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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by 도생(道生) 2016. 12. 22.

조선 후기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역사서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조선왕조실록』은 국가가 편찬한 정사(正史)로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부터 25대 철종(재위 1849~1864)까

지 기록하고 있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개인이 편찬한 야사(野史)로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부터 18대 현종(재위 1659~1674)까지 기록하고 있다.

 

 

 

 

역사서는 역사의 사실을 년월일(年月日) 순서, 즉 연대의 순서로 기록하는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편년체(編年體) 역사서가 있다.

또, 본기」와 「열전」 등 인물 중심으로 기록하는 사마천의 『사기』와 김부식의 『삼국사기』 같은 기전체(紀傳體) 역사서가 있고,

시간의 흐름과 인물보다 사건을 중심으로 원인, 과정, 결과를 기록하는 일연의 『삼국유사』와 같은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역사서가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의 『연료실기술』은 사건중심의 기사본말체 형식의 역사서다.

 

 

 

 

 

 

 

 

 

 

 

 

 

 

조선 시대 정사(正史)와 야사(野史)의 구분은 정부(국가)에서 편찬했느냐, 개인이 편찬했느냐에 따라 구분했다.

정사와 야사의 구분이 진실과 거짓, 옳고 그름이 아니라는 의미다.

 

일례로 실록청에 소속되어 조선왕조실록 편찬작업에 참여한 사관이 개인적으로 책을 쓰면 야사가 된다.

정사(正史)는 정부중심의 역사기록이고, 야사(野史)는 백성의 눈으로 바라본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정사(正史)는 사실의 역사서로, 야사(野史)는 거짓 또는 믿을 수 없는 기록이라는 삐뚤어진 시각과 색안경을 쓰고 보는 사람도 있다. 국가에서 편찬한 정사(正史)에도 거짓과 왜곡, 축소, 과장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고, 개인이 쓴 야사(野史)에 정사보다 사실과 부합하는 내용이 많은 책도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1736~1806)은 조선 2대 왕 정종과 성빈 지씨 사이에서 태어난 열 번째 왕자 덕천군 이후생의 후손이다.

이긍익의 할아버지 이진검(1671~1727, 예조판서)은 노론의 탄핵을 받아 강진에 유배되어 사망했다.

 

이긍익의 아버지 이광사(1705~1777)는 백부 이진유가 나주 괘서사건에 연류되면서 연좌되어 함경도 부령에 유배되었다.

이광사의 부인은 남편이 역모죄로 체포되자 자결하였다.

 

이광사는 진도와 신지도로 이배 되었고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이진검과 이광사는 당대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영조실록 83권, 영조 31년 3월 30일(1755년)

죄인 이광사는 본율대로 유(流) 3천 리에 처하고....

 

 

영조실록 100권, 영조 38년 7월 25일(1762년)

이광사, 심약이 북쪽 변방에서 목숨을 붙이고 있어, 지방인들을 많이 모아서 글과 글씨를 가르치고 있다 합니다. 변방의 어리석은 풍속이라 어찌 선동하여 어지러운 데에 빠져드는 근심이 없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광사는 진도(珍島)에 안치하고....

 

 

영조실록 100권, 영조 38년 9월 6일(1762년)

이광사는 진도에 이배하였는데, 비록 해도(海島)라고 할지라고 본래 좋은 곳이며, 또한 관부가 있는 곳이니 이들 죄인을 옮겨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죄인 이광사를 다시 머나먼 작은 섬에 옮겨 외부 사람과 교통하는 폐단을 끊도록 하소서."

 

 

 

 

이긍익이 『연려실기술』을 쓰게 된 동기가 아버지 이광사의 영향이 컸다고 전해진다.

국조 단군부터 고려말 두문동에 은거한 충신의 이야기를 30수로 지어 아들 이긍익이 화답한 30편의 악부시 『동국악부(東國樂府)』가 있다. 우리의 역사를 바탕으로 지어진 동국악부를 보면 이광사가 그만큼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은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로 엮어진 역사서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을 집필할 때 사실만을 기록할 뿐 절대 창작하지 않는다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원칙을 지켰다.

『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공자가 '나는 옛것을 전하기만 할 뿐 창작하지 않는다.'라는 정신을 가지고 썼다.

 

 

이긍익을 붕당으로 보면 소론의 집안에 속하는 인물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노론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그러나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 서인, 노론, 소론, 남인 등 당파를 가리지 않고 그들의 견해를 그대로 서술하였다.

 

야사(野史) 『연려실기술』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공정하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한다는 술이부작의 원칙을 지켰다. 

실학자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 대한 평가를 후대의 몫으로 남겨 놓았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정사(正史)보다는 문집과 일기 등 야사(野史)에 더 큰 비중을 두었고, 400여 종의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여 편찬하였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을 저술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전혀 넣지 않고, 자료의 출처도 밝혔다. 

 

혹자는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정사(正史)인 조선왕조실록보다 더 객관적이며 공정하고, 조선 시대 개인이 저술한 최고의 역사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긍익의 호(號)는 연려실(燃藜室)과 완산(完山)이다.

 

이긍익이 의 이름을 『연려실기술』이라고 정한 이유를 「의례」에 써놓았다.

"내가 젊었을 때, 일찍이 사모하던 유향(劉向)이 옛글을 교정할 적에, 태일선인(太一仙人)이 청려장에 불을 붙여 비춰주던 고사를 사모하였는데, 선군(아버지 이광사)으로부터 연려실(燃藜室)이란 세 글자의 큰 수필을 받아 서실의 벽에 붙여두고, 그것을 각판하려다가 미처 못했다. 친지들이 서로 전하기를 "그것이 선군의 글씨 중에서 가장 잘 된 글씨라고 서로 다투어 모사하여 각판한 이도 많았고, 그것으로 자기의 호를 삼은 이도 있다." 하되 또한 우스운 일이다. 이 책이 완성된 후 드디어 연려실기술이라고 이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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