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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일제의 식민통치 방식 무단통치 문화통치 민족말살통치 정책

by 도생(道生) 2017. 4. 16.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강제병합한 일제가 시대별 식민통치 방식 

일제의 식민통치 방식 무단통치, 문화통치, 민족말살통치 정책

 

 

 

 

 

 

 

 

 

 

 

 

 

일제는 불평등한 강화도조약(1876년) 이후 패망하는 그 날까지 철저하게 무력으로 우리 민족을 탄압했으며, 36년간의 일제강점기에는 무단통치, 문화통치, 민족말살통치 정책 등의 식민지통치방식을 이어갔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 방식 무단통치, 문화통치, 민족말살통치는 큰 틀에서 보면 황국사관의 황국신민화 정책, 내선일체(일선동조론)를 위해서 시대와 환경에 따라 사용한 식민통치 정책이다.

  

 

 

일제는 명치유신을 전후하여 조선을 정벌한다는 정한론(征韓論)과 대동아공영론을 바탕으로 무력으로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했다.

일제는 한민족을 황국신민화하기 위해 민족혼뿌리 뽑아버렸고, 자원을 수탈하고 조선인을 강제 노역, 위안부 등으로 동원하여 인간 이하의 삶을 살게 하였으며,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에 총알받이로 내세우며 강화도조약 이후 패망하기까지 약 800만 명의 우리 민족이 희생됐다.

 

 

 

 

 

 

 

 

 

 

 

 

 

 

일제가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고 1945년 패망할 때까지 36년간 식민지 통치방식을 학자들은 무단통치, 문화통치, 민족말살통치 시대로 구분한다.

 

 

 

대한제국 강제병합 후 1910년대는 일본 헌병(일본군)이 경찰 업무를 보면서 한민족을 무력으로 탄압한 무단통치 시대다.

일제는 우리의 토지와 자원 등, 인적·물적인 경제 수탈을 하는 한편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헌병경찰대를 기반으로 강압적인 무단통치를 약 10년간 이어갔다.

 

  

1919년 3월 1일 한반도 전역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고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소위 문화통치(1920년대)로 식민지 통치 전략을 바꾼다. 일제가 무단통치에서 기만적인 문화통치로 식민지 통치방식을 바꾼 것은 단순히 무단통치의 한계 때문만이 아니다.

 

 

 

 

 

 

 

 

 

 

 

 

조선을 무력으로 잔혹하게 탄압하고 경제력을 독점하여 삶의 기반을 빼앗은 일제가 3.1만세 운동을 계기로 큰 저항에 부딪혔다.

일제는 유화책을 쓰는 한편 대외적인 이미지를 고려하여 위장된 문화통치를 한다.

일제의 문화통치는 조선을 영구적으로 식민통치하기 위해 두 번째로 선택한 통치방식이다.

 

 

일제는 식민지 통치방식을 소위 문화통치로 전환하면서 우리 민족을 잔혹하게 탄압한 헌병경찰대를 보통 경찰로 바꾸었으나 경찰력과 예산은 3배 이상 증가시켰다.

 

  

 

일제가 소위 문화정책을 시행하면서 겉으로는 우리의 문화와 관습 등을 존중하는 듯 했으나 언론 검열을 강화하고 민족 분열을 획책하여 일제에 부역하는 친일파를 대거 양산해 내면서 강력한 탄압을 이어갔다.  

 

1920년대 일제는 경찰과 사회 각 분야에 친일파를 대거 만들어냈고, 민족반역자들이 앞다투어 일제에 충성경쟁을 벌이면서 문화통치의 탈을 쓴 무단통치를 했다.

 

 

 

 

 

 

 

 

 

 

 

 

 

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의 시기는 일제가 1920년대 약 10년간 유지하던 문화통치에서 민족말살통치로 식민지 통치방식을 전환한 때다.

 

 

일제가 식민통치방식을 민족말살통치 정책으로 바꾼 시기에 세계대공황,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이 큰 변화가 있었다.

미국으로부터 시작된 세계대공황은 일본을 경제 위기로 몰면서 사회적 불안이 가속화됐다.

 

 

일제가 세계대공황(1929년) 타개를 위해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전쟁이었다. 일제는 대공황 타개책으로 만주사변(1931년)을 일으켰고, 급기야 중국 본토를 침략하는 중일전쟁(1937년)과 태평양전쟁(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일제가 선택한 세 번째 식민통치 방식은 민족말살통치 정책이다.

일제의 민족말살통치 정책의 일차적인 목적은 한반도 병참기지화와 침략 전쟁에 조선인을 동원하려는 것이었다.  

 

 

전쟁은 인적·물적 자원이 공급되어야만 가능하다.

일제는 전쟁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조달하고 조선을 병참기지화하기 위해 조선에서 나오는 자원을 기반으중화학, 금속, 군수공장 등을 대거 육성하고 조선에 23만 명의 일본군을 대거 배치했다. 일제는 수많은 조선인을 강제징병, 위안부, 강제노역 등으로 동원하였다.

 

 

 

일제는 식민지 통치방식을 민족말살통치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신사참배, 일본식 성명 강요, 황국신민 서사 암송, 한글 말살, 언론 말살, 역사조작 말살, 일본어사용, 일본 신도와 기독교 불교 외는 탄압하는 정책 등을 시행하면서 말 그대로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 정신을 모두 뿌리 뽑아 버렸다.

 

일반적으로 일제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과 함께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요하며 민족말살통치의 정책을 시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과 내선일체 정책은 민족말살통치 정책을 시행하던 시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일본은 명치유신(1868년) 이후 고사기(古事記, 712년)와 일본서기(日本書紀, 720년)의 기기신화(記紀神話)를 사실로 만들었다.

기기신화를 역사 사실로 조작한 일제는 기기사관(記紀史觀)과 신도(神道) 국교화 정책을 추진하여 황국사관(皇國史觀)을 만들었다.

일본의 신(神)의 나라다. 일본 왕은 천손의 자손이다. 일본 왕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황국사관이다.

 

 

요시다 소우인(이토 히로부미 스승)는 일군만민론(日君萬民論)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확장주의(팽창주의)를 주장한다.

일군만민론은 천하는 일왕이 지배하며 모든 백성은 일왕 아래서 평등하다. 고로 천하를 일왕의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황국사관과 일군만민론을 바탕으로 일본이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이 나왔다.

일본 제국주의가 만든 황국사관의 곁가지가 식민사관이고, 대한제국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한 식민주의 사관의 뿌리가 황국사관이다.

 

 

식민주의 사관의 큰 틀은 일본과 조선은 조상이 똑같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 조선의 발전이 정체됐다는 정체성론(停滯性論), 외세에 의해 조선이 발전했다는 타율성론(他律性論)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황국신민화 정책과 내선일체 정책은 황국사관에서 비롯됐다.

일제는 무력으로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 후 황국사관을 바탕으로 영구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식민사관을 만든다.

 

1916년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를 만들었고, 1921년 조선사편찬위원회, 1925년 조선사편수회로 확대하면서 우리의 역사를 왜곡 날조하고 문화를 말살하였다.

 

 

 

 

일제의 식민지 통식방식을 시기에 따라 무단통치, 문화통치, 민족말살통치 정책으로 구분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황국사관을 바탕으로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여 식민통치를 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일제가 우리의 역사를 왜곡, 조작, 말살하고 만든 식민사관, 황국사관의 곁가지인 일본 제국주의가 만든 식민주의 역사교육을 진짜 역사로 알고 아직도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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