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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3750

인조반정의 논공행상 이괄의 난 인조반정의 후폭풍 반정 세력 간의 다툼인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반란인가? 이괄의 난 김자점, 김류, 이귀 등 서인(西人) 세력과 이괄(1587~1624) 등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 이종을 왕으로 옹립하는 인조반정을 일으킨다. 일반적으로 이괄의 난이 인조반정을 이끈 공신들의 논공행상에서 2등 공신이 된 이괄이 불만을 품고 변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혹자는 인조반정에 기여한 공로를 포상하는 논공행상의 불만 때문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기보다는 반정 세력 간의 권력다툼 때문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당시는 명청전쟁(후금이 1636년 청나라로 국호를 바꿈) 초기로 북방의 국경 경비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었다. 인조는 이괄의 충성심을 믿었고, 그를 북방 방어를 책임지는 평안도 .. 2016. 12. 9.
불세출의 영웅에서 역적이 된 남이장군 불세출의 영웅에서 역적이 된 남이 장군 남이 장군(1441~1468)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조선의 불세출 영웅이다. 남이 장군의 고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남재, 증조부는 영의정부사에 추증된 남경문이다. 조부는 남휘, 조모는 태종 이방원의 딸 정선공주이며, 아버지는 남빈이다. 세조와는 6촌 간이며, 예종과는 7촌 간이 된다. 남이 장군의 장인은 권람으로 한명회, 신숙주와 함께 세조의 최측근 3인방이다. 남이 장군의 본가와 처가는 당대 최고의 가문 중 하나였다. 보통 사람보다 지혜와 재능, 용맹함이 뛰어나 어려운 일을 해내는 등 좀처럼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을 말할 때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이라 말한다. 17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여진족을 토벌하는 등 큰 공을 세워.. 2016. 12. 8.
세조의 장자방(장량) 한명회, 위징 신숙주, 좌장 권람 계유정난으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장자방(장량) 한명회, 위징 신숙주, 좌장 권람 조선 7대 왕 세조, 예종, 성종 재위 시 많은 정승이 있었지만, 수양대군(1417~1468)이 계유정난부터 보위에 오르기까지 최측근에서 맹활약하여 재상(정승)까지 오른 3인방이 있다. 세조의 장자방 한명회(1415~1487), 위징 신숙주(1417~1475), 좌장 권람(1416~1465)은 세조(1417~1468)의 3대 권신(權臣)으로 불린다. 세조는 한명회를 장자방(장량)이라고 치켜세웠다. 장자방(장량)은 한나라 고조 유방의 책사로 한나라 창업에 일등공신이다. 장량(장자방)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한고조 유방의 곁을 떠나버렸다. 세조는 신숙주를 자신에게 당나라 명재상 위징과 같은 존재라고 칭찬했다. 위징은 .. 2016. 12. 6.
문무를 겸비한 북방의 호랑이 김종서 장군 왕위찬탈을 위해 수양대군이 죽인 6진 개척의 주역, 문무(文武)를 겸비한 대호(大虎), 북방의 호랑이 정승 절재(節齋) 김종서 장군 절재 김종서(金宗瑞)는 군(軍)을 통솔하는 무신(武臣)의 우두머리로서 장군(將軍)의 칭호를 받지만, 본래 문신(文臣)이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절재 김종서가 북방의 6진을 개척하고 대호(大虎), 즉 백두산 호랑이란 별명이 붙으면서 자연스럽게 장군이란 칭호가 붙었다. 단종대왕 밑에서 좌의정을 지낸 재상이며 북방의 호랑이 절재 김종서 장군은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왕위찬탈을 위해 계유정난을 일으키면서 역적이 되어 죽었다. 절재 김종서 장군은 순천 김씨로 1383년(고려 우왕 9) 도총제를 지낸 무장(武將) 김추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종서는 비록 몸집은 작았으나 무장의.. 2016. 12. 5.
이수광 지봉유설과 청백리 재상 류관(유관) 조선 초기 청백리 3인방 - 선초삼청(鮮初三淸) 류관(유관), 맹사성, 황희정승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집필한 장소 비우당(庇雨堂)의 원주인이며 청백리 재상의 대명사가 하정 류관(유관) 광해군 재위 시 지봉 이수광이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지봉유설(芝峰類設)』을 집필한 곳이 바로 비우당(庇雨堂)이다. 지봉 이수광은 5대 외할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겨준 작은 초가집, 그 초가삼간의 이름을 비우당(庇雨堂, 겨우 비를 덮는, 비를 피하는 집)이라 이름을 붙였고, 이곳에서 『지봉유설』을 집필했다. 조선왕조 청백리 재상의 대명사가 된 비우당의 원주인 하정 류관(유관)은 고려 공민왕 때부터 조선 세종까지 60여 년간 관직에 있었다. 선초삼청(鮮初三淸), 즉 황희(1363~1452), 맹사성(1360~1438.. 2016. 12. 4.
대마도정벌과 4군 개척의 명장 최윤덕 장군 무인(武人)으로 정승에 오른 명장(名將) 대마도정벌과 압록강 4군 개척의 명장으로 정승에 오른 좌의정 최윤덕 장군 조선 초기 명장 임곡 최윤덕 장군은 무인으로 시작하여 세종대왕 재위 시 정승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혹자는 최윤덕 장군이 무장으로 정승의 반열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또, 최윤덕 장군이 영의정을 지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개성 선죽교에서 포은 정몽주를 죽인 조영무가 무장으로서 가장 먼저 정승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조영무는 조선에서 가장 먼저 충무공의 시호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영의정은 황희정승이었다. 임곡 최윤덕 장군(1376~1445)은 1376년(고려 우왕 2) 경상도 창원 북면에서 최운해(1347~1404.. 2016. 12. 3.
조선 정조의 명재상 번암 채제공 영조대왕 이금과 정조대왕 이산이 중용(重用)한 조선의 명재상 번암 채제공 조선왕조에서 가장 위대한 임금은 추앙받는 조선 4대 왕 세종대왕 이도(1397~1450)와 조선 22대 왕 정조대왕 이산(1752~1800)이다. 세종대왕의 치세에 명재상 방촌 황희정승(1363~1452)이 있었다면, 정조대왕의 치세에는 명재상 번암 채제공(1720~1799)이 있었다. 세종대왕은 32년간 재위에 있었으며, 명재상 방촌 황희 정승은 24년간 정승의 자리에 있었고, 영의정으로 18년간 있었다. 개혁군주 정조대왕이 24년간 재위에 있을 때 명재상 번암 채제공은 11년간 정승으로 있었으며, 5년간 영의정 자리에 있었다. 방촌 황희정승과 번암 채제공은 중간에 공백은 있었으나, 오랜 시간 정승으로 지내며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을.. 2016. 12. 1.
조선의 명재상 방촌 황희정승 태종 이방원과 위대한 임금 세종대왕이 중용(重用)한 조선의 명재상 황희정승 조선의 명재상 방촌 황희정승은 24년간 정승 자리에 있었고, 18년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 자리에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공과(功過)가 있기 마련이고 조선의 명재상으로 알려진 방촌 황희정승도 예외는 아니다. 태종 이방원(1367~1422)과 위대한 성군 세종대왕(1397~1450)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조선의 명재상 방촌 황희 정승(1363~1452) 역시 90평생 동안 많은 공과가 있다. 그러나 방촌 황희정승의 90년 인생 중 관리로서 개인의 사리사욕보다 국가와 백성을 위해 쌓은 공(功)이 과(過)보다 월등히 크고 많아서 당대와 후대에 조선의 명재상으로 보고 있다. 방촌 황희가 고려 조정에 출사할 때는 고려가 망국으로 .. 2016. 11. 30.
만고역적이 된 조선의 천재 교산 허균 복권되지 못하고 만고역적이 된 조선의 천재 교산 허균 하늘이 낸 괴물, 천지 사이의 한 괴물, 역적 괴수, 개혁 사상가, 개혁적 정치인, 천재 문인이며 학자, 혁명적 지식인, 인본주의자, 실패한 혁명가, 조선의 이단아, 실학의 선구자, 시대를 앞서 간 선구자, 시대를 앞서 간 비운의 천재, 시대를 앞서 간 진보적 사상가, 자유주의자, 시대의 풍운아 등은 교산 허균을 지칭하는 말들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조선의 천재 허균(1569~1618)은 1618년(광해군 10) 모반을 획책했다고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당했다. 1910년 조선(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끝내 복권되지 못해 역적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끝내 만고역적(萬古逆賊) 남아버렸다. 조선의 천재 교산 허균은 어려서 누나 허난설헌과 함께 서자출신.. 2016. 11. 29.
비운의 천재 남매 허균 허난설헌 조선 시대 비운의 천재 남매 허균과 허난설헌 16세기 조선 시대 강원도 강릉출신 4명의 남녀가 각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신사임당 신인선(1504~1551)과 율곡 이이(1537~1584) 모자(母子)와 교산 허균(1569~1618)과 허난설헌 허초희(1563~1589) 남매(男妹)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남성은 학자와 정치가였으며, 두 여성은 화가와 문인이었다. 허균과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1517~1580)은 동인의 영수였으며, 20살 아래인 율곡 이이(1537~1584)는 서인이다. 허엽은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 사이에서 3남 3녀를 두었고 허균과 허난설헌은 셋째 아들과 셋째 딸이다. 비운의 천재 남매 허균과 허난설헌 외에도 허씨 집안에서 이름을 알려진 형제가 더 있다. 허엽의 첫째 부인 청.. 2016. 1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