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은 개벽중

문정왕후와 명종 윤원형과 정난정

by 도생(道生) 2016. 10. 7.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휘두른 문정왕후와 허수아비 왕 아들 명종,

문정왕후 파평 윤씨의 동생 부부 윤원형과 악녀 요부 정난정

 

 

  

 

 

 

 

 

 

 

 

 

 

 

 

 

문정왕후 윤씨는 조선의 11대 왕 중종대왕 이역의 두 번째 왕비(제2계비)다.

중종의 첫 번째 왕비는 단경왕후 신씨(재위 1506)로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중종이 보위에 오른 지 7일 만에 반정을 주도한 세력에 의해 폐위된다.

 

 

 

중종의 두 번째 왕비는 장경왕후 윤씨(1491~1515, 재위 1507~1515)로 조선의 12대 왕 인종대왕 이호를 낳고 25세에 승하한다.

중종의 세 번째 왕비가 문정왕후 윤씨(1501~1565, 재위 1517~1544)다.

문종왕후가 낳은 아들이 조선의 13대 왕 명종 이환(1827~1849, 재위 1545~1567)이다.

 

 

 

장경왕후와 문정왕후 9촌 간으로 장경왕후(대윤)가 문정왕후보다 항렬이 높다. 

문정왕후 윤씨는 조선 13대 왕 명종 이환(1534~1567, 재위 1545~1567)의 어머니다.

 

 

 

파평 윤씨는 여흥 민씨와 청주 한씨와 함께 조선의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집안이다.

 

조선의 7대 왕 세조대왕 이유의 정비 정희왕후 파평 윤씨,

조선의 9대 왕 성종대왕 이혈의 계비 정현왕후 파평 윤씨,

조선의 11대 왕 중종 이역의 계비 장경왕후와 문정왕후가 모두 파평 윤씨다.

(조선의 9대 왕 성종의 계비 제헌왕후 - 폐비 윤씨, 연산군의 어머니까지 포함하면 5명)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외척 세력이 윤임을 중심으로 대윤(大尹) 세력이며,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 윤씨의 외척 세력이 윤원형을 중심으로소윤(小尹) 세력이다.

두 집안은 파평 윤씨 집안으로 친척에서 원수 집안이 된다.

 

 

 

문정왕후 윤씨는 중종의 두 번째 계비 정경왕후 윤씨의 오빠 윤임에 의해 왕비가 되었다.

권력의 중심에 있던 윤임이 윤지임의 딸(문정왕후)을 중전으로 지지했다. 윤임은 대윤(大尹)의 영수다.

문정왕후는 자신에게 국모의 자리를 준 윤임의 은혜를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자 원수로 갚아준다.

 

 

 

 

1544년 중종이 승하하고 장경왕후의 아들 인종이 조선의 12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효심이 지극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던 인종은 뛰어난 학식까지추었다.

거기에 어진 성품까지 갖춘 인종은 성군의 자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종의 옆에는 표독한 계모 문정왕후 윤씨가 있었다.

조선의 12대 왕 인종은 보위에 오른 지 불과 8개월 보름 만에 승하하고 만다.

후사가 없던 인종은 경원대군 이환(명종)에게 승하 직전 선위하였다.

 

 

 

 

 

 

 

 

 

 

 

 

 

 

조선의 12대 왕 인종이 세자시절 문정왕후에 의해 죽을 뻔 한 적도 있었다.

중종이 사건을 그냥 덮는 바람에 일단락되었지만, 권력의 욕망에 사로잡힌 문정왕후가 세자(인종) 제거 음모에 개입되었음은 궁궐 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중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왕비가 사주하였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문정왕후의 인종 독살설이 수백 년 동안 회자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한 것이고 실제 인종이 독살되었다고 해도 엄청난 파문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 왕조에서 가장 악독한 여인, 조선의 측천무후, 여성독재자, 철의 여인, 악녀, 여인 천하를 만든 여자 등 후대 사람들이 문정왕후 윤씨에 대한 평가다.

 

 

문정왕후에게 긍정적인 평가는 없고, 부정적인 표현만 가득 찬 이유는 조선의 가장 큰 어른 대비가 어린 왕 명종의 국정운영에 도움을 주어야 함에도 자신과 친정 식구를 위한 욕구를 채우는 데 권력을 전횡하였기 때문이다.

 

문정왕후 윤씨와 동생 부부 윤원형, 요부 정난정의 무소불위 권력 앞에 조선의 양반과 백성은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데 필요한 소모품에 불과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법과 질서를 짓밟은 문정왕후는 윤원형과 정난정을 앞세워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행사했다.

윤원형과 정난정은 문정왕후의 후광으로 권세를 휘두른다.

 

외척 난신(亂臣)과 요부(妖婦), 윤원형 정난정은 권력을 전횡하여 부정부패로 사리사욕을 채웠다.

백성의 목숨은 파리목숨보다 못했고 그들의 삶을 짓밟아 도탄에 빠트리는 등 문정왕후와 윤원형과 정난정의 만행(蠻行)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장경왕후 윤씨(인종의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명종의 어머니), 인종의 외삼촌 윤임과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은 친척이면서도 권력 투쟁에서는 원수지간이었다.

파평 윤씨 집안의 두 윤씨 세력을 윤임을 대표로 하는 대윤(大尹)과 윤원형을 대표로 하는 소윤(小尹)으로 구분하여 불렀다.

 

 

 

 

1545년 인종이 승하하면서 12살의 경원대군 이환 조선의 13대 왕 명종으로 즉위한다.

 

드디어 문정왕후의 시대가 열렸다. 수렴청정한 문정왕후는 동생 윤원형, 요부 정난정과 함께 윤임을 비롯한 대윤 세력을 제거했다. 소윤 세력은 대윤(大尹)뿐만 아니라 유관, 유인숙, 권벌 등 사림(선비) 세력도 제거했다.

이른바 '을사사화'(1545년, 명종 즉위년)다.

 

 

1547년(명종 2)에는 '양재역 벽서사건'을 만들어 사림 세력을 뿌리째 뽑아 버린다.

권력을 전횡한 문정왕후와 윤원형, 정난정의 외척 정치로 민생은 파탄 났다.

급기야 의적 임꺽정이 나타나 3년간이나 조선이 소란하였다.

 

 

 

 

 

 

 

 

 

 

 

 

 

 

문정왕후와 동생 윤원형의 옆에는 언제나 요부이며 악녀였던 정난정이 있었다.

여부 정난정은 노비에서 기녀, 윤원형의 첩에서 정경부인(외명부 종 1품)까지 올랐다.

 

 

조선의 신분제도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을 억지로 만들 정도였으니 가히 정난정은 희대의 사특한 요녀다. 

윤원형과 정난정이 도성에 고래 등 같은 기와집만 13채에 이르고 재산이 나라 재산보다 많다는 소문이 회자하기도 했다. 

 

 

 

 

불교에 관심이 많았던 문정왕후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했다.

사특한 요부 정난정은 봉은사 승려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소개하였고 문정왕후는 불교를 부활시키는 한편 내탕고(왕실 재정)를 채워나갔다. 

 

 

무소불위를 권력을 휘두른 문정왕후 윤씨는 성리학(유학)의 나라 조선에 불교 승려 보우를 병조판서에 임명한다.

봉은사는 선종 본산, 봉선사는 교종 본산으로 정하고 승려를 위한 과거제도를 부활시켰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은 한 것은 조선왕조에서 합법적인 행위다.

그러나 수렴청정 이후 문정왕후가 죽는 순간까지 조선의 국법은 철저하게 무시됐다.

문정왕후 윤씨와 동생 부부 윤원형, 요부 정난정의 말이 곧 법이었다.

 

 

 

 

 

 

 

 

 

 

 

 

 

 

 

조선왕조실록 명종실록 31권(1565년, 명종 20년 4월 6일)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스스로 명종(明宗)을 부립(扶立)한 공이 있다 하여 때로 주상에게 ‘너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으랴.’ 하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곧 꾸짖고 호통을 쳐서 마치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함이 있었다.

 

상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김없이 받들었으나 때로 후원(後苑)의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었고 더욱 목놓아 울기까지 하였으니, 상이 심열증(心熱症)을 얻은 것이 또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비(尹妃)는 사직의 죄인이라고 할 만하다.

 《서경(書經)》 목서(牧誓)에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 하였으니, 윤씨(尹氏)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사신은 논한다.

윤비(尹妃)는 천성이 엄의(嚴毅)하여 비록 상을 대하는 때라도 말과 얼굴을 부드럽게 하지 않았고 수렴 청정(垂簾聽政)한 이래로 무릇 설시(設施)하는 것도 모두 상이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불교에 마음이 고혹(蠱惑)되고 환관을 신임하여 나라의 창고를 다 기울여 승도(僧徒)들을 봉양하고 남의 전지와 노복을 빼앗아 내수(內需)를 부유하게 하며 상벌(賞罰)이 참람하여 사람들이 권계(權戒)되지 않았다.

 

 

게다가 권세가 외척으로 돌아가 정사가 사문(私門)에서 나오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며 기강이 문란하고 국세(國勢)가 무너져서 장차 구원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행히 명종 대왕이 전의 잘못을 깨달음에 힘입어 장차 크게 바로잡으려는 뜻이 있었는데, 정령(政令)을 베푼지 오래지 않아서 문득 승하하니, 아, 슬픈 일이다.

 

 

 

 

 

남성중심의 유교 나라 조선이라서 여성이 정치한 것을 문제 삼아 후대 사관이나 학자들이 문정왕후를 악녀로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문정왕후와 동생 윤원형, 요부 정난정이 조선(나라)을 버렸고 백성을 버렸다.

왕조시대 절대지존의 국가통치자 왕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권세로 부정부패를 일삼아 오직 사리사욕을 채웠기 때문이다.

법과 질서, 윤리와 도덕을 파괴한 죄가 크기 때문에 실록에서도 부정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1565년(명종 20) 권력을 전횡했던 문정왕후 파평 윤씨가 65세로 승하했다.

승려 보우는 삭탈관직당하고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참수되었다.

1565년(명종 20) 윤원형과 정난정은 탄핵당하여 경기도 강음현에 유배되었다가 자결하였다.

 

 

 

 

 

 

 

 

 

 

 

 

 

 

악녀이며 요부인 윤원형의 첩 정난정이 윤원형의 본처를 독살한 내용이 나온다.

 『명종실록』 31권(1565년, 명종 20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형조가 아뢰기를,

"고(故) 현감 김안수(金安遂)의 처 강씨(姜氏)가 전후로 소장을 올리기를 ‘사위 윤원형은 젊었을 때 딸 김씨(金氏)와 결혼하여 여러 해를 함께 살았는데, 정윤겸(鄭允謙)의 서녀 정난정(鄭蘭貞)을 얻은 이후 임금을 속여 내쫓고, 김씨의 사환(使喚) 비(婢) 구슬이(仇瑟伊)·가이(加伊)·복한(福漢)·복이(福伊)와 노(奴) 향년(香年)·복년(福年)·허년(許年)·명장(命長) 등을 잡아두고 놓아주지 않았으며, 도리어 종들로 하여금 원주인을 능멸하고 모욕하게 하였고, 그의 가산(家産)을 모두 빼앗고 마침내 종적을 없애 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김씨가 매우 굶주려서 정난정에게 먹을 것을 구하자 정난정이 음식 속에 독약을 집어넣고 몰래 구슬을 시켜 김씨에게 올리게 하여 김씨가 먹고 즉시 죽었습니다.

 

온 집안이 모두 그 원통함을 알고 있었으나 대단한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소장을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하였으니, 몹시 놀랍습니다. 본조가 마음대로 처단할 수 없으니 금부로 보내겠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문정왕후의 아들이며 조선의 13대 왕 명종 이환은 문정왕후 승하 2년 후인 1567년 34살에 승하한다.

 

명종은 재위 22년 동안 뚜렷한 업적 없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어머니 문정왕후의 치마폭과 외삼촌 윤원형과 요부 정난정의 권력 앞에서 한낮 허수아비 왕에 불과했다.

 

 

 

명종은 아들(순회세자)이 3살에 요절하여 후사 없이 승하하였다.

그래서 방계인 중종의 손자(서손)로 덕흥대원군의 아들 하성군 이연이 조선의 14대 왕 선조로 즉위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