도 적지 않은 수가 왔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 김호동 교수는 북방 유목민의 일부가 신라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4~5세기경에 조성된 신라의 대형 적석목관분 무덤에서 중앙아시아의 문화적 기류를 느끼게 하는 유물이 대거 발견되는 것은 이처럼 선비족이 들어왔음을 증명한다. 훈족의 출현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서부에서 민족대이동이 일어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대륙의 동부에서도 그에 못지않게 커다란 민족이동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북방 유목민들의 이동의 파고는 유럽에서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가져오고 중국에서는 북방민족이 중원을 장악한 5호16국 시대를 열었으며 한반도와 일본에서는 기마민족의 정권을 성립시켰다. 한마디로 말해 유목민은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를 유목민의 대이동으로 크게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 돌궐족

『단군세기』에는 흉노의 시조에 대한 언급뿐 아니라 투르크계인‘ 강거康居’에 대한 기록도 나온다. 강거는 흉노의 서쪽에 자리 잡은 유목민으로서『 사기』에도 나온다. 가륵단군 8년에 강거가 반란을 일으키자 단군이 지백특에서 토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지백특은 티베트를 가리킨다. 18세 동엄단군 때에는 지백특 사람이 공물을 바치러 왔다는 기록도 있다. 이 기록은 고조선의 활동영역이 티베트 인근까지 뻗쳤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단군세기』에 직접 나오지 않지만 투르크 계통의 민족으로서 동양 고대사와 서양 중세사에 큰 영향을 미친 민족이 있다. 바로 투르크족이다. 투르크족은 6세기 중반에 서쪽으로 카스피해에서, 동쪽으로 몽골과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강력한 유목제국을 세웠다. 이 제국을 건설한 사람들은 스스로 족속 이름을‘ 투르크(Turk)’라 하였는데, 중국 측 자료에는‘ 돌궐突厥’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터키Turkey라는 나라 이름도 바로 이 투르크에서 비롯한 것이다.

 

돌궐 제국은 기원 후 1세기 중반에 흉노가 붕괴된 뒤 실로 500년 만에 초원의 유목민을 통합하고 출현한 국가였다.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돌궐 제국은 553년에 토문土門이라는 이름의 수령이 몽골리아에 있던 몽골족 국가 유연柔然을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이다. 돌궐은 몽골계인 유연의 예속 하에 있던 집단으로 알타이 지역에서 야금 일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돌궐족은 알타이 산지에서 나는 철광석을 제련하는 등 금속가공에 뛰어난 솜씨를 보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돌궐 제국의 건설자인 토문이 죽자 그 영토는 아들 무한과 아우 이스테미에게로 나뉘어졌다. 카간의 칭호를 쓴 아들은 몽골 지역을 차지하여 동돌궐이 되었고,‘ 야브구’라는 칭호를 사용한 이스테미의 나라는 서돌궐이 되었다. 서돌궐은 중앙아시아 일대에 위치하였다.

 

서돌궐은 곧 사산조 페르시아와 협력하여 헤프탈Hephtal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어서 동돌궐은 동쪽으로 거란족을 복속시키고, 북으로 바이칼호에 이르렀다. 남으로는 고비사막을 넘어 당시 북주·북제로 나뉘어 있던 북중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당시 북주와 북제는 서로 대립하였기 때문에 북방의 돌궐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경쟁적으로 재물을 갖다 바쳤다.

그러나 중국에 당나라가 들어서자 상황은 급속히 바뀌기 시작하였다. 돌궐의 내분이 격화되고 자연재해가 겹쳤기 때문이다. 결국 당나라는 쇠약해진 돌궐, 초원의 대제국을 일거에 무너뜨려 버렸다.

 

그러나 돌궐은 중국의 지배를 받은 지 반세기 만에 놀랍게도 제국을 부흥시켰다. 만리장성 주변 내몽골 지방에 살면서 당나라의 감시와 통제를 받던 부족민 사이에서 670년대 후반부터 독립을 향한 움직임이 나타나 돌궐 제국을 재건한 것이다. 이것이 제2 돌궐제국이다.

 

다시 일어난 돌궐 제국은 752년에 그 지배하에 있던 세 부족의 반란으로 무너졌다. 세 부족 가운데 하나인 위구르가 몽골의 모든 유목민을 제압하고 돌궐의 뒤를이어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위구르족은 9세기 중반에 몽골고원에서 천재가 빈발한 때에 유목민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망하게 되었다. 돌궐의 후예들은 차츰 서진하여 이란 지역에 왕조(가즈나 왕조)를 세우기도 하고 이슬람을 받아들여 이슬람의 노예와 용병 노릇을 하였다. 그러다가 동로마 제국으로 침투하여 셀주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건설하였다.

 

 

⊙ 몽골족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단군세기』 4세 오사구단군 조에는 단군이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한蒙古里汗’에 봉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BCE 2137년의 일이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에는‘ 동호東胡’라는 이름의 족속이 나온다. 동호는 만리장성 너머 몽골과 만주 일대에 걸쳐 살던 사람들을 포괄적으로 부른 명칭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몽골족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국시대에 동호가 주로 교류한 나라는 연燕나라였는데, 동호는 4세기에 매우 세력이 강했던 것이 분명하다.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동호의 인질로 잡혀 있었다는『 사기』의 기록이 그것을 말해 준다. 동호 역시 흉노처럼 야금술과 궁술, 기마 전투술이 뛰어났고, 진개는 인질로 있는 동안 동호의 앞선 기술을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연나라가 쌓은 장성은 바로 이 동호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몽골 일대의 동호는 한대에 흉노의 묵돌선우에게 패한 후(BCE 209년) 약화되었다. 그 후 동호라는 이름은 사서에서 사라지고 선비鮮卑, 오환烏桓으로 바뀌어 등장한다. 선비보다 약했던 오환은 삼국시대 조조의 공격으로 붕괴되어 조씨 권력의 기동부대로 전락하였다. 이것이‘ 오환돌기烏桓突騎’ 부대이다.

 

선비족의 영웅이었던 단석괴 이후 선비 제국이 붕괴되면서 여러 부족(탁발拓跋, 모용慕容, 유연柔然, 거란契丹, 실위室韋)이 분립하였는데 이들 중 앞의 세 부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강력한 국가를 건립하였다. 거란은‘ 키탄’이라 불리는데, 거란의 영웅 야율아보기는 10세기 초 요나라를 건국하였다. 야율아보기는 907년 천제를 거행하고 칭호를‘ 탱그리 카간’이라 하였다. 거란족에게도 카간은 천제의 대행자인 천자였다. 야율아보기는 곧 몽골고원을 장악하고 발해(대진국)을 멸망시켰다. 거란 제국은 이어서 현재의 북경과 대동 일대에 이르는 북중국을 장악하고 송나라와 대치하였다. 거란 제국은 거란족 외에 몽골계 유목민, 한족, 발해 유민, 여진족, 탕구트인 등 다양한 족속을 포괄하였다. 또 중국과 달리 발해의 5경 제도를 계승하였다. 거란 제국은 12세기 초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금나라에 의해 계승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금나라는 여진족과 거란족의 연합정권이었기 때문이다.

 

몽골 제국을 세운 칭기즈칸(1162~1227)은 실위족에 속한다. 그러나 실위는 다양한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칭기즈칸이 등장하기 이전에 몽골초원 지역은 투르크계와 몽골계, 퉁구스계가 뒤섞인 다양한 집단의 상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집단 가운데‘ 울루스’가 세력이 컸는데, 칭기즈칸이 속한 울루스는‘ 몽골울루스’였다. 칭기즈칸은 19세에 몽골 울루스의 칸으로 선출되고 곧 동쪽의 타타르 울루스, 중앙의 케레이트 그리고 서쪽의 나이만과 메르키트 등 여러 울루스를 차례로 격파하고 통합하였다. 마침내 1206년 쿠릴타이(몽골 족장회의)에서 몽골 집단 전체의 카간으로 추대되었다.

 

칭기즈칸은 곧 눈길을 초원 밖으로 돌려 중앙아시아 일대를 정복하였다. 그의 아들들은 1222~1223년에 아조프 해 연안에서 러시아 군대와 싸워 이기고 1223년에는 키에프 공국을 공격하였다. 1227년 칭기즈칸이 사망하자 그 후계자들은 정복의 범위를 더 넓혔다.

 

칭기즈칸의 후예인 오고타이(2대 카간 1229~1241), 구유크(3대 카간 1246~1248), 몽케(3대 카간1251~1259), 쿠빌라이(4대 카간 1260~1294)는 정복사업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북부의 금나라를 정복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금의 멸망 후에는 네 방향으로 정복사업을 추진하였다. 유럽 원정(1236~242)을 수행한 다음 중동을 공격하여 카프카즈 지역과 셀주크 투르크를 속국으로 삼고(1243) 바그다드를 점령하였다.(1258) 고려도 1236~1241년에 걸쳐 몽골의 공격을 받아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1279년 남송을 멸망시킨 쿠빌라이는 섬나라인 일본과 자바까지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동남아시아는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몽골 제국은 그 지배 지역이 매우 이질적이고 다양하였다. 그러나 효율적인 역참제를 통해 결속을 이뤄 낼 수 있었다. 몽골의 역참제는 제국 전역을 연결하는 조밀하고 광대한 교통 네트워크였다. 동으로 고려와 만주, 서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이란과 러시아에 이르는 교통로 상에 역참을 두었고, 남쪽으로는 안남과 버마까지 연결되었다. 역참에는 운송 수단인 말과 수레, 배를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숙박시설도 있었고 패부牌符라는 증명서만 있으면 얼마든지 역참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문서와 서신, 관원과 공적 물자가 신속하게 이동되었다.

 

이러한 역참제를 기반으로 몽골 제국은 상업을 진흥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몽골제국은 중국의 전통적 한족 왕조와 달리 상인을 우대했고 국제무역을 적극 지원했다. 심지어‘ 오르톡’이라는 상인조합에게 행정을 포함한 다양한 국가사업을 맡겼다. 또 통행세를 폐지하고 통상로를 안전하게 만드는 데 신경을 썼기 때문에 몽골 제국 시대에는 동서양 간에 교류가 매우 활발하게 이뤄졌다.

 

몽골 제국은 종교인에게도 관용정책을 취하여 각 종교의 지도자에게 면세 혜택까지 부여하였다. 페르시아나 중국 측 기록에도 남아 있듯이 이슬람·기독교·유대교·유교·불교·도교의 사제나 승려가 그러한 혜택을 누렸다.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여태까지 국가의 탄압을 받던 소수 교단이 활력을 얻게 되었다. 중국과 중동에서는 네스토리우스파가 활발한 활동을 했고 유럽의 가톨릭도 적극적으로 선교사를 몽골 제국으로 파견하였다.

 

이러한 몽골 제국의 개방적인 동서교류 정책은 인류 역사상 어느 시기보다도 활발한 인적 왕래, 종교의 전파, 상품의 확산을 가져다 주었다. 이것이 소위‘ 팍스 몽골리카’의 실체였다. 이 시대에 위대한 여행기들이 나온 것은 이러한 팍스 몽골리카를 배경으로 한 것임이 틀림없다.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는 서양인으로서 몽골 제국에 가서 쿠빌라이 칸의 신하로 살다가 귀국하여 견문록을 남겼다. 반대로 동에서 서로 가서 여행기를 남긴 사람들도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장춘진인長春眞人(1148~1127)이다. 산동성 사람으로 도교의 도사이던 그는 칭기즈칸의 부름을 받고 몽골군의 원정에 종군하였다. 알타이산을 넘어 천산북로를 따라 사마르칸트에 갔고 후에 남쪽으로 힌두쿠시 산맥을 넘었다. 장춘진인의 기행문은 『장춘진인서유록長春眞人西遊錄』으로서 13세기 몽골 제국 시대의 동서교통에 대한 귀중한 자료이다.

 

이처럼 몽골이 주도하던 13~14세기 때에는 동서 간에 활발한 교류가 있었고, 이러한 교류는 다시 근대를 열어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요컨대 몽골 지역을 중심으로 한 북방 지역에서 일어났던 흉노, 선비, 돌궐, 몽골 등 여러 족속은 상고 시대에 우리 민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사의 흐름을 이끈 주도 세력으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원문: 상생출판 환단고기)

 

 

증산도 열어나가는 상생 후천개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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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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