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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현충사 이순신장군과 거북선(귀선)

by 도생(道生) 2017. 1. 17.

성역화 된 현충사(顯忠祠),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귀선龜船)

 

 

 

 

 

 

 

 

 

 

 

 

 

 

충청도 아산의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모신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당이다.

조선 19대 왕 숙종은 충청도 유생의 상소를 보고 충청도 아산에 이순신 장군의 사당을 세우게 하였고, 현충의 시호를 내려 현재의 현충사가 되었다.

 

 

 

현충사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리면서 폐쇄되었고, 일제강점기였던 1932년 현충사가 중건됐다.

 

1952년 진해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졌고, 1966년부터 현충사 성역화 사업이 시작되었다.

1968년 광화문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졌고, 이순신 장군의 출생한 날이 1973년 충무공 탄신일 법정기념일로 지정됐다.

 

 

 

 

 

 

 

 

 

 

 

 

 

거북선(귀선龜船)은 고려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나 실물은 없고 입에서 입으로 구전(口傳) 되었다고 한다.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80년 전에 조선 태종 이방원 때 만들어졌고, 이때 왜 수군과 모의 전투를 참관했다는 기록이 있다.

 

 

태종 때 만들어진 거북선,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 그리고 후대 거북선은 기본 형태는 같지만 좀 더 실용적이고 효율적으로 변형된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말 고종 때까지도 귀선(龜, 거북선)이 만들어지고 운용된 것으로 나온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이순신 장군(1545~1598)이 바다에서 왜의 수군을 무찌를 때 거북선(귀선龜船)도활약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승전에 이바지한 거북선을 흔히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 하는데 철갑선이라는 기록은 없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4년(선조 37) 공신을 책정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갈 때 자신을 따른 신하를 호성공신(扈聖功臣), 왜적을 물리친 장수 등을 선무공신(宣武功臣), 이몽학의 난 등을 토벌한 사람을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하여 각각 3등급으로 나누었다.

 

 

이순신 장군은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宣) 1등 공신 책봉되었다.

1642년(인조 20) 공조판서 윤휘가 임진왜란 때 왜적을 공을 세웠으나 아직까지도 시호(諡號)를 받지 못한 고경명, 이순신 조헌 등에게 시호를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 1643년(인조 21)에 이순신 장군은 충무(忠武)의 시호를 받았다.

 

 

 

 

 

 

 

 

 

 

 

 

조선왕조시대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이 나라와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은 신하와 백성 된 자의 도리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조선의 백성으로, 그리고 장수로서 임진왜란의 국가 위기 상황에서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 바친 충신이며 영웅이다.

 

 

 

이순신 장군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민족의 영웅, 구국의 영웅 등의 수식어가 붙고, 성웅(聖雄)이란 칭호가 붙은 것은 근현대사의 일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이름 앞에 성웅(聖雄)이란 칭호를 처음 붙인 사람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며 국어학자였던 환산 이윤재(1888~1943)) 선생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윤재 선생은 일제강점기였던 1931년 『성웅 이순신』을 저술하였다.

 

 

 

 

 

 

 

 

 

 

 

 

혹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민족의 영웅을 넘어 성스러운 영웅으로 부각시킨 것은 군사정권에 의해서 였다고 주장한다.

군사정권은 이순신 장군을 화폐와 교과서를 통해 널리 홍보하고, 현충사를 성역화하였다는 것이다.

 

 

국민 모두가 인정하고 공감할 수 있는 민족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통해 군사정권의 합리화, 강력한 지도력,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 요구 등 강력한 통치를 위한 필요에 의해 성웅 이순신 장군으로 탈바꿈 시켰다고 한다.

현충사는 1967년 16만여 평의 엄청난 규모로 확장하여 성역화 됐다.

 

 

 

 

이순신 장군의 조카 이분(李芬)은 『이순신행록』에서 귀선(龜船, 거북선)에 대하여 '배 위에는 판자를 덮고 칼과 송곳을 꽂아서 사방으로 발붙일 곳이 없었다. 판자 위에 십자 모양의 작은 길로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앞에는 용머리를 만들고 입에는 총구멍, 거북선 뒤쪽에 거북꼬리를 만들었다. 모양이 거북이와 비슷하여 귀선(龜船)이라 하였다.'라고 했다.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 2월 5일(1413년)

임금이 임진도(臨津渡, 임진강)를 지나다가 귀선(龜船, 거북선)과 왜선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 7월 16일(1415년)

귀선(龜船, 거북선)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

 

 

 

선조실록 82권, 선조 29년 11월 7일(1596년)

임금이 이르기를

귀선(龜船, 거북선)의 제도는 어떠한가? 하니

남이공이 아뢰기를

"사면을 판옥으로 꾸미고 형상은 거북 등 같으며 쇠못을 옆과 양머리에 꽂았는데, 왜선과 만나면 부딪치는 것은 다 부서지니, 수전에 쓰는 것으로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많이 만들지 않았는가?"하니

조인득(임진왜란 당시 황해도관찰사, 황해도 병마절도사)이 아뢰기를

"소신이 황해도에 있을 때에 한 척을 만들어 검(劍)을 꽂고 거북 등과 같이 하였는데. 그 제주가 아주 신묘(神妙)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206권, 선조 39년 12월 24일(1606년)

귀선(龜船, 거북선)은 전쟁에 쓰기는 좋지만 사수(射手)와 격군(格軍)의 숫자가 판옥선의 1백25명보다 적게 수용되지 않고 활을 쏘기에도 불편하기 때문에 각 영(營)에 한 척씩만 배치하고 더 이상 만들지 않고 있다....

 

 

 

인조실록 43권, 인조 20년 5월 13일(1642년)

공조판서 윤휘가 아뢰기를

"증시(贈諡) 하는 전례(典禮)는 예로부터 있는 것이데, 고경명, 이순신, 조헌 등은 아직도 증시를 받지 못했으니, 이는 진실로 흠전(欠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조로 하여금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

 

 

 

효종실록 21권, 효종 10년 윤 3월 28일(1659년)

남해의 싸움터에 충무공 이순신의 비(碑)를 세웠다.

 

 

 

현종실록 5권, 현종 3년 2월 2일(1662년)

예조가 아뢰기를

"남해 노량은 곧 고(故) 통제사 이순신이 순절한 곳입니다....

액호(額號)와 교서(敎書)를 예문관으로 하여금 속히 지어 올리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현종실록 7권, 현종 4년 10월 5일(1663년)

유중이 아뢰기를

"남해의 노량은 곧 이순신이 순절한 지역으로서 그곳의 사우(祠宇)에는 이미 충렬(忠烈)이라고 사액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통영 또한 순신이 처음 개설한 곳이므로 장사(將士)들이 일찍이 사우를 세워 존모(尊慕) 하는 정성을 바치고 있다 하니, 거듭 사액하는 데에 구애받지 마시고 노량의 예에 따라 충렬의 호를 내려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현종실록 10권, 현종 6년 5월 1일(1665년)

예관을 보내어,

유신 증 영의정 김장생, 충신 증 이조판서 조헌, 증 이조판서 송상현, 증 우의정 이순신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숙종실록 39권, 숙종 30년 5월 16일(1794년)

충청도 유생 서후경이 소를 올려, 고 충무공 이순신을 위하여 아산 땅에 사당을 세우기를 청했으니, 이는 이순신이 생장(生長)한 고향이고, 구묘(丘墓)가 있기 때문이다.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숙종실록 45권, 숙종 33년 2월 6일(1707년)

충청도 아산의 충무공 이순신 사우(祠宇)에 현충(顯)이라 호를 내리고....

 

 

 

정조실록 38권, 정조 17년 7월 21일(1793년)

"생각해보면 충무공의 그 충성과 위무(威武)로서 죽은 뒤에 아직까지 영의정을 가증(加贈) 하지 못한 것은 실로 잘못된 일이었다.

유명 수군 도독 조선국 증 효충 장의 적의 협력 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덕풍부원군 행 정헌 대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 충무공 이순신에게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하라.

비석을 세우는 날의 치제에 대하여는 전에 명을 내려 알렸는데, 벼슬을 추증하고 선고하는 일도 그날 함께 거행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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