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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조선 21대 왕 영조 대왕(탕평책) 이금

by 도생(道生) 2016. 9. 25.

근세조선 21대 왕 영조(英祖) 대왕 이금 - 탕평책(蕩平策)

 

 

 

 

 

 

 

 

 

 

 

 

 

 

조선의 21대 왕 영조대왕 이금(1694~1776)은 조선의 19대 왕 숙종대왕 이순(1661~1720)과 숙의 최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서자)이며 조선의 20대 경종대왕 이윤(1688~1724)의 배다른 동생이다.

 

 

경종대왕 이윤이 후사가 없자 주도권을 잡고 있던 노론 세력은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주장하였고, 경종은 이를 받아들여 연잉군(영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고, 경종 승하 후 1724년 조선의 21대 왕으로 등극했다.

 

 

 

영조대왕은 조선왕조 519년 역사에서 가장 오랜 기간 52년 동안 보위에 있었던 임금이고, 승하할 때 83세로 가장 장수한 왕이다.

 

영조의 재위 기간은 52년은 노론으로 시작하여 노론으로 끝났다.

영조는 노론 세력의 힘으로 왕위에 올랐고 노론 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있을 때 승하하였다.

 

 

 

조선의 21대 왕 영조대왕 이금의 어머니는 숙빈 최씨는 영조를 낳고 후궁이 되었지만, 본래 비천한 무수리(궁중 청소를 하는 계집종) 출신이다.

 

영조가 선왕 경종의 독살 배후라는 소문과 본래 비천한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꼬리표처럼 따라다녀 승하할 때까지 독살설과 천출의 자식이라는 두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조대왕은 즉위 초 소론 세력을 단죄했다.

 

1721년 소론의 김일경과 1722년 남인 목호룡 때문에 왕세제 연잉군(영조)과 노론 세력은 고난을 겪었으며 벼랑 끝까지 내몰렸었다.

 

 

영조는 즉위와 함께 신임옥사(辛壬獄事, 1721~1722)를 일으킨 소론의 주동자와 관련자를 처형하고 유배 보냈다.

김일경과 목호룡 등은 경종 독살설을 말하며 영조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고 막말을 하였다.

 

 

노론에서 소론 세력에 대한 복수를 주장했으나 영조는 신임옥사에 관련된 인물만 처벌하고 마무리한다. 

자신과 노론을 궁지로 내몰았던 소론 세력의 주동자와 관련자만 처벌함으로써 영조는 왕권의 합법성, 노론은 주도권의 명분을 얻었다.

 

 

 

 

1727년(영조 3)에 드디어 노론, 소론 등 사색당파의 붕당정치 폐해를 없애는 탕평책을 선언한다.

자신과 대립각을 세웠던 소론 세력도 조정에 등용하여 정치보복과 혼란 등 당쟁의 폐단을 없앤다.

 

영조는 탕평책과 다양한 정책으로 조선의 22대 왕 정조대왕까지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라 불리는 문을 연다.

 

 

 

 

 

 

 

 

 

 

 

 

이인좌는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후손이다.

 

1728년(영조 4) 소론과 남인에서 밀려난 이인좌, 정희량, 이유익 등이 소현세자의 증손자 밀풍군 이탄을 왕으로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영조의 즉위 초 소론 세력을 처단한 일도 빌미가 되었지만, 반란의 명분은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을 독살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이인좌의 난(무신난)이다.

약 20만 명까지 이르렀던 반란세력은 진압되었고 이인좌는 영조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고 처형됐다.

 

 

 

 

 

영조는 탕평책으로 국정안정과 왕권을 강화하여 조선의 정치, 국방, 경제, 문화, 사회 등 여러 방면에서 안정되었다. 

학문에 깊은 관심이 있었던 조선의 21대 왕 영조대왕 이금은 10여 권의 책을 쓰기도 했고, 학자를 지원하여 영조 재위 당시 여러 책이 출간되었다.

 

동국문헌비고, 퇴도언행록, 경국대전 등이 출간, 증보, 개정해서 편찬했다.

균역법 시행, 오가작통법 시행, 신문고 부활과 신분에 맞게 권리와 의무를 갖는 공사천법을 실시하였다. 

 

 

 

붕당정치의 폐해를 없애고자 노론, 소론, 남인 등 강경파와 온건파를 고루 등용하여 탕평책을 내놓았고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국정 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탕평책을 시행하여 겉으로 사색당파가 고르게 조정에 등용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노론 세력이 많이 등용되다 보니 노론의 힘이 강했다.

 

 

 

 

 

 

 

 

 

 

 

 

1755년(영조 31) '조정에 간신이 가득하여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라는 내용이 쓰인 나주벽서 사건이 발생하였다.

 

나주벽서 사건을 일으킨 소론의 관련자는 체포됐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특별 과거를 실시하였는데 이때 이인좌의 난 때 사형당한 심성연의 동생 심정연이 영조를 분노케 하는 글을 써 소론 세력이 불과 수개월 만에 수백 명이 참화를 당했다.

 

탕평책으로 안정을 찾던 정국은 노론 세력이 주도권을 잡으며 탕평책이 붕괴한다.

천출 무수리의 아들 연잉군을 왕(영조)으로 만들어준 노론 세력은 권력의 칼을 잡았다.

 

 

 

 

노론 세력은 소론과 남인이 대리청정하던 사도세자를 부추겨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중상모략한다.

노론의 모함과 영조의 결정으로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 갇혀 죽게 된다

영조는 아들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로 기록되고 있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는 사도세자와 영조대왕을 정신병자라고 했다.

정신병자 시아버지(영조)를 극진히 모시고? 정신병자 남편(사도세자)의 미친 짓?을 참고 견딘 현모양처? 혜경궁 홍씨의 친정아버지 홍봉한은 세도사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의 영수다.

 

 

 

 

 

 

 

 

 

 

 

 

조선의 21대 왕 영조대왕 이금은 1776년(영조 52) 승하하였다.

묘호는 영조(英祖)다. 시호는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英祖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이다.

 

 

 

 

영조의 탕평책은 본래 홍범구주 제5조 황극(皇極) 편에 나오는 말이다.

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에서 유래한 말이다.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패거리(당파) 짓지 않는 것이 넓고 큰 왕도(王道, 통치)이며, 패거리 짓지 않고 치우치지 않을 때 왕도가 평평(공평하게 펼쳐진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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