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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3대 대첩3

임진왜란 3대 대첩 (이치대첩)권율장군 행주대첩 임진왜란 3대 대첩 - 이치대첩의 영웅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첫 번째는 1592(선조 25) 8월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이고, 진주 목사 김시민 장군이 진두지휘하여 승리한 1592년 10월의 1차 진주성 전투가 진주대첩이다. 그리고 세 번째가 1593년(선조 26) 2월 권율 장군이 지휘한 행주대첩이다. 그러나 한산도대첩과 진주대첩의 승리가 있기 전 1592년(선조 25) 7월에 권율 장군은 충청도 금산(전라도 완주)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른바 이치 대첩(梨峙大捷)으로 불리는 승리였다. 이치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 한산도대첩,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 큰 승리였다. 이치는 충청도 금산군과 전라도 완주군의 경계 대둔산에 있는 고개이름이다. 이치(梨.. 2016. 11. 17.
임진왜란 3대 대첩 김시민 장군 진주대첩 임진왜란 3대 대첩 - 진주(晋州) 목사(牧使) 김시민 장군 진주대첩 - 1차 진주성 전투 임진왜란 당시 조선 팔도 관찰사가 있고, 팔도 20곳에 20명의 목사(牧使)가 있었다. 목사는 무관직으로 정3품의 벼슬이다. 경상도는 상주, 진주, 성주 3곳에 3명의 목사가 다스리고 있었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진주대첩을 이끈 진주 목사 김시민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 1591년(선조 24)에 종5품 진주 판관(晋州判官)으로 부임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육상에서 연전연승하며 파죽지세로 북진하였다. 그러나 병력과 군량미를 싣고 남해와 서해를 거쳐 한양으로 진격하려던 일본 수군은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에 막혀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임금과 조정 신료들이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 2016. 11. 16.
임진왜란 3대 대첩 이순신 장군 한산도대첩 임진왜란 3대 대첩 - 충무공 이순신 장군 한산도대첩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7백 척의 왜선에 약 2만 명에 육박하는 왜군이 침략해 들어왔다. 4월 21일 대구성 함락, 4월 26일 상주 함락, 4월 27일 문경새재를 넘어 4월 28일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장군이 무너졌다. 왜군은 조선군을 파죽지세로 몰아붙여 승승장구하며 1592년 5월 3일 한양도성에 들어왔다. 임진왜란 초기 이후 육상의 조선 군대는 부산진성, 동래성을 빼앗기며 연전연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조선 왕 선조는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맹장(猛將) 신립장군을 삼도도순변사로 임명하여 왜군을 물리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믿었던 신립장군마저 왜군에 패하고 자살하고 만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선조 24) 전라.. 2016. 1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