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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3.10 환단고기 태백일사의 소장자 항일독립운동가 해학 이기 선생 (5)
  2. 2017.03.18 항일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2)

한민족의 국통맥(國統脈, 나라의 계보)과 정신문화를 밝힌 환단고기태백일사

태백일사 소장자이며 환단고기를 감수한 역사가이며 항일독립운동가 해학 이기 선생

 

 

 

 

 

 

 

 

 

 

 

 

 

해학 이기 선생은 잃어버린 한민족의 역사와 정신문화를 복원하는데 불멸의 공덕을 쌓은 고성 이씨 가문의 후손으로 1848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습니다.

 

 

해학 이기 선생은 전북 김제 출신으로 예술과 학문에 조예가 깊은 실학자 석정 이정직(1840~1910) 선생과 고창 출신의 실학자이며 애국지사로 매천야록의 저자인 매천 황현 선생과 함께 호남의 삼재(三才)로 불렸습니다.  

 

 

호남의 삼걸이라고도 불린 해학 이기, 석정 이정직, 매천 황현 선생은 모두 성리학과 실학을 섭렵한 학자로 실용적인 실사구시를 주장했습니다.

 

 

 

 

 

 

 

 

 

 

고성 이씨 가문의 위대한 업적은 필설로 다할 수 없습니다.

자주적 역사관과 자주부강론을 설파했던 후암 이존비 선생,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를 저술하신 행촌 이암 선생, 행촌 이암 선생의 동생 도촌 이교 선생은 『환단고기』의 『삼성기 下』를 저술하신 원동중 선생의 스승입니다.

 

 

 

또, 행촌 이암 선생의 손자로 세종대왕에게 『단군세기』를 올린 용헌 이원 선생, 『환단고기』의 『태백일사』를 저술하신 일십당 이맥 선생 등 한韓민족의 참역사와 정신문화를 밝힌 고성 이씨 가문의 유업을 계승한 분이 구한말 항일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해학 이기 선생입니다. 

 

 

 

 

 

 

 

 

 

 

이건창, 이정직, 황현 선생 등은 『환단고기』 『태백일사』의 소장자이며 『환단고기』(합본 이전의 다섯 권)를 감수한 해학 이기 선생을 두고 대문장가이며 행동적 저항주의자라고 평했습니다.

 

 

해학 이기 선생은 198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녹두장군 전봉준을 찾아가 "동학군을 이끌고 한양으로 올라가 간사한 무리를 물리치고 임금을 받들어 국가의 질서를 새롭게 하자"라는 뜻을 전했습니다. 전봉준 장군은 해학 이기 선생과 뜻을 같이했지만, 김개남 장군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1897년 『환단고기』 『태백일사』의 소장자 해학 이기 선생(1848~1909)을 찾아온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후일 『삼성기 上』, 『삼성기 下』,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다섯 권의 사서를 하나로 묶어 『환단고기』라는 이름으로 편찬한 운초 계연수 선생입니다.

 

 

 

 

 

 

 

 

 

 

해학 이기 선생의 문하에 들어온 운초 계연수 선생(1864~1920)은 스승의 가르침 아래 2년(1898~1899)에 걸쳐 『태백진훈』, 『단군세기』, 『참전계경』, 『태백일사』, 『천부경요해』 등의 책을 간행합니다.

 

해학 이기 선생은 러일전쟁이 끝나고 러시아와 일본 간에 강화조약이 체결될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왕과 정계에 항의 서면을 제출하고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침탈한 을사늑약 직후 귀국해 한성사범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했습니다.

 

 

 

해학 이기 선생은 1906년 장지연, 윤효정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해 국권 회복과 계몽운동에 앞장섰고, 1907년 나인영(홍암 나철), 오기호, 윤주찬 등 10여 명이 모여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해 을사오적을 척살하려 했지만, 친일매국노 권중현에게만 상처를 입히고 거사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7년 형을 선고받은 해학 이기 선생은 진도로 유배되었고, 2년 만에 석방되어 호남학보를 발행해 민족계몽을 운동을 벌이는 한편 민족의 주체 의식을 높이기 위해 단학회를 조직했습니다.

 

 

 

 

 

 

 

 

 

 

해학 이기 선생은 1909년 5월 5일 고구려를 창업한 고주몽 성제와 광개토태왕을 추모하는 광개절을 맞아 제자 운초 계연수 선생을 데리고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에 올라 삼신상제님께 천제(天祭)를 모십니다.

 

 

회갑이 넘은 나이에도 지칠 줄 모르던 해학 이기 선생의 애국활동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마수를 견디지 못한 대한제국의 국운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기울었습니다.

해학 이기 선생께서 1909년 7월 13일 서울의 한 여관에서 단식 자진하시니 향년 62세였습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의 소장자이며 항일독립운동가인 해학 이기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에 『환단고기』가 출간됩니다.

해학 이기 선생의 제자 운초 계연수 선생은 스승께서 생전에 세세하게 감수해준 『삼성기 上』, 『삼성기 下』,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를 하나로 묶어 『환단고기』란 이름으로 출간했습니다. 

 

 

 

 

 

 

 

 

 

 

 

 『태백일사』 소장자이며 『삼성기 上』, 『삼성기 下』,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다섯 권의 책을 감수해준 해학 이기 선생은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를 지으신 행촌 이암 선생과 『환단고기』의 『태백일사』를 지으신 일십당 이맥 선생의 후손입니다.

 

해학 이기 선생은 고성 이씨 가문에 비장 되어 온 역사서를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보았기 때문에 자주적 역사관이 정립되어 있었습니다.

 

 

 

후암 이존비 선생부터 행촌 이암, 일십당 이맥, 해학 이기 선생까지 근 7백 년 동안 고성 이씨 가문이 올바른 정신과 희생과 정성으로 환단(桓檀)의 역사를 밝혔고 지켜왔습니다.

 

고성 이씨 가문의 7백 년 혈성과 희생, 그리고 역사적인 사명감으로 한韓민족의 역사를 밝히고자 했던 운초 계연수 선생에 의해 우리의 참역사와 정신문화를 복원한 『환단고기』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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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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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녁노을* 2019.03.10 05: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기 선생님은...처음 접하네요.
    ㅎㅎ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휴일 되세요^^

  2. 청결원 2019.03.10 07: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말 잘 보내세요~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3. kangdante 2019.03.10 07: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학 이기선생에 대해 알고 갑니다
    예전에는 몰랐던 사람들이
    요즘은 언론에도 많이 소개되는 것 같아요..

  4. 버블프라이스 2019.03.10 19: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이기 선생님은 환단고기 소장자 이시군요?
    해학 이기 선생에 대해 몰랐던 내용들을 알고 갑니다^^

  5. 죽풍 2019.03.10 20: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좋은 공부하고 갑니다.
    행복하세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맞선 항일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조선 중기 영의정을 지낸 경주 이씨 백사(白沙) 이항복은 오성이란 별칭으로 더 유명하다.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의 9대손이 조선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이다.

 

명문가의 후손으로 한성판윤과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넷째 아들이 우당 이회영(1867~1932)이고, 다섯째 아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년) 초대 법무 총장과 대한민국(1948년)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1868~1953)이다.

 

 

 

 

우당 이회영은 19세기 말부터 항일의병에게 자금을 조달해 주었으며, 을사오적 암살을 준비하기도 했다.

1905년 을사늑약과 107년 정미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고종황제를 강제퇴위, 군대 해산, 입법, 사법, 행정 등 내정에 직접 간섭하며 국권을 침탈하려 하고 있었다.

 

 

 

 

 

 

 

 

 

 

 

 

 

1906년 만주 용정에 인재 양성과 항일독립운동가를 더욱 많이 배출하기 위해 신학문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우는 데 동참한다.

 

 

1907년 일제의 방해공작과 이준 열사의 죽음으로 실패로 끝난 헤이그 특사 파견을 기획하기도 한 우당 이회영과 성재 이시영 등 경주 이씨 형제들과 안창호를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가 뜻을 모아 신민회를 결성한다. 

신민회는 국권 회복과 민중 계몽을 위해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항일독립단체다.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강제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고, 1910년 12월 서간도에 무장투쟁을 할 항일독립운동가와 인재를 양성하는 무관학교를 설립할 목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던 안명근을 체포한다.

 

일제는 안명근을 체포하면서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이라는 희대의 사건을 조작하여 항일독립운동가를 대대적으로 체포한다. 이때 신민회 간부 상당수가 체포되면서 국내 신민회 활동은 사실상 와해한다.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 일제가 무단통치를 시작하자 우당 이회영을 비롯한 6형제와 40여 명의 전 가족은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한다. 

 

 

 

 

혹자는 우당 이회영과 성재 이시영 형제들의 행동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모범적인 선각자라고 말한다.

항일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과 성재 이시영 등 경주 이씨 일가는 단순히 사회지도층의 의무와 도덕 책임을 다한다는 의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 위해 부귀영화를 버린 것이 아니다.

 

우당 이회영과 그 가족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범주를 넘어 자신의 목숨을 비롯하여 전 가족의 목숨과 전 재산을 항일독립운동에 바친 민족의 귀감이며, 숭고하고 위대한 나라 사랑의 뜻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보다 더 크고 위대하다.

 

당시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친일파도 있었지만, 국가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항일투쟁에 남녀노소가 따로 없고,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다. 우당 이회영 일가는 진실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받친 숭고하고 거룩한 희생이었.

 

 

 

 

 

 

 

 

 

 

 

 

1911년 경학사 설립에 참여하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한다.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는 서간도로 이주한 사람들을 위해 농업, 실업, 교육을 장려하는 한편, 항일독립운동가 양성하여 항일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기 위함이다.

 

1919년까지 국내외를 오가면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고종의 망명을 계획하였으나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무위 된다.

 

 

 

우당 이회영은 1919년 3.1만세 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동참하였으나, 임시정부 내에서 의견 차이로 내분이 일어나고 분쟁이 심화하자 블라디보스토크와 베이징, 상하이 등을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이회영의 동생 이시영은 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법무총장이 된다.

 

 

 

 

 

 

 

 

 

 

 

 

 

 

1923년 우당 이회영은 신채호 등과 이른바 아나키스트 운동(무정부주의 운동)을 전개하며 독립운동을 이어나간다.

1924년 우당 이회영은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 조직 창설을 후원하였고,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한 후 항일결사조직 다물단 조직한다.

 

1929년 우당 이회영은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결성하고, 김좌진 장군과 '재만한족연합회' 조직을 만들었다.

 

 

 

 

1931년 우당 이회영은 동지들과 '남화한인연맹' 창설하고, 항일비밀결사조직 흑색공포단 조직한다.

1932년 항일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상하이에서 다롄으로 가던 중 밀정의 밀고로 일제에 체포되어, 여순감옥에서 극심한 고문을 받다가 11월 17일 그토록 원하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66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했다.

 

 

 

 

 

 

 

 

 

 

 

 

우당 이회영은 백사 이항복 이후 대대로 정승과 판서를 지낸 명문대가 집안의 후손이다.

우당 이회영과 그 가족 모두는 문벌 가문에 대단한 재력가 집안 후손이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신의 안락과 영화를 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목숨과 집안의 모든 것을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다 바친 진정한 애국 충정 지사 집안이다.

 

 

 

경주 이씨 6형제 중 유일하게 생존하여 조국의 광복을 지켜본 성재 이시영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초대 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거창 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나자 이승만 정부의 부패와 실정을 성토하며 부통령직을 사임하고, 1953년 86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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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뉴론7 2017.03.18 07: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분인데 잘 알고 계시네요
    도생님은 국사 역사 선생님 하셔도 좋겠어요

  2. 죽풍 2017.03.18 18: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최근 어느 젊은 강사가 독립선언문 낭독 33인과 관련한 폄하 논란이 일었는데,,,
    동영상을 보니 팩트에 기반했다고는 하나 비하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뜻을 잘 기리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