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본능과 사람의 악행을 부추기는 현대문명
삶에의 본능과 죽음에의 본능
소유냐 존재냐, 사랑의 기술, 자유로부터의 도피, 인간의 마음 등의 많은 저서를 남긴 세계적인 철학자이며 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1900~1980)은 인간에게는 삶과 죽음을 향한 두 개의 본능이 무의식에서 꿈틀대고 있다고 하였다. 즉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이다.
인간의 이런 본능은 인생의 여러 경험과 굴곡을 거치면서 어떤 때는 삶으로, 어떤 때는 죽음으로 향하면서 이렇게 또 저렇게 변하는 속성이 있고, 그러면서 사람마다 현재 상태가 삶이나 죽음 중 어느 하나를 향해 몰입한다고 하였다.
가령 권선징악의 영화에서 주인공이 악당들을 무지막지하게 응징하거나 죽여버리는 '정의의 사도' 역할을 보면서 사람들은 감정이입을 하고, 대리만족을 느끼며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심리학으로 보면 '죽음에의 본능'이 강력하게 발동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대량학살을 자행했던 독재자는 '죽음에의 본능'이 강력했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사람들은 호생지덕(好生之德)이 많았으므로 '삶에의 본능'이 강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밝은 미래를 지향하는 현대문명의 어두운 그림자 - 사람의 악행을 부추기는 현대문명
현대문명의 어두운 밑바닥에 숨어서 하루하루 생명을 이어가는 '사이코패스' 같은 인간형은 어떨까?
생명에 대한 가치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아무 이유도 없이 살인을 즐기는 악마의 표상과도 같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자신의 성격이나 행동 경향이 '죽음과 관련된 행위'를 연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살해 행위를 꺼리낌 없이 실행에 옮기면서 이 사회 한편에 버젓이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극단적인 인간형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인간의 본능이 선험적(先驗的)으로 주어진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면, 대자연 안에서 대자연과 환경과 더불어 형성되고 완성되어가는 것이라면 말이다. 우리가 의식주 생활을 하며 생명을 이어가고 느끼고 감동하며 상호 작용하는 사회의 속성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대문명은 '죽음에의 본능'을 더욱 부채질한다.
인터넷 게임과 영화, 드라마, 문학, 예술 등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파괴, 살상, 강도, 테러 등 생명을 경시하고 해치는 '죽음의 이야기'가 매우 많다. 이런 것들은 사람의 순수한 마음을 '죽음에의 본능'으로 유혹해 혼탁하게 만들어 인간의 악행을 부추기고 있다.
작게는 개인과 가정에서 크게는 국제사회에서 숱한 명분을 내세우며 폭력과 살인, 보복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문명 속의 상극(相克) 정신으로 말미암아 잔혹 범죄가 늘어가고 우리 사회의 미래인 청소년마저 병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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