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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조선 25대 왕 철종 대왕(강화도령) 이변

by 도생(道生) 2016. 9. 29.

근세조선 25대 왕 철종(哲宗) 대왕 이변 - 강화도령

 

 

 

 

 

 

 

 

 

 

 

 

 

 

 

조선의 24대 왕 헌종대왕 이환(1827~1849)의 뒤를 이어 일명 강화도령으로 불린 이원범(1831~1864)이 조선의 25대 왕으로 등극한다.

 

조선의 25대 왕 철종대왕 이변은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선의 23대 왕 순조대왕 이공의 양자로 입적하여 보위에 올랐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한 이후 조선왕조의 역대 왕은 임금으로 등극하기 전 왕세자 시절 군왕수업을 받았다.

혹 세자가 아닌 대군(大君)이나 군(君)이 임금을 오를 때도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최소한 대군(大君) 또는 왕족으로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25대 왕 철종대왕(강화도령) 이변은 그렇지 못했다.

강화도령으로 불린 철종대와 이변의 고조부는 영조대왕이며 증조부는 사도세자이다.

그리고 역모에 엮여 죽은 은언군 이인이 할아버지이며 아버지는 전계대원군(추존)으로 강화도령 이원범(철종)은 셋째 아들이다.

 

 

 

 

 

 

 

 

 

 

 

 

 

 

강화도령 이원범(철종)의 조부 은언군과 큰 형 이원경이 역모에 연류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은원군과 후손이 역모에 몰려 왕족의 예우를 박탈당한 강화도령 이원범둘째 형 이경응과 강화도(교동)에 유배되어 있던 중이었다.  

 

 

 

순원왕후와 외척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를 이어가기에는 강화도령 이원범(이변)보다 더 좋은 인물이 없었다.

조선의 24대 왕 헌종과 가장 가까운 왕족이었으며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세력도 없고, 제대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강화도령 이원범이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25대 왕으로 만든다.

 

 

 

철종은 한양에서 태어났으나 가족이 역모에 연류되어 강화도(교동)로 유배되어 약 5년간 생활하다 임금으로 즉위하면서 강화도를 떠났다.

 

불과 몇 년간이었지만 강화도에서 농사짓던 젊은이였기에 강화도령이라 불린 것일 수도 있지만, 혹자는 세도정치 세력이 철종의 자질과 능력이 부족한 임금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백성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만든 별명이라고도 한다.

 

 

 

 

 

 

 

 

 

 

 

 

 

 

헌종의 대를 이을 왕족도 없었고, 순원왕후 김씨(순조 왕비)는 강화도령 이원범을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켜 덕완군으로 봉하고 조선의 25대 왕이 되었다. 왕권을 자신들의 발밑에 두고 세도정치를 하였던 안동 김씨 세력은 순조, 헌종, 철종 3대 왕비를 배출한다.

전주 이씨의 조선이 아니라 안동 김씨의 조선이 되었다.

 

 

 

부정부패, 매관매직, 권력남용과 수탈 등 삼전의 문란은 극에 달해 조선이 급속하게 침몰하고 있었다.

수렴청정이 끝나고 친정을 하면서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삼정이정청' 설치 등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여러 노력하였으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뭄과 전염병 등으로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임금과 백성은 안중에도 없었던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곪아 터지며 급기야 1862년(철종 13)에 경상도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만다. 

 

 

 

1860년(철종 11)에 무극대도와 후천개벽 선포, 상제님 강세를 외치며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가 1864년(철종 14)에 경상도 대구 감형에서 참형된다. 

 

수운 최제우의 동학 세력이 확장되자 조정에서는 최제우를 체포하여 왕권에 대한 도전과 유교 사상을 부정하는 몇 가지를 수정하라며 무죄 방면시켜줬다. 그러나 점차 세력이 확장되자 위기의식을 가진 안동 김씨 세도정치 세력은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를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사학한 가르침을 편다는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처형하였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도 외척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아래에서 철종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철종을 무식한 임금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무능한 임금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교육적인 면에서 다른 왕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철종이 소학과 통감을 익혔다고 하니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일자무식쟁이는 아니다. 

 

 

 

권력의 욕망에 눈먼 대왕대비(왕대비)가 수렴청정했거나, 외척, 사색당파, 세도정치 세력이 권력을 휘두를 때 재위했던 임금들도 철종 못지않게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교육을 많이 받은 왕들도 왕권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철종만이 허수아비 왕이었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유교 사회였던 조선에서는 어린아이가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소학(小學)이다.

소학이 쉬워서 먼저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가장 먼저 알아야 하고 근본이 되는 내용이 담겨 있는 책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배운다.

 

인성과 예의범절이 담긴 소학은 부모 형제를 비롯하여 세상 사람과 소통하며 올바르게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적인 인성교육이 보고(寶庫)다.

 

 

 

 

 

 

 

 

 

 

 

 

 

 

 

철종대왕 이변은 왕위계승서열에 의하거나, 또는 자신의 의지로 왕이 된 것은 아니다.

왕으로 등극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조선의 25대 왕이 되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와 동양으로 몰려드는 동서양 제국주의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몰락하는 조선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왕은 될 수 없었다.

 

 

 

 

강화도령으로 불린 조선의 25대 왕 철종대왕 이변은 1863년(철종 14)에 다음 보위를 넘겨줄 후사 없이 33살의 나이에 승하한다.

조선왕조실록의 마지막 기록 철종실록은 조선의 26대 왕 고종 임금 때 편찬된다.

묘호는 철종(哲宗)이며, 시호는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추존한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文顯武成獻仁英孝章皇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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