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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만고역적이 된 조선의 천재 교산 허균

by 도생(道生) 2016. 11. 29.

복권되지 못하고 만고역적이 된 조선의 천재 교산 허균

 

 

 

 

 

 

 

 

 

 

 

 

 

 

 

하늘이 낸 괴물, 천지 사이의 한 괴물, 역적 괴수, 개혁 사상가, 개혁적 정치인, 천재 문인이며 학자, 혁명적 지식인, 인본주의자, 실패한 혁명가, 조선의 이단아, 실학의 선구자, 시대를 앞서 간 선구자, 시대를 앞서 간 비운의 천재, 시대를 앞서 간 진보적 사상가, 자유주의자, 시대의 풍운아 등은 교산 허균을 지칭하는 말들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조선의 천재 허균(1569~1618)은 1618년(광해군 10) 모반을 획책했다고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당했다.

1910년 조선(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끝내 복권되지 못해 역적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끝내 만고역적(萬古逆賊) 남아버렸다.

 

 

 

 

조선의 천재 교산 허균은 어려서 누나 허난설헌과 함께 서자출신으로 당대 한시(漢詩)의 대가였던 손곡 이달의 밑에서 공부하였다. 교산 허균은 서자로 관직에 나가지 못하는 스승을 보고 적서차별과 같은 신분 불평등의 인간차별을 느꼈을 것이다.

 

 

교산 허균은 어려서부터 총명함을 드러내 신동으로 불렸다.

스승 손곡 이달에게 시(詩)를 배웠고, 서애 류성룡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다. 

1580년 12살에 동인의 영수였던 아버지 허엽이 객사하였다.

1585년 17살에 생원 초시에 급제하였고, 김대섭의 딸 안동 김씨와 혼례를 올린다.

 

 

 

 

 

 

 

 

 

 

 

 

 

 

 

1589년(선조 22), 1594년(선조 27), 1597년(선조 30) 과거에서 연속 급제하며 조정에 나가 승승장구한다. 

임진왜란(1592~1597) 중에 첫째 부인과 사별하였고, 동인의 역수 김효원(1542~1590)의 딸 선산 김씨와 재혼했다.

조선의 천재 교산 허균의 아버지 허엽과 장인 김효원 모두 동인의 영수다.

 

 

교산 허균은 기생을 데리고 부임하고, 무뢰배와 어울리고, 불교를 숭상하고, 명(命)을 거부하고, 과거 시험에 조카와 조카사위를 부정 합격시킨 의혹 등으로 6번의 파직과 3번의 유배를 당한다.

교산 허균은 신분과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럼없이 행동하는 등 숱한 기행으로 굴곡진 관직 생활을 해나갔다.

 

 

 

 

 

1613년(광해군 3) 명문가 출신 서자 7명이 모여서 조선의 죽림칠현을 자처한 무리가 있었다.

자칭 강변칠우(江邊七友) 일곱 명은 여주 남한강 가에 토굴을 파고 도적질과 살인 혐의로 체포된다. 

이때 대북파 이이첨은 영창대군과 외조부 김제남을 제거하기 위해 역모사건으로 확대하여 계축옥사가 일어난다.

이들과 가까이 지냈던 교산 허균도 화를 입을 뻔했으나 다행스럽게 화를 피했다.

 

 

교산 허균은 당시 정권의 핵심이었던 대북파 이이첨과 함께 어울린다.

1616년(광해군 8) 형조판서에까지 오른다.

 

1617(광해군 9) 교산 허균은 인목대비 폐출 논의에 앞장서며 폐모론을 주장하고, 폐모에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이 파직당하고 유배되자,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이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라고 광해군에게 비밀상소를 올린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광해군은 허균의 역모를 고변한 기준격의 상소를 덮어버린다.

 

 

1618년(광해군 10) 8월 10일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대장군 정 아무개가 곧 온다...'라는 괘서가 붙었고, 이 벽서를 허균이 붙였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허균과 가까이 지내던 인물들이 잡혀 들어갔고, 급기야 국문장에 잡혀간 허균의 첩 추섬과 하인준, 김윤황 등이 심한 고신을 받고 허균이 했다고 자백한다. 기준격(1594~1624)과 교산 허균은 8월 17일 의금부에 잡혀갔고, 허균은 끝까지 역모를 모의하지 않았다고 혐의를 부정했다.

 

 

 

 

허균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왜? 역모를 꾸몄는지, 배후와 가담자가 더 있는지? 등을 심문하는 국문도 받지 않았고 빨리 죽이기에 급급했다. 의금부에 잡혀와 고문을 당했던 허균의 주변 사람들의 자백만으로 8월 24일 대역죄로 능지처참 됐다.

기준격은 역모 고변을 늦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유배당했다.

 

 

허균은 시신은 갈기갈기 찢겼고 역적의 시신을 감히 수습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현재 허균의 묘는 시신 없는 가묘다.

대역죄는 3족, 또는 9족을 멸하는 멸문지화를 당한다.

역적 허균의 가족은 멸문지화를 당하지 않았다. 허균의 아들들은 연좌되어 처형됐고, 아버지 허엽은 부관참시당했다.

그러나 딸들과 사위, 친척은 연좌되지 않았고, 혹자는 허균이 아들 중 한 명이 살아남았다고도 한다. 

 

교산 허균의 사상과 학문 대해 재조명되고 있지만,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신원복권이 되지 않아 만고역적이 되었다.

 

  

 

 

 

 

 

 

 

  

 

 

 

 

 

조선의 3대 간신으로 불리는 이이첨의 외손녀 밀양씨가 1614년(광해군 6) 세자빈(폐세자 이지)이 되었다.

이이첨의 외손녀 세자빈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허균의 딸이 1618년(광해군 10) 5월 광해군의 아들 세자(1598~1623, 폐세자 이지)의 후궁이 되었다. 이이첨의 외손자나 허균의 딸이나 왕위를 이을 원손을 낳으면 외척 세력의 힘이 세진다.

 

광해군이 임금에 오를 때 대북파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고, 광해군 재위 기간 내내 대북파가 정권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움켜쥔 이이첨은 대북파의 영수였고, 다른 누구와도 권력을 나누지 않았다.

 

 

 

 

교산 허균(1569~1618)은 사명대사 유정(1544~1610)의 비문(해인사 홍제암 석정비)을 지었다.

"나는 비록 유가(儒家)에 속하는 무리지만, 서로 형님 아우 하는 사이로 누구보다 스님을 깊이 알고 있다."

 

교산 허균은 김종직론(金宗直論)을 통해 사림의 중시조로 추앙받던 김종직을 비판하였고, 남효온론(南孝溫論)에서는 김종직의 제자 추강 남효온의 높은 기개와 인품을 기렸다. 허균이 불교를 숭상하고 사림의 종조인 김종직을 혹평한 것 때문에 사림세력에 미움을 받았다.

 

 

신흠, 이민구, 김만중, 안종복 등 당대와 후대의 정치가와 학자들이 교산 허균의 총명함과 뛰어난 문장력에 찬사를 보냈다. 

명나라 오명제는 허성, 허봉, 허균 3형제가 뛰어난 문장력에 감탄했고, 허균의 천재성에 극찬을 보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27권, 광해 10년 윤4월 29일(1618년)

"허균은 천지 사이의 한 괴물입니다...

허균이 일생 해 온 일을 보면 악이란 악은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광해군일기(정초본)』 131권, 광해 10년 8월 21일(1618년)

삼사에서 비밀 계사를 입계하니 비답을 봉하여 내리다.

(史論 - 이때에 허균이 무사를 많이 모으고 은밀히 승군을 청해서는 곧바로 대비궁을 범하여 일을 먼저 일으키고 나중에 아뢰려고 하였는데 왕도 이미 허락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31권, 광해 10년 8월 22일(1618년)

"하늘이 낸 괴물인 허균이 2백 년의 종사에 화를 전가시키려고 한 전후의 흉악하고 비밀스런 상황에 대해서, 사람마다 모두 마음속으로 통탄해 하고 있었으나 입으로 말하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31권, 광해 10년 8월 24일(1618년)

"근일에 국청에서 신문하는 것이 자못 허술한 일이 많다. 김윤황(金胤黃)과 하인준(河仁浚)이 공초한 일 중에 다시 신문할 만한 단서가 있는 데도 상세하게 캐묻지 않고 먼저 역적의 괴수를 정형할 것을 청하니 극히 타당하지 못하다.

 

금후로는 죄인이 공초한 일에 대해서는 다시 더 반복하여 상세하게 물으라.

역적 허균이 저지른 짓이 단지 흉격과 흉서에만 그친다 하더라도 당연히 반복하여 끝까지 물어서 그 실정을 다 알아낸 연후에 나라의 형으로 바루어야 할 것이다...

 

 

"오늘 정형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심문한 뒤에 정형하고자 하는 것이다...  역적 허균이 저지른 각 항목을 일일이 엄히 국문한 후에 통쾌하게 왕법을 시행하는 것이 가할 것이다. 다만 양사의 계사가 이와 같으니 다시 더 상세하게 의논하여 처치하라."

 

이이첨 이하가 같은 말로 아뢰기를,

"지금 만약 다시 묻는다면 그는 반드시 잠깐 사이에 살아날 계책을 꾸며 다시 함부로 말을 낼 것이니 도성의 백성들을 진정시킬 수 없을까 걱정됩니다."하였다. 왕이 끝내 군신들의 협박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따랐다.

(史論 - 이때에 이이첨과 한찬남의 무리들은 허균과 김개 두 적이 다시 국문하는 것으로 인하여 사실대로 공초하면 그들의 전후 흉모가 여지없이 드러나 다같이 주륙을 받게 될까 두려워하였다... 왕도 어찌할 수가 없어서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겨둘 따름이었다...)

 

 

역적 허균(許筠)·하인준(河仁浚)·현응민(玄應旻)·우경방(禹慶邦)·김윤황(金胤黃)을 서쪽 저자거리에서 정형하였는데...

(史論 -기자헌은 허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예로부터 형신도 하지 않고 결안도 받지 않은 채 단지 공초만 받고 사형으로 나간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다." 했다고 한다.)

 

 

 

 

 

 

허균의 호(號)는 교산(蛟山)이다.

고향 강릉 사천면에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의 전설이 내려온다.

허균은 이무기 산, 교산(蛟山)에서 자신의 호를 따왔다.

 

 

만고역적이 된 조선의 천재 교산 허균이 살았던 선조와 광해군 재위 때 조선은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격동기였다.

교산 허균이 역적으로 능지처참을 당할 때는 명나라와 청나라가 명청전쟁(1618년 4월~1644년 4월)을 시작한 직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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