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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조선 15대 왕 광해군(인조반정) 이혼

by 도생(道生) 2016. 9. 19.

근세조선 15대 왕 광해군(인조반정) 이혼

 

 

 

 

 

 

 

 

 

 

 

 

 

 

조선의 15대 왕 광해군 이혼(1575~1641)은 조선 14대 왕 선조대왕 이연(1552~1608)의 둘째 아들이다.

아버지 선조는 최초의 방계혈통으로 왕위에 올랐고, 아들 광해군은 적통이 아닌 후궁(공빈 김씨) 소생으로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선조대왕의 정비 의인왕후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조선의 14대 왕 선조대왕 이연은 마흔 살이 넘어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피난 갔던 평양성에서 18살의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 같은 어머니 공빈 김씨의 소생인 3살 위의 형 임해군(첫째 아들)이 있었으나 난폭하고 방탕하여 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선조대왕 때 시작된 붕당(朋黨)정치는 시간이 갈수록 반목과 대립으로 치달았다.

 

임진왜란 중 선조대왕은 조정을 둘로 나눈 분조(分朝)를 결정하여 세자 광해군에게 맡겼다.

광해군은 전란의 어려움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분조를 잘 이끌어 백성에게 인망을 얻었지만, 선조대왕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선조대왕의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1569~1600)는 후사 없이 승하한다.

1606년 55세의 선조대왕과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사이 유일한 적통 왕자 영창대군 이의가 태어난다.

 

 

 

 

 

 

 

 

 

 

 

 

 

 

선조대왕 때 만들어진 붕당정치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 과정에서부터 앞으로 불어닥칠 피바람을 예고했다.

 

1591년 선조가 무척 총애하였던 넷째 아들 신성군(인빈 김씨 소생)과 둘째 아들 광해군(공빈 김씨 소생)의 세자 책봉문제를 음모로 조작하여 동인 세력이 서인 세력을 몰아낸 일명 '건저의 사건'이다.

 

1606년 선조대왕의 유일한 적자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영의정 유영경이 적자인 영창대군이 왕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기회에 소북파 유영경을 제거하려던 대북파 이이첨과 정인홍은 쓸데없이 분란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유배된다.

 

 

사림(士林, 선비) 세력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

서인은 분열 없이 근 백 년을 지속

동인 -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

북인 - 대북(광해군 지지 세력)과 소북(영창대군 지지 세력)으로 분열

 

 

 

 

조선왕조 최초로 방계혈통으로 왕위에 등극한 선조대왕은 왕통의 정통성 문제에 고심하였을 것이다.

후대에 우유부단하고 변덕이 심했다고 평가되는 선조대왕은 왕세자 자리를 놓고 둘째 아들 왕세자(광해군), 총애했던 넷째 아들(신성군), 유일한 적통 왕자 열네 번째 막내아들(영창대군)을 두고 갈팡질팡하였다.

 

 

 

1608년 선조대왕이 승하하기 직전 유영경에게 세자 광해군에게 선위한다는 교서를 내렸다.

소북파 유영경은 선조의 교서를 숨겼고, 대북파 정인홍은 영의정 유영경이 왕명을 거역한 사실을 선조에게 알렸으나 결정을 못 하고 승하하고 만다.

 

선조대왕이 승하하자 영창대군을 다음 보위에 앉히고 인목대비가 수렴청정해 줄 것을 간청하는 영의정 유영경을 간청을 뿌리치고 인목대비는 선조대왕의 교서대로 광해군이 다음 보위에 오르도록 교서를 내린다.

 

 

 

 

 

 

 

 

 

 

 

 

 

 

1608년 선조대왕의 승하로 왕세자 광해군 이혼이 조선의 15대 왕으로 등극한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승자의 역사는 조선의 15대 왕 광해군을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다.

근래 들어 광해군이 대동법 시행과 실리적인 중립 외교정책과 등의 업적을 볼 때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의 15대 왕 광해군 이혼은 즉위와 함께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을 재건하고 왕권 강화를 나갔다.

대동법, 양전 시행, 종묘 복구, 경복궁, 창경궁을 중건했고, 경덕궁(경희궁), 인경궁(인조 때 헐림)을 건립했다.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 화제로 모두 소실된 대궐을 중수하고 건립하는 과정에서 백성에게 원성을 듣기도 했지만, 권력으로 나라를 파탄지경으로 만들었다던가 백성을 핍박하지는 않았다.   

 

무너져가는 명나라와 새롭게 등장한 후금(여진족, 청나라) 사이에서 자주적이며 실리적인 외교를 하였다.

『용비어천가』, 『신동국신속삼강행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출간했고, 『국조보감』을 증보하여 간행했다.

 

 

 

 

 

 

 

 

 

 

 

 

 

 

 

광해군 재위 기간 내내 대북파가 전횡을 하였다. 

 

광해군이 종묘사직과 백성을 위해 펼치려던 정치는 권력을 잡은 대북파의 힘 앞에 당당하게 맞서지 못했다.

나라와 백성의 앞날보다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눈이 어두워진 붕당정치의 폐해는 광해군 재위 기간 내내 죽고 죽이는 싸움이 계속됐다.

 

 

 

광해군의 지지 세력인 대북파의 이이첨과 정인홍은 광해군을 움직여 임해군을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보냈다가 죽인다.  

 

대북파는 1612년 '김직재의 옥' 사건과 1613년 '칠서의 옥'으로 비롯된 계축옥사를 영창대군과 추종 세력을 역모로 교묘하게 엮었다. 8살의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어 있다가 9살 때 죽었고, 소북 세력이 대다수가 죽고 귀양갔다. 대북파는 남인과 서인 세력도 몰아냈다.

 

1615년 대북파는 신성군(선조의 넷째 아들)의 양자였던 능창군(인조대왕의 친동생)을 '신경의의 옥사'를 역모로 엮어 죽인다.

 

1618인목대비(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왕후)를 폐위하여 서궁(경운군)에 유폐시켰다.   

 

 

 

 

 

조선의 15대 왕 광해군 이혼이 47세가 되던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어찌 됐든 모든 책임은 권좌에 있던 군주(광해군)와 전횡을 휘두른 대북파의 몫이었다.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은 처음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충남 태안, 다시 강화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온 수모와 멸시를 받아가며 모진 삶을 이어가다 1641년(인조 19) 67세에 세상을 떠났다.

 

 

폐 세자와 세자빈은 강화도에서 자살하였고, 폐비 윤씨도 병사하였다.

광해군은 폐위된 임금이라 묘호와 시호가 없다.

실록은 『광해군일기』로 편찬됐다.

 

 

 

 

 

 

 

 

 

 

 

 

 

 

김류, 이귀, 김자점, 이괄 등 서인 세력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인조반정의 반정 명분은 인목대비를 폐하고 (임해군) 영창대군, 능창군 등을 죽였다는 폐모살제(廢母殺弟)와 재조번방지은(再造藩邦之恩, 임진왜란 당시 무너져가는 조선을 다시 세우게 해준 은혜)에 지성사대(至誠事大)해야 하는 상국(천자국)명나라를 배신하였다는 것이다.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 세력의 무자비한 숙청은 자신들을 죽이고 내쫓은 광해군과 대북파에게 당한 피의 보복이었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들의 존명사대(尊明事大) 명분은 뒷날 인조가전도에서 오랑캐 야만족이라 업신여긴 여진족에게 치욕적인 삼두고배(三頭叩拜, 청나라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군신의 예)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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