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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31

대명사대주의가 자초한 정묘호란 병자호란 대명(大明) 사대주의(事大主義)가 자초한 국란 동아시아의 신흥 강대국 후금(청나라)의 조선 침략전쟁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1616년(광해군 8) 여진족 누르하치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후금(後金, 청나라)을 세웠다. 후금(後金)은 명나라와 전쟁 중이던 1636년(인조 14) 청나라로 나라이름을 바꿨다. 1624년(인조 2) 이괄이 난을 일으킨지 한 달도 못되어 실패로 끝났지만, 그 여파로 후금(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전쟁인 정묘호란(1627년, 인조 5)이 일어난다.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조선은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기도 했다. 1618년(광해군 10) 중국 대륙의 패권을 놓고 후금(청나라)이 명나라를 공격하면서 명청전쟁(1618~1644)이 시작됐다. 광해군은 비록 쇠퇴하고 있었지만 강대국인 명.. 2016. 12. 11.
후금(청나라) 조선침략, 정묘호란 병자호란 한양 도성(都城)을 3번씩이나 버리고 도망간 인조의 굴욕과 치욕 후금(청나라)의 조선 침략전쟁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조선왕조 5백 년 역사에서 3번씩이나 한양 도성을 버리고 도망간 임금은 조선 16대 왕 인조(1595~1649, 재위 1623~1649)가 유일하다. 인조는 내란(內亂) 이괄의 난과 후금(청나라)의 조선 침략 전쟁인 정묘호란(1627년, 인조 5)과 병자호란(1636년, 인조 14~15)의 외침(外侵) 때 도주했다.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이 명나라와 의리를 저버리고 오랑캐 야만족 후금(청나라)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조반정에 성공하여 보위에 오른 인조와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서인(西人)은 배금친명(排金親明)의 외교정책을 고수한다. 광해군이 국정운영에서 폐.. 2016. 12. 10.
인조반정의 논공행상 이괄의 난 인조반정의 후폭풍 반정 세력 간의 다툼인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반란인가? 이괄의 난 김자점, 김류, 이귀 등 서인(西人) 세력과 이괄(1587~1624) 등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 이종을 왕으로 옹립하는 인조반정을 일으킨다. 일반적으로 이괄의 난이 인조반정을 이끈 공신들의 논공행상에서 2등 공신이 된 이괄이 불만을 품고 변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혹자는 인조반정에 기여한 공로를 포상하는 논공행상의 불만 때문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기보다는 반정 세력 간의 권력다툼 때문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당시는 명청전쟁(후금이 1636년 청나라로 국호를 바꿈) 초기로 북방의 국경 경비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었다. 인조는 이괄의 충성심을 믿었고, 그를 북방 방어를 책임지는 평안도 .. 2016. 12. 9.
불세출의 영웅에서 역적이 된 남이장군 불세출의 영웅에서 역적이 된 남이 장군 남이 장군(1441~1468)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조선의 불세출 영웅이다. 남이 장군의 고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남재, 증조부는 영의정부사에 추증된 남경문이다. 조부는 남휘, 조모는 태종 이방원의 딸 정선공주이며, 아버지는 남빈이다. 세조와는 6촌 간이며, 예종과는 7촌 간이 된다. 남이 장군의 장인은 권람으로 한명회, 신숙주와 함께 세조의 최측근 3인방이다. 남이 장군의 본가와 처가는 당대 최고의 가문 중 하나였다. 보통 사람보다 지혜와 재능, 용맹함이 뛰어나 어려운 일을 해내는 등 좀처럼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을 말할 때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이라 말한다. 17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여진족을 토벌하는 등 큰 공을 세워.. 2016. 12. 8.
세조와 이시애의 난, 유자광 한명회 신숙주 세조의 중앙집권 정책에 반발하여 일어난 이시애의 난 이시애의 난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유자광과 반역 연루설에 곤욕을 치른 세조의 최측근 한명회와 신숙주 이시애의 난은 세조 13년(1467)에 함길도(함경도) 일어난 반란이다. 세종대왕 재위 시 북방 여진족을 소탕하여 최윤덕 장군은 4군을 개척하였고, 북방의 호랑이 김종서 장군은 6진 개척하여 조선의 국경이 넓어졌다. 함길도(함경도)는 이때 조선의 영토에 편입됐다. 세종대왕은 함길도 지역을 조선의 영토로 확고히 하고자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삼남 지역의 백성을 비롯하여 다른 지역도 북방에 이주시켰다. 이른바 북방사민정책으로 토착민과 이주민에게 많은 혜택을 줬다. 군역과 부역 등 국역(國役)을 면제해줬고, 관직을 주거나 올려주고 토착민을 관리로 임명하여 .. 2016. 12. 7.
세조의 장자방(장량) 한명회, 위징 신숙주, 좌장 권람 계유정난으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장자방(장량) 한명회, 위징 신숙주, 좌장 권람 조선 7대 왕 세조, 예종, 성종 재위 시 많은 정승이 있었지만, 수양대군(1417~1468)이 계유정난부터 보위에 오르기까지 최측근에서 맹활약하여 재상(정승)까지 오른 3인방이 있다. 세조의 장자방 한명회(1415~1487), 위징 신숙주(1417~1475), 좌장 권람(1416~1465)은 세조(1417~1468)의 3대 권신(權臣)으로 불린다. 세조는 한명회를 장자방(장량)이라고 치켜세웠다. 장자방(장량)은 한나라 고조 유방의 책사로 한나라 창업에 일등공신이다. 장량(장자방)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한고조 유방의 곁을 떠나버렸다. 세조는 신숙주를 자신에게 당나라 명재상 위징과 같은 존재라고 칭찬했다. 위징은 .. 2016. 12. 6.
문무를 겸비한 북방의 호랑이 김종서 장군 왕위찬탈을 위해 수양대군이 죽인 6진 개척의 주역, 문무(文武)를 겸비한 대호(大虎), 북방의 호랑이 정승 절재(節齋) 김종서 장군 절재 김종서(金宗瑞)는 군(軍)을 통솔하는 무신(武臣)의 우두머리로서 장군(將軍)의 칭호를 받지만, 본래 문신(文臣)이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절재 김종서가 북방의 6진을 개척하고 대호(大虎), 즉 백두산 호랑이란 별명이 붙으면서 자연스럽게 장군이란 칭호가 붙었다. 단종대왕 밑에서 좌의정을 지낸 재상이며 북방의 호랑이 절재 김종서 장군은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왕위찬탈을 위해 계유정난을 일으키면서 역적이 되어 죽었다. 절재 김종서 장군은 순천 김씨로 1383년(고려 우왕 9) 도총제를 지낸 무장(武將) 김추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종서는 비록 몸집은 작았으나 무장의.. 2016. 12. 5.
이수광 지봉유설과 청백리 재상 류관(유관) 조선 초기 청백리 3인방 - 선초삼청(鮮初三淸) 류관(유관), 맹사성, 황희정승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집필한 장소 비우당(庇雨堂)의 원주인이며 청백리 재상의 대명사가 하정 류관(유관) 광해군 재위 시 지봉 이수광이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지봉유설(芝峰類設)』을 집필한 곳이 바로 비우당(庇雨堂)이다. 지봉 이수광은 5대 외할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겨준 작은 초가집, 그 초가삼간의 이름을 비우당(庇雨堂, 겨우 비를 덮는, 비를 피하는 집)이라 이름을 붙였고, 이곳에서 『지봉유설』을 집필했다. 조선왕조 청백리 재상의 대명사가 된 비우당의 원주인 하정 류관(유관)은 고려 공민왕 때부터 조선 세종까지 60여 년간 관직에 있었다. 선초삼청(鮮初三淸), 즉 황희(1363~1452), 맹사성(1360~1438.. 2016. 12. 4.
대마도정벌과 4군 개척의 명장 최윤덕 장군 무인(武人)으로 정승에 오른 명장(名將) 대마도정벌과 압록강 4군 개척의 명장으로 정승에 오른 좌의정 최윤덕 장군 조선 초기 명장 임곡 최윤덕 장군은 무인으로 시작하여 세종대왕 재위 시 정승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혹자는 최윤덕 장군이 무장으로 정승의 반열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또, 최윤덕 장군이 영의정을 지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개성 선죽교에서 포은 정몽주를 죽인 조영무가 무장으로서 가장 먼저 정승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조영무는 조선에서 가장 먼저 충무공의 시호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영의정은 황희정승이었다. 임곡 최윤덕 장군(1376~1445)은 1376년(고려 우왕 2) 경상도 창원 북면에서 최운해(1347~1404.. 2016. 12. 3.
세종 예악정치의 명정승 고불 맹사성 세종대왕의 예악정치(禮樂政治) 실현에 앞장선 조선의 명정승 고불 맹사성 조선 4대 왕 세종대왕 이도는 조선 초기 문화융성시대를 열어 조선의 문화 기반을 다져 놓았고, 조선의 군주이며 만백성의 어버이인 조선 22대 왕 정조대왕 이산은 조선왕조 27명의 왕 중에서 가장 학식이 높은 임금으로 백성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어 문화융성의 꽃을 피웠다.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의 치세(治世)를 있게 한 명재상으로 방촌 황희정승과 고불 맹사성이 있다. 방촌 황희정승과 고불 맹사성은 세종대왕의 민본정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보필한 조선의 명재상이다. 세종대왕은 행정, 외교, 국방 등은 방촌 황희정승(1363~1452)이 문화와 교육 등은 고불 맹사성(1360~1438)이 맡겼다. 세종대왕은 성리학적 이상 정치를 꿈꾸며 위.. 2016. 1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