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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3749

일본 군함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 일본 제국주의 군함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 1868년(고종 5) 일본은 메이지유신(명치유신)을 통해 막부정권을 무너트리고 일본 왕 친정체제의 제국주의로 발돋움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에 여러 차례 통상교섭을 요구하였으나, 당시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하던 시기라 성공하지 못했다. 1873년(고종 10) 고종과 중전 민씨는 경복궁 중건과 서원철폐 등의 정책으로 양반과 백성에게 민심을 잃은 흥선대원군을 최익현과 유학자를 앞세워 내쫓는다.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민씨 일파가 조정 요직을 차지하며 세도정치를 한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일본 제국주의는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군함을 파견한다. 1875(고종 12) 8월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에 침입하여 조선과 전투를 벌이는 사건이 발생.. 2016. 12. 29.
흥선대원군 이하응 쇄국정책과 척화비 건립 조선 26대 왕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쇄국정책(鎖國政策)과 척화비(斥和碑) 건립 인간은 누구나 공(功)과 과(過)가 있다. 한 나라의 국정(國政)을 운영한 사람이라면 그 책임은 더욱 막중하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한때 조선의 국정을 책임진 한 사람이었으며,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한 이래 근 5백 년 동안 조선은 여러 번의 내란과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의 외침도 있었다. 1863년 조선 26대 왕 고종이 즉위할 때는 조선이 근 5백 년 동안 경험하지 못한 절체절명 위기,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국가의 생존이 위기에 몰린 시기였다. 순조가 즉위한 이래 약 60여 년 동안 조선은 외척세력의 세도정치로 백성의 삶은 파탄지.. 2016. 12. 28.
제국주의 열강 조선 침략 -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제국주의 열강의 조선 침략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는 서양 제국주의 열강 프랑스 함대와 미국 함대가 조선을 침략하여 벌인 전쟁이다. 서양 제국주의 열강 프랑스와 미국이 조선을 침략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은 단호하게 대처한다. 병인양요(丙寅洋擾)는 1866년(고종 3) 병인년(丙寅年)에 프랑스 제국주의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하여 벌인 전쟁이다. 병인양요는 천주교 탄압, 즉 병인박해 과정에서 살아서 조선을 탈출한 프랑스 출신 천주교 선교사 리델 신부가 청나라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출병을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리델 신부는 병인박해로 프랑스 신부가 처형됐고, 아직 살아 있는 두 명의 신부를 보호해 달라.. 2016. 12. 27.
황사영 백서 사건과 천주교 배론성지 외세를 끌어들이려던 역모사건 황사영의 백서 사건과 충청북도 제천의 천주교 배론성지 충북 제천시에 있는 배론성지는 천주교(가톨릭)의 순교성지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외세를 끌어들여 조선을 전복하려 한 황사영의 백서(帛書)가 발견된 역모(逆謨)의 산실이다. 서양에서 중국을 거쳐 조선에 들어온 서학(西學, 천주교)은 성리학적 이념의 조선사회체제를 붕괴할 수도 있었다. 당시 조선은 국가의 기강과 사회의 윤리도덕을 파괴하는 서학을 사학(邪學)으로 규정했다. 정조대왕 15년(1791)에 조선의 사회질서를 혼란케 한 서학(西學, 가톨릭) 신도 윤지충과 권상연이 처형됐다. 1800년 6월 정조대왕이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노론 벽파가 국정의 주도권을 잡았다. 정조대왕 재위 시 조정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노론 시파와 .. 2016. 12. 25.
천주교 4대 탄압 박해- 신유 기해 병오 병인박해 조선 후기 천주교 4대 탄압(彈壓)과 박해(迫害) - 신해박해,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조선 조정의 천주교(가톨릭) 4대 탄압과 박해 사건은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다. 탄압(彈壓)은 권력과 무력으로 개인 또는 집단을 억지로 눌러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박해(迫害)는 핍박하여 해롭게 함, 못살게 굴어서 해롭게 한다는 것이 탄압과 박해의 사전적 의미다. 종교라는 말은 도교, 유교, 불교, 기독교 등의 총칭이다. 종교(宗敎)는 19세기 말 일본에 의해 정의된 개념으로 우리가 종교라는 말을 사용한 지는 불과 1백여 년 남짓밖에 안 된다. 가톨릭이 조선에 유입된 초기에는 서학(西學), 사학(邪學), 천주학 등으로 불렸다. 천주교 탄압과 박해는 차별과 탄압, 박해를 받았다고 주.. 2016. 12. 24.
가톨릭 선교사 마테오리치 신부의 천주실의 파란 눈의 가톨릭 예수회 선교사, 서양 선비(西士) 마테오 리치 신부의 『천주실의天主實義』 『천주실의天主實義』는 서양에서 온 선비(西士) 마테오 리치 신부(1552~1610)와 동양의 중국 선비(中士) 서광계(1562~1633)가 서로 말하고 대답하는 형식의 대화체(對話體) 문장으로 서술된 책이다. 1603년 가톨릭 선교사 마테오 리치 신부에 의해 출간된 『천주실의天主實義』는 '하느님에 관한 참된 논의', '천주님의 참뜻'이란 의미다. 『천주실의』는 상권과 하권으로 나누어져 있고, 상권은 1편~4편, 하권은 5편~8편까지로 구성되어 있다. 가톨릭 선교사 마테오 리치 신부와 서광계의 대화 『천주실의』는 한자문화권인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 천주교가 뿌리내리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마테오 리치 신부를 가.. 2016. 12. 23.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조선 후기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역사서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조선왕조실록』은 국가가 편찬한 정사(正史)로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부터 25대 철종(재위 1849~1864)까 지 기록하고 있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개인이 편찬한 야사(野史)로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부터 18대 현종(재위 1659~1674)까지 기록하고 있다. 역사서는 역사의 사실을 년월일(年月日) 순서, 즉 연대의 순서로 기록하는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편년체(編年體) 역사서가 있다. 또, 「본기」와 「열전」 등 인물 중심으로 기록하는 사마천의 『사기』와 김부식의 『삼국사기』 같은 기전체(紀傳體) 역사서가 있고, 시간의 흐름과 인물보다 사건을 중심으로 원인, 과정, 결과를 .. 2016. 12. 22.
실학자 성호 이익과 안정복(동사강목)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과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저술한 실학자이며 역사가 순암 안정복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성호 이익(1681~1763)은 순암 안정복의 스승이다. 역사서 『동사강목』을 저술한 조선 후기 실학자 순암 안정복(1712~1791)의 학통과 당파는 동인(東人)에서 분파된 남인에 속한다. 인조반정 이후로 서인(노론과 소론)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고, 동인(남인과 북인)계열은 권력에 다소 소외되어 있었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6촌 형이며 실학의 비조로 추앙받는 반계 유형원과 남인의 영수이며 우암 송시열과 예송논쟁을 벌였던 미수 허목의 영향을 받았다.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은 근기남인(近畿南人, 기호남인, 한양 인근 출신 남인) 중에서 가장 큰 성호학파를 형성했다. 성호 이익의 실.. 2016. 12. 21.
조선후기 실학사상과 실학자 조선왕조 후기 실학사상과 실학자 실학사상의 비조라고 하는 반계 유형원 이전에도 실학사상이 체계화되지는 않았지만, 실학자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 있었다. 조선 중기 동인계열의 초간 권문해(1534~1591, 중종 29~선조 24), 남인 계열의 구암 한백겸(1552~1615, 명종 7~광해군 7), 남인 계열의 지봉 이수광(1563~1628, 명종 18~인조 6), 서인 계열의 잠곡 김육(1580~1658, 선조 13~효종 9) 등이다. 조선 중기 실학자들의 사상을 토대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이 자리 잡고 뿌리를 내리게 된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전쟁으로 백성의 삶이 황폐해지면서 조선의 사회변화를 요구하며 시대정신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실학(實學)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국가의 부국강.. 2016. 12. 20.
암행어사 대명사 박문수 암행어사의 대명사가 된 별견(別遣) 어사 박문수 기은(耆隱) 박문수(1691~1756) 하면 떠오르는 말은 암행어사 박문수와 꼬마 어사 박문수다. 박문수는 암행어사로 임명된 적도 없고, 어린 나이에 어사로 임명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문수는 암행어사의 대명사가 되었다. 1727년(영조 3) 영남과 호남 지역에 흉년이 들자 임금(영조)은 박문수를 특별히 영남지역 별견 어사(御史)를 파견했다. 임금으로부터 특별히 명을 받아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활동하는 어사(御史)를 암행어사라 하고, 지방에 특별한 일이 발생하였을 때 왕명을 받아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그 지역의 문제를 감독하고 해결하여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어사를 별견어사(別遣御史)라 한다. 어사 박문수는 암행어사의 왕명을 받지 않.. 2016. 12.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