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족과 불가리아,
지리적 개념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발칸반도의 명칭과 유래
발칸반도를 정복했던 민족들은 각기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들어왔다.
6~7세기 발칸으로 이주해온 슬라브인, 이주 당시 남슬라브족은 조상신 숭배와 농업관련 신(神)과 자연 정령신을 모시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기독교로 개종했다.
9세기 발칸에 크리스트교가 전파된 것은 비잔틴 황제의 명을 받은 그리스 데실로나카 출신의 치린(키릴)과 메토다우스 두 형제에 의해서이다. 뛰어난 문법학자이면서 키릴문자를 만든 키릴과 행정, 정치, 외교에 능했던 메토다우스는 자신들이 만든 슬라브 문자(나중에 키릴의 업적을 기려 '키릴문자'로 불림)와 언어로 성서를 만들어서 기독교를 보급했다.
발칸반도에서 가장 먼저 국가를 세운 불가리아가 처음 정교를 받아들였고, 그 뒤를 이어 세르비아가 정교를 신봉했다. 정교는 10세기 말 러시아 케에프 공국(현 우크라이나 중심)까지 전파되어 오늘날 발칸 유럽을 비롯한 러시아와 그 주변 국가들이 강력한 정교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 국가는 키릴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발칸이라는 명칭의 유래도 다양하다.
오스만 트르크인들은 산이 많고 나무가 많아서 푸르러서 푸른 지역이라는 이름으로 발칸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오래된 산이라는 의미로 발칸을 쓰기도 한다.
신용하 교수의 부여족과 불가리아
이화여자대학교 신용하 석좌교수는 발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부여족의 특징은 정착지에 반드시 '불' 자를 붙여 '국호(國號, 나라 이름)를 지었다고 했다.
4세기 말엽 부여가 망해서 서쪽으로 이동한 부여족이 고추불가(고추加)를 거쳐 7세기 후반 불가리아 제1제국과 12세기 불가리아 제2제국을 세웠다. 이때 부여족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해 오면서 남긴 흔적으로 밝안산(백두산) - 부여호 - 발카시호 - 발칸산 등이라고 했다. 엉덩이의 몽고반점과 우리 생활양식과 문화의 친연성을 예로 들었다.
부여족은 5~7세기 초까지 돈 강 양안과 북캅카스에 흩어져 정착했으며, 서양 역사 기록에서는 이 시기부터 부여족이 불가(Bulghar)족으로 나온다. 부여의 가족이라는 의미의 '불(Bul)' '가(加, 마가 우가 저가 할 때의 개념)' 족이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불가족은 7세기 후반 비잔틴 로마제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불가리아 왕국을 건설한다.
발칸반도는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를 나누는 사바 강과 유럽을 대표하는 도나우 강을 경계로 남쪽에 자리한 땅덩어리를 이른다. 그래서 아드리아 해와 흑해 사이에 놓인 국가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발칸이라는 용어는 19세기 이전까지는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유럽의 터키로 더 많이 불려 왔다. 무엇보다 종교 때문에 유럽체제 일부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발칸이라는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러시아와 오스만의 전쟁(1878년) 때 오스만 터키가 패한 후 발칸 국가들이 독립하고 나서부터이다. 그리스, 불가리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몬테네그로 등 오스만제국을 계승한 여러 나라가 등장해서 남아 있는 땅을 차지하려고 으르렁거리던 19세기에 와서 발칸이라는 용어를 지리적인 개념보다는 야만, 폭력, 원시성 같은 사상 유례가 없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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