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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이수광 지봉유설과 청백리 재상 류관(유관)

by 도생(道生) 2016. 12. 4.

조선 초기 청백리 3인방 - 선초삼청(鮮初三淸) 류관(유관), 맹사성, 황희정승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집필한 장소 비우당(庇雨堂)의 원주인이며

청백리 재상의 대명사가 하정 류관(유관)

 

 

 

 

 

 

 

 

 

 

 

 

 

 

 

광해군 재위 시 지봉 이수광이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지봉유설(芝峰類設)을 집필한 곳이 바로 비우당(庇雨堂)이다.

지봉 이수광은 5대 외할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겨준 작은 초가집, 그 초가삼간의 이름을 비우당(庇雨堂, 겨우 비를 덮는, 비를 피하는 집)이라 이름을 붙였고, 이곳에서 『지봉유설』을 집필했다.

 

 

 

 

 

조선왕조 청백리 재상의 대명사가 된 비우당의 원주인 하정 류관(유관)은 고려 공민왕 때부터 조선 세종까지 60여 년간 관직에 있었다. 선초삼청(鮮初三淸), 즉 황희(1363~1452), 맹사성(1360~1438), 류관(유관, 1346~1433) 3명을 조선 초기 청백리를 말한다.

 

하정 류관(유관)은 선초삼청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았고, 가장 먼저 정승의 자리에 올랐다.

좌의정과 영의정에 오르지 못했고, 짧은 기간 우의정 자리에 있었다.

  

 

 

 

하정 류관(유관)은 베옷과 짚신을 신었, 울타리 담장도 없는 초가삼간에서 살았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렴결백한 청백리의 대명사가 되었다. 비가 많이 올 때나 장마 때는 항상 초가집 지붕에서 비가 새서 우산을 쓰고 지냈다고 한다.

소탈하면서도 온화한 성품을 가졌으며, 태종이 세자의 스승으로 또 성균관에서 학문을 가르치게 할 정도로 학문도 뛰어났다.

 

 

 

 

 

 

 

 

 

 

 

 

 

 

문화 류씨 하정 류관(柳寬, 유관)은 1346년(고려 충목왕 2) 황해도 문화현에서 태어났다.

본래 한자(漢字) 이름은 류관(柳觀, 유관)이다.

1426년(세종 8) 아들 류계문이 충청도 관찰사가 되자 혐명(嫌名)이라는 이유로 임금에게 청하여 관(觀)을 관(寬)으로 고친다.

 

 

 

 

조선 청백리의 대명사이며 비우당의 원주인인 하정 류관은 고려 공민왕 20년(1371) 26살의 하정 류관(유관)은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한다. 고려 조정에서 전리전랑, 봉산군주, 사헌중승 등 여러 벼슬을 지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 된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고 태조 재위 시 내사사인, 조산기상시, 형조전서에 임명된다.

1398년(태조 7) 형조전서에서 파직됐다가 복직되었다.

1400년(정종 2) 강원도 도관찰출척사,

1401년(태종 1) 사헌부 대사헌과 승녕부윤,

1402년(태종 2) 계림부윤에 임명되었으나 국가 중대사를 보고하지 않은 죄를 물어 고향으로 귀양간다. 

 

 

 

1403년(태종 4) 태종의 명으로 성균관에서 생도들을 가르친다.

1405년(태종 5) 전라도 도관찰사

1406년(태종 6) 예문관 대제학, 판공안부사, 세자(양녕)의 빈객,

1407년(태종 7) 형조판서,

1415년(태종 15) 의정부참성에 임명되고 이후 의정부 찬성 등을 역임했다.

 

 

 

 

 

 

 

 

 

 

 

 

 

 

1419년(세종 1) 세종대왕이 즉위하면서 74세의 류관은(유관)은 예문관 대제학 지경연사, 판중군도총제부사가 된다.

1420년(세종 2) 의정부찬성사,

1421년(세종 3) 76세가 된 예문관 대제학 유관은 세종대왕으로부터 궤장(杖, 지팡이)을 하사받는다.

1422년(세종 4) 의정부 찬성사에 제수된다.

 

 

 

1424년(세종 6) 5월 12일 79세에 이른 류관(유관)이 나이가 많아 사직을 청하자 윤허하지 않는다.

6월 20일 세종대왕은 류관(유관)에게 우의정의 관직을 제수한다.

이때 황희는 의정부 찬성의 관직을 제수받았다.

 

 

1426년(세종 8)에 81세가 된 류관을 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하였다.

1433년(세종 15) 조선 초기 우의정에 올라 청백리의 대명사가 된 하정 류관(유관)이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지봉유설을 지은 이수광(1563~1628)은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비론을 반대하다가 벼슬을 버렸다.

지봉 이수광의 5대조 외할아버지이며 청백리 재상의 대명사가 된 유관이 남겨준 초가집을 비우당(庇雨堂)이라 이름 짓고 지봉유설을 집필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은 천문, 지리, 역사, 정치, 경제, 언어, 경영, 문학, 복식, 잡학, 문학, 인물, 동물, 식물 등 3435항목에 달하는 10책 20권으로 된 방대한 분량으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은 일부 빠진 것이 있으나 대부분 그 출처를 밝혔으며, 조선뿐만 아니라 외국의 문물과 이마두 신부의 천주실의 같은 내용도 소개하고 있다.

 

 

 

 

지봉 이수광의 지봉유설은 평생 책을 보고 세상 사람들에게 들은 내용, 자신의 생각과 느낌 등을 항상 기록해 두었다가 이 시기에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1614년(광해군 6)에 지봉유설을 탈고했다.

 

1634년(인조 12) 두 아들 이성구와 이민구에 의해 지봉선생집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지봉유설을 지은 지봉 이수광을 실학의 선구자라 말한다.

 

 

 

 

 

 

 

 

 

 

 

 

 

 

『세종실록』 60권, 세종 15년 5월 7일(1433년)

 

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한 유관(柳寬)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곧 거애(擧哀)하고자 하니, 지신사 안숭선이 아뢰기를,

"오늘은 잔치를 베푼 뒤이고, 또 예조에서 아직 정조장(停朝狀)을 올리지 않았으며, 날이 저물고 비가 내리니, 내일 거행하도록 하소서."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고, 흰옷과 흰 산선(繖扇)으로 홍례문 밖에 나아가 백관을 거느리고 의식과 같이 거행하였다....

 

관은 공순 검소하고 정직하며, 경사(經史)를 널리 보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아니하며, 무경(武經)에 이르러서도 모두 섭렵(涉獵)하였다. 집에 있을 때 살림을 돌보지 아니하고 오직 서사(書史)로 스스로 즐기고, 비록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어도 조금도 개의치 아니하였다....

 

3일 동안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고, 치조(致弔)하며, 관에서 장사를 다스렸다.

시호를 문간(文簡)이라 하였는데,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덕을 한결같이 닦고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간(簡)이다.

 

 

 

 

『세종실록』 61권, 세종 15년 7월 12일(1433년)

 

우의정으로 그대로 치사(致仕)한 유관(柳寬)에게 사제(賜祭)하였다.

그 교서에 이르기를,

"높은 신하 큰 보필로 일찍부터 임금 돕는 충성이 현저하매, 덕을 높이고 공을 갚음에 마땅히 은전의 예식 표할지로다.

생각건대, 경은 기질이 온전히 순후하고 성품이 너르고 깊어서, 학문은 고금의 사리에 통달하고, 재주는 경제의 포부를 갖추었도다. 경외(京外)에 복무하기를 3대 조정에 근속하였다.

 

 

 

동경에 나아가 원이 되매 백성들은 빌리기 원하는 생각을 품었고, 남쪽 지방에 순무하니 사람들은 자르지 말라는 노래를 불렀도다. 대헌(臺憲)을 맡아서는 이단을 철저히 배척하였고, 나라 정치를 잡아서는 한결같은 법을 깎듯이 지켰도다.

 

문앞에는 사사로 찾는 자가 끊어졌고, 곳간에는 남는 재물이 없었도다. 지위를 낮추어 깔끔한 풍도를 지니었고, 덕은 높아도 교만한 태도가 없었으니, 사림의 모범이요, 진신(縉紳)의 높은 이었도다.

 

 

더구나 동궁을 보도(輔導)한 은혜가 있고, 경연에 모시어서 깨우쳐 준 공이 많았도다.

행여나 편히 휴양함으로써 백세를 누릴 줄로 여겼더니, 하늘이 남겨 주지 아니하여 문득 장서(長逝)하게 하는고. 곧 애도를 표하여 조의를 드리며 시호를 의논하여 이름을 바꾸게 하노라.

 

 

이에 예관을 보내어 약소한 제전을 베푸노니, 아아, 먼저 근심하고 뒤에 즐겨함은 이미 좋고 슬픔을 함께 하였거니, 삶의 영광과 죽음의 슬픔이야 어찌 이승의 다름이 있으리오. 신령이여 어둡지 않거든 나의 지극한 심회를 살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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