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은 개벽중

조선 정조의 명재상 번암 채제공

by 도생(道生) 2016. 12. 1.

영조대왕 이금과 정조대왕 이산이 중용(重) 조선의 명재상 번암 채제공

 

 

 

 

 

 

 

 

 

 

 

 

 

 

 

조선왕조에서 가장 위대한 임금은 추앙받는 조선 4대 왕 세종대왕 이도(1397~1450)와 조선 22대 왕 정조대왕 이산(1752~1800)이다. 세종대왕의 치세에 명재상 방촌 황희정승(1363~1452)이 있었다면, 정조대왕의 치세에는 명재상 번암 채제공(1720~1799)이 있었다.

 

 

세종대왕은 32년간 재위에 있었으며, 명재상 방촌 황희 정승은 24년간 정승의 자리에 있었고, 영의정으로 18년간 있었다.

개혁군주 정조대왕이 24년간 재위에 있을 때 명재상 번암 채제공은 11년간 정승으로 있었으며, 5년간 영의정 자리에 있었다.  

방촌 황희정승과 번암 채제공은 중간에 공백은 있었으나, 오랜 시간 정승으로 지내며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을 보필하여 치세를 만들어 나갔다.

 

 

 

 

방촌 황희정승은 태종 이방원과 세종 이도가 신뢰하여 중용한 인재였고, 번암 채제공은 영조 이금과 정조 이산의 신뢰 속에 중용한 충신이며 명재상이다.

 

조선 초기 명재상 황희정승이 공과(功過)가 있듯이, 조선 후기 명재상 번암 채제공 또한 공과(功過)가 있다.

임금들은 그들의 단점보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중용(重用)하여 그들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한다.

 

 

 

 

 

 

 

 

 

 

 

 

 

 

 

번암 채제공은 1720년(숙종 46) 충청도 홍주(홍성)에서 지중추부사(정2품) 채응일의 아들로 태어났다.

1735년(영조 15) 15세에 향시, 1743년(영조 19) 23세에 문과 정시(병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한다.

 

1749년(영조 25)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다.

영조가 탕평책으로 국정을 운영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노론의 힘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남인과 소론의 지지 속에 사도세자는 여러 정책을 시행하려 했으나,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노론에 의해 좌절됐다.

 

 

 

 

1751년(영조 27) 번암 채제공은 파직당해 삼척에 유배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73권, 영조 27년 3월 28일(1751년)

전 지평 채제공은 어떤 중인(中人)의 분산(墳山, 무덤이 있는 산)을 빼앗으려다가 그에게 구타당하고 내쫓기게 되자, 스스로 반성할 줄은 모르고 세력을 믿고서 침학(侵虐, 침범하여 포학스럽게 행동)하여 여러 날을 가두어 두었으며, 추조(秋曹, 형조)에 이송하여 속전(贖錢, 죄를 면하기 위해 바치는 돈)을 함부로 거두어 대각(臺閣, 사헌부와 사간원)에 수치를 끼쳤으니,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1752년(영조 28) 영조는 번암 채제공을 조정으로 다시 불러들여 홍문관 부교리 관직을 제수한다.

1753년(영조 29)에 파직당했다가 다시 부교리 관직을 제수받는다.

1755년(영조 31) 임금은 특별히 번암 채제공을 승지로 임명한다.

1757년(영조 33)에 대사간, 이천 부사, 도승지에 제수되고 이후 대사헌, 형조참판, 공조참판, 개성 유수, 대사간, 예조참판, 예문관 제학, 함경 감사, 병조판서, 호조판서, 평안 감사 등을 지냈다.

 

 

  

 

 

 

 

 

 

  

 

 

 

 

 

1758년(영조 34)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위하라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자 당시 도승지로 있던 번암 채제공은 목숨을 내놓고 영조 앞에서 신하의 도리상 절대 할 수 없다고 아뢰어 비망기를 철회시킨다. 

 

1772년(영조 48) 영조는 번암 채제공에게 세손(정조)을 보위하고 훈육하는 세손우빈객이 된다.

58세의 번암 채제공은 21세의 세손(정조)의 인연이 시작됐고, 1799년(정조 23) 번암 채제공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됐다.

 

 

 

 

『영조실록』 127권, 영조 52년 1월 11일(1776년)

왕세손(정조)이 채제공(蔡濟恭)에게 말하기를,

"경이 서백(西伯)이었을 때에 쇄신한 것을 보면 경이 탐오(貪汚)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만하다.

경과 같은 자라면 알 수 있는 가운데 마음에 기대할 만한 일이 있을 것이다."

 

 

 

 

 

 

 

 

 

 

 

 

 

 

1775년(영조 51) 24세가 세손(정조) 이산이 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한다.

1776년(정조 1) 영조가 승하하자 3월 5일 정조가 조선의 22대 왕으로 즉위한다.

3월 10일 즉위식에서 정조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천명하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사도세자 무고 사건'의 조사가 시작됐고, 7월에는 궁에 괴한(자객)이 침입한 사건이 있었다.

형조판서와 판의금부사(종1품)를 겸한 번암 채제공은 홍국영과 함께 사도세자를 죽음에 연류된 자들괴 자객을 시켜 정조를 암살하려던 관련자를 단죄한다.

 

 

정조 재위 초기 노론 핵심 세력이 제거되자 홍국영의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홍국영의 누이는 정조의 후궁이었으나 1년 만에 죽었다. 누이가 독살당했다고 오판한 홍국영은 왕비를 독살의 배후로 생각하고 중궁전 궁녀들에게 모진 문초를 가했고, 문제가 커지면서 결국 조정에서 내쫓긴다.

 

 

 

1780년(정조 4) 홍국영의 몰락과 함께 가깝게 지냈던 번암 채제공도 탄핵을 받아 파직된다.

정조는 홍국영은 강원도 횡성으로 물리쳤고, 강릉으로 내쫓겼다가 죽는다.

 

 

 

 

 

 

 

 

 

 

 

 

 

 

 

 

정조는 번암 채제공이 파직된 이후에 계속 관직을 내리고 조정에서는 채제공 탄핵 상소가 빗발치게 올라온다.

1781년(정조 5년) 한성부판윤, 판의금부사, 예조판서, 지중추부사, 병조판서, 1782년(정조 6년) 한성부판윤, 판의금부사, 1784(정조 8년) 공조판서, 1786년(정조 10년) 평안도 병마절도사 등의 관직을 제수했다.

그러나 번암 채제공은 정조의 부름에 나가지 않고, 8년 동안 집과 한양 근교 명덕산을 오가며 은거 생활을 했다. 

 

 

 

 

1788년(정조 12) 정조는 친필을 써서 번암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명한다.

어필(御筆)을 용정(龍亭, 나라의 보배를 싣는 가마)에 싣고 풍악을 울리며 채제공의 집으로 보냈다.

채제공의 우의정 제수에 반대가 심했지만, 정조의 결심은 확고했다. 채제공 임명에 반대하던 승지와 이조판서를 파직시킨다.

 

 

 

조선 후기 명재상 번암 채제공은 정조에게 6조 진언을 올린다.

황극(皇極)을 세우고, 탐관오리를 징벌하며, 탐관오리를 없애고, 당론을 없애고, 의리를 밝히고, 백성의 어려움을 돌보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 등 부국강병을 위한 여섯 가지 내용이다.

 

정조대왕의 치세 후반기는 명재상 번암 채제공을 필두로 정약용, 유득공, 박제가, 이가환 등이 참여하여 문예부흥을 이룬다.

 

 

조선의 명재상 번암 채제공은 정조에게 선조 때 붕당의 원인이 되었던 이조전랑과 관련된 문제를 들고 나왔다. 

붕당 간의 당쟁을 완화하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는 탕평책을 강화하기 위해 이조전랑의 통청권(通淸權, 정3품 이하 인사 추천권한)과 자대권(自代權, 후임임명 권한)폐지를 주장해 관철했다.

 

 

 

 

 

 

 

 

 

 

 

 

 

 

1790년(정조 14) 번암 채제공은 좌의정이 된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삼정승 중 좌의정을 제외한 두 정승 자리가 비어있었기 때문에 3년 동안 좌의정 번암 채제공은 정조대왕의 개혁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권력과 결탁한 대상들의 독점상권, 즉 금난전권 폐지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 1791년)을 통해 소상인이 자유롭게 상거래를 하는 길을 열어주었고, 이로 말미암아 조선 경제가 활발하게 움직여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793년(정조 17) 영의정에 제수된다.

번암 채제공이 영의정에 제수되자 노론 세력의 반대가 거셌다.

 

 

조선의 성리학적 이념에 반하는 서학(천주학)은 1790년부터 박해를 받기 시작한다.

1791년(정조 15) 전라도 진산에 사는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했는데 서학(천주교) 장례를 치렀다.

번암 채제공은 남인 계열이었는데, 천주학을 믿거나 비호 또는 묵인하는 정약용 등이 남인이라 '진산 사건'으로 말미암아 세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1795년(정조 19) 서양 신부 주문모의 밀입국 사건으로 박해가 심해지면서 남인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이는 정조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번암 채제공이 좌의정으로 제수받고 활발하게 정책을 추진한 3년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대는 노론의 집중적인 공격으로 탄핵과 파직, 복직이 거듭됐다. 힘을 잃은 채제공은 정약용과 함께 수원화성 축조를 감독하다.

1798년(정조 22) 사직한다.

 

 

1799년(정조 23) 조선 22대 임금 정조대왕이 신뢰하여 중용한 명재상 번암 채제공이 80세를 일기를 세상을 떠난다.

정조대왕 이산은 친히 제문을 지었고, 불세출의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영조는 손자(정조)에게 번암 채제공을 "그는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며 너의 충신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정조실록 25권, 정조 12년 2월 11일 1788년

어필(御筆)로 특별히 지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을 임명해 의정부 우의정으로 삼고...

또 어필로 채제공에게 하유하기를,

"지금 경을 정승의 직에 제수하는 것이 내가 어찌 경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여 이런 거조가 있는 것이겠는가.

평소부터 말이 충성스럽고 행실이 독실하였으니 또한 늦었다고 하겠다.

경은 모름지기 나의 허저(虛佇)의 뜻을 본받아 즉시 숙배하여 부족하고 어두운 나를 도와 널리 시사(時事)를 구제하라....."

 

 

 

 

정조실록 51권, 정조 23년 1월 18일 1799년

판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이 죽었다.

상이 친히 제문을 지어 사제(賜祭)하고 문숙(文肅)이란 시호를 내렸다...

 

"내가 이 대신에 대해서는 실로 남은 알 수 없고 혼자만이 아는 깊은 계합이 있었다. 이 대신은 불세출의 인물이다.

그 품부받은 인격이 우뚝하게 기력(氣力)이 있어, 무슨 일을 만나면 주저없이 바로 담당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굽히지 않았다. 그 기상을 시(詩)로 표현할 경우 시가 비장하고 강개하여, 사람들이 연조 비가(燕趙悲歌)의 유풍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여 이때부터 영고(寧考)께 인정을 받아 금전과 곡식을 총괄하고 세법(稅法)을 관장하였으며, 어서(御書)를 윤색(潤色)하고 내의원(內醫院)에 있으면서 선왕의 옥체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매양 주대(奏對)할 적마다 선왕의 웃음이 새로웠는데, 그때는 그의 수염이 아직 희어지지는 않았었다.

 

 

내가 즉위한 이후로 참소가 여기저기서 빗발쳤으나 뛰어난 재능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는데, 극히 위험한 가운데서 그를 발탁하여 재상 지위에 올려 놓았었다.

 

이어 내각(內閣)에서 기사(耆社)로 들어갔고, 나이가 80이 되어서는 구장(鳩杖)을 하사하려고 했었다.

그 지위가 높고 직임이 나와 친근하였으며, 권우가 두텁고 은총이 성만하여 한 시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입을 못 열고 기(氣)가 빠지게 하였으니, ‘저렇듯 신임을 독점했다.’고 이를 만한 사람으로서 옛날에도 들어보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50여 년 동안 조정에 벼슬하면서 굳게 간직한 지절은 더욱 탄복되는 바인데, 이제는 다 그만이구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