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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세조와 이시애의 난, 유자광 한명회 신숙주

by 도생(道生) 2016. 12. 7.

세조의 중앙집권 정책에 반발하여 일어난 이시애의 난

이시애의 난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유자광과

반역 연루설에 곤욕을 치른 세조의 최측근 한명회와 신숙주

 

 

 

 

 

 

 

 

 

 

 

 

 

 

 

이시애의 난은 세조 13년(1467)에 함길도(함경도) 일어난 반란이다.

세종대왕 재위 시 북방 여진족을 소탕하여 최윤덕 장군은 4군을 개척하였고, 북방의 호랑이 김종서 장군은 6진 개척하여 조선의 국경이 넓어졌다. 함길도(함경도)는 이때 조선의 영토에 편입됐다.

 

 

 

세종대왕은 함길도 지역을 조선의 영토로 확고히 하고자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삼남 지역의 백성을 비롯하여 다른 지역도 북방에 이주시켰다. 이른바 북방사민정책으로 토착민과 이주민에게 많은 혜택을 줬다.

군역과 부역 등 국역(國役)을 면제해줬고, 관직을 주거나 올려주고 토착민관리로 임명하여 자치를 허용해줬다.

 

 

 

 

세조의 중앙집권 정책에 반발하여 1467년(세조 13) 5월 10일 이시애가 난을 일으켰다.

세조는 호패법을 시행하고 조세 수입을 확충하는 등 국방력 강화와 국가 재정을 위해 지방을 통제하면서 중앙의 권한을 강화했다.

군역과 부역이 부과되고, 호패법으로 이주가 제한되었으며, 중앙에서 관리를 직접 임명하여 보내는 등 그동안 유지됐던 특혜가 사라지면서 불만이 쌓여갔다.

 

 

 

 

 

 

 

 

 

 

 

 

 

 

 

함길도(함경도) 회령부사를 지낸 이시애는 모친의 장례식 때 동생 이시합, 매부 이명효 등과 반란을 모의하였다.

지방 수령의 자문 역할을 하는 기구 유향소를 중심으로 지역 토호들에게 "병마절도사 강효문 외 여러 명이 반역을 음모하고 있고, 조정에서 군대를 보내 함길도 군민을 모두 죽이려 한다."라고 유언비어를 퍼트리며 백성을 선동하였다. 

 

 

1467년 5월 함길도 병마절도사 강효문을 비롯하여 길주 목사 설정신, 부령 부사 김익수 등 지방 수령을 죽이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3개월간의 교전 끝에 반란의 주모자 이시애와 이시합이 체포되면서 이시애의 난은 끝났다.

 

 

 

 

 

 

이시애가 난을 일으켰을 때 세조(1417~1468)의 최측근 한명회(1415~1487)와 신숙주(1417~1475)가 봉변을 당한다.

 

이시애의 난 초기 이시애는 '함길도 병마절도사 강효문이 조정의 한명회와 신숙주 등과 내통해 반역을 꾸민 것을 알고 강효문을 죽였다.'라는 헛소문을 퍼트렸고, 이 말은 세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세조는 5월 19일 신숙주를 의금부에 하옥시키고 병으로 집에 있던 한명회는택 연금하였다.

신숙주의 둘째 아들 신면은 함길도 관찰사로 있다가 이시애의 난이 일어난 직후인 1467년 5월 22일에 반란군에 의해 죽었다.

이시애의 난으로 아들도 죽고 의금부에 하옥된 신숙주와 세조의 최측근이며 사돈관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한명회가 헛소문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헛소문을 듣고 자신을 임금으로 만들어준 최측근 신하를 감금한 세조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세조의 장자방과 위징 같은 존재 한명회와 신숙주는 또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시애의 난 때 서자 출신 갑사(직업군인) 유자광(1439~1512)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유자광은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세조에게 이시애의 난 평정에 관한 상서를 올렸다.

 

 

1467년(세조 13) 6월 14일 세조는 유자광의 상소를 읽고 "이글은 내 뜻에 매우 합당한 진실로 기특한 재목이다. 내가 장차 임용(임용)하여서 그 옳은 것을 시행하라."라고 하였다.

 

다음날 세조는 유자광을 궁으로 불러들였고 겸사복으로 승진시켰다.

세조의 후광을 바탕으로 서자출신 유자광은 병조정랑에 오른다.

 

 

 

 

 

유자광은 1468년(세조 14) 온양별시문과에 도전했으나 낙방하지만, 세조의 명으로 합격 처리된다.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때까지 간에 붙었다가 쓸개에 붙었다 하는 등 만인이 감탄할 정도의 처세술로 승승장구한다.

 

 

중종반정으로 유자광은 정국공신 1등 숭정대부 무령군에 봉해졌으며유자광에게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를 주지만, 대간들이 정승을 지내지 않은 이에게는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끝내 오르지 못했다.

1512년(중종 7) 탄핵을 받아 유배되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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