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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 타개책 뉴딜정책을 추진한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명언

by 도생(道生) 2015. 9. 20.

세계 대공황 타개책(打開策)으로 뉴딜정책을 추진한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명언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1776년부터 240년 역사 동안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진 인물이 프랭클린 루즈벨트(1882~1945) 미국 대통령이다.

193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1933년 제37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며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인류 역사상 가장 기록에 남을 대사건인 세계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대통령 재임 중에 모두 경험하며 제38대, 제39대, 제40대 대통령으로 4선 연임을 하며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웠으나, 2차 세계대전 종전을 얼마 앞두고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뉴욕 주지사로 재임하던 당시 세계 대공황이 일어났다. 

검은 목요일로 불리는 1929년 9월 24일 뉴욕 주식시장이 대폭락으로 촉발된 세계 대공황으로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엄청난 충격과 혼란에 빠져든다. 주식시장의 붕괴와 함께 기업과 은행, 개인이 파산하고 노동자들은 직장을 잃고 길거리로 내몰렸다.

 

그 틈을 이용하여 일부 대자본가는 엄청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기 전 3%였던 도시 실업률은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하던 1933년에는 37%로 급등하였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근대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케인즈의 이론(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에 국가가 개입)을 받아들여 세계 대공황 타개책으로 뉴딜(New Deal)정책을 선언하며 대통령에 당선하게 된다.

 

보수주의자들은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이 대중을 선동하였고 기업에 손상을 주는 급진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정책이라고 비판했지만, 루즈벨트 대통령은 제1차 뉴딜정책에 이어 제2차 뉴딜정책을 시행하며 미국 전체 국민에게 부(富)가 배분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였다. 국가가 직접 수요를 늘리는 역할을 하며 사회간접자본 투자 등 재정지출에 적극적으로 임하였으며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회개혁도 단행하였다. 

 

 

 

 

 

 

 

부유한 집안에서 명석한 머리로 명문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40세 나이에 찾아온 소아마비로 장애를 갖게 되었으나 불굴의 의지와 당당한 자신감으로 뉴욕 주지사를 거쳐 민주당 진보 대통령으로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4번 연임을 하는 대통령이 되어 인간승리의 진기록을 만들고 재임 중 돌연 사망한다.

 

그가 암울했던 세계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 국민에게 보여준 리더십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 국민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과 함께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남아 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은 크게는 국가 경제의 재건이었고 작게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노동자와 실업자, 서민을 위해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하고 노동조합에 가입하여 적정한 임금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가 완전하게 살아나지는 못했다. 이러한 때 2차 세계대전의 발발하면서 미국과 세계 각국이 세계 대공황에서 탈출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전쟁물자를 공급하는 미국의 군수산업은 뉴딜정책과 맞물려 미국 경제를 다시 살려냈다.

 

 

 

 

 

 

 

 

테네시 강 유역 개발 사업으로 대표되는 뉴딜 정책의 대규모 프로젝트는 고용창출과 공공개발을 동시에 이루어냈다.

연방예금보험공사, 연방긴급구호청, 민간환경보호대, 농업조정청, 노동진흥청 등을 설립하였고, 최저임금법, 산업간 비경쟁법, 생산제도 등을 도입하는 국가산업회복법을 제정하였다. 

 

지금은 모든 나라가 시행하는 제도지만 당시 법원에서 헌법위반이라는 판결을 받기는 했으나 세계 대공황의 촉발지 월스트리트를 감독하는 증권거래위원회를 설립하였다. 국가노동관계법을 제정하여 노조의 조직권, 단결권, 행동권을 보장하였고, 빈민층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사회보장법을 제정하였다. 

 

 

 

 

 

 

 

 

영국, 미국, 소련은 1943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이집트 카이로와 이란 테헤란에서 개최된 카이로 회담과 테헤란 회담에서 일본의 식민지(대한민국) 문제가 언급되고 전후 전범국 일본에 대한 처리 문제가 일부 결정되게 된다. 

 

 

대통령으로서 너무 많은 권한이 집중된 것과 4선 연임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만들어 미국의 전통과 관행을 깬 것, 그리고 공산주의 소련에 너무 호의적인 것이 공산국가 소련이 동유럽과 아시아에 진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미국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소련 스탈린 서기장은 1945년 2월 4일부 11일까지 소련 크리미아반도 얄타에서 열린 소위 얄타 밀약에서 대한민국(조선) 신탁통치에 관해 밀약하는데 4월 12일 루즈벨트 대통령이 돌연 사망하게 된다.

 

얄타 회담 다음으로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독일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열린 포츠담 회담에서 대한민국(조선)에 대한 신탁통치에 대하여 미국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영국 처칠 총리, 소련 스탈린 서기장과 중국 총통 장개석이 서명한다.

그리고 1945년 12월 16일에서 25일까지 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영국, 소련 3국 외상회담에서 대한민국(조선)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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