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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조선 22대 왕 정조대왕(사도세자의 아들) 이산

by 도생(道生) 2016. 9. 26.

근세조선 22대 왕 정조(正祖)대왕 이산 - 사도세자의 아들

 

 

 

 

 

 

 

 

 

 

 

 

 

 

조선의 22대 왕 정조대왕 이산(1752~1800)은 조선의 21대 왕 영조대왕 이금(1694~1776)의 손자다.

영조대왕 이금과 영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 사도세자(1735~1762)의 아들이기도 하다.

 

 

정조대왕 이산은 영조대왕과 정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큰아들 효장세자(1719~1728)의 양자로 입적하여 조선의 22대 왕으로 등극했다.

 

 

 

 

정조대왕이 임금으로 즉위하기 전 영조대왕이 세손(정조)의 대리청정을 명하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 벽파는 반대했었다.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라는 '죄인지자 불위군왕(罪人之子 不爲君王)'의 팔자 흉언(八字 凶言)을 유포하기도 했다.

 

노론 벽파를 의식한 영조는 정조를 사도세자의 아들에서 효장세자(영조의 큰아들)의 아들로 입적시켜 보위에 올렸다.

 

 

 

 

 

 

 

 

 

 

 

 

 

 

사도세자의 아들 조선의 22대 왕 정조대왕 즉위를 전후하여 노론이 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그즈음 노론은 벽파와 시파로 분열됐다.

 

벽파는 홍인한(노론의 영수, 정조의 외할아버지 홍봉한의 동생)을 중심으로 한 노론의 외척 중심 세력이고, 시파는 정조의 정치 노선을 따랐던 소론과 남인 및 노론의 일부 세력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즉위 초부터 끊임없이 암살의 표적이 됐다.

노론 벽파는 1777년(정조 1) 전흥문을 시켜 정조를 암살하려다 실패한다.

정조의 최측근이었던 홍국영은 정조의 등극과 함께 막강한 권력을 갖고 전횡을 일삼다 유배되어 죽는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대왕 이산은 할아버지 조선의 21대 왕 영조대왕의 탕평책을 계승한다고 천명하였다.

남인 출신 채제공을 정승에 임명하고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등 노론, 소론, 남인 등을 가리지 않고 등용하여 노론 벽파 세력이 약화하였다.

 

 

 

 

 

 

 

 

 

 

 

 

 

 

정조대왕은 친위부대 장용영을 2만의 대군으로 키웠다.

임금의 경호와 한양 도성뿐만 아니라 수원 화성을 수비했다.

 

정조의 수원 화성 능행 행차에 장용영 3천 명이 동원되기도 했는데, 이런 대내외적인 과시는 능행길 장용영의 사기를 높여주기도 하지만, 친위군 장용영의 군사적 기반은 그동안 붕당 세력에 휘둘린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는 왕권 강화의 목적도 있었다.    

 

 

 

 

 

 

 

 

 

 

 

 

 

 

정조대왕 이산은 조선왕조의 위대한 군주였으며 천하의 효자이기도 하다.

1788년(정조 13)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양주에서 화성(수원)으로 이장했다.

 

1789(정조 14)년부터 1800년(정조 24)까지 무려 12번이나 아버지가 계신 현륭원을 찾았다.

1794년(정조 18)에는 현륭원(사도세자의 능)에서 대성통곡을 하다가 혼절하기도 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 벽파는 정조가 수원 화성을 오가는 길을 보며 자기들이 지은 죄 때문에 감히 나서지도 못했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현륭원의 배후도시 화성의 설계를 맡겼다. 

 

 

 

 

 

 

 

 

 

 

 

 

수원 화성은 당시 선진 과학기술을 접목하여 만든 조선의 정치, 문화, 사상, 예술 등이 집약된 건축물이다.

축성에 10년을 예상하였으나 신기술을 접목하고 공짜가 아닌 임금(급료)을 지급한 덕분에 일에 능률이 올라 불과 3년도 안 돼공됐다.

 

 

수원 화성만 축성한 것이 아니고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사통팔달의 길을 만들고 각종 물품을 판매하는 상가들도 조성되었다.

정조는 수원 화성을 12차례 오가는 동안 백성을 만나고 백성의 소리를 몸소 들었다.

 

 

 

 

 

 

 

 

 

 

 

 

 

 

 

노론이 주도권을 잡았던 정국을 소론과 남인, 실학자 등도 참여할 수 있게 붕당정치를 타파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는 정치를 개혁하였다. 엄청난 양의 도서가 보관된 왕실도서관 규장각에서는 젊은 관료를 중점으로 학문과 교육, 업무 능력을 신장시키는 등 규장각은 학문과 정치의 산실로 미래를 위한 개혁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정조는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성리학뿐만 아니라 성리학을 비판하는 양명학과 천주학(서학) 등을 용인하며 사상 개혁을 하였다.

 

할아버지 영조대왕이 밑돌을 깔아 놓은 국가 중흥의 발판 위에 조선의 문화를 더욱 융성하게 하려고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였다. 북학파이며 서자로 출사를 하지 못하고 있던 박제가, 유득공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신분 개혁을 하였다.

 

그러나 정조대왕이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진정한 개혁군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완전한 개혁은 미완의 개혁이 되어 버렸다.

 

 

 

 

 

 

 

 

 

 

 

 

 

 

끊임없이 개혁 정치를 실현하였던 조선의 22대 왕 정조대왕 이산은 개혁군주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노론 벽파는 정조의 개혁 정치를 좌절시키기 위해 갖은 음모와 모략을 꾸민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는 등 천주교의 행위는 노론 벽파의 공격거리가 되었다.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를 계기로 노론 벽파는 권력의 중심으로 이동한다.

 

 

 

 

정조는 신해공통을 발표하여 육의전 상인들의 독점권(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일반 소상인의 상업을 진흥했고 노비추쇄법을 폐지했다. 상언(上言)과 격쟁(擊錚) 제도로 백성소통다.

 

증보동국문헌비고, 속오례의, 대전통편, 국조보감, 문원보불, 동문휘고, 오륜행실, 규장전운 등이 출간됐다.

지도 제작, 천문과 과학의 발전을 비롯하여 민간에서는 미술, 문학작품 출판 등 조선의 모든 백성이 각자의 위치에서 문화에 대한 의식이 커지며 문예가 부흥한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대왕 이산은 임금으로 즉위 후 세상을 향한 첫 마디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말이었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를 이어받도록 명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1권 정조 즉위년 3월 10일)

 

 

 

 

 

만백성의 군주(君), 만백성의 스승(師), 만백성의 어버이(父)였던 위대한 군주 정조대왕 이산.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이고 자신을 위협하던 노론 세력을 포용하고 국정 쇄신을 한 개혁군주 정조대와 이산.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도했고 평생을 살해위협에 시달리다 결국 의문의 죽음을 당하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군주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으로서 하늘이 임금을 만들고 스승을 만든 이유는 백성을 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라고 했다. 정조대왕 이산은 백성을 교화(敎化)하는 스승임을 자임했다.

 

 

 

 

 

 

 

 

 

 

 

 

 

 

정순왕후(1745~1805)는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대왕의 계비(영조와 51살 차이) 정조보다 7살 많지만, 할머니가 된다.

정순왕후 오빠 김귀주는 노론 벽파였고 정조의 등극을 반대했던 인물이며 정조의 외할아버지 홍봉한을 공격했던 인물이다.

 

김귀주는 결국 유배됐다 죽게 된다. 이 일로 정순왕후는 정조에게 원한을 품고 정조가 승하할 때까지 괴롭힌다.

개혁군주 정조대왕 이산이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조선은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가 주도권을 잡으세도정치로 넘어간다.

 

 

 

사도세자의 아들로 개혁군주였던 조선의 22대 왕 정조대왕 이산은 49세에 갑자기 승하하였다.

묘호는 정조(正祖)이며, 시호는 천자의 나라, 황제국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가 선황제로 추존하여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이다.

 

 

 

 

조선왕조의 22대 왕 정조대왕 이산부터 27대 순종까지 모두 사도세자의 후손이다.

사도세자는 왕이 되지 못했지만, 그 후손은 조선의 왕이 되었다.

 

고종과 철종은 본래 인조대왕의 아들 인평대군의 후이다.

고종의 친할아버지 남연군 이구가 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였고,

고종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사도세자의 손자)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이산 - 조선의 22대 왕(사도세자의 둘째 아들)

사도세자의 손자 순조 이공 - 조선의 23대 왕(정조의 둘째 아들)

사도세자의 손자 헌종 이환 - 조선의 24대 왕(순조의 장남인 효명세자의 아들)

사도세자의 증손자 철종 이변 - 조선의 25대 왕(사도세자의 아들 은언군의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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