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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조선왕조 최초로 수렴청정한 대왕대비 정희왕후

by 도생(道生) 2016. 10. 18.

조선 7대 왕 세조의 왕비로 조선왕조 최초로 수렴청정대왕대비 정희왕후 파평 윤씨

 

 

 

 

 

 

 

 

 

 

 

 

 

 

 

 

태조 이성계가 창업한 조선왕조에서 최초로 수렴청정한 여인은 정희왕후 파평 윤씨(1418~1483, 재위 1455~1468)로 조선 7대 왕 세조의 부인이며 조선 8대 왕 예종의 어머니이고, 조선 9대 왕 성종의 할머니다.

 

파평 윤씨 정희왕후와 관련 있는 후대 왕비로는 조선 11대 왕 중종의 부인 장경왕후(1계비)와 문정왕후(2계비)가 있다.

장경왕후와 문정왕후는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 윤씨의 오빠 윤사분과 남동생 윤사흔의 후손이다.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가 1457년(세조 3) 20세에 죽자 둘째 아들 해양대군(예종)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60년(세조 6) 왕세자 이황(예종)은 한명회의 딸과 가례를 올린다.

 

 

1468년(세조 14) 지병이 악화한 세조는 예종에게 선위하고 죽기 전 어린 왕을 위해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 등 조정 원로 중신들이 왕을 보필하는 원상제도를 만들었다. 정희왕후는 원상제도와 함께 조선왕조 최초로 수렴청정하였으나 실제 국정은 원상들이 결정하였고 예종은 승인만 하였다.

 

 

 

 

 

 

 

 

 

 

 

 

 

 

1468년(예종 원년) 18세에 조선의 8대 왕으로 즉위한 예종은 왕위에 올라 왕권강화를 위해 국정을 운영하였다.

훈구(공신)세력의 비대해진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결실을 보지 못하고 1469년에 재위 15개월 만에 승하한다. 

 

세조와 장희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큰아들 의경세자와 둘째 아들 예종은 모두 20살에 요절했다.

 

 

 

 

보위 결정권은 대비였던 정희왕후에게 있었다.

예종이 15개월 만에 승하하자 다음 보위를 예종의 아들(제안대군, 4세)에게 물려주지 않고 의경세자(세조의 장남, 덕종 추존)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 13세)을 다음 왕으로 선택한다.

 

 

예종에 이어 다음 보위에 오를 왕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정희왕후 윤씨는 한명회와 손을 잡았다.

한명회는 세조의 계유정난을 성공시킨 최고의 참모이면서 예종과 자을산군(성종)에게 두 딸을 시집보낸 권력의 실세였다.

당시 한명회는 정희왕후에게 가장 강력한 믿음을 주는 버팀목이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든든한 버팀목이 필요했던 정희왕후에게 권력의 실세였던 한명회의 사위 자을산군이 선택된 것이다.

자을산군(성종)이 왕위 서열에서 밀림에도 예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정희왕후와 한명회, 인수대비의 합작품이다.

 

 

 

한명회는 정희왕후와도 사돈이었고, 인수대비(의경세자 부인)와도 사돈이다.

 

한명회의 셋째 딸 청주 한씨는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 예종)

한명회의 넷째 딸 청주 한씨는 성종의 정비 공혜왕후.(세조 큰아들 의경세자와 인수대비의 둘째 아들 성종)

 

 

 

1467년(세조 13) 한명회의 넷째 딸 한씨가 의경세자의 아들 자을산군(성종)과 부부가 되었다.

세조의 큰며느리이며 의경세자의 부인인 세자빈은 한확의 딸 청주 한씨(인수대비)다.

 

 

 

 

 

 

 

 

 

 

 

 

조선왕초 최초로 수렴청정한 대왕대비 정희왕후는 권력의 실세이며 권모술수의 대가인 한명회와 당대 조선 최고의 지식을 가진 여인 인조대비를 선택한다. 

 

정희왕후 파평 윤씨는 글(문자)을 모르는 여인이었고, 며느리 인수대비는 조선왕조 왕비 중 가장 뛰어난 지식의 소유자였다.

 

 

 

 

『예종실록』 8권, 예종 1년 11월 28일 1469년

"이제 원자(元子)가 바야흐로 어리고, 또 월산군(月山君)은 어려서부터 병에 걸렸으며, 홀로 자을산군(者乙山君)이 비록 어리기는 하나 세조(世祖)께서 일찍이 그 도량을 칭찬하여 태조(太祖)에 비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그로 하여금 주상을 삼는 것이 어떠하냐?"

 

 

 

『예종실록』 8권, 예종 1년 11월 28일 1469년

"내가 생각하건대, 대위(大位)는 잠시라도 비울 수 없는 것이다.

사왕(嗣王)의 아들이 바야흐로 강보(襁褓)에 있고, 또 본래부터 병에 걸려 있다. 세조(世祖)의 적손(嫡孫)으로 다만 두 사람이 있을 뿐인데, 의경 세자(懿敬世子)의 아들 월산군(月山君) 이정(李婷)은 어려서부터 병이 많고, 그의 동모제(同母弟)인 자을산군(者乙山君)이 기의(岐嶷) 숙성(夙成)하고, 세조께서 매양 그 자질과 기도(器度)가 보통과 특별히 다른 것을 칭찬하여 우리 태조(太祖)에 비하는 데에 이르렀다. 이제 연령이 점점 장성하고, 학문이 날로 나아가므로 가히 큰 일을 맡길 만하다. 이에 대신과 더불어 의논하니, 대신들이 합사하여 여망에 합당하다 하므로, 자을산군을 명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다."

 

 

 

 

 

 

 

 

 

 

 

 

1475년 (성종 6) 정희왕후 윤씨의 인척들을 비난하는 익명서가 승정원에서 발견되면서 대왕대비 정희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성종이 친정하게 된다.

 

 

 

1474년(성종 5) 성종의 정비이며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가 19세에 승하하자 1473년에 후궁으로 들어와 있던 폐비 윤씨(연산군 어머니)가 왕비로 책봉된다.

 

폐비 윤씨는 수년 동안 시어머니 인수대비와의 갈등과 남편 성종과 마찰을 빚다가 왕의 용안에 상처를 만들면서 폐위된다. 

대왕대비 정희왕후와 인수대비가 폐비 윤씨 폐출을 주도하였다.

 

 

 

1483년(성종 14) 치료를 받으러 갔던 대왕대비 정희왕후는 온양행궁에서 66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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