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강제징용11

사이판 자살절벽과 만세절벽, 티니안 강제징용 피해자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침략전쟁 태평양전쟁에 끌려가 총알받이가 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남양군도 사이판 섬 자살절벽과 만세 절벽, 티니안 섬에서 목숨을 잃은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태평양전쟁(2차 세계대전)의 최고 전범은 일본 제국주의 히로히토 천황이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의 승전국 미국은 일본의 천황제를 인정하고, 침략전쟁을 일으킨 일본 천황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고 일본군이 있던 장소에는 조선인 강제징집 피해자, 강제징용 피해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강제동원됐다. 인간의 존엄성을 철저히 파괴되고 노예보다 못한 참담한 삶을 살던 한국인은 일본이 저지른 침략전쟁의 전쟁터에서 무고하게 희생됐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의 최정예부대 관동군과 본토 일본군, 조선 주둔 일본군 일부가 남양군도.. 2017. 8. 13.
태평양전쟁의 격전지 남양군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일본 제국주의가 1941년 12월 7일 미국 진주만을 기습 폭격하여 시작된 태평양전쟁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전쟁 최대 격전지 남양군도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일본 제국주의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41년에는 미국을 기습 폭격하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일본 제국주의가 전선을 확대하면서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인력을 충원하기 위해 일본은 조선인을 강제징집, 군속(군무원), 학도병(소년 및 학도지원병), 강지징용(강제노역), 일본군 위안부 등으로 강제동원한다. 태평양전쟁 당시 남양군도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의 숫자 통계는 없다. 일본이 강제동원 자료를 고의로 소각 또는 폐기와 은폐를 하거나 전쟁 중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말기 남양군도의 사이판 섬을 점령하기 위한 .. 2017. 8. 12.
일본의 사할린 조선인 강제징용과 이중징용 피해자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린 조선인 강제징용과 이중징용 피해자 아직도 무국적자로 살아가는 사할린 고려인 강제징용 피해자와 후손 일본 열도의 최북단에 있는 섬, 홋카이도(북해도)와 마주한 러시아 사할린은 한때 러시아와 일본이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던 섬이다. 월타족과 니브흐족(퉁구스계), 홋카이도의 원주민 아이누 등이 거주하던 사할린은 몽골(원나라)과 명나라, 청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19세기 들어서면서 러시아가 정착민을 보내 실효적 지배를 했다. 사할린은 19세기 중반 러시아와 일본이 남북으로 분할하여 지배하였고, 일본이 러시아에 사할린을 넘겨주고 쿠릴 열도 남쪽의 4개 섬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사할린 섬의 남쪽 절반을 러시아로부.. 2017. 7. 30.
일제강점기 홋카이도(북해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일제강점기 일본의 최북단 섬 홋카이도(북해도北海島) 탄광과 군사시설 건설현장 등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북해도(홋카이도)는 본래 아이누가 살던 섬으로 일본의 영토가 아니었다. 홋카이도는 1868년 메이지유신 때 만들어진 일본 제국 헌법에서도 북해도(홋카이도)는 일본 영토에 포함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 제국 헌법에는 조선(대한민국)의 독도, 유구 열도(오키나와 유구왕국), 사할린, 쿠릴열도(북방 4도) 역시 일본 영토에 포함되지 않았다. 대부분 교과서와 학자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북해도(홋카이도)를 개척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본의 북해도(홋카이도) 개척 역사는 왜곡된 것으로 일본 측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다. 자국의 영토가 아닌 곳을 힘으로 개척한다는 것은 식민지.. 2017. 7. 29.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와 장생탄광(2) 일제강점기 해저탄광 갱도붕괴로 바다 밑에 수장(水葬)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와 장생탄광(長生炭鑛) - (2)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 노무자가 석탄 채굴작업을 한 장생탄광은 해저탄광으로 당시 여느 탄광처럼 비좁고 어두웠으며, 높은 습도와 고온의 열기 속에 속옷(훈도시)만 걸친 채 석탄 채굴 작업을 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끌려간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작업 현장은 지역을 불문하고 생지옥이었다. 장생탄광에서 일한 대부분의 조선인 노무자는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사람들이었고,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왔다 장생탄광에서 일한 조선인도 일부 있었다. 일본인과 조선인 등 1천 명 남짓 일하던 장생탄광에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높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숙소에서 너덧 평 되는 방.. 2017. 7. 23.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와 장생탄광(1) 일제강점기 해저탄광 갱도붕괴로 바다 밑에 수장(水葬)된 조선인 강제징용(강제노역) 피해자와 장생탄광 - (1) 석탄산업은 조선과 철강 등과 함께 일본의 산업 혁명을 주도했던 근대화의 상징이다. 석탄산업은 일본 제국주의가 군사 대국화와 팽창주의 과정에서 일본 근대화의 기반이 된 산업 중 하나다. 산업근대화를 이룬 일본은 주변국을 침략하는 군사적 목적의 전쟁에 이용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강제징용 피해자는 석탄산업뿐만 아니라 조선과 철강산업을 비롯한 공사장, 벌목장, 군수기지 건설 현장 등 인력이 필요한 거의 모든 분야에 노무자로 강제동원됐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군수물자를 동원한 일본 제국주의는 모든 산업 분야에서 안전보다는 생산량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사고로 목숨을 잃은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도 많.. 2017. 7. 22.
도쿄대공습(동경대공습)과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미국의 일본 본토 초토화 작전 동경대공습과 도쿄대공습에 숨진 1만여 명의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일제강점기 일본이 조선인을 강제동원한 방식은 크게 3가지다. 조선인을 일본군과 군속(군무원)으로 강제징집하여 전쟁의 총알받이와 강제노역에 동원한 것, 조선인을 일본의 침략전쟁에서 필요한 군수기지 건설과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무기 제조와 석탄 채굴 등에 필요한 남녀 인력을 강제노역시킨 강제징용, 조선인 여성을 꼬임과 협박 등으로 강제연행하여 일본군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일본군 '위안부' 등이다. 1939년 일본의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이 공포되기 이전인 20세기 초부터 학업, 또는 직업을 찾아 조선인이 본격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의 강제연행, 강제징용에 끌려온 조선인도 많았지만, 일본에 수년에서 수십.. 2017. 7. 9.
군함도(하시마섬 탄광) 강제징용 피해자 201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군함도(하시마 섬 탄광)와 한국인 강제징용(강제노역) 피해자 일본은 동양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룬 나라다. 혹자는 일본 근대화와 산업화가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인을 강제징용으로 끌고 가 이루었다고 주장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일본은 강제징용을 본격화한 1939년 말 이전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미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루었다. 일본은 지난 2015년 지옥섬으로 불린 군함도(하시마 탄광)를 비롯한 23개 시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데 성공했다. 일본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을 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군함도(하시마 탄광)를 비롯한 23곳 중 7개 시설이 일제강점기 한국인이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시설이라 세계문화유산 등재 보류 또는 일본의 강제징용.. 2017. 7. 2.
군함도 강제징용 생지옥 하시마섬 탄광 군함도(軍艦島) 강제징용(강제노역): 조선인에게 생지옥과 같았던 하시마섬 탄광 우리나라 석탄산업은 19세기 말 일본인에 의해 탄전(炭田)이 조사되었고,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문경 탄광(남한)이 채굴을 시작했다. 탄광산업의 전성기라고 하는 1960~70년대 흔히 탄광을 '막장'이라고 불렀다. 광부라는 직업이 그만큼 위험하고 힘들었다는 의미였다. 수십 년 전 사용하던 막장이라는 의미는 아직도 부정적 또는 극단적 의미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군함도(하시마섬) 탄광으로 강제징용 당하여 끌려간 한국인 피해자들은 하시마섬 탄광을 생지옥과 같은 지옥섬이라고 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19세기 말부터 침략전쟁을 일으켰고, 식민지와 점령지 국민을 자신들이 저지른 침략전쟁에 강제동원했다.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2017. 7. 1.
일제강점기 일본의 조선인 강제징용 집단학살 사건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만행 강제노역(강제징용)에 동원한 조선인 집단학살 사건 일제강점기 조선인은 일본인으로부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일본의 강제노역(강제징용)에 끌려간 조선인은 가혹한 노동과 굶주림에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한 맺힌 절규를 남기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죽어갔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강제노역(징용)에 끌려간 숫자는 대한민국 정부와 단체마다 차이가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1910년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강제병합하기 이전부터 우리 민족은 일본에 의해 강제이주와 강제징집 및 강제동원을 당했다. 1876년 불평등 강화도조약 이후 1945년까지 약 800만 명의 우리 동포가 일본에 의해 목숨을 잃었으며, 약 5백만 명의 동포가 조국을 떠났다. 일제강점기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 2017.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