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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3745

백두산 화산폭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화산 대폭발로 추정되는 약 1천 년 전 백두산 화산 대폭발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백두산 화산폭발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1대 임금 태조 이성계에서 25대 임금 철종 이변(이원범)에 이르는 472년간의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 472년간 기록에는 백두산 화산폭발로 추정되는 기록이 나온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사화산(死火山)이 아니라 휴화산(休火山)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고, 내일 당장 폭발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화산분화를 잠시 멈추고 있는 살아 있는 화산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백두산 화산폭발은 대규모 화산 대폭발은 아니고 비교적 소규모의 화산폭발이다. 실록에 나온 백두산 화산폭발 기록 중에 숙종 때 일어난 백두산 화산폭발이 그 중 규모가 큰 것으로 보인다. 물.. 2016. 12. 14.
효종의 북벌정책(1, 2차 나선정벌) 숭명배금(崇明排金)의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 대명(大明) 의리론과 삼전도의 굴욕에 대한 복수 - 효종의 북벌정책 청나라의 파병 요구로 나선 1, 2차 나선정벌(러시아) 조선은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을 겪고 오랑캐라 무시하던 청나라에 치욕을 당하고 군신(君臣)관계를 맺는다. 조선의 임금과 대명(大明) 사대주의자들은 오랑캐 야만족(청나라, 1636~1912)에 무릎 꿇고 머리 조아렸다. 그러나 효종(1619~1659, 재위 1649~1659)은 마음속으로 이미 멸망한 명나라(1368~1644)를 숭상하고 있었다. 병자호란에서 치욕을 당한 것도 모자라 조선 왕자 세 명을 비롯하여 50만 명이 넘는 조선 백성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인조의 큰아들 소현세자와 둘째 아들 봉림대군은 병자호란에서 .. 2016. 12. 13.
오랑캐 청나라의 조선침공 병자호란 후금(後金, 청나라)을 여진족 오랑캐로 멸시하여 자초한 병자호란 청나라의 조선 침공으로 청나라 황제에게 삼배구고두례를 올린 조선 16대 왕 인조 후금(여진족, 청나라)은 북방의 여러 부족과 내몽골을 정복하고 2대 황제 숭덕제(홍타이지)가 1636년(인조 14) 국호를 후금에서 청나라로 고쳤다. 조선의 임금과 대명 사대주의자들이 여진족 오랑캐로 업신여긴 청나라(후금)는 명실공히 제국의 위상을 갖추고, 1627년(인조 2) 정묘호란에 이어 조선을 재침공한다. 바로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하는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대명 사대주의자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조선 조정은 후금을 여진족 오랑캐 이상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 후금(청나라) 사신을 푸대접하는 등 철저하게 무시하는 등 대명 사대주의자들은 친명배금(親明排.. 2016. 12. 12.
대명사대주의가 자초한 정묘호란 병자호란 대명(大明) 사대주의(事大主義)가 자초한 국란 동아시아의 신흥 강대국 후금(청나라)의 조선 침략전쟁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1616년(광해군 8) 여진족 누르하치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후금(後金, 청나라)을 세웠다. 후금(後金)은 명나라와 전쟁 중이던 1636년(인조 14) 청나라로 나라이름을 바꿨다. 1624년(인조 2) 이괄이 난을 일으킨지 한 달도 못되어 실패로 끝났지만, 그 여파로 후금(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전쟁인 정묘호란(1627년, 인조 5)이 일어난다.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조선은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기도 했다. 1618년(광해군 10) 중국 대륙의 패권을 놓고 후금(청나라)이 명나라를 공격하면서 명청전쟁(1618~1644)이 시작됐다. 광해군은 비록 쇠퇴하고 있었지만 강대국인 명.. 2016. 12. 11.
후금(청나라) 조선침략, 정묘호란 병자호란 한양 도성(都城)을 3번씩이나 버리고 도망간 인조의 굴욕과 치욕 후금(청나라)의 조선 침략전쟁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조선왕조 5백 년 역사에서 3번씩이나 한양 도성을 버리고 도망간 임금은 조선 16대 왕 인조(1595~1649, 재위 1623~1649)가 유일하다. 인조는 내란(內亂) 이괄의 난과 후금(청나라)의 조선 침략 전쟁인 정묘호란(1627년, 인조 5)과 병자호란(1636년, 인조 14~15)의 외침(外侵) 때 도주했다.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이 명나라와 의리를 저버리고 오랑캐 야만족 후금(청나라)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조반정에 성공하여 보위에 오른 인조와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서인(西人)은 배금친명(排金親明)의 외교정책을 고수한다. 광해군이 국정운영에서 폐.. 2016. 12. 10.
인조반정의 논공행상 이괄의 난 인조반정의 후폭풍 반정 세력 간의 다툼인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반란인가? 이괄의 난 김자점, 김류, 이귀 등 서인(西人) 세력과 이괄(1587~1624) 등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 이종을 왕으로 옹립하는 인조반정을 일으킨다. 일반적으로 이괄의 난이 인조반정을 이끈 공신들의 논공행상에서 2등 공신이 된 이괄이 불만을 품고 변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혹자는 인조반정에 기여한 공로를 포상하는 논공행상의 불만 때문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기보다는 반정 세력 간의 권력다툼 때문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당시는 명청전쟁(후금이 1636년 청나라로 국호를 바꿈) 초기로 북방의 국경 경비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었다. 인조는 이괄의 충성심을 믿었고, 그를 북방 방어를 책임지는 평안도 .. 2016. 12. 9.
불세출의 영웅에서 역적이 된 남이장군 불세출의 영웅에서 역적이 된 남이 장군 남이 장군(1441~1468)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조선의 불세출 영웅이다. 남이 장군의 고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남재, 증조부는 영의정부사에 추증된 남경문이다. 조부는 남휘, 조모는 태종 이방원의 딸 정선공주이며, 아버지는 남빈이다. 세조와는 6촌 간이며, 예종과는 7촌 간이 된다. 남이 장군의 장인은 권람으로 한명회, 신숙주와 함께 세조의 최측근 3인방이다. 남이 장군의 본가와 처가는 당대 최고의 가문 중 하나였다. 보통 사람보다 지혜와 재능, 용맹함이 뛰어나 어려운 일을 해내는 등 좀처럼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을 말할 때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이라 말한다. 17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여진족을 토벌하는 등 큰 공을 세워.. 2016. 12. 8.
세조의 장자방(장량) 한명회, 위징 신숙주, 좌장 권람 계유정난으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장자방(장량) 한명회, 위징 신숙주, 좌장 권람 조선 7대 왕 세조, 예종, 성종 재위 시 많은 정승이 있었지만, 수양대군(1417~1468)이 계유정난부터 보위에 오르기까지 최측근에서 맹활약하여 재상(정승)까지 오른 3인방이 있다. 세조의 장자방 한명회(1415~1487), 위징 신숙주(1417~1475), 좌장 권람(1416~1465)은 세조(1417~1468)의 3대 권신(權臣)으로 불린다. 세조는 한명회를 장자방(장량)이라고 치켜세웠다. 장자방(장량)은 한나라 고조 유방의 책사로 한나라 창업에 일등공신이다. 장량(장자방)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한고조 유방의 곁을 떠나버렸다. 세조는 신숙주를 자신에게 당나라 명재상 위징과 같은 존재라고 칭찬했다. 위징은 .. 2016. 12. 6.
문무를 겸비한 북방의 호랑이 김종서 장군 왕위찬탈을 위해 수양대군이 죽인 6진 개척의 주역, 문무(文武)를 겸비한 대호(大虎), 북방의 호랑이 정승 절재(節齋) 김종서 장군 절재 김종서(金宗瑞)는 군(軍)을 통솔하는 무신(武臣)의 우두머리로서 장군(將軍)의 칭호를 받지만, 본래 문신(文臣)이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절재 김종서가 북방의 6진을 개척하고 대호(大虎), 즉 백두산 호랑이란 별명이 붙으면서 자연스럽게 장군이란 칭호가 붙었다. 단종대왕 밑에서 좌의정을 지낸 재상이며 북방의 호랑이 절재 김종서 장군은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왕위찬탈을 위해 계유정난을 일으키면서 역적이 되어 죽었다. 절재 김종서 장군은 순천 김씨로 1383년(고려 우왕 9) 도총제를 지낸 무장(武將) 김추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종서는 비록 몸집은 작았으나 무장의.. 2016. 12. 5.
이수광 지봉유설과 청백리 재상 류관(유관) 조선 초기 청백리 3인방 - 선초삼청(鮮初三淸) 류관(유관), 맹사성, 황희정승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집필한 장소 비우당(庇雨堂)의 원주인이며 청백리 재상의 대명사가 하정 류관(유관) 광해군 재위 시 지봉 이수광이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지봉유설(芝峰類設)』을 집필한 곳이 바로 비우당(庇雨堂)이다. 지봉 이수광은 5대 외할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겨준 작은 초가집, 그 초가삼간의 이름을 비우당(庇雨堂, 겨우 비를 덮는, 비를 피하는 집)이라 이름을 붙였고, 이곳에서 『지봉유설』을 집필했다. 조선왕조 청백리 재상의 대명사가 된 비우당의 원주인 하정 류관(유관)은 고려 공민왕 때부터 조선 세종까지 60여 년간 관직에 있었다. 선초삼청(鮮初三淸), 즉 황희(1363~1452), 맹사성(1360~1438.. 2016. 1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