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태양신 숭배와 기독교(4) - 로마의 전통종교와 국가를 부정한 초기 기독교 박해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김현일 박사)
로마의 전통종교를 인정하지 않고, 국가도 부정하여 시작된 초기 기독교 박해.
다양한 종교를 신봉하는 많은 민족들로 이루어진 로마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시도했던 것처럼 종교적인 통합이 필요하였을까?
원래 로마인들은 다른 민족들의 종교에 대해 매우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로마인들의 원래 종교가 유피테르신을 위시한 다양한 신들로 이루어진 다신교였기 때문이다.
세상이 하나의 신에 의해 창조되고 그의 뜻으로 움직여 나간다는 일신교와는 성격이 전혀 달랐다.
일신교도들은 모든 민족이나 족속이 자신들이 믿고 있는 진정한 신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다른 종교들은 모두 잘못된 가르침 즉 우상숭배에 불과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래서 유일신을 숭배하는 종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 되고 적대적이 되는 것이다.
물론 다신교를 숭배하는 로마가 외래 종교를 박해한 경우가 없지 않다.
외래 종교가 로마의 전통적인 국가종교를 부정하고 또 로마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경우 박해가 가해졌다.
기독교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기독교는 로마의 전통종교를 우상숭배라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로마의 국가도 인정하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기독교도들의 유일신 신앙보다는 그들의 공동체관 즉 국가관을 문제로 삼았다. 예수가 설파한 '신의 나라'만 인정하고 현실의 로마 제국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라는 가르침으로 세속 권력을 인정하라고 가르쳤으나 후대의 기독교도들은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로마 제국에 대해 반란을 획책한 것은 아니나 공직이나 병역을 거부하는 식으로 국가에 대해 소극적인 저항 뿐 아니라 로마인들이 일반적으로 따르는 로마의 전통적 종교예식도 따르지 않았다. 이러한 기독교도들이 국가의 통합에 대단히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황제들이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기독교도들에 대한 탄압은 네로 황제 때부터 간간히 있어왔지만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탄압은 마지막 탄압으로서 대단히 엄격하고 철저한 탄압이었다. 황제는 칙령으로 교회건물을 파괴하고 신도들의 모임을 엄금하였다. 또 성서와 예배에서 사용되는 십자가상과 예수의 도상 등은 모두 소각하고 기독교도들을 모두 공직에서 추방한다는 내용이었다.
칙령에 부수된 칙령에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기독교도들에게 로마의 전통 신들에게 예물을 바치게 하고 이를 거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거나 강제 노역에 처하도록 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령에 반발하여 기독교도들의 폭동이 몇 군데서 일어났으나 모두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탄압은 기독교 사가들에 의해 '대박해'로 불리지만 실제로 처형당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많은 기독교도들이 일시적으로나마 신앙을 버려 박해를 피하는 선택을 하였다. 그래서 결국 기독교를 근절하려는 디오클레티어누스 황제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계속)
(당시에는 정제와 부제가 있었다.
정제正帝를 '아우구스투스' 그보다 하위 파트너인 부제副帝를 '카이사르'라고 불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을 동서로 나눠 두 명의 정제가 각기 동서 로마를 다스리고 정제는 다시 각각 그 밑에 부제를 두어 영역을 통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모두 네 명의 통치자가 로마 제국을 분할해서 통치하는 통치제도가 출현하였는데, 이를 '테트라르키'라고 부른다.
그런데 네 사람이 사이가 좋고 서로 손발이 잘 맞는 경우에는, 이 분할통치가 효과를 발휘하였으나, 서로 대립하는 경우 제국은 여러 결쟁자들 간의 내전으로 빠져들게 된다. 실제로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일어난 일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여러 경쟁 황제들을 물리치고 일인통치를 달성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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