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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성호 이익과 안정복(동사강목)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과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저술한 실학자이며 역사가 순암 안정복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성호 이익(1681~1763)은 순암 안정복의 스승이다. 역사서 『동사강목』을 저술한 조선 후기 실학자 순암 안정복(1712~1791)의 학통과 당파는 동인(東人)에서 분파된 남인에 속한다. 인조반정 이후로 서인(노론과 소론)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고, 동인(남인과 북인)계열은 권력에 다소 소외되어 있었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6촌 형이며 실학의 비조로 추앙받는 반계 유형원과 남인의 영수이며 우암 송시열과 예송논쟁을 벌였던 미수 허목의 영향을 받았다.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은 근기남인(近畿南人, 기호남인, 한양 인근 출신 남인) 중에서 가장 큰 성호학파를 형성했다. 성호 이익의 실.. 2016. 12. 21.
조선후기 실학사상과 실학자 조선왕조 후기 실학사상과 실학자 실학사상의 비조라고 하는 반계 유형원 이전에도 실학사상이 체계화되지는 않았지만, 실학자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 있었다. 조선 중기 동인계열의 초간 권문해(1534~1591, 중종 29~선조 24), 남인 계열의 구암 한백겸(1552~1615, 명종 7~광해군 7), 남인 계열의 지봉 이수광(1563~1628, 명종 18~인조 6), 서인 계열의 잠곡 김육(1580~1658, 선조 13~효종 9) 등이다. 조선 중기 실학자들의 사상을 토대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이 자리 잡고 뿌리를 내리게 된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전쟁으로 백성의 삶이 황폐해지면서 조선의 사회변화를 요구하며 시대정신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실학(實學)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국가의 부국강.. 2016. 12. 20.
암행어사 대명사 박문수 암행어사의 대명사가 된 별견(別遣) 어사 박문수 기은(耆隱) 박문수(1691~1756) 하면 떠오르는 말은 암행어사 박문수와 꼬마 어사 박문수다. 박문수는 암행어사로 임명된 적도 없고, 어린 나이에 어사로 임명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문수는 암행어사의 대명사가 되었다. 1727년(영조 3) 영남과 호남 지역에 흉년이 들자 임금(영조)은 박문수를 특별히 영남지역 별견 어사(御史)를 파견했다. 임금으로부터 특별히 명을 받아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활동하는 어사(御史)를 암행어사라 하고, 지방에 특별한 일이 발생하였을 때 왕명을 받아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그 지역의 문제를 감독하고 해결하여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어사를 별견어사(別遣御史)라 한다. 어사 박문수는 암행어사의 왕명을 받지 않.. 2016. 12. 19.
영조의 경종 독살설과 즉위 - 이인좌의 난 왕세제(영조)의 경종 독살설과 영조의 즉위로 일부 소론과 남인의 반란 - 이인좌의 난 왕실의 핏줄을 이어받았지만, 조정에 출사를 하지 못한 이인좌(1695~1728)등이 영조 4년(1728년) 반란을 일으켰다. 이른바 이인좌의 난은 붕당정치의 폐해가 낳은 반란이며, 왕세제(영조)의 경종 독살설과 영조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은 일부 강경파 소론과 남인의 반란이다. 흔히 이인좌의 난을 이인좌가 주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영조실록』의 내용을 보면 이인좌를 반란을 주모(主謀)한 우두머리 괴수(魁首)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괴수(魁帥)는 난을 일으킨 반란 무리의 장수를 의미하며, 괴수(魁首)는 반란을 주도한 역적의 가장 우두머리를 말한다. 이인좌의 난은 박필현, 정희량, 이인좌 등이 전라, 경상, 충청, 경기(한.. 2016. 12. 18.
서인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 조선 중기 정치가이며 대학자 서인(西人)과 노론의 영수(領袖) 우암 송시열 숭명반청, 친청배금, 사대주의, 북벌, 예송논쟁, 소인배, 송자(宋子), 당쟁을 조장한 인물, 서인의 영수, 노론의 영수, 성리학의 대가 등 우암 송시열(1607~1689)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서인과 노론의 영수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우암 송시열은 당대와 후대의 당파와 학자에 따라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받는 등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조선의 주자가 되기를 꿈꾼 대학자이며 정치가인 우암 송시열(선조 30년~숙종 15년) 족적은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이나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그 족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우암 송시열은 율곡 이이, 김장생, 김집으로 이어지는 서인(西人)계열이며, 퇴계 이황 등 동인(東人) 중심의 영남학파.. 2016. 12. 17.
청나라 황제 강희제와 백두산정계비 청나라 황제 강희제의 황명(皇命)으로 세워진 조선과 청나라 국경을 표시한 백두산정계비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이 끝나면서 청나라와 조선은 군신(君臣)관계를 맺는다. 청나라는 황제(천자)가 다스리는 나라이며 조선은 신하의 나라가 되었다. 조선 19대 왕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의 재위할 때 청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꼽히는 강희제(1654~1722, 재위 1661~1772)가 다스리고 있었다. 조선과 청나라 국경을 표시한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진 것은 1712년(숙종 38)의 일이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영산이면서, 조선의 임금 숙종과 조정 신료들 처지에서도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가 활동했던 지역이라 그 의미가 깊다. 장백산(백두산)은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 2016. 12. 16.
안용복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땅 노비출신으로 조선의 영토를 지켜낸 안용복 -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땅 조선 왕조는 신분사회로 노비는 조선말 신분제가 폐지될 때까지 최하위계층이었다. 관청 등 공적 기관에 예속된 공노비(公奴婢)와 양반계층, 즉 개인에게 예속된 사노비(私奴婢)가 있었다. 사노비(私奴婢)출신 안용복의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조선 시대 노비였던 안용복을 현대에는 안용복 장군으로 부른다. 그의 활약을 기려 안용복 장군이란 칭호를 붙인 것은 불과 수십 년밖에 되지 않았다. 조선 시대 경상도 남동해안은 왜구의 노략질과 어업활동으로 충돌이 잦은 지역이다. 안용복은 경상도 동래(부산)출신이다. 1693년(숙종 19) 초봄 동래 울산 지역의 어부 40여 명이 울릉도 근방에서 고기잡이하던 중 일본 어부와 충돌하였다. 조선 측 대표로 나섰던 안.. 2016. 12. 15.
백두산 화산폭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화산 대폭발로 추정되는 약 1천 년 전 백두산 화산 대폭발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백두산 화산폭발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1대 임금 태조 이성계에서 25대 임금 철종 이변(이원범)에 이르는 472년간의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 472년간 기록에는 백두산 화산폭발로 추정되는 기록이 나온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사화산(死火山)이 아니라 휴화산(休火山)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고, 내일 당장 폭발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화산분화를 잠시 멈추고 있는 살아 있는 화산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백두산 화산폭발은 대규모 화산 대폭발은 아니고 비교적 소규모의 화산폭발이다. 실록에 나온 백두산 화산폭발 기록 중에 숙종 때 일어난 백두산 화산폭발이 그 중 규모가 큰 것으로 보인다. 물.. 2016. 12. 14.
효종의 북벌정책(1, 2차 나선정벌) 숭명배금(崇明排金)의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 대명(大明) 의리론과 삼전도의 굴욕에 대한 복수 - 효종의 북벌정책 청나라의 파병 요구로 나선 1, 2차 나선정벌(러시아) 조선은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을 겪고 오랑캐라 무시하던 청나라에 치욕을 당하고 군신(君臣)관계를 맺는다. 조선의 임금과 대명(大明) 사대주의자들은 오랑캐 야만족(청나라, 1636~1912)에 무릎 꿇고 머리 조아렸다. 그러나 효종(1619~1659, 재위 1649~1659)은 마음속으로 이미 멸망한 명나라(1368~1644)를 숭상하고 있었다. 병자호란에서 치욕을 당한 것도 모자라 조선 왕자 세 명을 비롯하여 50만 명이 넘는 조선 백성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인조의 큰아들 소현세자와 둘째 아들 봉림대군은 병자호란에서 .. 2016. 12. 13.
오랑캐 청나라의 조선침공 병자호란 후금(後金, 청나라)을 여진족 오랑캐로 멸시하여 자초한 병자호란 청나라의 조선 침공으로 청나라 황제에게 삼배구고두례를 올린 조선 16대 왕 인조 후금(여진족, 청나라)은 북방의 여러 부족과 내몽골을 정복하고 2대 황제 숭덕제(홍타이지)가 1636년(인조 14) 국호를 후금에서 청나라로 고쳤다. 조선의 임금과 대명 사대주의자들이 여진족 오랑캐로 업신여긴 청나라(후금)는 명실공히 제국의 위상을 갖추고, 1627년(인조 2) 정묘호란에 이어 조선을 재침공한다. 바로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하는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대명 사대주의자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조선 조정은 후금을 여진족 오랑캐 이상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 후금(청나라) 사신을 푸대접하는 등 철저하게 무시하는 등 대명 사대주의자들은 친명배금(親明排.. 2016. 1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