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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현모양처 신사임당

by 도생(道生) 2016. 11. 25.

조선 중기 대학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며 문인과 화가로 활동한

현모양처의 모범이 된 신(申)사임당 신인선

 

 

 

 

 

 

 

 

 

 

 

 

 

 

 

 

조선왕조 5백 년 역사에서 사대부 아녀자로 당호(堂)와 이름 석 자가 모두 알려진 여성은 손가락으로 꼽는다.

조선 시대 여성 중 호(號)와 이름이 가장 많이 알려진 여성은 현모양처의 상징이 된 신사임당 신인선이다.

 

 

 

 

사대부 아녀자에서 왕의 어머니가 된 인수대비(소혜왕후, 1437~1504)는 훈민정음(언문), 한어(漢語, 중국어), 산스크리트어(범어)에 능했고, 유교의 경전뿐만 아니라 불경에도 조예가 깊은 조선 최고의 여성 지식인이었다. 인수대비는 청주 한씨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문인으로 화가로 유명해진 신사임당은 평산 신씨로 본명은 신인선(申仁善, 1504~1551)이다.

당호(堂號)는 스스로 지은 사임당(師任堂)이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나로도 유명한 문인 허난설헌은 양천 허씨이며 본명은 허초희(1563~1589)다.

당호(堂號)는 난설헌(蘭雪軒)이다.

 

이 밖에도 영조에서 정조 재위 당시 최고의 여성 성리학자로 유명한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규합총서, 청규박물지, 빙허각고략 등을 지은 여성 실학자 이빙허각(李憑虛閣, 1759~1824) 등이 있다.

 

 

 

 

 

 

 

 

 

 

 

 

 

 

 

 

조선 왕조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자질과 능력을 발휘한 여성은 많지 않았다.

그들은 절대 신사임당 신인선에게 뒤지지도 않았고, 나름 뛰어난 학문과 예술적 소양을 갖춘 여성들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신사임당 신인선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현모양처의 모범이 되고, 우리나라 화폐 최고 고액권 5만원 권에 초상이 들어갔을까?

 

 

 

 

 

먼저 현모양처의 개념은 조선 시대에는 없었고 열녀 효부의 여성상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남녀가 동등하게 재산권과 상속권을 갖는 사회였다. 우리가 아는 조선 시대 남존여비 사상이 굳어진 것은 그 후대의 일이다.

 

 

 

현모양처는 18세기 서양 자본주의체제에서 형성된 것이 19세기 일본인 마카나 마사나오에 의해 어진 어머니이며 착한 아내로 정의된 개념의 단어다. 일본이 근대화하면서 여성교육의 목표로 현모양처(賢母良妻)를 도입했고, 현모양처의 개념을 조선에 유입시켰기 때문에 현모양처는 일제 식민주의 잔재다.

 

 

 

일제는 광복 직전인 1945년 초 더 많은 지원병과 위안부, 근로정신대 등을 동원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제와 친일파는 신사임당을 현모양처로 포장하고 조선의 아들딸을 일본제국에 바치는 군국의 어머니로 묘사하였다.

광복 후 위정자들은 신사임당을 포장하여 산업화의 어머니로 만들었다.

 

 

 

 

 

 

 

 

 

 

 

 

 

 

 

대학자 율곡 이이가 천재성을 타고났다고 하더라고 부모나 스승이 그 재능을 알아보고 육성하지 않으면 영재로서 커갈 수 없을 것이다. 어린 율곡 이이에게 어머니 신사임당 신인선은 큰 스승이었다.

 

 

율곡 이이는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나 살다가 6살에 한양 집으로 들어갔다.

율곡 이이는 덕수 이씨 본가가 있는 파주와 외가가 있는 강릉을 오갔고, 13세에 진사시 과거에 합격했다.

신사임당 신인선은 율곡 이이가 16세 되던 1551년 48세로 세상을 떠난다.

 

 

 

 

율곡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선비행장行狀>(곡전서18)을 지었다.

어머니 신사임당을 그리워하며 신사임당 신인선의 일생을 기록한 것이 선비행장이다.

 

신사임당의 출생과 사망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한 <선비행장>에는 경전 통달, 글과 그림 등 온갖 재능에 탁월했고,

자질과 인품이 훌륭했다는 내용의 짧은 글에 사임당이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 두 편도 담겨 있다.

 

 

 

 

 

 

 

 

 

 

 

 

 

 

 

 

신사임당 신인선의 모든 기록은 율곡 이이의 율곡전서18 <선비행장>에서 비롯된다.

이후 김장생과 송시열, 그리고 현대에 나온 신사임당에 대한 기록은 작가가 상상을 발휘하여 덧붙인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알려진 신사임당 신인선에 관한 기록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그녀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아버지 신명화와 어머니 용인 이씨 사이의 다섯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세에 이원수와 결혼한 신사임당의 친정은 강원도 강릉이다.

신혼 초 신사임당의 친정아버지 신명화가 죽자 삼년상을 치르고 3년이 지나 시어머니를 처음 만났다.

 

신사임당 신인선은 혼인 후 19년을 강릉 친정에 기거하며 가끔 시댁을 오갔고, 38살이 돼서야 시집이 있는 한양으로 올라왔다.

한양에서 10년을 살다.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신사임당 신인선의 48년 인생 중 38년을 친정에서 강릉에서 지냈다. 

 

 

 

 

 

 

율곡 이이의 학통을 이은 김장생과 후학 송시열은 신사임당 신인선의 작품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노론으로 예조판서를 지낸 송상기는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을 동일시하기까지 했고, 권상하, 정호, 신석우 등 노론 출신들도 신사임당의 인품과 작품에 대해 온갖 미사여구를 사용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율곡 이이는 서인으로 효종 때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

율곡 이이의 학통을 이은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율곡 이이를 뿌리, 즉 종장으로 받든다.

노론은 조선을 몰락으로 끌고 간 세도정치까지 국정을 잡은 주도세력이다.

 

 

 

 

 

큰 흐름으로 보면 신사임당 신인선과 율곡 이이의 뜻과는 상관없이 다수 위정자와 여론에 의해 과대 포장됐다고 볼 수 있다.

신사임당 신인선을 일제 잔재인 현모양처의 모범으로 추켜세우는 것은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서 학자 율곡 이이와 글과 그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신사임당 신인선일 뿐이다.

자식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아낀 것은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본능적으로 한 행위로 교육의 방법론에서는 차이가 있겠으나, 익히 알려진 바대로 율곡 이이가 천재성을 타고났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크게 내세울 것은 못 된다. 

 

 

 

 

 

 

 

 

 

 

 

 

 

 

 

 

신사임당 신인선이 조선사회에 끼친 업적이 과연 얼마나 될까?

업적(業積)이라 함은 개인이 단체나 사회, 그리고 국가에 공적을 쌓아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것을 말한다.

 

신사임당 신인선이 아들 율곡 이이가 주장한 대로 자식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가정에 충실했으며 개인적으로 문학과 그림 등 예술적인 재능이 출중했을지 모르나 큰 공덕의 업적을 쌓았다고는 볼 수 없다.

  

 

 

 

율곡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 신인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율곡이 아버지 이원수의 행장은 쓰지 않고 어머니 신사임당의 행장만 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율곡 이이가 자신의 사후 수백 년 또는 수천 년을 내려갈지도 모르는 호(號)를 정할 때 어머니의 고향이며 자신이 태어난 곳이 아닌 아버지의 고향 경기도 파주의 파평면 율곡리, 밤나무가 많은 마을 지명에서 유래된 율곡(栗谷)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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