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태양신 숭배와 기독교(2) - 로마 황제이면서 태양신 사제였던 소년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김현일 박사)
로마 황제이면서 태양신 사제였던 소년, 엘라가발루스
A.D. 218년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마크리누스 황제를 죽이고 새로운 황제를 선출하는 일이 벌어졌다.
원래 로마의 황제는 인민을 대변한다고 자부하는 원로원이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정치가 혼란해지면서 군대가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인물(보통은 자신들의 사령관)을 황제로 옹립하는 일이 예전에도 여러번 일어나 이제는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진짜 놀라운 것은 이번에 새로 옹립된 황제는 열네살짜리 소년이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같으면 중학교 3학년 학생이 거대한 로마 제국을 다스리는 제위에 올랐던 것이다.
시리아에 주둔하던 제3 군단이 세운 소년 황제의 이름은 엘라가발루스로서 시리아의 유명한 사제 가문의 아들이었다.
당시 시리아에서는 아랍어로 '엘가발'이라고 불린 태양신을 널리 숭배하고 있었는데 에메사 시는 그 중심지였다.
로마 제국의 속주들 가운데 시리아가 로마 제국의 권력중심부에 다가가게 된 것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재위 193~211) 때부터였다.
세베루스의 황후 율리아 돔나는 시리아 왕족의 후예로 에메사의 엘가발 신의 대사제직을 맡고 있던 사람의 딸이었다.
상당한 지성을 갖춘 돔나가 왕궁의 안주인이 되면서 시리아인들이 원로원을 비롯한 고위 직책에 대거 진출하였던 것이다. 위에서 말한 엘라가발루스도 돔나 황후의 언니인 율리아 마에사의 손자였다. 엘라가발루스가 제위에 추대된 것은 세베루스 황제와의 이러한 인척관계 때문이었다.
소년 황제 엘라가발루스는 4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있다가 다시 군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엘라가발루스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후에도 통치보다는 태양신 사제 역할에 집착하였다.
제위에 등극하기 위해 로마시로 올 때에는 에메사의 태양신 신전에서 검은 돌을 모시고 와서 로마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 돌은 그리스, 로마식으로 신의 모습이 새겨진 조각상이 아니라 그냥 돌덩어리였다.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이었다는데 이를 시리아 인들은 신이 깃든 신체(神體)로 숭배하였던 것이다. 이 신체를 안치하기 위해 황제는 로마의 팔라틴 언덕 위에 신전을 건립하였을뿐 아니라 태양신 엘가발을 로마의 전통적인 주신인 유피테르 위에 두려고 하였다. 위로부터 일종의 종교 쿠데타가 감행된 것이다.
소년 황제는 로마인들을 계속해서 당황하게 만들었다.
베스타 신전의 처녀와 결혼을 하였던 것이다. 원래 베스타 신전을 지키는 처녀들은 30년 동안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사제가 되는 것인데 황제는 그 가운데 한 처녀를 취함으로써 로마의 신성한 전통을 짓밟아 버렸다.
또 엘라가발루스는 남성신인 태양신을 아스타롯 여신과 결혼을 시켰다.
아스타롯 여신은 구약성경에도 많이 등장하는 페니키아 인들의 여신이다.
북아프리카(오늘날의 튀니지)에 정착한 페니키아 인들이 카르타고를 세웠는데 그들의 신을 그대로 가져갔음은 물론이다.
카르타고의 이 아스타롯 여신을 로마인들은 미네르바 여신과 같은 신으로 여겼다. 이 여신의 신상을 바다 건너서 모시고 와서 엘가발 신과 결혼을 시켰던 것이다. 이 신들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축제가 황제의 명으로 성대히 베풀어졌다.
그런데 엘라가발루스는 성적으로도 매우 방종하였다.
여러 여성과 결혼하였다가 이혼하였으며 심지어는 측근의 남성들과 동성애 관계를 갖고 심지어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인 히에로클레스라는 노예를 자기 남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성적 정체성이 혼란을 겪었던 것이다. 역사가들이 그를 '트렌스젠더'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소년 황제의 괴기한 행각을 지켜보던 로마의 근위대 병사들은 마침내 더이상 황제의 기행을 용납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황제와 그 모후는 근위대 병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리고 황제의 사촌인 알렉산더 세베루스가 같은 근위대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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