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은 개벽중

인조반정의 논공행상 이괄의 난

by 도생(道生) 2016. 12. 9.

인조반정의 후폭풍

반정 세력 간의 다툼인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반란인가?

이괄의 난

 

 

 

 

 

 

 

 

 

 

 

 

 

 

 

김자점, 김류, 이귀 등 서인(西人) 세력과 이괄(1587~1624) 등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 이종을 왕으로 옹립하는 인조반정을 일으킨다. 

 

 

일반적으로 이괄의 난이 인조반정을 이끈 공신들의 논공행상에서 2등 공신이 된 이괄이 불만을 품고 변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혹자는 인조반정에 기여한 공로를 포상하는 논공행상의 불만 때문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보다는 반정 세력 간의 권력다툼 때문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당시는 명청전쟁(후금이 1636년 청나라로 국호를 바꿈) 초기로 북방의 국경 경비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었다.

 

 

 

인조는 이괄의 충성심을 믿었고, 그를 북방 방어를 책임지는 평안도 병마절도사(종 2품) 겸 부원수로 내보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날 때 이괄의 관직은 함경도 병마절도사였고, 1624년 이괄이 난을 일으킬 때 관직은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이괄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선조 32년(1599년) 윤사월 9일이다.

이때 관직이 선전관이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5월 9일 함경도 명천 현감(종 6품)으로 부임한 것으로 나온다.

이후 형조좌랑, 태안군수, 경성판관, 제주목사의 관직을 거쳤다.

 

광해군 14년(1622년) 12월 16일에 이괄은 추천을 받아 북병사(함경도 병마절도사) 관직을 제수받았다.

인조반정은 1623년(광해군 15) 3월 12일에 일어났다.

광해군일기에는 이때까지 이괄이 임지로 떠나지 않고 인조반정에 참여한 것으로 나온다.

 

 

 

 

 

당시는 인조반정이 일어난 직후라 국내적으로도 혼란스러웠지만, 명나라와 청나라가 전쟁(1618~1644)을 시작한 시기였기 때문에 북방의 국경 방어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괄은 인조반정 모의에 늦게 합류했고, 반정의 주축인 서인과 이괄은 국경수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반정에 집중하고 있었다.

 

 

 

반정군을 총지휘하기로 한 김류가 일이 발각됨을 알고 나타나지 않자, 이괄이 대신 반정군을 지휘하였고, 얼마후 김류가 다시 나타나면서 반정군을 지휘했다. 이괄을 비롯한 서인 세력이 주축이 된 인정반정은 성공했다.

 

강대국 명나라와 청나라에 어느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립외교를 했던 광해군은 폐모살제(廢母殺弟)와 배명친금(明親金)의 명분으로 일어난 반정으로 폐위된다.

 

 

 

 

 

 

 

 

 

 

 

 

 

 

 

인조반정에 성공한 인물들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이괄은 2등 공신으로 책봉된다.

이괄은 명나라와 청나라가 전쟁하는 중차대한 시기에 임금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가 되어 북방으로 향했다. 이괄이 평안도 병마절도사 관직을 제수받은 것이 좌천과 다름없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5일(1623년)

김류가 아뢰기를,

"북병사 이괄을 그대로 부임하게 하시겠습니까. 북방이 중하긴 하지만 나라에 근본이 되는 한양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괄은 지금 대공을 세웠으리 도하(都下)에 두어 의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임금)이 이르기를

"북방은 이 사람이 아니면 수습할 수 없다."

 

  

1623년(인조 1) 4월 12일 도원수 장만이 '이괄'과 '이서' 중 한 사람을 택할 수 있도록 임금께 아뢰고,

1623년(인조 1) 8월 17일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 이괄이 인조를 알현하고 평안도로 떠난다.

 

 

 

 

1624년(인조 2) 1월 17일 문회, 이우, 권진 등이 이괄과 아들 이전 등이 기자헌, 정충신 등과 변란을 꾀하고 있다고 고변한다.

국문결과 변란을 모의하였다고 한 이괄 및 관련자는 무고함이 밝혀졌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괄을 직에서 해임하고 한양으로 압송해서 국문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조실록』 4권, 인조 2년 1월 22일(1624년)

상(임금)이 답하기를,

"이괄은 충의스런 신하인데, 어찌 두 마음을 품었을 리가 있겠는가.

흉악한 무리의 근사하지 않은 말만을 믿고 의심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의심하게 된다면, 이는 스스로 흉악한 사람의 계책에 빠지는 것이다.

 

어제 이귀가 두세 번 국문하기를 청한 것을 내가 매우 괴이하게 여겼는데, 너희가 또 이 일을 논하니, 생각하지 못한 것이 심한 것이 아니겠는가. 옥사를 다스리는 방도는 진위를 밝히는 데에 있는 것이다. 부원수의 직임은 이괄이 아니면 맡을 수 없으니 다시 번거롭히지 말라."하였다.

 

 

 

 

 

 

 

 

 

 

 

 

 

 

조정에서는 이괄을 제외하고 관련자로 지목된 수십 명을 하옥하고, 이괄의 아들을 압송하기 위해 금부도사를 보냈다.

무고함이 밝혀졌는데도 끝까지 역모로 몰아가는 조정 대신들의 행위는 이괄로 하여금 역모를 선택하게 한다.

인조반정의 주역이었던 이괄은 죽고 사는 갈림길에서 역적으로 몰려 그냥 죽느니, 역적이 되어 사는 길을 선택한다.

 

 

 

인조실록 4권, 인조 2년 1월 24일(1624년)

부원수 이괄이 금부도사 고덕률, 심대림, 선전관 김지수, 중사 김천림 등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반역하였다.

이에 앞서 상변(上變, 변란을 보고)한 사람이 이괄 부자가 역적의 우두머리라고 하였으나, 상(임금)이 반드시 반역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여 그 아들 이전을 나래(拿來, 잡아옴)하라고 명하였는데 이전은 그때 이괄의 군중에 있었다. 드디어 도사 등을 죽이고 제장을 위협하여 난을 일으켰다.  

 

 

 

 

 

 

1월 25일 이괄이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기자헌에게 사약을 내리고, 성철, 성효량, 한욱 37명을 죽였다.

 

 

 

인조실록 4권, 인조 2년 1월 25일(1624년)

이때 갇혀 있는 죄인은 혹 공초하고 그대로 갇혀 있기도 하고 혹 형신(刑訊)을 받아도 승복하지 않아 미처 구명하지 못하였는데, 역적 이괄의 반서(反書)가 갑자기 이르자 인심이 어수선하였다.

 

좌찬성 이귀(李貴)는 국문하여 사실을 밝힌 뒤에 논죄하여 죽이고 귀양보내려 하였으나,

판의금(判義禁) 김류(金瑬)는 ‘역적 이괄이 군사를 일으켰는데 안팎이 체결하여 헤아릴 수 없는 변란이 서울에서 일어난다면 장차 어찌하겠는가. 그리고 대신, 추관이 날마다 국청(鞫廳)에 나아가 참여하면 방어하는 방책을 어느 겨를에 규획(規劃)하겠는가.

곧 죽여 없애야 한다.’ 하였는데,

 

대개 신경진(申景禛)·심명세(沈命世) 등이 힘껏 권하고 문사랑(問事郞) 등 여러 사람도 대부분 도왔기 때문이다.

김류가 드디어 들어가 상에게 청하였는데 삼공(三公)도 이론이 없으므로, 상이 드디어 따른 것이다.

 

 

 

 

인조실록 4권, 인조 2년 2월 4일(1624년)

이괄의 아내 예(禮)와 이괄의 아우 이돈을 주벌하였다.

좌찬성 이귀가 역적의 아내를 참형에 처하는 것은 법전에 없는 것이므로 새로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인조는 도성을 버리고 공주로 도망가기 전 이괄의 처와 장인, 동생 등을 죽였다.

조선왕조에서 역모자의 처와 딸 등 여자는 죽이지 않고 관비 등으로 삼는다. 

 

임금과 조정은 이괄과 관련이 있다는 사람들을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단지 도망가기에 바빠 영의정을 지낸 기자헌 등 수십 명을 죽여버리고, 조선 법률에도 없는 여자를 참형했다.

 

 

 

 

 

 

 

 

 

 

 

 

 

 

이괄이 이끄는 1만여 명의 반란군이 황해주 황주, 평산, 임진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자 인조는 도성을 버리고 공주로 도망간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이괄의 반란군은 2월 10일 한양을 점령한다.

선조와 온빈 한씨 사이에서 태어난 열 번째 아들 흥안군 이제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

 

 

 

반란군은 안현전투에서 대패하고 경기도 광주, 이천으로 도망간다.

2월 13일 정충신 등이 관군을 이끌고 이천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이괄은 죽었다.

실패한 반란이라고 여긴 반란군 장수 기익헌, 이수백 등이 이괄과 한명련 등을 이미 죽인 뒤였다.

이괄의 난은 새로운 임금을 추대한 지 3일 만에 끝나, '삼천하'라고도 한다.

 

 

 

인조 2년(1624년) 2월 16일 심기원, 신경진, 장만 등이 흥안군을 목매어 죽였다.

2월 22일 공주로 도망갔던 인조는 한양에 돌아왔으나, 창경궁이 이미 불탔기 때문에 경덕궁(경희궁)으로 들어갔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