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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틀 - (2) '체體와 용用의 논리 = 몸과 몸짓의 논리'(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by 도생(道生) 2014. 11. 5.

동아시아 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틀 -

(2) '체體와 용用의 논리 = 몸과 몸짓의 논리'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박성배교수가 '체와용의 논리'를 문제로 제기한 이유는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박성배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1983년 이 책이 처음 출판된 이래 20연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나는 미국에서 살면서 여러 가지 색다른 체험을 했고, 따라서 내 사상도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특히 불교 교리상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우리 선배들의 '체와 용의 논리'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했는지를 깨닫게 된 것은 적지 않은 수확이었다." 박성배교수가 보기에 동아시아 대승불교를 이해하는 데 '체와 용의 논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성배교수는 믿음과 닦음과 깨침이 각기 따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또 셋이 하나로 붙어 있는 유기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동아시아 전통적 사유구조의 틀인 '체와 용'의 논리를 응용한다.

 

'체와 용의 논리'는 중국철학에서 위진현학에서 시작되어 수당의 불교철학과 송명철학을 거쳐 청대와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 사유구조의 틀이다. '체와 용의 논리'는 '체용불이體用不二', 체용일여體用一如', 입체달용立體達用', 전체대용全體大用, 즉체즉용卽體卽用' 등으로 다양하게 구사된다.

 

 

 

 

 

 

동아시아 철학은 어떤 의미에서 '체'와 '용'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집약될 수 있다. 왜냐하면 위진에서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철학의 근본과제가 각 시대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체'와 '용'의 관계를 하나로 합치시킴으로써 이상세계와 현실세계를 통일하려는 측면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철학에서 '체'는 우주만물의 본래 바탕, 즉 본질을 말하고, '용'은 우주만물의 본질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작용을 말한다.

 

 

 

박성배교수는 '체'와 '용'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한다.

"동아시아 해석학 전통에서 '체'는 본질적이고 내적이며,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 면을 가르킨다. 그 체가 움직여 드러나고 일을 하는 면을 '용'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용은 현상적이고 외적이며, 따라서 눈에 보이는 면을 가르킨다. 그러나 체용의 개념이 그 두 면을 갈라놓으려고 고안된 것은 결코 아니다. 반대로 체용이라는 개념들은 언뜻 보기에는 별개인듯한 그 두 면이 실제로는 불가분의 불이(不二)적 관계임을 이야기하고자 고안되었다."

 

 

 

박성배교수는 '체와 용의 논리'를 자신의 독특한 관점에서 해명하고 있다.

'몸과 몸짓의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편의상 체용을 '몸과 몸짓'이라는 말로 바꾸어서 이여기하고자 한다. '체'를 '몸'이라고 하고 '용'을 '몸짓'이라고 하자는 것이다. 몸이 움직여 일을 하여 드러나는 것이 몸짓이다.그러므로 생명 있는 몸이라면 반드시 몸짓이 나온다. 우리가 보는 것은 몸짓뿐이다. 그러나 몸짓이 몸과 별개로 벌어지고 존재할 수는 없다. 몸이 있으면 반드시 몸짓이 있고, 몸짓이 있으면 그것은 반드시 몸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몸과 몸짓은 일단 구별할 수는 있지만 원래 하나이다."

 

 

 

 

박성배교수는 이미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몸'과 '몸짓'의 논리는 '능'과 '소'의 주객이분법적 사유방식에 비롯되는 온갖 그릇된 행동을 치유하기 위한 데 있다. 다시 말해 "몸과 몸짓이라는 개념은 주체와 객체, 수단과 목적, 원인과 결과, 생겨남과 없어짐, 삶과 죽음 등의 이분법에서 볼 수 있는 분별의 사고방식을 불식하기 위해, 그리고 그런 분별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되는 온갖 그릇된 행동을 치유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몸과 몸짓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원효가 말하는 것처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불일不一'과 '불일不二'의 관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문제는 몸과 몸짓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의식이 몸짓의 현상적 차원에 머물러 거기에 집착하여 몸의 본질적 차원을 배제함으로써 "몸과 몸짓의 관계가 자연스런 생명 본연의 관계가 아니라 적대적 대립관계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몸과 몸짓의 역동적 전일성의 관계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박성배교수는 동양의 체용사상이 불행히도 변질되었다고 비판한다.

즉 체용사상의 종교적 성격이 사라지고 말장난이나 사색의 훈련에 응용되는 차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박성배교수의 주장을 직접 인용하여 보자.

"그러나 불행히도 동양의 체용사상은 변질되고 말았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체용은 말장난으로 떨어지고 본래의 종교적인 성격이 사라지고만 것이다. 유교의 성리학자들이 즐겨 썼던 체용론은 모두 말장난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서 종교적인 성격을 찾아보기 힘든 것만은 사실이다. "바람이 용이라면 부채는 체다. 붓이 채라면 글씨는 용이다." 이것은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이 즐겨 인용한 체용의 예이다.

 

수학이나 논리학이 사람의 생각을 정리해 주듯이, 자기의 눈에 보이는 것을 안 보이는 것과 연결시켜 주는 지적 훈련이나 전혀 별개의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두 개의 사실이 알고 보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사색의 훈련이 바로 조선 시대 유학자들의 체용론이었다. 우리는 이들의 체용론에서 어떤 교육적 노력의 흔적을 역력히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변질은 역시 변질이라는 사실에 있다. 체용론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 성격의 증발이 바로 변질이다."

 

 

 

 

 

 

 

 

 

 

 

박성배교수는 체용론의 변질이 곳곳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본말론'이나 인도의 '진속론'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의 '본말론'은 근본적인 것과 지엽적인 것과의 관계를 나무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나무의 가지는 용이요 뿌리는 체다. 뿌리 없는 가지가 없듯이 체 없는 용은 없는 것이다."

 

근본적인 것과 지엽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따지는 본말론은 체용론에서 종교주의적 성격이 사라지고 공리주의적 성격이 판을 치게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인도의 중관학파들은 '진속불이'의 사상을 고취함으로써 대승불교사상을 펼치는 데 크게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진속불이론'이 체용론에서 종교적인 성격을 탈색시키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본말론과 같은 맥락에 있다.

 

 

 

 

박성배교수의 이런 관점은 좀더 비판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문제의 핵심은 '체용론'의 종교적 특성과 공리적 특성을 어떻게 하면 '양전兩全' 또는 '겸전兼全'할 수 있는가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증산도의 '성웅양전聖雄兩全' 또는 '성웅겸전聖雄兼全'의 논리는 '체용론'의 종교적 특성과 공리적 특성을 양가적으로 살리는 전형적 논리이다.

 

 

또한 박성배교수가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유학의 '체용론'이 참으로 종교적 특성이 배제된 채 공리적 특성으로 전락하여 변질된 것인지도 좀더 면밀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다. 박성배교수는 도가철학의 '체용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는데, 이에 대한 설명도 보충되어야 할 것이다.

 

 

 

 

아래에서 우리는 박성배교수가 믿음과 닦음과 깨침을 '체와 용의 논리',

즉 '몸과 몸짓의 논리'를 가지고 어떻게 분석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박성배교수는 몸과 몸짓의 논리를 가지고 믿음과 닦음과 깨침을 각기 양가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믿음의 측면에서는 '조신'과 '교신'의 관계이고,

닦음의 측면에서는 '조신'적  닦음과 '교신'적 닦음이며,

깨침의 측면에서는 '조신'적 '깨침'과 '교신'적 '깨달음'이다.

 '조신'과 '교신', '조신'적 닦음과 '교신'적 닦음, '조신'적 깨침과 '교신'적 깨달음 등의 양자적 관계는 각기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양자는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도 둘인 묘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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