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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명량대첩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각오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왜군보다 중과부적의 상태에서 전쟁을 치렀다. 일반 백성과 의병, 승병이 합세하였지만, 수적인 열세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왜군과 맞서 싸웠다. 그리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자는 뜨거운 열망은 명량대첩과 같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기적의 역사를 만든다. 최소 몇 배에서 10배가 넘는 왜군과 결전을 치른 전투로 행주대첩, 1차 진주성 전투(진주대첩), 황석산성대첩, 이치대첩 등 임진왜란의 대다수 전투가 수적 열세에서 치러졌다.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약이 깨지자 일본은 1597년 8월 정유재란으로 다시 조선을 침략한다. 이순신 장군은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7년 2월에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었다. 이.. 2016. 11. 20.
남명 조식과 의병장 곽재우 정인홍 김면 칼 찬 선비(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과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한 제자들 임진왜란 경상도 3대 의병장 - 의령의 의병장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장군, 합천의 의병장 내암 정인홍 장군, 고령의 의병장 송암 김면 장군 창녕 조씨 남명 조식(南明 曺植, 1501~1572, 연산군 7년~선조 5년) 선생은 조선 중기 대학자다. 조선 성리학 영남학파의 거두 남명 조식 선생의 이름 앞에는 칼 찬 선비, 대쪽 같은 선비, 실천 지식인, 조선의 참 선비 등 숱한 수식어가 붙는다. 당시 조선 성리학에서 남명 조식 선생은 경상우도의 영수였으며, 퇴계 이황은 경상좌도의 영수로 두 사람은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도 3대 의병장인 홍의장군 곽재우, 내암 정인홍, 송암 김면과 이노, 전치원, 하락, 조종도.. 2016. 11. 19.
임진왜란 의병장과 의병 승병 활동 임진왜란 당시 국란(國亂)극복의 주역 의병장과 의병, 승병 활동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후 200년 만에 닥친 큰 전쟁, 즉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는다. 임금은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야반도주했고, 조정 신료들은 임금을 보좌한다는 명분으로 함께 도주했다. 임금과 조정 대신들이 나라와 백성을 버리자 분노한 백성은 궁에 불을 지른다. 임진왜란이 시작되고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하는 왜군에게 조선 관군은 추풍낙엽처럼 연전연패한다. 임진왜란에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나라를 구한 대다수의 구국 영웅은 의병장과 의병, 그리고 승병들이다. 이순신 장군, 권율 장군, 김시민 장군 등이 승전할 때 옆에서 조선 관군과 혼연일체가 되어 목숨 걸고 활동한 이들이 바로 조선의 백성과 의병, 승병이다. 임진왜란.. 2016. 11. 18.
임진왜란 3대 대첩 (이치대첩)권율장군 행주대첩 임진왜란 3대 대첩 - 이치대첩의 영웅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첫 번째는 1592(선조 25) 8월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이고, 진주 목사 김시민 장군이 진두지휘하여 승리한 1592년 10월의 1차 진주성 전투가 진주대첩이다. 그리고 세 번째가 1593년(선조 26) 2월 권율 장군이 지휘한 행주대첩이다. 그러나 한산도대첩과 진주대첩의 승리가 있기 전 1592년(선조 25) 7월에 권율 장군은 충청도 금산(전라도 완주)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른바 이치 대첩(梨峙大捷)으로 불리는 승리였다. 이치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 한산도대첩,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 큰 승리였다. 이치는 충청도 금산군과 전라도 완주군의 경계 대둔산에 있는 고개이름이다. 이치(梨.. 2016. 11. 17.
임진왜란 3대 대첩 김시민 장군 진주대첩 임진왜란 3대 대첩 - 진주(晋州) 목사(牧使) 김시민 장군 진주대첩 - 1차 진주성 전투 임진왜란 당시 조선 팔도 관찰사가 있고, 팔도 20곳에 20명의 목사(牧使)가 있었다. 목사는 무관직으로 정3품의 벼슬이다. 경상도는 상주, 진주, 성주 3곳에 3명의 목사가 다스리고 있었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진주대첩을 이끈 진주 목사 김시민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 1591년(선조 24)에 종5품 진주 판관(晋州判官)으로 부임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육상에서 연전연승하며 파죽지세로 북진하였다. 그러나 병력과 군량미를 싣고 남해와 서해를 거쳐 한양으로 진격하려던 일본 수군은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에 막혀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임금과 조정 신료들이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 2016. 11. 16.
임진왜란 3대 대첩 이순신 장군 한산도대첩 임진왜란 3대 대첩 - 충무공 이순신 장군 한산도대첩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7백 척의 왜선에 약 2만 명에 육박하는 왜군이 침략해 들어왔다. 4월 21일 대구성 함락, 4월 26일 상주 함락, 4월 27일 문경새재를 넘어 4월 28일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장군이 무너졌다. 왜군은 조선군을 파죽지세로 몰아붙여 승승장구하며 1592년 5월 3일 한양도성에 들어왔다. 임진왜란 초기 이후 육상의 조선 군대는 부산진성, 동래성을 빼앗기며 연전연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조선 왕 선조는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맹장(猛將) 신립장군을 삼도도순변사로 임명하여 왜군을 물리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믿었던 신립장군마저 왜군에 패하고 자살하고 만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선조 24) 전라.. 2016. 11. 15.
선조 30년, 임진왜란에 이어 재침략한 정유재란 선조 30년(1597년), 일본(왜군)이 임진왜란에 이어 재침략한 정유재란 1592년(선조 25) 일어난 일본의 첫 번째 조선 침략전쟁, 임진왜란의 명분은 정명가도(征明假道, 가도입명假道入明)였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명나라를 치려고 하니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 노예전쟁, 살육전쟁, 무역전쟁 등으로 말하기도 한다.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년(1597년)에 왜군이 재차, 다시, 거듭, 두 번째로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란 의미다. 임진왜란에 이어 일본의 재침략인 정유재란(선조 30)은 그 양상이 달랐다. 조선이 일본의 공격대상이었다. 임진왜란 발발하고 조선이 배제된 상태에서 명나라 심유경과 일본의 강화회담이 결렬되면서 일본이 재침략한 전쟁이다. 남해안 일대에서 성을 쌓고.. 2016. 11. 14.
선조 25년 일본 침략전쟁, 1592년 임진왜란 선조 25년 일본의 침략전쟁,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임진왜란은 전쟁에 대한 아무 준비가 없던 조선이 일본 왜군에 의해 한반도가 쑥대밭이 된 침략전쟁이다. 일본은 열도 안에서 전국시대(戰國時代) 120년간 자기들끼리 전쟁을 지속했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많은 전쟁 경험과 조직화한 군대로 조선을 침략했다.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은 1592년에서 1597년 재침한 정유재란까지 포함하여 6년 7개월(약 7년)의 일본 침략전쟁으로 말한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구분하기도 한다. 조선 13대 왕 명종대왕 이환(재위 1545~1567)이 후사 없이 승하하면서 방계였던 하성군 이연이 조선 14대 왕(재위 1567~1608)으로 즉위한다. 조선은 1392년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세웠다. 이성계.. 2016. 11. 13.
조선왕조실록의 대금황제 이징옥의 난 수양대군과 한명회 일파가 편찬한 조선왕조실록 『노산군일기(단종실록)』 대금 황제(大金黃帝) 이징옥의 난 조선왕조실록의 『노산군일기(단종실록)』는 단종을 폐위시킨 세조(수양대군)의 신하가 편찬한 실록이다. 한마디로 『노산군일기』는 승자가 기록한 역사다. 조선 27명의 왕 중에 고종과 순종을 제외한 25명 왕의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이다. 조선의 26대, 27대 왕이면서 대한제국 초대와 마지막 황제인 고종과 순종의 실록은 일본 제국주의의 손에 의해서 쓰였기에 조선왕조실록에 넣지 않는다. 조선 1대 왕 태조 이성계에서 조선 25대 왕 철종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이다. 25명의 왕 중에 폐위된 노산군(단종), 연산군, 광해군의 기록은 『노산군일기』,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로 편찬되었다. 『노산군일.. 2016. 11. 12.
계유정난의 주역 한명회의 살생부(생살부)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주역으로 생(生)과 사(死)를 가른 한명회의 살생부(殺生簿, 생살부生殺簿) 살생부(殺生簿, 생살부生殺簿)는 살릴 사람과 죽일 사람의 이름을 기록한 문서다.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를 결정짓는 명부(名簿)는 계유정난의 주역 압구정 한명회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혹자는 한명회가 아닌 수양대군이 살생부를 만들었다고도 한다. 조선 5대 왕 문종은 승하 전 고명대신에게 아들 단종을 잘 보필하여 주라고 부탁하였다. 어린 조카 단종과 그 옆에서 정사를 좌지우지하는 김종서와 황보인 등 고명대신에 의해 약해지는 왕권을 보면서 야심가 수양대군은 고명대신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수양대군은 문무를 겸비했고 정치적 야심도 컸다. 그는 스스로 주나라의 주공단(周公 旦)임을 자처했다. 중국 주나라 무.. 2016. 1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