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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틀 - (4) 닦음의 양가성 '조신祖信'적 닦음과 '교신敎神'적 닦음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by 도생(道生) 2014. 11. 7.

동아시아 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틀 -

(4) 닦음의 양가성 '조신祖信'적 닦음과 '교신敎信'적 닦음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동아시아 대승불교에서 닦음은 믿음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믿음은 반드시 닦음으로 나타나야 한다. 닦음에는 "명상과 내면의 정신 수련뿐만 아니라 자비와 보시"등 도덕적 실천도 포함된다. 닦음은 집착을 떨침으로써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소극적 해탈'과, 자비를 통해 모든 것에 자재한다는 '적극적 해탈'을 모두 아우른다.

 

 

그런데 믿음이 '조신'과 '교신'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닦음도 그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즉 '조신'적 닦음이 될 수도 있고, '교신'적 닦음이 될 수도 있다.

'조신적' 닦음은 '몰록 닦음(돈수頓修)'이고 '교신적 닦음'은 '점차 닦음(점수漸修)'이다.

 

 

중요한 것은 '교신'이 닦음과 깨침의 전제 조건으로 작용하는 반면, '조신'은 그 자체가 닦음이며 깨침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교신'은 처음에 믿음을 일으키고 다음에 그 내용을 이해하여 실행에 옮기도 마침내 깨침에 이르는 점수의 과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조신'은 몰록 깨치고 단박에 닦아 마치는 '돈오돈수'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볼 때, '교신'은 점차적인 닦음의 과정을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믿는 것이고, '조신'은 믿음을 일으킴과 동시 즉각 깨쳐서 부처가 될 수 있다.

 

 

'교신'은 '점수'에 연결되고, '조신'은 '돈오'에 연관된다.

 

"조신에서는 닦음이 깨침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깨침의 용(用)다. 다시 말하자면, 교신에서는 분별적 능소의 구도가 전제되고, 교신은 불이적 체용의 구도를 바탕으로 한다. 교신에서는 중생과 부처 사이에 간격이 전제되고, 따라서 점진적 닦음을 통하여 그 간격을 메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편, 아무리 확고한 교신을 지닌다해도 그것으로써 자신과 부처 사이의 간격을 메울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돈오 즉 몰록 깨친다는 사상의 안목이다.

 

그 간격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와 중생의 구분은 분별심이 일으키는 망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 가상의 간격을 메우는 길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 것 뿐이다. 돈오사상에 입각하여 볼 때, 접진적으로 닦는 것은 다만 분별심을 바탕으로 한 행위로써 오히려 깨침을 지연시킬 뿐이다. 그러니까 교신을 바탕으로 한 점진적 닦음을 통해서는 결코 깨침을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점진적 닦음을 부정한다.

점진적 닦음은 단지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의 간극을 고착시키는 분별심을 덧붙이는 것으로 오히려 깨침을 지연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점차적 닦음을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부처와 중생의 간극과 차이를 '점수'를 통해 메우려 드는 것이다.

 

이는 이미 주객이분법적 구도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와 중생의 간극과 차이는 인간의 차별심이 일으킨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돈오돈수론'에서는 부처와 중생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양자의 차별이 없다.

 

인간의 분별심이 사라지면 막바로 그 간격이 저절로 없어진다. '교신'에 의거한 전차적 닦음은 부처와 중생을 둘로 가르는 것으로 주객이분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대원칙인 '불이불이'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신'에 의거한 단박에 닦음은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는 주객일체법에 그 존재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

 

 

 

 

닦음은 믿음이나 깨침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다.

'조신'에 근거한 주객일체적 닦음은 닦음과 깨침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수증일여修證一如'에 기초를 두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닦음 밖에서 따로 믿음이나 깨침을 찾아서는 결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런 예를 조동종의 도겐이 지은 『정법안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닦음과 깨침을 구별하는 것은 이단사설이다. 불법에서는 닦음과 깨침이 하나이다. 닦음은 깨침을 근거로 하므로 초심자의 닦음조차도 모두 본각이다. 그러므로 선사가 제자에게 수행의 가르침을 줄 때에는 수행 밖에서 따로 깨침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해야 한다. 수행 자체가 곧 본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 안되는 것은 수행 밖에서 따로 깨침이나 믿음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도겐에서 선의 수행은 '깨침 위에서 행하는 닦음'(증상證上의 수修)이지 '깨침 이전에 깨침을 위해서 행하는 닦음'(증전證前의 수修)이 아니다.

 

"결국 요점은 닦음과 깨침이 동시적이라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닦음과 깨침이 몸과 몸짓의 관계라고 함은 깨침을 향해 닦아 나가는 시간상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관념을 배제하고 대신에 완전한 불가분성, 불이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문제는 많은 불교인들이 닦음은 행하고 있지만 깨침은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닦음과 깨침이 둘이 아니건만, 닦음과 깨침을 동시에 이루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조신'에 의한 닦음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닦음과 깨침은 '조신'에 입각한 것일 때에만 비로서 양자가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불교의 수행의 비결은 바로 '조신'에 있다.

 

 

 

 

 

 

 

 

 

 

 

우리는 '조신'을 근거로 하는 닦음의 실례를 '벽관壁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벽관'은 중국 선종의 초대 선사인 보리달마가 소림사에서 9년 동안 수행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렇다면 '벽관'이란 무엇인가? '벽관'은 일반적으로 벽을 마주하고 앉아서 참선을 한다는 뜻으로 해석 된다. 그러나 '벽관'의 참뜻은 벽을 마주하고 앉아서 참선을 하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참선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조신의 닦음으로서 참선을 행할 때, 그것은 불성 즉 부처님 성품이라는 몸에서 나오는 몸짓이라는 점에 참선의 본질이 있다."

 

 

 

참선을 왜 하필 '벽관'이라고 했는가?

'벽관'이란 말 앞에 '응주'라는 말이 붙는다. '응주벽관凝住壁觀'이 바로 그것이다.

'응주벽관'에서 중요한 것은 벽이 아니라 얼마 만큼 사무치게 볼 수 있는가 하는데 있다.

 

시 말해 '응주'는 주객일체의 경지에 확고하게 머문다는 뜻이고, '벽관'은 벽처럼 주객일체의 경지에 확고부동하게 머무는 경지에서 보는 것을 뜻한다. 박성배교수는 야나기다의 해석에 근거해서 '벽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벽관이란 벽이라든가 그 밖의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한 명상도 아니고, 특정의 장소에서 특정의 자세로 행하는 명상도 아니다. 벽과 같이 확고한 마음으로 행하는 명상이라면 자세와 장소에 상관없이 모두 벽관일 수 있다...

 

그러니까 보리달마가 6세기 중국 불교계에 끼친 중요한 공헌은 불교의 모든 명상 수련에 적용되는 기준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보리달마의 벽관이란 특정 종류의 명상 수련이 아니라 올바른 명상 수련과 올바른 닦음의 기준이었던 것이다.

 

그 기준이란 (1) 모든 중생이 똑같이 참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깊은 마음, (2) 벽처럼 확고부동한 불이의 경지, (3) 일상 생활에서도 늘 사념처의 수행에 전념하는 것 등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올바른 닦음의 기준은 주객불이의 상태에 굳건한 벽처럼 확고하게 머무는 데 있다. 따라서 닦음은 깨침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깨침을 늘 새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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