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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의 태양신 숭배와 기독교(5) -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타협책, 니케아 공의회로 삼위일체설 채택(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김현일 박사)

by 도생(道生) 2014. 10. 25.

고대 로마의 테양신 숭배와 기독교(5)

-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타협책, 니케아 공의회로 삼위일체설 채택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김현일 박사)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정치적 타협책, 니케아 공의회로 삼위일체설을 채택.

 

기독교는 불안의 시대이자 위기의 시대였던 3세기에 큰 성공을 거뒀다.

로마의 전통적인 다신숭배가 줄 수 없는 영혼의 구원을 내세운 기독교는 불안하고 희망을 찾기 힘든 로마인들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로마 황제들이 일시적으로 탄압한다고 해서 기독교의 확산을 막기는 힘들었다.

 

더욱이 교회는 내세에서의 영생을 가르쳤기 때문에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수년 전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함께 박해를 주도하였던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 황제는 311년 박해령이 실패하였음을 자인하고 기독교들에 대한 이전의 박해정책을 취소하였다.

 

 

 

그 뒤를 이어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리키니우스 황제가 공동명의로 내린 313년의 밀라노 칙령은 대기독교 정책을 박해로부터 공인으로 180도 전환한 혁명적 칙령이었다. 역사를 바꾼 이 칙령에는 다음과 같은 그 의도가 설명되어 있다.

 

 

"오늘부터 기독교든 어떤 종교든 상관없이 각자 원하는 종교를 믿고 그에 수반되는 제의에 참여할 자유를 완전히 인정 받는다. 그것이 어떤 신이든 그 지고의 존재가 은혜와 자애로써 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을 화해와 융화로 이끌어 주기를 바란다...

 

기독교에게 인정된 이 완전한 신앙의 자유는 다른 신을 믿는 자에게도 똑같이 인정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가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것이 제국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라 판단했기 때문이고, 이떤 신이나 종교도 그 명예와 존엄성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칙령이 제국의 통합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였음을 잘 드러낸준다.

밀라노 칙령은 제국의 평화적 통치를 위한 종교적 자유의 선언이었다. 물론 아직은 기독교와 로마의 다른 전통 종교들은 동등하게 대접받았다.

 

서방의 정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후에 친기독교적인 정책을 취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것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려고 하는 후대의 움직임과는 달랐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과 제국의 통치를 분점하고 있는 동방 정제 리키니우스의 눈치를 봐야 할 뿐 아니라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죽기 전까지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로마의 전통적인 신들에 대한 제례를 관장하는 최고사제인 폰티펙스 막스무스직도 버리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태양신 숭배를 위한 조처도 취했다.

 

 

 

 

 

 

 

 

 

 

 

 

321년 칙령에서도 기독교이든 아니든 태양신의 날을 존중할 것을 명했다. 일요일을 지정해서 이 날은 재판도 하지 않고 관공서도 열지 않으니 도시의 다른 직업종사자들도 일을 하지 말고 공식적으로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농민은 예외였다. 날씨의 영향을 받는 농사일의 특성 때문에 예외로 하였던 것이다. 태양신의 날(디에스 솔리스)은 바로 우리가 일요일(Sunday)이라고 부르며 매우 좋아하는 날이다. 기독교 교회도 명백히 이교적인 기원이 있는 이 태양신의 날을 집회일로 삼았다. 그리하여 후일 이 날은 '주의 날'(디에스 도미니쿠스)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의 모습이 들어간 화폐에도 태양신 즉 '솔 인빅투스'의 모습을 넣었다.

 

'SOLIINVICTO COMITI(정복되지 않는 태양신에게)'라는 명문(銘文)은 그의 시대에 주조된 많은 주화에서 보이는 데 황제는 태양신을 자신을 도와주는 동료로 여겼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증거들로 볼 때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 인정해 주었지만 기독교와 태양신 숭배 사이의 화합과 타협을 추진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양쪽에 모두 우호적인 제스처를 썼다. 기독교 교회에 대해서는 박해기에 몰수하였던 교회재산을 돌려주고 또 교회 건물도 지어주었다. 예루살렘의 성묘 교회와 로마의 구베드로 성당은 그가 건립하였다고 한다.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면세의 특권을 준 것도 그였다. 그러나 신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할 후 이곳에 이교신전을 건립한 것도 콘스탄티누스 황제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황제가 기독교 내부의 교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25년 니케아에서 공의회를 소집하고 그 회의를 몸소 주재한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회의는 삼위일체설이라는 이해하기 힘든 비현실적 교리를 정통교리로 선언한 회의였다.

 

황제는 대다수 주교의 생각을 쫓아 삼위일체설을 정통으로 선언하고 선언서에 서명을 거부한 아리우스를 비롯한 세 사람의 주교를 먼 곳으로 추방해버렸다.

  

 

 

황제가 이렇게 교회 내부의 문제에 과도하게 개입한 것은 그가 기독교도로서 교회의 교리에 관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삼위일체설 문제로 가두에서 난투극이 벌어질 정도로 교회 내부의 분쟁이 신각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세력이 상당히 커진 한 종교의 심각한 내부분쟁을 황제가 방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여러 종교의 평화적인 공존을 통해 제국의 정치적 안정을 달성하려 하였던 것이 황제의 소망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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