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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6대 왕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쇄국정책(鎖國政策)과 척화비(斥和碑) 건립

 

 

 

 

 

 

 

 

 

 

 

 

 

인간은 누구나 공(功)과 과(過)가 있다.

한 나라의 국정(國政)을 운영한 사람이라면 그 책임은 더욱 막중하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한때 조선의 국정을 책임진 한 사람이었으며,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한 이래 근 5백 년 동안 조선은 여러 번의 내란과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의 외침도 있었다. 1863년 조선 26대 왕 고종이 즉위할 때는 조선이 근 5백 년 동안 경험하지 못한 절체절명 위기,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국가의 생존이 위기에 몰린 시기였다.

 

 

 

 

순조가 즉위한 이래 약 60여 년 동안 조선은 외척세력의 세도정치로 백성의 삶은 파탄지경에 이르렀고 망국(亡國)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중앙정부와 지방 관리, 양반계층의 사리사욕과 부정부패, 가혹한 횡포 등으로 백성은 벼랑 끝에 몰려 있었고, 조선은 붕괴하기 일보 직전에 놓여 있었다.

 

 

세도정치가 판을 치면서 여러 차례의 민란이 발생한다. 

조선 후기를 민란의 시대라 부르는 만큼 조선이 망국의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말한다.

 

 

더욱이 19세기는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이 앞다투어 식민지를 개척하던 때였다.

조선도 예외 없이 서구 열강의 도전을 받았고, 내적으로 붕괴 직전까지 와 있던 조선은 외세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는다. 흥선대원군은 근 500년 동안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절체절명의 상황인 누란(累卵)의 위기 앞에 홀로 서 있었다.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병인양요(1866년, 고종 3)와 신미양요(1871년, 고종 8)를 거치면서 서구 세력을 배척하는 이른바 쇄국정책(통상수교거부정책)과 척화비를 건립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여러 정책 중에는 성공한 정책과 실패한 정책이 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곪을 대로 곪아 터진 조선을 개혁하고자 삼정의 개혁, 당파를 초월한 인재등용, 법제확립, 비변사 혁파, 서원혁파, 경복궁재건,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통상수교 거부한 쇄국정책과 척화비 건립 등이 있다. 

 

 

 

혹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실패한 정책 중에 당대 일부 사람과 후대의 학자는 특히 쇄국정책과 척화비 건립을 비판한다.

흥선대원군이 능동적으로 문호를 개방해 서구문물을 받아들였다면, 조선이 근대화를 좀 더 빠르고 수월하게 이루었을 것이라는 이유다.

 

 

그러나 당시 서구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은 단순히 통상적인 수교와 선진문물만 전해주고 끝내지 않았다.

제국주의 국가는 식민지 개척을 전제로 문호개방을 요구하였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실각하고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는 강화도조약(1876년)을 강압적으로 맺는다.

문호개방의 통상조약인 강화도조약으로 조선(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여타 서구 제국주의는 문호개방이라는 미명아래 일본 제국주의보다 먼저 식민지 정책을 썼다.

서구 제국주의에 먼저 문호를 개방하였다면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가 아닌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로 전락했을 것이다.

 

 

 

 

미국의 무력시위는 조선을 식민지화하려 한 것이 아니고 단지 문호를 개방시키려 했다고 하지만, 1905년 미국과 일본의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보면 미국은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알 수 있다.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화했고 일본의 대한제국(조선) 식민지 정책을 지지했다. 

 

 

 

 

 

 

 

 

 

 

 

 

   

 

흥선대원군은 미국의 침략전쟁인 신미양요를 전후하여 서양 제국주의 세력을 배척하는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척화비(斥和碑)를 건립한다. 흥성대원군은 백성이 잘 볼 수 있도록 조선 팔도 요지 200여 개소에 척화비를 건립했다.

 

  

조선은 60여 년의 세도정치로 백성은 도탄에 빠졌고, 민란이 발생하는 등 정치적, 사회적, 외교적으로 내우외환의 혼란기였다. 

당대와 후대의 학자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쇄국정책과 척화비 건립 등 여러 정책의 공과(功過)를 평가하기도 한다.

 

 

 

절체절명의 위기, 내우외환으로 망국의 벼랑 끝 위기에 직면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큰 파도 쇄국정책과 척화비 건립을 선택하였다. 

 

 

洋夷侵犯 非戰卽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서양 오랑캐가 침범했을 때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

우리의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 병인년(1866)에 짓고 신미년(1871)에 세우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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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6.12.28 06: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가네요

  2. 죽풍 2016.12.28 11: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도자는 공과 과는 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공은 지나치게 평가받는 경우가 있고, 과는 공에 덮혀 크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만 같습니다.
    박정희 정권도 마찬가지고, 그의 딸 박근혜는 두말 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국민의 올바른 인식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

  3. 고프다 2016.12.28 18: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4. 생명마루 신림점 2016.12.28 22: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세계일보 보도일부 발췌

이원(50·) 대한황실문화원 총재는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이 총재는 이날 이화(李花·자두나무꽃) 문양이 선명한 고종의 익선관(翼善冠·왕이나 세자가 평상복으로 정무를 볼 때 쓰던 관)과 투구 등을 확인한 뒤 “한국에는 임금이나 황제가 쓰던 익선관이나 투구, 갑옷이 없다. 이게 왜 일본에 있는 것이냐”며 통탄했다.


의친왕의 13남9녀 중 9남 이충길씨의 장남인 이 총재는 2005년 7월 후사 없이 타계한 대한제국 마지막 황세손 이구(李玖·1931∼2005)씨의 양자로 선택되면서 공식적인 고종의 증손이 됐다.............


이씨는 “투구는 1897년 대한제국 설립 후에 국화로 사용한 이화 문양이 사용된 것으로 볼 때 대한제국 것이 확실하고 갑옷도 마찬가지”라며 “앞으로 유출 경위를 확인하는 데 온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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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대한제국을 세우고 환구제를 거행하다

1897년 고종황제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황천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는 환구제를 거행하고, '대한민국'의 근간인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풍전등화의 국운 아래,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의 무능한 임금으로 흔히 그려지는 고종황제,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당시 일본이 왜곡해낸 이미지다.

황제국가의 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국호를 바꾸고 연호를 재정한 다음, 천상의 황천상제님께 천제를 지내기 위한 천단, 즉 환구단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천제는 황제국의 출범을 대내외에 알리는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이에 대해 이민원 교수는(동아역사연구소 소장) "환구단을 설치해서 황제가 하늘의 신과 직접 교감하면서 제천행사를 한다. 이전에는 중국의 황제만이 할 수 있었던 행사를 우리 대한제국에서도 이제는 자주국이고 독립국의 입장에서 진행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한제국의 국왕은 더 이상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는 왕이 아니라, 천상의 상제님으로부터 천명을 부여받은 천자, 즉 황제가 된 것이다. 1981년 2월, 황궁우 복원공사를 하던 도중 발견된 황궁우 상량문에는 당시 고종황제가 국가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상제께 고하는 글귀가 발견되었다.

"상제님께 정성을 다하여 상량하오니 상량 후에 국운이 장구하여 만민이 복되게 하여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고종황제가 천제를 올린 황천상제님는 어떤 존재일까?

상제上帝에서 상上은 가장 높은, 더 이상이 없는, 지고무상至高無上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帝는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한울님 제帝자입니다. 그러므로 상제님는 신의 세계, 인간의 세계, 나아가서는 자연세계를 두루 다스리는 지존무상至尊無上의 한울님을 말합니다." (강영한 연구위원, 상생문화연구소)

대한제국이 건국되고 2년 후인 1899년, 황천상제님께 천제를 지내기 위해서 만들어졌던 환구단 옆에 황궁우가 들어선다. 황궁우는 "황천상제, 황지기, 태조'의 신위를 보관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어 하늘에 천제를 지냈던 환구단! 그러나 지금은 환구단은 사라지고 신위를 모셨던 황궁우만 고층빌딩에 둘러싸인 채 남아 있다. 황궁우에서는 오늘날에도 환구대제가 열린다. 하지만 환구단이 아니라 황궁우라 아쉬움이 남는다.

황천상제님께 황제국의 꿈과 이상을 고하고 그 꿈을 대한제국으로 풀어나가길 기원했던 환구단! 그러나 1914년 9월 30일, 일제는 환구단을 헐고 거기에 조선경성철도호텔을 세운다. 환구단 주변의 건물들도 철거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수난을 당한다.

1945년 광복 후, 일본에 의해 건립된 철도호텔은 헐렸지만 그 자리에는 환구단이 아닌 조선호텔이 들어서기에 이른다. 현재는 호텔의 정원인양 황궁우만 외롭게 서 있고, 이 자리가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했던 곳임을 알리는 팻말만 쓸쓸히 서 있을 뿐이다.

 

고종 - 상제님의 명으로 대한제국 선포하다

EBS 잊혀진나라 13년 1부 중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uUqa6-55Q54

 

고종황제가 즉위하면서 내린 말씀
"짐이 부덕하여 마침 어려운 때를 당하였는데

상제께서 권고하여 위태로움을 편안함으로 바꾸고

독립하는 기초를 창건하여 스스로 주장하는 권리를 행하라 하시니

황제의 칭호를 추존코자하매 천지에 제사를 고하고

황제의 자리에 나아감에 국호를 정하여 가로되

대한이라하고 이해로써 광무 원년을 삼고

이에 역대 고사를 상고하여 따로 큰 제사를 행한다.


고종 - 대한제국 애국가를 만들도록 명을 내리다

 

 

             

 

 

대한제국 애국가는 몇 차례의 가사 변화가 있었다

첫 번째 가사

한문 표기

上帝保佑皇帝聖上

聖壽無疆

海屋籌山

威權瀛廣

于千萬歲

福祿無窮

上帝保佑皇帝聖上

고전 한글 표기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를 도으ㅅㆍ

셩슈무강(聖壽無疆)ㅎㆍㅅㆍ

ㅎㆍㅣ옥듀(海屋籌)를 산(山)갓치 ᄡᆞ으시고

위권(威權)이 환영(環瀛)에 ᄯᅳᆯ치사

오쳔만셰(於千萬歲)에 복녹(福祿)이

일신(日新)케 ㅎㆍ소셔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우소셔

현대 한글 표기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사.

만수무강하사

큰 수명의 수를 산같이 쌓으시고.

위엄과 권세를 천하에 떨치사

오천만세에 기쁨과 즐거움이

날로 세롭게 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두 번째 가사

당시 한국어

상뎨(上帝)난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소셔 / 셩슈무강(聖壽無疆)ㅎㆍ샤

ㅎㆍㅣ옥듀(海屋籌)를 산(山)갓치 ㅆㆍ으소셔

위권(威權)이 환영(環瀛)에 떨치샤

오쳔만셰(於千萬歲)에 무궁(無窮)케 ㅎㆍ소셔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소셔


현대 한국어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만수무강하사

큰 수명의 수를 산 같이 쌓으소서

위엄과 권세를 천하에 떨치사

오천만세에 무궁케 하소서

상제는 우리황제를 도우소서

 

 

증산도 열어나가는 상생 후천개벽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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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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